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안 피우는 애들 손들어! 다음 주 흡연캠프에 다녀오도록! 세계에는 담배가 즐비한데 못 배워오면 퇴학이다.”
‘행복한 학교 만들기’라는 테마로 진행된 청소년 흡연 예방과 금연 의지를 강화하는 심리극 현장. 서울 인수중학교에서 진행된 이 심리극의 대상은 이 학교에서 흡연하다 적발된 학생 20여 명이었다. 심리극은 집단 구성원의 정보를 미리 얻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대본도 없다. 극에 등장하는 출연자나 역할도 정해져 있지 않다.
이날 심리극을 진행한 김영한 ‘별자리사회심리극연구소’ 소장은 학생들에게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는지, 어떤 징계를 받았는지 등을 즉석에서 질문했다. 그리고 흡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반어적으로 풀어내며 극을 진행했다. 심리극에는 이중자아 기법이 도입됐다. 금연하고 싶은 마음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마음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즉흥적으로 이뤄졌다. 학생이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꺼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자’는 그 학생의 부모, 선생님 역할을 번갈아 맡았다. 학교와 사회로부터 받는 차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있던 흡연 학생은 처음에는 좀처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꺼렸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실의 극장(the theater of truth)’이라 표현하는 심리극은 1921년 제이콥 모레노(Jacob Moreno 1889~1974)가 창시했다. 김영한 소장은 “연극적 방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진실을 조명하고, 인간이 처한 환경의 현실적인 측면을 탐구하는 과학”이라고 설명했다. 의과대학에 다니며 소외 계층을 돕던 모레노 박사는 다른 의사들과 함께 집단 정신치료 방법으로 심리극을 시작했는데, 이를 심리치료하는 사람들이 활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심리극의 디렉터로 활동하는 김영한(41) 소장을 만났다. 그는 1992년 ‘별자리사회심리극연구소’를 설립, 사람들이 내면 갈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수많은 별이 자기만의 위치에서 자기만의 빛을 발하잖아요.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큰 빛을 주자’라는 의미를 담아 연구소 이름에 ‘별자리’를 넣었어요.”
그는 음성 정신병원에서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 재직 중이기도 하다. ‘정신보건사회복지사’는 심리 상담·치료 프로그램 제작, 재활 상담을 통해 정신장애인이 안전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한 그가 심리극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군대를 제대한 후 대학에 복학하면서였다. 정신병원에 실습을 나갔을 때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이코드라마를 보았는데 환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재연하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심리극을 통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진로를 정했다.
“사회복지에도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는 걸 알았어요. 정신보건사회복지사로 진로를 정했죠. 아직 우리나라에는 사이코드라마 전문가 자격증이 없어요.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자원봉사를 다니면서 사이코드라마 보조자를 많이 맡았어요. 사이코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이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이 크죠. 그들을 도와 심리극을 하면서 저 자신이 치료되는 느낌이었어요.”
자살충동 느끼던 여고생이 심리극 통해 치유받기도
심리극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기 다른 역할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점, 내면의 갈등과 상처를 인식하고 해결점을 찾아간다. 역할 연기를 하면서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던 진실을 드러내는데, 무의식에 깔려있는 자신의 잠재심리를 인식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말 대신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지적장애가 있거나 언어 표현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표현력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다. 요즘은 병원뿐 아니라 학교, 상담실, 복지관, 청소년 단체, 교육기관, 기업체 등에서 인성교육으로 활용되면서 그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에게 “이제까지 이끈 심리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물었다.
“지방에 있는 한 여고에서 심리극을 진행할 때였어요. 한 여학생이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왔어요. 여학생이 꺼낸 첫 마디가 ‘죽고 싶다’였어요. 알고 보니 중3 때부터 왕따를 당했더군요. 보조자에게 엄마 아빠 역할을 맡기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했죠. 여학생은 왕따당하며 힘들었던 일들을 다 토해냈어요. 학생도, 그걸 보는 아이들도 울음바다가 됐죠. 이번에는 보조자를 눕혀놓고 ‘이게 약을 먹고 죽은 네 모습이다’ 했더니 여학생은 ‘무척 불쌍하지만 편안해 보인다’고 하더군요. 자신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드러냈더니 속이 후련하다고 했어요. 그 뒤로도 연락이 왔어요. 친구도 많이 생기고, 대학도 갔다고. 이렇게 심리극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그는 심리극을 진행하는 건 외과 수술과도 같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수술해서 봉합까지 해야 하는데 그냥 방치해버리면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다면 주인공의 심리를 어떻게 이끌어낼까.
심리극은 자발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스스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얘기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상처를 드러낸다는 건 더 힘든 일이다. 그래서 주인공을 선택하는 기법을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마술가게 기법을 활용하죠. 마음을 사고팔 수 있는 마술가게를 열어요. 불편하고 힘들고 버리고 싶은 마음을 마술가게에 버리고, 갖고 싶은 마음으로 바꿔 갈 수 있다고 소개하는 거예요.”
보통은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데, 심리극에 참여한 청소년이 소극적이고 자기표현이 부족한 경우에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심리극은 무엇보다 참여자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 연출자는 초조해져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작업이죠. 주인공을 처음만나 이야기하며 중간중간 단서를 집어내 주인공 스스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바로 판단해야 하거든요.”
그는 상담문화가 보편화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보통 정신과를 찾을 때는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거나 마음의 병이 깊어진 뒤거든요. 심리극 또한 보편화되어 있지 않죠. 심리극을 딱딱한 심리치료가 아닌,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놀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마당극처럼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의미 있는 놀이가 바로 심리극입니다. 대학로에 심리극 전용극장을 만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서로 공감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사진 : 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