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륙횡단철도(大陸橫斷鐵道, The First Transcontinental Railroad) 건설


테오도르 유다(Theodore Judah)라는 젊은 토목기사는 ‘미친 유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미쳐 있는 것은 미국 동안과 서안을 있는 대륙횡단철도였다. 유다는 남북전쟁이 막 시작된 1861년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험준한 봉우리를 탐사하고 열차가 지나갈 경로를 찾아냈다. 그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상원ㆍ하원 의원들을 찾아다니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설계도를 들이밀었다. 전쟁이 끝나면 미국을 통합할 수단이 대륙횡단철도라는 사실은 링컨도 잘 알고 있었다. 링컨은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1862년 철도법에 서명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이 시작된다. 미국은 당시 캘리포니아를 손에 넣었지만, 동과 서를 연결하는 교통망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황무지를 지나갈 경우,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인디언의 공격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바다로 가는 길도 험난했다.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의 거센 풍랑을 헤치며 멀리 돌아야 했고, 말라리아 위협을 감수하고 파나미 지협의 열대우림을 지나야 했다.
두 회사가 도전에 나섰다. 유다가 설립한 센트럴퍼시픽(Central Pacific)과 동부에서 출발할 유니언퍼시픽(Union Pacific)이었다. 센트럴퍼시픽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출발, 서쪽으로 철도 공사를 하고, 유니언퍼시픽은 동에서 서로 공사를 해서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것으로 연방정부와 함께 약속이 되었다.
완성된 구간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난이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평탄한 선로는 1마일당 1만6,000달러, 경사진 땅은 마일당 3만2,000달러, 산맥을 통과하는 땅은 마일당 4만8,000달러였다. 게다가 선로를 1마일 공사할 때 철도연변에 25㎢의 땅을 주는 조건이 더해졌다. 이 조건은 후에 52㎢로 불어났다. 철도가 건설되면 인근 땅은 요즘 용어로 역쇄권이 형성된다. 도시가 들어서고 공장과 상가가 세워진다. 당연히 땅값이 올라간다. 이런 수지맞은 장사를 투기자본이 놓칠 리 없었다. 동쪽과 서쪽에서 시작해 선로 공사가 얼마나 나가느냐에 따라, 공사비와 그 주변의 땅이 주어진다.
세기의 경쟁이 펼쳐졌다. 서부 센트럴퍼시픽에는 서부의 부자 4명이 달라붙었다. 이 4명중에는 상인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인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가 포함되었다. 동부 유니언퍼시픽에는 월가의 투자가 토머스 튜란트(Thomas C. Durant)가 지휘했다.
유니온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두 회사가 사업자로 선정되었고 유니온 퍼시픽은 아이오와 카운슬 블라프스에서 서쪽으로, 센트럴 퍼시픽은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으로 철도를 건설해가기 시작했다. 일단 공사는 시작했지만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수만에 이르는 중국인 노동자들, 가난을 피해 대서양을 넘어온 아일랜드인들, 전과자, 부랑자들이 공사에 동원되는데 혹독한 기후와 중노동, 인디언 습격으로 수없이 희생자가 발생했다.
출발은 서부가 빨랐다. 1863년 1월, 센트럴퍼시픽은 대륙횡단철도 착공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그들은 ‘미친 유다’의 지휘 아래 새크라멘트에서 철도를 깔기 시작했다. 처음 32km는 비교적 순탄했지만, 곧바로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야 했다. 철도에 들어갈 침목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 조달하면 되었지만, 철강재와 부수 물자는 동부에서 가져와야 했다. 서부의 산업은 아직 취약했다. 돈이 급격하게 빨려 들어갔다. 4명의 투자자가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 해도 엄청나게 들어가는 자금을 대기 어려웠다. 부동산이고 뭐고 모두 담보로 내놓았지만, 금새 거덜이 났다. 정부 지원금은 후불제여서 초기공사비를 대지 못했다.
그때 테오도르 유다는 뉴욕에 건너가 대규모 투자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서둘러 서부 공사장으로 가기 위해 파나마 지협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그게 다였다. 유다는 황열병에 걸려 공사를 1863년 11월에 37세로 사망했다.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나자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동쪽과 서쪽에서 쉴 새 없이 선로가 놓였죠. CP와 UP는 상대방 보다 더 많은 선로를 놓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부설 선로 길이에 따른 정부보조금과 선로 주변을 연방정부로부터 불하받는 조건에서 더 많은 선로를 놓을수록 더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아메리카는 유럽인들이 규정한 것과 달리 신대륙이 아니었다. 인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인디언이라고 불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습니다. 남북전쟁의 영웅 셔먼 장군은 철도건설을 방해하는 원주민을 소탕하라는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의 명령을 저돌적으로 수행하며 아메리카 원주민 살육 작전에 매진하였고 원주민들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동부 유니언이 인디언 수족을 처음 부딛친 것은 1866년 여름이었다. 악명 높은 추장 점박이꼬리(Spotted Tail)가 이끄는 무리가 다가와 철마와 달리기 경쟁을 하겠다고 했다. 당연히 인디언 기마병이 철마를 이기지 못했다. 화가 난 추장은 식량을 달라고 했다. 거절하자 그들은 위협적인 언사를 뱉어내고 사라졌다.
그 후 인디언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원주민들의 공격에 열차가 탈선하고 선로가 뜯겨 나가고 인부들이 공포스럽게 살해되었다. 수족은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승객도 공격했다. 어떤 인부는 머리가죽이 벗겨졌고, 어떤 이는 화살이 19개나 꽂힌 채 죽었다. 공사장에 앞서 나가는 측량사는 인디언 공격에 가장 취약했다.
공사장 인근 도시에는 환락가가 만들어졌다. 인부들은 공사판에서 번 돈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구하고 도박을 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무법지대 장면이 공사장 곳곳에서 나타났다. 공사장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들은 유니언퍼시픽이 불하받은 구역내에 들어와 사업을 했다. 그들은 불법으로 토지를 점거해 술집을 만들고 도박장을 차렸다. 닷지 장군은 분노해 케이스먼트 형제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케이스먼트 형제는 인부 200명을 중무장시키고 유흥가로 달려가 “마음껏 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30명의 인부가 죽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순직으로 처리되었다.
동부의 공사는 구인난에 시달렸다. 인부를 채용하면 달아났다. 공사구간이 험난하기도 했지만, 인근에 철도공사판보다 더 많은 봉급을 주고 처우가 좋은 광산이 많았다. 힘들게 2,000명의 인부를 구해 공사장에 투입하면, 곧 1,900명이 달아났다.
1848년∼1849년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중국은 5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밑바닥 삶을 살았던 중국인 이주민들을 철도건설 노동자로 고용하기 시작했다. 강도가 높기로 악명 높은 철도공사 현장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은 놀랄만한 인내력과 더 놀랄만한 저임금을 감수하고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개미떼처럼 매달렸다. 절벽을 깎아 선로를 놓아야 하는 난공사 앞에서 CP의 기술진들이 손을 놓고 있을 때 중국인 기술자 한 명이 찾아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중국인 조상들이 양쯔강 요새를 만들 때 썼던 방법으로, 절벽 위쪽에서 갈대를 엮은 바구니를 내리면 그 안에 화약을 가진 중국인 노동자가 선로 부설 지점에 정으로 구멍을 뚫고 화약을 설치한 후 불을 붙였다. 바구니 안의 중국인 노동자는 절벽 위로 큰소리를 질러 줄을 당기게 했다. 사력을 다해 올려진 바구니 안에는 하얀 돌먼지를 뒤집어쓴 중국인 노동자의 검은 눈동자만 보였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가끔씩 바구니에 연결된 끈만 끌어올려 지는 경우도 있었다. 바구니 채 폭발로 날아간 노동자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골짝이 속으로 사라졌다.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그 무렵 도입되었다.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약은 다루기가 위험했는데, 그 일을 중국인에게 맡겼다.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는 식이었다.
혹한이 다가왔다. 시레라네바다 산맥의 겨울은 매서웠다. 따듯한 푸젠(福建)성 출신이 대대수였던 중국인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들이 얼마나 얼어 죽었는지 자료도 없다. 10톤의 중국인 유해가 배에 실려 중국에 보내졌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쿨리(coolie)라는 비속어로 불리웠다. 나중에 센트럴퍼시픽의 스탠포드는 공사가 끝난 후 중국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샌프란시스코에 거주지로 차이나타운을 기부하고,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해 일정비율의 중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이런 험난하고 비인간적이며, 투기적인 공사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동과 서에서 시작한 공사는 1869년 5월 10일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 프로몬토리 서밋(Promontory Summit)에서 마지막 대못을 박았다. 새크라멘토에서 착공식을 한지 6년만이다. 그동안 서부의 센트럴퍼시픽이 새크라멘토에서 1,110km, 동부의 유니언퍼시픽은 오마하에서 1,747km를 연결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지긋지긋하던 남과 북의 전쟁도 끝났고, 이제 미국은 동과 서를 통합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첫 번째 대륙횡단 철도가 성공적으로 건설되고 건설회사들이 돈더미에 앉게 되자 수많은 투자자들이 수익성 높은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불과 15년 만에 횡단철도 세 개-노선 퍼시픽, 서던 퍼시픽, 산타페-가 추가로 건설되었고 1890년대 마지막으로 그레이트 노선 횡단 철도가 건설되어 오늘날의 대륙횡단 철도망이 완성되었다.
이와 함께 횡단 철도를 중심으로 수많은 지선들이 건설되어 이제 웬만한 곳은 기차로 연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1865년 5만 6,000km에 불과하던 철도가 1900년 즈음 거의 32만km에 육박했는데 이 길이는 당시 전 유럽의 철도망을 합한 것보다도 더 긴 거리였다.
최초의 대륙횡단 열차는 아직도 장작을 지펴 증기터빈을 돌리는 원시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장작 대신 석탄을 원료로 사용하는 대형 증기기관차가 개발되면서 더 많은 사람과 화물을 더욱 빨리 운송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해서 철도는 역마차를 대신한 새로운 운송수단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대륙횡단 철도의 건설은 미국인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모시켰다. 우선 상품과 천연자원의 운송비가 엄청나게 줄어들면서 이것이 상업과 산업의 발전을 크게 자극했다. 서부로의 여행이 용이해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찾아 서부로 몰려갔고 이들에 의해 황무지에 불과했던 서부개척이 급속도로 이뤄졌다.
철도 주변과 특히 교차 지점에 거대한 도시들이 생겨난 것도 철도가 가져온 큰 변화의 하나였다. 오마하, 캔자스시티, 오클랜드, 포틀랜드 등은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아예 없었거나 조그만 촌락에 불과했다. 미국은 드디어 사람들을 보내 대륙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게 되었고 철도를 통하여 태평양까지 이른 미국의 힘은 곧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와 한국에까지 그 손길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철도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어떤 사람은 근대화를, 어떤 사람은 식민주의와 제국의 약탈을, 어떤 사람은 여행과 낭만을 떠올릴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철도에서 만남과 이별이나 전쟁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만큼 철도는 우리에게 천의 얼굴로 다가온다. 인간이 만든 것들 중 철도만큼 다양하고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것도 그리 많지 않다. 무수한 영화가 철도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미국 서부영화에서 열차강도는 거의 단골 메뉴 중 하나였다. 달리는 기차에서 벌이는 추격 장면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