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예수님의 아버지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네에 심심치 않게 걸리는 어느 집 누구의 대학 합격, 승진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가 누구고 또 어떻게 성장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다 알 거다. 예수님이 그렇게 금의환향했다면 다들 기뻐하고 반겼을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르 6,3). 아마도 평범한 사람이 하느님인 척 하니 그러지 않았을까?
편견 선입견 판단 등은 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작은 방에 가둠이다. 그런 것들이 전혀 터무니없고 근거 없이 내 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내 안에 있는 그 사람이 내 밖에 있는 진짜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특히 하느님이 그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고 계시고(마태 10,30),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하늘에서는 그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마태 18,10) 있다는 걸 인정하기 쉽지 않다. 하느님은 그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셨다.
‘그를 위해 피를 흘린 건 그대가 아니다.’ 스페인 어느 작은 성당에서 십자고상 예수님이 당신 오른손을 빼내시며 그곳 고해 사제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그 사제는 말로만 뉘우친다고 하고 똑같은 죄를 고백하는 그에게 사죄경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미워해야 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런 하느님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싫은 사람과는 밥도 같이 안 먹는데 말이다.
하느님은 내 작은 머리 안에 다 담을 수 없다. 하느님은 내 안에 계신다고 하는데 그러시지 못할 거다. 내 가슴은 비좁다. 모든 이를 똑같이, 아니 아픈 손가락은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바리사이들에게 그랬고, 그런 생각은 신성 모독이었던 거고,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6). 예수님과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분의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엄위하신 하느님은 같지 않은 거다.
예수님, 오늘도 새롭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무한히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 사람 판단과 제 안에 저절로 생기는 그의 이미지는 막지 못합니다. 그 대신 그것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얕은 제 생각이라서 언제든지 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아니라 그런 그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느님 아드님의 죽음까지 지켜보셨으니,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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