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아,
재수 시절을 떠올리면 늘 그날이 생각난다.
너와 호가 그 당시 아무도 입지 않던 국립대 교복을 입고 재수학원을 찾아와 해맑은 얼굴로 나를 찾던 날.
같은 반 재수하는 친구들이 우~~ 야유를 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너희 둘이 다급하게 했던 말.
"그 여학생 찾았다. 맘모스제과 이층 고전다방에 약속 잡아놨다. 얼른 가봐라. 기다릴 거다."
남학생이 거의 대부분인 공대 전자과에 몇 안 되는 여학생 중 한 명이 나를 아느냐고... 같은 고등 출신인 너희에게 물었다지.
향토 고등학생 문학지에 올린 글을 보고 몇 번 편지를 주고받았던, 대학 가서 만나자 했던 글 잘 쓰던 그 여학생은 우리 모두의 여학생이기도 했었다.
반듯하고 총명해 보이는, 이제 막 신입생이 된 그녀와 추레한 재수생인 내가 만나서 나눌 이야기는 사실 많지 않더구나.
몇 마디 어색하게 주고받고, 너희들이 억지로 찔러 넣어준 지폐로 냄비우동 두 그릇 사 먹고 헤어졌지만, 그날이 내 기억에 오래 남은 이유는 헐레벌떡 나를 찾아온 너희들의 그 해맑은 우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재수하던 날들 중 또 다른 하루.
누군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노란 손수건'.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분이 리더스다이제스트에 실린 감동 실화 이야기들을 모아 펴낸 책.
몇 페이지 읽지 않아 난 그 내용들에 푹 빠졌고, 온몸에 휘감기는 전율과 눈물과 벅찬 감동으로 그날 하루를 부들부들 떨며 보냈지.
이야기 속의 그런 삶들을 사는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어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얼마나 감격스럽고 고맙던지... 눈물이 뚝뚝 흐르는데도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버스에 탄 모든 승객들이 다 같이 바라보는 그 나무에 온통 노랗게 묶여있던 손수건들.
주인공과 그 아내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한때의 죄를 씻고 돌아가는 주인공을 다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는 승객들과 죄를 씻고 돌아오는 그를 마을 전체 사람들이 다 같이 용서하고 환영해 주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덮쳐오던 전율과 감동.
2차 대전 중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전쟁터 가까이의 시골 농가에 살던 아이의 회상.
부상당한 미군과 그 동료들이 그 집으로 찾아들었고, 조금 뒤 독일군 병사들이 또 찾아들었다.
아이 엄마의 지혜로 다 같이 어울린 그들이 다음날 헤어지면서 서로의 안전을 염려하며 안전한 귀대를 서로 돕던 이야기.
입양된 봉사 소녀가 낳아준 엄마를 원망하며 살다가 그 엄마를 만났는데, 그 엄마가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더듬어 만지며 오열했다는 이야기 등등...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참으로 많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그 책 안에 있었다.
'갈매기의 꿈'을 읽고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나에게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던 가로등 같은 그 책.
'노란 손수건'은 또 하나의 길이 되었다.
그 당시 추천되는 명작소설들은 대부분 서술이 장황하고 지루하기 일쑤여서, 대하소설이나 장편 역사소설 또는 무협지가 훨씬 더 재미있었는데, 그날 이후 나는 샘터나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매달 즐겨 보았고, 보통 사람들의 가슴 뛰는 이야기들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달려와 그 여학생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던 너희들은 나와 같은 길에 선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벗들이었고...
첫댓글 노란손수건 -- (일명) 집으로 가는길 ㅡ 이라는 단편소설을 젊은 시절에 읽고 나도 감명 받았습니다
그 소설의 주제는 용서 이지요
우리 대한민국 스타일로는 남편이 죄를 짔고 교도소에 있는 4 년 동안에
아내가 고무신을 거꾸로 안 신었다는게 주제입니당 우하하하하하
지금의 대한민국 부인들도 이런 부인이 분명히 있을겁니다
과거에 읽었던 소설을 또 생각나게 합니당
위의 글에서 나오는 샘터 라는 잡지?
나도 젊은 시절에 이 잡지를 너무 좋아해서
나중에 이잡지 여러권을 합쳐서 단행본으로 발행한것도 사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고맙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용서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니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그때는 참 멋져보였습니다. ㅎㅎ
마치 그제 같은 추억속의 이야기네요.
푸른 청춘의 가슴 설레는 이야기들, 다시 돌아가고픈 참 예쁜 시절들이죠.
저도 고교때 추억보다 종로재수학원 시절의 추억이 더 가슴에 남네요. 재수하면서 사귄 친구도 .
샘터, 리더스 다이제스트. 중 저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꼬박 꼬박 사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서울로 진로를 마음 먹은 친구들은 서울 종로나 노량진으로 올라가서 재수했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좋은생각'은 한참 후에 나왔지만
샘터와 다이제스트는 그 당시에 읽는 사람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성장의 길에 노란 손수건도 있었군요.
저는 성년이 되어 접한 건데요.
우연히 한 반에 있던 친구가 권해준 덕분에 일찍 보게 되었습니다.
명작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감동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었지요.
친구와의 우정,
부부간의 따뜻한 용서,
세상에는 많은 인연들이
세월이 흘러도 잊은 듯 잊지 못하는
어여쁜 인연들이 있지요.
그런 멋과 맛이
인생 길, 삶의 길에 한 번씩 생각나는
양념이 되지요.
가는 길 걸음걸음이 꽃길로 가시기를 바라옵니다.
우정과 사랑, 그 나이 땐 그 두가지에 목숨이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었지요. 길에서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이라 투박한데도 잘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경쾌한 멜로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마다 핑크빛 사연이 참 많았지요. 이제는 멀어진 이야기들.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재의 이야기는 잊어도 옛날 추억은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마음자리 님이 전해 주는 추억의 한 페이지 잘 보았습니다.
길을 달리다보면 눈은 앞을 보는데 생각은 뒤로 달려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구봉님의 글을 보면 책을 많이 접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늘 받습니다. 다이제스트 ㅎ 고백컨데 저는 한글판을 주로 읽었습니다.
글을 두번이나 천천히 읽어도
유난히 관심 모음은
,,재수,, 라는 무거운 두 글자
자식에 대한
유난스런 아버지의 아집인지
교육에 대한 바지 바람인지
삼수까지 할뻔했지만
다행히도 다행히도 무난히 재수까지 끝 ㅡ
그 재수생활 1년동안
늘 내 짝쿵이었던
준수하게 생긴 나의 유일한 친구 ㅇ현
서로 눈빛만 주고받다
도끼자루가 썩도록 공부를 해야 된다는
아버지의 준엄한 특명으로
서로가 놓아버린 풍선이되어.....
유장한 세월이 수없이 흐른 지금도
저는 가끔 옹아리를 한답니다
늘~
내 가슴에 살아있는 그리운 사람아~
그 당시엔 힘들다 느꼈었는데, 돌아보면 청년기에 좌절과 아픔을 겪었던 그 시절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더군요.
미지수님에게도 그 시절이 특별한 의미를 간직하게 했던 시절이었던가 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월간지 샘터 정기 구독자입니다.
다이제스트도 가끔씩 접하곤 했었는데 인상깊은 줄거리의 실속있는 내용들이 많았었던 것으로 제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
아... 요즘도 샘터에선 맑고 신선한 이야기들이 퐁퐁 솟아나고 있겠지요?
제가 존경하는 정채봉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2001년까지 샘터의 편집자로 계셔서 더 정감이 가는 월간지입니다.
고교시절부터 문학소년이었군요. 글솜씨가 특출하다 생각하였더니 ᆢ
역시 내공이 있는 분이군요. 그 여학생과 러브스토리도 듣고 싶군요
건강하게 그리스 여행 잘 다녀오셨다구요. 글은 사십 넘어서면서 재미를 붙이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고교시절엔 이과학생이라 ㅎㅎ 읽기만 좋아했지 쓸 줄은 몰랐습니다.
그 여학생과 러브스토리는 없었지만 친구들 덕분에 소식은 들으며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