'책은 도끼다' 中에서 / 박웅현
“내가 읽은 책들은 나의 도끼였다.
나의 얼어붙은 감성을 깨트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도끼 자국들은 내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어찌 잊겠는가?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쩌렁쩌렁 울리던,
그 얼음이 깨지는 소리를.”
* 냉정하게 얘기하면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먹고사는 게 다예요. 태어났으니까 살려고 애쓰는 거죠.
그렇다면 기본적인 게 입과 항문이라는 겁니다.
숨을 쉬어야 하니까 폐가 생기고,
뭔가를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손과 발이 생긴 거고,
동물들에게 힘으로는 못 이기니까 머리가 커진 것이고,
종족 번식을 해야 하니까 섹시하게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 거죠.
그러니 입과 항문은 근간이라는 겁니다.
이 한 마디는 똑같은 우리를 완전히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최인훈의 문장을 읽고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있다가 갑자기 지하 20층까지
떨어지는 것 같아요. 현기증 나는 경험을 최인훈과 김훈을 통해 하는 겁니다.
* 저는 책 읽기에 있어 '다독 콤플렉스' 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독 콤플렉스를 가지면 쉽게 빨리 읽히는 얇은 책들만 읽게 되니까요.
올 해 몇 권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 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줄 친 부분이라는 것은 말씀드렸던, 제게 '울림' 을 준 문장입니다.
그 울림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보고 잊히는 것과 '몸은 길을 안다' 이 구절 하나 건져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 가끔 왜 책을 읽느냐고, 왜 음악을 듣느냐고 누가 물을 때
이런 즐거움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때는 삶의 위안이 되니까요.
그래서 힘들 때는 진통제를 가지고 다니듯이 음악을 가지고 다녀요.
그만한 진통제가 없는 것 같아요. 이 음악을 듣고, 삶의 속도라는 게 있구나 싶고
잔디가 자라는 속도라는 말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다리는 백이숙제와 같다. 굶어죽어도 더러운 먹이를 먹지 않는다.'
이 짧은 한 문장은 많은 걸 담고 있습니다.
도다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광어를 떠올리게 하죠.
둘은 비슷하게 생겨서 겉모습만 대충 봐서는 분간이 잘 안 가는데요.
옛날엔 광어가 더 비쌌지만 지금은 도다리가 더 비쌉니다.
광어는 양식이 되는데 도다리는 양식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요즘 제주도의 오분자기와 전복도 광어, 도다리와 비슷한 운명이라고 해요.
전복이 양식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오분자기가 귀한 식재료가 됐다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저 한 문장으로 표현해낸 거죠.
그것도 도다리를 '사기' 에 나오는 백이숙제(伯夷叔齊) 에 비유하면서 말입니다.
인문과 자연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고 있어요.
*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보다 '나는 상대에게 누구인가' 가 중요해진다는 이야기죠.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는 겁니다.
사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높은 사람을 만나면 벌벌 떨고,
아랫사람을 만나면 오만해지는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죠.
내 자아가 진정으로 있다면 내가 이 사람을 만나든 저 사람을 만나든,
사장을 만나든 직원을 만나든 다 '똑같은 나' 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는 이게 잘 안 됩니다.
유난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큼은 내가 아닌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저 사람이 좋아해줄까가 중요해집니다.
관점이 모두 상대로 돌아서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연인들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서지 않는다고 알랭 드 보통은 말합니다.
* 요즘 시대에는 필요 이상의 것을 먹으면서 아주 풍요롭게 살고 있어요.
인류의 어떤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가장 풍요롭죠.
그런데 우리가 과연 풍요롭게 살고 있느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봐요.
그 이유는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풍요는 상대적이라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사는데 저쪽은 저렇게 사네 하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 내용을 보시면,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알랭 드 보통은 바로 그것, 상대적 궁핍과 궁핍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덜 불안해진다는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 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
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도 같은 문맥인거죠.
* 신문 지면에 빈틈없이 꽉 차 있지만 설명이 압축적일수록,
전쟁에서 죽은 몇 만 명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겁니다.
중국에서는 기차가 탈선해서 사람이 죽고,
노르웨이에서 테러범이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르고,
일본은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솔직히 말해서,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게는 그냥 '오락' 입니다.
"아, 가슴 아파" 라고 하지만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듣는 걸로 넘어가요.
오늘 그런 일이 있었네, 안됐다 하고 지나치는 거예요.
프루스트가 싫다고 한 게 바로 이런 거죠.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사실은 그런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신문기사를 보고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하는 게 우리니까요.
*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말하죠.
익숙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땅버들 씨앗 같은 삶의 태도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땅버들 씨앗들이 의도를 가지고, 이번 물살이 좀 안전하니까
이번에 타야지, 하고 가는 게 아니잖아요.
갑자기 급한 물이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쓸려가야 해요.
우리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내 마음대로 직조할 수 없어요.
시대라는 씨줄과 내 의지라는 날줄이 맞아야 해요.
내가 아무리 날줄을 잘 세운다고 해도 씨줄이 너무 세게 밀고 들어오면
휘게 되어 있어요. 살다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아요.
급한 물이 밀려올 때가 있죠. 그럼 타야지 어쩌겠어요.
그러고 나서 결국 어딘가에 닿았어요. 사실 나는 거기에 닿고 싶지 않았는데,
아래쪽으로 3미터쯤 더 가고 싶었는데 그 지점에 가지 못하고 닿았단 말이죠.
그럼 어쩌겠어요. 땅버들 씨앗처럼 거기서 최선을 다해 싹을 틔워야죠.
* 지중해는 이렇게 견딜 수 없는 햇살과 함께하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게 만드는 화창한 날씨의 연속인 곳이에요.
흔히 지중해성 기후라고 하는데, 내리쬐는 햇살 덕에 기온은 높지만
습도가 낮아 굉장히 쾌적합니다. 저는 일 년에 한 번 씩
칸 국제광고제 때문에 남프랑스의 도시인 칸에 가는데요,
햇볕은 뜨겁지만 그늘로 들어가면 아주 서늘하더군요.
더운 날씨지만 전혀 짜증스럽지 않죠.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그곳 사람들은 아등바등할 일 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생을 바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지중해 사람들입니다.
숲에 조금만 들어가면 먹을 만한 게 있고, 삶이 고통스럽지 않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그들은
삶이 없어진다는 것이 누구보다 슬픈 사람들입니다.
그 찬란한 축복의 나날이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순간을
즐기며 삽니다. 오늘 하루의 햇살을 소중하게 여기면서요.
* 여행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떠날 때 아스라한 느낌이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도시, 내가 잠시 며칠 기거했던 민박집 주인에게
"안녕히 계세요" 라고 인사할 때의 기분 말입니다.
다시 못 볼 걸 알면서 헤어지는, 죽음의 예행연습 같은 것. 삶은 이별 연습이에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죽을 때 똑같을 것 같지 않으십니까?
아, 저 햇살 못 보는구나, 끝이구나, 할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여행이 우리 삶을 예행연습시켜준다는 겁니다.
* 톨스토이가 아주 정확하게 사람 심리를 따라간 거죠.
안나의 자살은 충동적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음식 메뉴를 두고도 한참을 고민하는 게 인간인데,
하물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에는 얼마나 갈등이 심하겠어요.
생각은 있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이죠.
그러니까 하나 둘 셋,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뛰어내리는 겁니다.
모든 자살은 충동적이에요. 다만 개연성은 있어요.
미시적 우연이지만 거시적 필연인 것이죠.
미시적으로는 충동적인 것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늘 자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안나도 마찬가지로 이미 자살을 생각했어요.
* 쉬운 단어로 정리한다면 '바람기' 가 있는 여자가 아닐까 싶어요.
그 바람기는 나쁜 의미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도 다 있는,
누구에게나 있는 바람기 말입니다. 아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요. 툭 터놓고 얘기하면 말입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누구나 있어요.
바람기는 다른 말로 '다른 생에 대한 동경' 이에요.
다른 곳에 더 나은 인생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동경이죠.
결혼하고 이게 더 심해지는 이유는 결혼과 동시에 다른 선택의 문이
닫혀버리기 때문이에요. 다른 세계, 다른 가능성, 다른 즐거움,
다른 쾌락에 대한 문을 닫는게 결혼이라는 제도잖아요.
그래서 안나가 유난히 감수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결혼생활 중
다른 생을 갈망하는, 다른 말로 바람기를 숨기지 못하는 인물인거죠.
* 레빈도 지식인이니까 처음 농민들에게 뭘 해라, 하지 말아라 계몽을 시작했겠죠.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아요.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자연적인 질서를 아는 사람들이고 지혜롭게 그 질서에 맞춰 살았던 겁니다.
톨스토이는 그들이 자연과 함께 일궈낸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기껏 자신들 기준에서의
더 나은 삶을 살아가라고 강요 하는 게 이론가들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결국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 답은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나한테 모든 것들이 말을 걸고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들을 마음이 없죠. 그런데 들을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입니다.
두 시간 강의에서, 한 권의 책으로 제가 가르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여러분 안에 씨앗이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울림을 줬던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의성입니다.”
『책은 도끼다』에 등장하는 책들의 장르는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시, 소설, 에세이를 비롯해 과학서, 미술사책, 경전 해설서까지 고루 언급함으로써 문학뿐 아니라
철학, 과학, 예술 분야의 이야기 속으로도 독자들을 쉽고 흥미롭게 안내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책 읽기를 통해 나날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졌다고 고백한다.
김훈, 최인훈, 이철수, 김화영, 손철주, 오주석, 법정 스님부터 밀란 쿤데라, 레프 톨스토이,
알랭 드 보통, 장 그르니에, 알베르 카뮈,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저자가 매혹됐던 작가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문장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무뎌졌던 우리의 감각과 시선이 한층 새롭게 깨어나고 확장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