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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朝鮮王朝)의 경조(京兆) 및 경조윤(京兆尹)
2022년 08월 23일
○ “경조(京兆)” 및 “경조윤(京兆尹)”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한자사전(漢字辭典)을 찾아보면 : 『“서울. 장안(長安)”이라고 설명(說明)하면서 유의어(類義語)로서, “京闕(경궐)·京都(경도)·京洛(경락)·京輦(경련)·京府(경부)·京師(경사)·京邑(경읍)·都府(도부)·都邑(도읍)”이라고 하였다. 즉(卽) “나라(國家)의 서울”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조윤(京兆尹)’이란 ‘경조(京兆)’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관직(官職)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즉(卽) “서울”을 말하는 것이고,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다. ‘서울’은 순수(純粹) ‘한글’ 표현(表現)이다. 그런데 “장안(長安)”이라는 말은, 고유지명(固有地名)으로 “장안(長安)”을 말하며, 오늘날의 중원(中原) 땅,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岸)’ 땅을 말하는 것이다.
➤ 그런데 “서울은 장안(長安)”이란 말은 뭔가?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이를 설명(說明)하기를 : 〈장안(長安)은 옛날 한(漢)나라의 수도(首都)였는데, 수당(隋唐)도 장안(長安)을 수도(首都)로 하여, 조선(朝鮮) 때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사대부(士大夫) 일부(一部)들이 “서울”을 장안(長安)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데서 기인(起因)한다.〉고 말한다.【출처 : Daum백과. 장안 – 우리 한자어 1000가지, 이재운외, 예담】〉
그렇다면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것에 따르면 : “장안(長安)”이란 말은,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이후(以後)의 중국(中國)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인한 것이다〉라는 말이 된다. 그럼 이전(以前)의 고구려(高句麗) 때의 “장안(長安)과 장안성(長安城)”은 뭔가? 앞뒤(前後)가 맞지 않는 설명(說明)이잖은가!
또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21세기(世紀) 오늘의 한반도(韓半島) 땅 ‘한양(漢陽)=한성(漢城)’ 땅에, 수원(水原) 등 곳곳에 ‘장안(長安)’이라는 지명(地名)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건 뭔가? 지금(只今)도 한반도(韓半島)의 식자(識者)층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있다는 말일까? 이건 한반도(韓半島)와 재외민(在外民) 8,200만 국민(國民)들을 모독(冒瀆)하는 말이다.
‘한반도(韓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국(中國)의 많은 제후국(諸侯國) 가운데 한 나라’였을 뿐이다. 감히 천자국(天子國)의 ‘서울’을 차용(借用)해 ‘지’들의 서울 이름을 ‘장안(長安)’이라고 했다고… …이런 이야기는 『20세기(世紀)에 출현(出現)한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일부(一部) 학자(學者)들에 의해 탄생(誕生)된 ‘괴물사관(怪物史觀)’에 의한 해설(解說)일 뿐이다.』 이런 ‘괴물(怪物)’은, 무덤(墓) 속에서 꺼내어 ‘육시(戮屍)’를 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다.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들과 함께 말이다.
○ “경조(京兆)…경조윤(京兆尹)”이란 무슨 의미(意味)가 있을까?
우선(于先), 경조(京兆)란 말은 : 〈三輔決錄 注 : 京, 大也. 天子曰兆民. : 삼보결록(三輔決錄) 주석(註釋)에 따르면 : ‘京’은 크다. 天子는 ‘兆民’이다.〉라고 하였고, 그래서 사가(史家)들은 일컫기를, 〈고로 수도(首都)를 경조(京兆)라고 하였다. 마치 경사(京師)와 같은 것이다.[故首都曰京兆. 猶之京師也]〉하였다.
즉(卽) ‘봉건왕조(封建王朝)를 체계적(體系的)으로 새롭게 열었다’는 전한(前漢) 때부터 내려온 유물(遺物)이다.
이러한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은, “1천5백 년(年)”이라는 시간(時間)과 시대(時代)를 초월(超越)하여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재현(再現)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송(宋) 휘종(徽宗)의 사신(使臣)으로 고려(高麗)에 왔던 서긍(徐兢, 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宋 徽宗 宣和 5년(1123, 仁宗 1년)】에서 말하기를 : 당시(當時) 놀랍게도 “고려(高麗) 조정(朝廷)에는 주(周)나라의 복식(服飾)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고 하였다.
『주(周)』 는, BC1121∼BC249【合 873年】을 영위(營爲)했던 옛 봉건왕조(封建王朝)였다. 주(周)의 모든 것들이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로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는, 『주(周) 또한 선대(先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일원(一員)이었다.』는 것과 같다.
(1) 한국고전용어사전 / 경조[京兆] ①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漢城府)를 일컫는 말. 경(京)은 높고 큰 언덕을 가리키고, 조(兆)는 많은 무리를 가리키므로 경조는 많은 대중이 모여사는 장소, 곧 수도(首都)를 의미함. ② 중국의 수도를 지칭하는 용어. 일반적으로 한대(漢代) 이후에는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에서 동쪽으로 화현(華縣)에 이르는 지역을 말하며, 장안을 비롯한 12개의 현이 속해 있었음. 중략(中略). [네이버 지식백과] 경조 [京兆]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 문화원형 용어사전 / 경조[京兆] : 당[唐]나라 도성인 장안[長安] 부근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에 해당함.[네이버 지식백과, 경조(京兆)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3) 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 京兆(경조) : 서울. 장안(長安) : 에듀월드 중중한사전 / 京兆 : ‘京兆尹’의 약칭 2. 수도 3. 경조 / [한(漢)대, 수도 및 그 부근에 해당하는 행정 관할 구역]
(4) 경조윤(京兆尹) : 조선 시대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가리키는 다른 명칭. 경조 곧 수도(首都)의 장관이라는 의미로 경윤(京尹)이라고도 함. [유사어] 한성판윤(漢城判尹). [참고어] 경조(京兆). ②중국의 관직명. 한 무제(武帝) 원년(B.C. 104)에 우내사(右內史)를 고쳐 경조윤을 설치하였으며, 장안(長安) 이하 12개 현을 다스리는 일을 맡았음. [네이버 지식백과] 경조윤 [京兆尹]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5) 두산백과 / 경조윤[ 京兆尹 ] : 중국 한(漢)나라 때 수도를 지키고 다스리던 관직. 중국 한나라 때는 수도 장안(長安)과 그 주변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장안과 그 동부를 경조(京兆)라 하고, 북부는 좌풍익(左馮翊), 서부는 우부풍(右扶風)이라 하였으며, 이 셋을 합쳐 삼보(三輔)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경조는 천자(天子)가 계시는 땅이라는 뜻이며, 이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경조윤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조윤 [京兆尹] (두산백과)
(6) 경조윤(京兆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조윤(京兆尹)은 중국 고대의 관직으로, 전한의 수도인 장안과 그 주변 지역인 삼보를 관할하는 특수한 지방 장관이다. 전한의 수도권을 관할하는 직책은 경조윤 · 좌풍익 · 우부풍이 있으며 이는 모두 전한의 내사와 관련이 있다. 중략(中略).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우내사를 고쳐서 처음으로 경조윤을 두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9만 5702호, 68만 2468명을 관할했다. 현대의 시안 시 대부분과 웨이난 시의 웨이허 이남 지역에 해당한다.
(7) 경윤[ 京尹 ] / 한국고전용어사전 : 경조윤(京兆尹)의 준말. 조선 시대 수도행정을 담당한 한성부(漢城府)의 으뜸 벼슬인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다른 이름. [유사어] 경조윤(京兆尹). 한성판윤(漢城判尹).[네이버 지식백과] 경윤 [京尹]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위의 글 (1)∼(7) 번까지의 설명(說明)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학계(學界)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➊ 경조(京兆)는,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를 말하는 것이다. ➋ 경조(京兆)는, 중국(中國)의 옛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다. ➌ 경조윤(京兆尹)은, 조선(朝鮮)의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일컫는 말이다. ➍ 경조윤(京兆尹)은, 중국(中國) 한(漢)나라의 경조(京兆)를 다스리는 관직(官職)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다.
즉(卽) “전한(前漢)의 경조(京兆)는,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와 같다.”는 뜻이고, 또한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다. 『‘일천오백(一千五百)’년(年)이라는 시간(時間)과 시대(時代)를 초월(超越)하여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이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재현(再現)”』된 것이다.
『경조(京兆), 경조윤(京兆尹)』을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할까?
그렇다면 “경조(京兆)는 장안(長安)”이라고 하였다. 즉(卽) “장안(長安)은 평양(平壤)이요, 장안성(長安城)은 평양성(平壤城)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다”라는 말과 똑같다.
➤ 그러면 “평양(平壤)과 평양성(平壤城)”은, “장안(長安)과 장안성(長安城)”과 같은 뜻이고, 이는 바로 그곳이 “경조(京兆)”였다는 말이 된다.
즉(卽) 같은 곳을, 다르게 부르는 별칭(別稱)으로, 또한 “호경(鎬京)과 유경(柳京)” 또한 별칭(別稱)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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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서(隋書), 당서(唐書), 원사(元史) 등으로 대표(代表)되는 많은 사서(史書)와 조선사(朝鮮史) 및 지리지(地理志) 등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고구려(高駒驪)의 서울인 평양(平壤)을 장안(長安)이라고 하였고, 평양성(平壤城)을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하였다.〉는 말은 무언가? 특히
➤ 수, 당(隋, 唐)이라면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똑같이 “장안(長安)”을 도성(都城)으로 했던 옛 나라다.
그런데 〈이때 동시(同時)에, 고구려(高駒驪) 역시(亦是) “장안(長安)”을 도읍(都邑)으로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 아래의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살펴보기로 하자.
(1) 三國史記 :《陽原王 : 八 年, 築 長 安 城. : 양원왕(陽原王) 8년[AD 552年],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平原王 :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 평원왕(平原王) 28년[AD 586年],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都邑)을 옮겼다.》고 하였으며, 지리지(地理志)에서는,
《目錄云:鴨綠以北已降城十一,其一國內城,從平壤至此十七驛.則此城亦在北朝境內,但不知其何所耳. : 목록에는,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열하나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성도 역시 북조(北朝) 경내에 있었으나 다만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을 뿐이다. 都國內,歷四百二十五年,長壽王十五年,移都平壤.歷一百五十六年,平原王二十八年,移都長安城 : 국내성(國內城)에 도읍(都邑)한 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長壽王) 15년에 평양(平壤)으로 서울을 옮겼으며, 평양(平壤)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平原王) 28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都邑)을 옮겼다.》고 하였으며,
《唐書云 : 平壤城亦謂長安.而古記云:自平壤移長安.則二城同異遠近,則不可知矣. : 당서(唐書)에서 말하기를 :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도 불렀다.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는데, 두 성(城)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멀고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 즉(卽)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김부식(金富軾)은, 당서(唐書)를 신뢰(信賴)했고, 고기(古記) 또한 신뢰(信賴)했다는 것이고, 더불어 『장안성(長安城)을 쌓은 주체(主體)가 고구려(高駒驪) 양원왕(陽原王)이었고, 뒤에 평원왕(平原王)이 완성(完成)된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다』는 것이다. 또 동서(同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평양성(平壤城)은, 장안성(長安城)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記錄)을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사대사상(事大思想)에 빗대어 “호칭(呼稱)”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한마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조작(造作)된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해설(解說)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해도 시원치 않다.
(2)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 《고구려(高駒驪)가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평양(平壤)에 도읍(都邑)을 옮긴 지 1백 60년 만에 옮겼다.》고 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고구려(高駒驪)은 평양성(平壤城)에 있다가 장안성(長安城)을 쌓고, 장안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3) 북사(北史)에서 이르기를 : 《其王好修宮室,都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 : 고구려(高駒驪)의 도읍(都邑)는 평양성(平壤城)이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불렀는데, 동서(東西) 6리이다.》라고 하였고,
(4)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為三京.與新羅每相侵奪,戰爭不息. : 도읍(都邑)은 평양성(平壤城)인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 부른다. 동서(東西)가 6리이며, 산(山)을 따라 이리 저리 꺾이고 굽어 있으며, 남(南)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한다. 다시 국내성(國內城), 한성(漢城)이 있는데, 그곳은 나란히 도회지(都會地)로써, 그 나라 안에서는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신라(新羅)와 매양 서로 침탈(侵奪)하니 전쟁(戰爭)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였으며,
(5)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自東晉以後,其王所居平壤城,亦曰長安城 : 동진(東晉) 이후에 고구려(高句麗) 왕(王)이 평양성(平壤城)에 소거(所居)하였는데, 또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6) 신당서(新唐書)에서 이르기를 :《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 : 그 나라(高駒驪)의 왕(王)은 평양성(平壤城)에서 사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부른다. 한(漢)때의 낙랑군(樂浪郡)이다.》라고 하였고,
(7) 元史 地理志에서는 :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 : 동녕로(東寧路)는 본시 고구려(高駒驪)의 평양성(平壤城)이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하였으며,
(8)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173 [宋,樂史 撰] / 高句麗 : 自東晉已後其王所居平壤城即漢樂浪郡王險自慕容氏來伐後徙國内城移都此城亦曰長安城,中略,隋漸大東西六千里. : 동진(東晉)이후에 고구려왕(高駒驪王)은 평양성(平壤城)에서 살았는데, 즉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왕험(王險)이다. 모용씨(慕容氏)가 내침(來侵)하자 국내성(國內城)에서 이 성(城)으로 옮겼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 불렸다. 중략(中略), 수(隋)나라 때에는 점점 커져 동서(東西) 6천리(千里)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9) 명사(明史)에서 이르기를 : 《漢末,有扶余人高氏據其地,改國號曰高麗,又曰高句麗,居平壤,即樂浪也.已,為唐所破,東徙.後唐時,王建代高氏,兼併新羅,百濟地,徙居松岳,曰東京,而以平壤為西京.其國北鄰契丹,西則女直,南曰日本 : 한말(漢末), 부여인 고씨(高氏)가 그 땅에 거하고는, 다시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고 하였는데 또한 고구려(高句麗)라고도 하였는데, 평양(平壤)에서 사는데, 즉 낙랑(樂浪)이다. 당(唐)이 깨뜨리니, 동(東)쪽으로 옮겨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고씨(高氏)를 대신하여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땅을 병합하고는 송악(松岳)으로 옮겨 살았는데, 동경(東京)이라고 하였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고 하였다. 그 나라는 북(北)쪽으로 글란(契丹)과 이웃하고, 서(西)쪽에는 여진(女眞), 남(南)쪽에는 일본이 있었다.》고 하였다.
➤ 명사(明史)에 의하면 : ‘송악(松岳)=개성(開城)’은 동경(東京)이요,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으로 개명(改名)했다는 얘기다.
즉(卽) ‘평양(平壤)=장안(長安)’은, ‘송악(松岳)=개성(開城)’과 동서(東西) 방향(方向) 간(間)에 있었다는 뜻이다.
(1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이르기를 : 《王儉城,古記:檀君名王儉.箕城,樂浪,長安, 唐書:平壤亦謂長安. 西京,西都,鎬京,柳京.崔滋三都賦. : 왕검성(王儉城)은, 옛 기록에, 단군(檀君)의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이다. 당서(唐書)에 :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이른다고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은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고 하였다.
➤ 즉(卽)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서경(西京)·서도(西都)·호경(鎬京)·유경(柳京)』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말하기를 : “서울을 칭하기를 장안(長安)이라 한 것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근거(根據)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하고 있듯이 : “서경(西京)과 서도(西都)는 무엇이며, 호경(鎬京)과 유경(柳京)이라는 별칭(別稱) 또한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근거(根據)한 것인가?
『호경(鎬京)은, 주무왕(周武王)의 소도(所都)를 말하는 것이고, 유경(柳京)이란 위수(渭水) 변의 많은 버드나무를 빗대어 부른 것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것들 또한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근거(根據)한 것인가?
➊ 『서경(西京)=서도(西都)』는 : 서(西)쪽 땅에 있는 서울이란 뜻인데, 여기서 “고구려(高駒驪)가 점점 커져서 ‘수(隋)’나라 때는 동서(東西) 길이가 6천리(千里)나 되었다”는 기록(記錄)을 상기(想起)하자.
당연(當然)하게도 동경(東京)이 있으니, 서경(西京)이 있고, 서경(西京)이 있으니 동경(東京)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自然)스러운 이야기다. 서(西)쪽과 북(北)쪽도 구분(區分)하지 못한다? 이건 〈무식(無識)·무지(無智)·무지(無知)·무능력(無能力)의 극치(極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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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指導者)=리더[leader]’의 “무능력(無能力)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나라(國)와 많은 백성(百姓)들을 곤궁(困窮)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도자(指導者)의 덕목(德目) 중에서 가장 멀리해야 하는 항목(項目) 중의 첫 번째다.”〉 우리는 지금 어떤가?
특히 ‘대통령(大統領) 부인(夫人)’이라고 해서 “법망(法網)”을 피해갈 수 없다. 더더구나 ‘파렴치(破廉恥)한 행위(行爲)’와 여러 피해자(被害者)를 만들어내는 ‘주가조작(株價造作)’같은 범죄(犯罪)는, 일벌백계(一罰百戒)해야 하며, ‘대통령(大統領) 부인(夫人)’이라고 해서 예외(例外)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국민(國民)들이 직접(直接) 선출(選出)한 것은, 대통령(大統領)이지, 그의 부인(夫人)을 선출(選出)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법치주의(法治主義)【국민(國民)의 의사(意思)를 대표(代表)하는 국회(國會)에서 만든 법률(法律)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나라가 국민(國民)의 자유(自由)나 권리(權利)를 제한(制限)하거나 의무(義務)를 지울 수 없다는 원리(原理)】에서 “예외(例外)”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금(昨今)의 ‘정권(政權)’은,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모독(冒瀆)하며, 하위법(下位法)인 시행령(施行令)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통치(統治)하려 한다. 그 ‘업보(業報)’는, 필연(必然)이 될 것이며, 필수(必須)과정(過程)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천리(天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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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호경(鎬京) : 『기원전(紀元前) 1,121년에,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을 멸(滅)하고,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에 새로운 도읍지(都邑地)를 건설(建設)한 곳이 바로 호경(鎬京)이다.』 그래서 “鎬京, 周武王 所都”라고 하며, 한(漢)나라가 장안(長安)에 도읍한 것을 일컫기를 ‘漢 都 長 安’이란 말로 표현(表現)하는 것이다.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대륙(大陸)의 ‘장안(長安)’ 땅의 이야기다.
즉(卽) 鎬京 : 陝西省 長安縣 西南에 있다. ‘周武王 (太子 發) 所都’라 한 곳이다.
➌ 유경(柳京) : ‘유경(柳京)’이란 말 그대로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는 서울”을 뜻하는 말이다. 즉 장안(長安)을 관통(貫通)하는 위수(渭水) 변(邊) 십리(十里)에 걸쳐 늘어진 버드나무(柳) 숲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역시(亦是)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장안(長安) 위수(渭水) 유역(流域) 땅’을 말하고 있다.
즉(卽) “유경(柳京)” : 陝西省 長安(西安)지역을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흐르는 渭水邊에 버드나무(柳)가 많아 붙여진 이곳의 별칭(別稱)이다.
➤➤➤ 三國史記 曰 : 《陽原王 : 八 年, 築 長 安 城. : 8년[552年],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平原王 :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 28년[586年],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都邑)을 옮겼다.》고 하였다.
이때 수(隋)【AD 581-618】나라는 ‘서력(西曆) 581년’에 ‘개황(開皇)’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 이전 수십(數十)년 전(前)【AD 552 年】부터 고구려(高駒驪)는, 장안성(長安城) 쌓았다는 것이니, “양견(楊堅)의 수(隋)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할 수 없다.”
또한 당(唐)【AD 618-907】나라 역시(亦是),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할 수 없다. “이미 장안(長安)은, 고구려(高駒驪)의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다. 많은 역사서(歷史書)에서, 지리지(地理志)에서 설명(說明)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웃기는 ‘머저리’같은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고구려(高駒驪)는 이미 수당(隋唐) 이전(以前)부터 “장안성(長安城)을 쌓고,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都邑)을 옮겼다.”』고 하였는데, 『후대(後代)의 수, 당(隋, 唐) 나라들이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했다.』는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역사(歷史) 조작(造作)이다.
○ 많은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 속에서 “장안성(長安城)은 고구려(高駒驪)”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있는 옛 장안성(長安城)은. 고구려(高駒驪)의 것인가?” 하는 질문(質問)에 답(答)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평양성(平壤城)은, 곧 장안성(長安城)이다. 고구려(高駒驪)의 서울이었으며, 고려(高麗)의 서도(西都)·서경(西京)이었고, 한때는 호경(鎬京)으로부터 불렸고, 유경(柳京)이라는 별칭(別稱)으로도 불렸던 곳이다. 이곳이 곧 평양(平壤)이다.』 이건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원전(原典) 기록(記錄)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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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예문(例文)은,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에 대해 몇 가지를 예(例)로 든 것이다.
① 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용재(慵齋) 성현(成俔, 1439~1504)】 제12권 / 시(詩) / [自京兆尹按節關西.丙午年公以平安道監司赴關西作 : 경조윤(京兆尹)에서 체차되어 관서(關西) 안찰사로 나가다. 병오년(丙午年 : 1486, 成宗 17) 공(公)이 평안도 관찰사로 관서에 부임했을 때 지었다.] 고 하였으니,
‘경조윤(京兆尹)’은 조선왕조(朝鮮王朝) 때의 “경조(京兆)”를 다스리던 우두머리 ‘관직(官職)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다산시문집 제2권 / 시(詩) / 이 좌윤 명준 에 대한 만사[李左尹 命俊 輓詞]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것임 : 《嘉善大夫京兆尹 : 가선대부 한성부윤 품계 벼슬 쓰여진 / 丹旌飄拂向東湖 : 붉은 명정 나부끼며 동호로 향해가네》하였다.
③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경도(京都) 한성부(漢城府) : 《李壎。蓄子。世祖時累遷京兆、秋官,成宗朝參佐理功臣,封韓城君,官至議政府左參贊。子惟淸,官左議政,封韓原君。孫彦浩,爲全羅道觀察使。이훈(李塤) 이축(李蓄)의 아들이다. 세조 때에 누차 승진하여 경조윤(京兆尹)과 형조 참의가 되었고, 성종 때에 좌리 공신에 참여하여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관직이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④ 동명집(東溟集) 제4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185수 / 판윤 민성휘가 연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2수 〔送閔判尹 聖徽 之燕 二首〕:《三韓京兆尹 : 삼한 땅에서 경조윤의 자리에 있다. 十月薊門行 : 시월 달에 계문 향해 길을 가누나.》하였다.
⑤ 세종실록(世宗實錄) 31년 기사(1449) 9월 28일(을사) / 《遣禮官, 賜祭于知中樞院事金孟誠。 其文曰:지중추원사 김맹성에게 사제하는 제문 : 勳盟之冑, 瑚璉其器。 早登仕版, 恪謹職事。 中外賢勞, 蔚有聲續。 擢居銀臺, 多所啓沃。 再尹京兆, 詞訟簡平。: "훈신(勳臣)의 후손으로 호련(瑚璉)같은 기국(器局)이었다. 일찍이 사판(仕版)에 올라 직무를 조심하고 부지런이 하였으며, 중외에서 어질고 수고로움이 성하여 명성이 연속되었도다. 승정원에 발탁되어 있을 적에는 보필한 바 많았으며, 두 번 경조 윤(京兆尹)으로 있으면서 백성의 송사를 간편하고 공평히 하였도다.》
⑥ 중종실록(中宗實錄) 24년 기축(1529) 9월 4일(병신) / 이조 판서 홍언필이 체직된 자들의 품계 처리를 묻다 : 《吏曹判書洪彦弼啓曰: "李思鈞, 判尹則已遞矣, 其資級何以爲之?" 傳曰: "京兆之職, 不可久曠, 故判尹則命遞, 其資級, 則不須改正也。" : 이조 판서 홍언필(洪彦弼)이 아뢰기를, "이사균(李思鈞)이 판윤에서 이미 체직되었으니, 자헌 대부의 품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경조윤(京兆尹)의 직임은 오래 비워 둘 수 없어서 체직시키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나 자급(資級)은 개정할 필요가 없다.“》
⑦ 광해군(光海君) 9년 정사(1617) 12월 27일(무오) / 유학 이국광ㆍ이국헌 등이 충성스런 인재의 진출을 상소하다 :【參副, 許筠也; 京兆, 金闓也。: 참찬은 허균(許筠)이고, 경조윤은 김개(金闓)이다.】
⑧ 숙종실록(肅宗實錄) 15권, 숙종 10년 3월 22일 戊子 / 1684년 청 강희(康熙) 23년한성부에서 향도를 뽑아 군정에 채우고 과조를 엄하게 세워 폐습을 고치기를 청하다 : 《戊子/漢城府請抄香徒實丁, 嚴立科條, 以革弊習, 上從之。 先是, 因閔鼎重所奏, 議行鄕約法, 罷香徒契, 令京兆詢問便否, 民多樂故俗、厭新制, 遂令仍舊法, 稍加裁革。 : 한성부(漢城府)에서 향도(香徒)156) 를 뽑아내어 군정(軍丁)에 채우고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서 폐습(弊習)을 고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에 앞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뢴 바에 따라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고 향도계(香徒契)를 폐지할 것을 의논하고, 경조윤(京兆尹)를 시켜 편리한지를 묻게 하였는데, 옛 풍속을 좋아하고 새 제도를 싫어하는 백성이 많으므로, 드디어 옛 법을 그대로 두되 조금 재량하여 고치게 하였다. [註 157]경조윤(京兆尹) : 한성 판윤(漢城判尹).》
⑨ 영조실록(英祖實錄) 32년 병자(1756) 8월 1일(정유) / 명릉에 거둥한 후 익릉ㆍ경릉ㆍ창릉ㆍ순회묘를 배알하다 : 《駕到弘濟橋, 水漲橋崩, 乘輿渡水。 京兆尹請治將作郞罪, 上置之, 命趁還宮改造。: 어가가 홍제교(弘濟橋)에 이르자 물이 불어 다리가 무너졌으므로, 여(輿)를 타고 물을 건넜다. 경조 윤(京兆尹)이 장작랑(將作郞)을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냥 두게 하고 환궁 때까지 고치라고 명하였다.》
⑩ 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 신해(1791) 6월 28일(신미) / 罷漢城府判尹具㢞職[한성부 판윤 구익을 파직하다] 《當該京兆尹罷職。: 해당 경조윤(京兆尹)을 파직하라.》
⑪ 정조실록(正祖實錄) 23년 기미(1799) 5월 2일(기미) / 遞漢城判尹李鼎運, 以李膺擧代之。[한성판윤 이정운을 체직하고 이응거로 대신 제수하다] : 《迨其上京之時, 欲試之。 大護軍李膺擧, 特除京兆尹, 牌招察任。: 마침 그가 서울에 올라왔으니 이때에 시험해 보고 싶다. 대호군 이응거(李膺擧)를 경조 윤(京兆尹)에 특별히 제수하고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도록 하라.》
⑫ 우종손(禹從孫) : 조선 성종(成宗) ~ 중종(中宗) 때의 무신(武臣). 본관은 단양(丹陽). 경조윤(京兆尹) 우맹선(禹孟善)의 아버지로, 동래 현령(東萊縣令) 등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에 대한 기록(記錄)은 수없이 많다. 곧 “경조(京兆)는 한성부(漢城府)”를 칭하는 말이고, “경조윤(京兆尹)은, 한성부윤(漢城府尹), 한성판윤(漢城判尹)”을 다르게 말하는 것이다.
○ ‘전한(前漢)이니 서한(西漢)’이니 하는 이름은 “한(漢)”의 별칭(別稱)으로 사가(史家)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한(漢)”나라는 봉건왕조(封建王朝)의 기틀을 세운 왕조(王朝)로 어떤 왕조(王朝)에서든 “한(漢)”을 정통(正統)으로 세운다.
그것은 《인의(仁義)를 바탕에 둔 통치 이념인 유교(儒敎)와 그 시행 법령(法令)인 율령(律令)이 정비된 시점이 바로 한(漢)나라 시대이며 다른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들도 유교(儒敎)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하여 오늘날 동양철학(東洋哲學)의 기반이 되었다.[출처: 나무위키 한(漢)]》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漢)나라를 ‘정통(正統) 왕조(王朝)’라고 하면서도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이라는 ‘신주(神州)’의 명칭(名稱)은 이어받지 않고 ‘경사(京師)’라고 다르게 호칭(呼稱)했을까? 차별화(差別化)하기 위해서?
그런데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왜 “한(漢)”과 똑같은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을 이어받았을까?〉
〈➊ 경조(京兆)는,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를 말하는 것이다. ➋ 경조(京兆)는, 중국(中國)의 옛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다. ➌ 경조윤(京兆尹)은, 조선(朝鮮)의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일컫는 말이다. ➍ 경조윤(京兆尹)은, 중국(中國) 한(漢)나라의 경조(京兆)를 다스리는 관직(官職)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다.
즉(卽) “전한(前漢)의 경조(京兆)는,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와 같다.”는 뜻이고, 또한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다. 『‘일천오백(一千五百)’년(年)이라는 시간(時間)과 시대(時代)를 초월(超越)하여 “경조(京兆)와 경조윤(京兆尹)”이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재현(再現)”』된 것이다.
당시(當時)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하고 있었으며, 그곳의 이름이 ‘한성부(漢城府)’였다는 뜻이고, 이곳을 다스리는 경조윤(京兆尹)이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다는 뜻이다.
즉(卽)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에 없었다.”는 뜻이다. 많은 역사서(歷史書)와 사대부(士大夫)들의 문집(文集) 속에서 이를 말해주고 있는데, 오늘은 난중잡록(亂中雜錄) 기록(記錄)을 예(例)로 들어보기로 하겠다. 【난중잡록(亂中雜錄)[山西 趙慶男]】
➊ 《庶 幾 梟 侵 鎬 之 兇. 慰 踰 梁 之 窘 : 서울[호경:鎬京]에 침범한 적을 무찔러 서(西)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하였으며,
➋ 《初 三 日 賊 入 長 安 城 中. : 초 3일 도적(賊)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라고 하였으며,
➌ 《漆浦萬戶文貫道.聞大駕西巡.西向再拜.痛哭良久.兩南義之.出慶尙巡營錄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 있다고 여기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➍ 《車駕發松都.向海西,中略.痛矣哉.哀我小中華.介於東夷北狄之間.變亂之作何代無之.然而淪陷之慘.播遷之辱.豈有至於此極哉.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중략(中略).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하였다.
➎ 《陰懷猾夏之心.敢肆跳梁之患.陷城池數十餘處。屠士卒幾千萬人.恇怯守臣.聞聲而鼠竄.愚駭群姓.望風而波奔.嶺南山河.盡入豺虎之窟穴.湖西草木.半染犬羊之腥膻. : 그들은 음흉하게도 화하(華夏)를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湖西)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➏ 《二百年之宗社.其忍輸之於賊手乎.數千里之山河.其忍委之於賊窟乎. :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산천을 차마 왜적의 굴혈로 둘 수 있겠는가. 中華變爲夷狄.人類化成禽獸.是可忍乎.是可爲乎. : 중화(中華)가 변하여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으며 또 할 수 있겠는가.》
‘하(夏)’는 중국(中國)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하(華夏)’ 즉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뜻하는 것이고, 『당시(當時)의 중화(中華)는 곧 조선(朝鮮)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오늘날의 정통보수(正統保守)라고 자칭(自稱)하는 ‘영남인(嶺南人)’들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친일(親日)이 보수(保守)냐? ”
과거(過去) ‘영남(嶺南) 출신(出身)’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 “영남(嶺南) 즉(卽) 경상도(慶尙道)인들은 정통(正統) 신라(新羅)의 후손(後孫)들로… …”하면서 우월감(優越感)을 들어낸 적이 있었는데,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하고 방향(方向)조차 분간(分揀)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극치(極致)’를 보여준다.
이런 자(者)들이 바로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자(者)들이다.” 그러는 이자(者)에게는, “친일(親日)이 보수(保守)냐? ”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난중잡록(亂中雜錄) 曰 :《時 嶺 人. 降 附 受 牌 者 不 知 其 數 云. : 그때 영남(嶺南) 사람으로 왜적(倭賊)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라고 한다.》고 하였다.
‘부지기수(不知其數)’란 :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건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의 ‘영남(嶺南) 땅’은, 한반도(韓半島)의 ‘영남(嶺南) 땅’일까? 필자(筆者)가 오늘날의 한반도(韓半島) ‘영남인(嶺南人)’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바로 이거다. ‘역사(歷史)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筆者)는, 누누이 주장(主張)해 왔다.『조선왕조(朝鮮王朝)와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고 말이다. 따라서 영남(嶺南) 땅 역시(亦是), 한반도(韓半島) 영남(嶺南)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그것은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화하(華夏)”였기 때문이다.
● 『경조(京兆)는,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를 말하는 것이다. 경조윤(京兆尹)은, 조선(朝鮮)의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일컫는 말이다.』라는 것이다. 이게 필자(筆者)의 한결같은 주장(主張)이다.
2022년 08월 23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이 유수같은 좋은 글들이 👍 왜 세상에서 통용되지 않는지 🤮 곡할 따름입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송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저술했다"는 "서긍"의 "도경"이 현존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고, "서긍"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의 고려는 옛 주(周)나라의 정통을 따르는 왕조였으며, 자신들의 송(宋)나라는 주(周)와는 다른 계통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서긍"이 고려와서 놀란 것은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던 옛 주(周)나라의 복식과 기타 예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민사관이나 반도사관 논자'들의 말에 따르면 : 오랑캐인 조선왕조(총칭)가 감히 천자국이었던 주(周)의 모두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서긍의 말대로 "고려가 주(周)의 복식이나 그외의 것들을 보고 놀라워했다"는 말은 곧 당시의 고려는 '주(周)의 후국이었다'는 것이고, 옛 주(周)는 "주 조선(周 朝鮮)"이었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참 후대의 조선왕조 사대부들의 문집속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한 주(周)에 속해 있던 "한(韓)"이 진(秦)의 핍박에 많은 백성들이 남(南)쪽으로 이주를 했고, 이것이 삼한을 이뤘다는 학설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한반도 조선이란 말은, 20세기에 출현한 '역사조작'일 뿐이다라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들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말로만 일제잔재를 청산하자고 합니다. 일제잔재를 청산하려면 실천이 필요한 것이지, 맆서비스가지고 단 하나도 청산하지 못합니다. 이게 오늘날의 대한민국 실제 상황입니다. 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이나 똑같지요!!!!!!!
더구나 오늘의 '윤석열' 정권은,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열도 아이들은 아예 대 놓고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두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입니다.일만년 조선의 역사를 난도질하고,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조선백성들을 개돼지 취급하던 일제 잔재를 왜 청산하지 않으려 하는가? 왜 친일분자나 부역매국노들이 오늘도 이 나라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나?
참 답답합니다.
우리는 "친일이 아닌 극일을 외쳐야 합니다" 정치인들도, 국민들도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카페를 운영하시기도 바쁜 와중에......'러브 선'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댁내 늘 평안하시고,
카페도 번창하기를 기원합니다.
건강하세요!
늘 언제나 좋은 글들 살아있는 역사를 집필하시는데 너무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 역사가 우리나라를 올바르게 이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