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믿음이란 하느님 앞에 있는 모든 영혼은 살아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알려주셨다(탈출 3,6). 이는 당신이 조상들이 과거에 섬긴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도 살아서 당신을 섬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그분은 ‘있는 나’이다(탈출 3,14). 언제나 내 앞에 살아 계신 분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걸 이 세상에서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은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치료되고, 죽은 소녀가 되살아났다고 전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참 잘못 알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죄대로 다루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죄를 없애 주시고 당신처럼 영원히 살게 하시는 분이다. 수천수만 번 들은 이야기인데도 말 그대로 그냥 이야기, 나와 상관없는 책에 적혀 있는 이야기로 들린다.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믿기 어려워서일 거다. 모두 죽었고, 믿는다고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러나 성인들의 삶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전구를 청하고 조상과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건 그들이 다 살아있다는 뜻이다. 지혜서는 알려준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23).”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주는 것이다(지혜 6,19).”
그런데 우리는 왜 죽나? 선조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했다. 성찰한 결과, 그 답은 아주 간단했다. 죄를 지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다. 따먹지 말라는 열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열매를 따서 먹는 바람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거라는 이야기를 지어 우리에게 전해준다.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는 선과 악을 구별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아주 드물게 기도 중에 내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완전히 온전하고, 어떤 유혹도 없다. 죄스러움은 여전히 있지만 그것이 나를 전혀 유혹하지 못한다.
그 여인의 부정(不淨)함과 그 소녀의 죽음이라는 지독한 어둠은 어디로 갔을까? 그 여인이 예수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당신에게서 힘이 빠져나간 것을 아셨다고 했는데(마르 5,30), 그건 당신의 어떤 신적 기운이 나간 게 아니라 그 여인의 부정이 당신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일 거 같다. 율법에 따르면 시신은 지극히 부정한 거라서 절대 손 대면 안 되는데 예수님은 기꺼이 죽은 그 아이의 손을 잡으셨다. 그의 죽음이 당신 안으로 들어왔다. 당신이 만난 모든 이들의 부정과 죽음이 다 그렇게 됐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살라 바치셨다. 그렇게 우리 부정과 죽음은 없어졌다. 십자고상을 보고 깊게 절하는 이유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절하는 건 오늘도 그때처럼 그렇게 해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사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믿는다. 죄를 지었고, 죄스러움이 언제나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믿는 거다. 젖을 빠는 아기는 엄마를 믿을 필요 없다. 엄마와 자신이 아직도 한 몸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과 하나가 돼서 믿음이 필요 없을 때까지.
예수님, 제 안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스러움이 있습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애써 감출 것도 아닙니다. 주님 앞에는 모든 게 다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반갑지 않지만 그것과 동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례에도 동반합니다. 그 여인은 몰래 숨어서 주님 옷자락을 잡았지만 저는 드러내놓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또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죽으면 제 손을 잡아 일어나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가 순례를 마칠 때까지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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