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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음 주부터는 신발 관련해서 출장을 가거나 그럴 일이 있어서 오늘은 4회와 5회를 합본으로 하겠습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늙은 주제에 오늘은 화사하게 입었죠. 이 화사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최근에 살이 내려서 입을 수 있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단추가 안 닫혀서 못 입었는데, 이제 장 출혈이 멈추니까 입을 수 있는 옷도 많아지네요.
이번에 삭는다! 늙는다! 하는 얘기를 가지고 주로 다뤘습니다만, 크게 보면 우리 몸을 4대 즉 4가지의 큰 어떤 구성 요소 부분들과 이 요소들의 업그레이드된 부분을 더한 8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리고 삭는 과정, 그 과정에서 아무튼 삭아는 가지만 그게 무너지는 정도보다는 흘러가는 정도의 삭음이어야 된다는 거죠.
샘물이 상류에서 깨끗하게 나와도 (그 물이 예전에 사람이 안 살고 말들이 살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들소들이 사는 그런 시대라고 하더라도) 중류로 가면 상대적으로 탁해지고 그리고 하류로 가면 더 탁해지는 것은 그 시대에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하류가 그렇게까지 맑지는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안에도 물고기는 살아야 되고 그들이 배설하고 그들이 먹는 것들이 과잉 공급됐다가 부패하기도 하고, 모자랄 경우에는 그들의 배설물이 또 부패를 시키고 해서, 하류는 지금으로 치면 1급수겠지만 떠먹을 수 있는 물은 아니었을 거라는 거죠.
그래서 어쨌든 흘러갑니다. 흘러가면서 물이 탁해지듯이 우리 몸도 흘러가면서 삭기는 하는 건데, 그 삭는 것이 갑자기 확 무너지듯이 무너지면,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이 오죠.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다양한 법제의 방법들
그런 얘기를 드리면서 법제(法制)라는 얘기, 멀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이야기 그리고 다가오게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법제라는 것도 그 세계가 무척 넓죠.
저도 사실은 음식을 해 먹으면 잘 해 먹는 편이에요. 많은 음식을 할 줄도 알고요. 저는 한때 짧은 시간 양식당 주방장이기도 했어요. 주방장을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옛날 도망 다니던 시절이 있었어요. 제일 안전한 곳이 주방 안이었죠. 양식장 주방 안을 아무도 안 보죠. 그래서 하다 보니까 주방장을 좀 하게 된 거고요. 심지어 여러분한테 돼지고기를 갖고 돈가스를 튀겨 드리거나 제가 신문지를 갖고 튀겨 드려도 여러분은 맛있다고 드실 정도로 잘 튀겨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음식에 대한 것이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죠. 그 얘기는 뭐냐? 각 지역마다 완성도는 서로 다를 수 있고 방향은 서로 다를 수 있어도,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오는 방법들이 존재했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방법에 있어서 열을 가하는 것에서 방법을 찾은 데도 있고, 상대적으로 그게 잘 안 되면 다른 양념장이나 이런 걸 가지고 발전시킬 수도 있죠.
기후 자체가 습기가 많아 건조된 열을 쓰기가 어려운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스를 많이 쓰죠. 소스라는 것 자체가 맛을 내기 위한 수단도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멀리 있는 음식을 가까이 빠른 시일 내에 끌어오기 위함인데, 잘 안 되기도 하죠.
예를 들어서 날씨가 더운 운남의 남부 지역이나 태국의 일부 지역, 미얀마 일부 지역 같은 곳, 심지어 베트남 까지도 사페이라는 게 있어요. 사페이라는 게 말 그대로 소스의 원조죠. 나물 같은 걸 먹는데 나물을 데쳐 먹을 정도의 열을 잘 안 쓰다 보니까 거의 준 생나물에 이 사페이를 뿌려요. 사페이를 얹으면 비빔장이죠. 얹은 장 그 맛으로 먹죠.
동남아식 샐러드가 그런 식이죠. 엄밀하게 말하면 서양 샐러드도 소스를 얹죠. 심지어 칼로 썰어서 하지도 않고 칼로 툭툭 썰면 쉬운데 뜯죠. 뜯어야 그 사페이에 해당되는 소스가 위에 얹는 소스가 잘 스며들죠.
요즘 한국에서 샐러드 만드는 것을 보고, 제가 “이 사람들은 흉내만 내네.” 그랬는데요. 제가 화장실 얘기했듯이, 유럽의 화장실이 유럽에서는 우리가 예전 재래식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던 것을 조금 더 편하게 해 놓은 정도였는데, 한국에 오면 의자처럼 바뀐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식으로 한국에 와서 (샐러드도) 엉뚱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제가 뭐 경험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직접 서양 사람들이 서양에서 하는 것을 내온 것을 많이 먹어보지도 못했죠.) 저는 소스를 잘 안 시켜요. 아니 소스가 아니라 샐러드를 잘 안 시켜요. 한 두세 번 시켜보니까 샐러드 흉내만 낸 거예요. 샐러드를 흉내 냈다는 게 뭐냐면요. 예전에 샐러드 만들 때 손으로 뜯잖아요. 칼로 안 썰잖아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풀을 들고 두들겨야 돼요. 손바닥이든 뭐에 놓고 이렇게 탕탕 쳐요. 풀을 손으로 이렇게 치면 풀이 죽잖아요. 그 위에 얹는 거예요.
근데 요즘에 한국에서 일부 주방장이 그걸 하더라고요. 제가 TV에 나오는 주방장들 중에서 한 사람밖에 못 봤어요. 나머지는 그냥 풀 뜯어 갖고 그 위에 소스 얹더라고요. 그러면 그게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질 않아요. 소스를 얹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항아리 안에 감을 넣어놓듯이, 싸리꼬지 꼽아서 곶감을 말리듯이 하는 식으로 하는 세월을 나는 것도 있죠. 하몽 같은 것! 프로슈토 같은 것도 그렇게 하죠.
(프로슈토: 프로슈토는 이탈리아어로 햄을 뜻하며, 보통 건염 생햄을 가리키고 익힌 햄은 프로슈토 코토라 부름 – 네이버 사전.)
우리는 데쳐 먹었잖아요. 데쳐먹을 때 일부 양념을 쓰는 것은 그나마 또 소스에 가까워서 빨리 변화시키는 거죠. 데친 상태에서 양념을 얹는 거죠. 묻히죠. 묻히는 과정에서 손으로 묻히죠. 거기서 또 조물락거리죠. 그래서 빨리 변하도록 하는 거죠.
그런데 서양 음식은 데치는 대신에 두들겨야 되는 거예요. 야채들을 두들기는 거예요. 손바닥으로 탕탕 치면 야채들의 섬유질이 많이 죽어요. 거기에 소스를 얻는 건데요. 그렇게 내오는 집을 제가 이태리에서는 못 봤어요. 그런 음식의 원조격인 데가 프랑스 아니면 이태리인데 못 봤어요. 이태리나 프랑스에 없다는 얘기는 영국에 당연히 없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샐러드를 먹을 때 바로 화장실을 우리가 오용하듯이, 소스 얹기 전에 샐러드를 두들겨 안 한단 말이죠. 뜯어놓으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게 끝난 게 아니에요. 두들겨야 되는 거예요. 두들기지 않으면 그냥 소스는 맛으로 먹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얘기를 드렸습니다.
가까운 것이 먼저, 먼 것이 나중, 그러면 몸이 열린다
그래서 선근후원(先近後遠) 얘기를 드렸는데요. 또 한편의 얘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먹으면 뭐가 차이 나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먹으면 사람의 몸이 열려요. 사람의 몸이 열려서 좌우를 느낄 수가 있게 돼요. 좌우를 느낄 수가 있게 되는데 어느 분한테는 제가 얘기를 드렸더니 해보셨나 봐요.
옛날 사람을 한번 볼 게요. 드라마 쓰는 사람들, 특히 예전에 드라마 쓰던 분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에요. 요즘 드라마 쓰는 분들은 사람이 살고 있는 패턴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드라마를 많이 써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먹었다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예전에는 양반들 중에서 어정어정 걸으면서 저기 저 온갖 근엄한 표정은 다 짓죠. 무서운 표정이죠. 엄밀하게 보면 다름의 표정이죠. 남들과 소통하기 싫고 내 얘기만 전하려는 표정이죠. 어정어정 팔자로 걸으면서 있는 양반들이 나오면, 그 양반들은 꼭 자기 집에 있는 종들이나 머슴들을 그냥 막 하대를 하고 골탕을 먹여요. 막 나무라고 그러죠.
그런데 간혹 가다가 드라마에서 꼿꼿하게 서가지고 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점잖게 왔다 갔다 하는 양반도 나와요. 그 양반의 집에도 종이 있고 머슴이 있죠. 그 머슴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과 여건상 종이거나 머슴이었겠죠. 그런데 그들에게 함부로 안 해요. 함부로 안 할 뿐만 아니라, 머슴과 종이라는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같이 살아가는,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라는 무언가가 깔려 있어요.
꼿꼿하게11자로 걸으면서 조용하게 ‘김 서방~!’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거예요. 그렇게 사람이 선근후원을 지켰을 때는 사람이 누군가와 또는 어떤 존재와의 교감이 저절로 일어나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요. 그리고 바르게 서요.
그렇게 됐을 때 늙어가는 거예요.
늙는다는 것은 선신후구(先新後舊)! 선근후원(先近後遠)과 선신후구는 모순되는 표현
선근(先近) 즉 가까이 있는 것, 그 다음에 선신(先新)! 이건 어쩌면 모순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선근(先近)이라고 하여 나한테 가까운 것은 역사성을 갖고 있어서 사실상 시간적으로는 옛것일 가능성이 많아요. 이미 익은 것 이거나 이미 익은 것일 가능성이 많아요.
후원(後遠)이면 나중에 있는 것, 멀리 있는 것을 당겨오는 거잖아요. 그런데 선신(先新)은 지금 바로 있는 거기 때문에 낯선 것일 수 있어요.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힘은 옛것을 또는 가까이 있는 것을 또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해서 내가 받아들인 결과예요.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은 가까이 새로 일어나는 것들,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게 돼요. 새로운 것들을 계속 받아들여서 축적시키는 거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서 축적시키는 것이 바로 ‘늙음’이에요. 늙는다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습득 능력과 소화 능력을 계속 이어가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오늘 새로운 걸 또 받아들일 수 있고 내일 또 받아들이면서 세월의 영역을 늘려가는 것! 그게 늙음이라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늙은이는 삭다리 즉 삭은 사람이죠. 사실 늙다리는 그냥 늙어가는 게 아니라 새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죠.
늙은이는 새것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내가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에요. 일신 우일신 하려고 노력해 봐야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겨울방학 때 여름방학 때 그 생활 계획표 그려 보신 분들 있으시죠? 그려놓고 나서 그 유효성이 언제 까지죠? 그리는 데 한 30분 이상 걸려요.
그렇죠? 열심히 연구한 결과는 30분인데 그걸. 벽에 붙이고 돌아서는 순간, 우리는 뭐라고 그러죠? 작심 3일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건 인간을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작심 3분이에요. 작심 3일은 무슨! 3일 가는 사람이 있으면 대단한 거죠. 그런데 작심하고 3분 돌아서면 달라요.
저와 같이 산보를 하면 제가 옆을 보고 그래요. “엄지로 걸으세요.” 물론 어떤 분은 엄지로 걸으라고 그러면, “저는 무지외반증이 너무 심해서 엄지로 못 걸어요.”라고 해요. 무지외반증이 너무 심해서 엄지로 못 걷는 분들은 반드시 병이 있어요.
유럽에 돈 좀 있다든가 홍콩이라든가 일본에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무지외반증을 겪게 되는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시나요? 무지외반증은 여성들이 주로 앓는데, 신발이에요. 그렇죠? 그런 신발을 제일 많이 생산하고 그런 신발을 대표적으로 생산했던 브랜드 아시나요? 그게 ‘로저 비비에’예요. 여성들의 발을 가둬놓는 딱딱한 신발이죠. 지금 여기도 보면 기성세대라고 불릴 수 있는 분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무지외반증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어요.
요즘 젊은 분들은 없죠. 그런 신발 안 신으니까. 아무튼 그런 신발을 신는 분들은 그렇게 무지외반증이 심하게 와서 엄지로 걸으려고 해도 바깥쪽으로 힘이 가요. 그런 분들은 이미 몸에 병이 있는 분들일 수 있어요. 여성분들이 임파선이라든가 이런 데 아픔이 있는 분들의 공통점으로 무지외반증이 발견될 때가 있어요. 근데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 있으면 잘 교정되지도 않아요.
어쨌든 저랑 같이 걸으면 여성이 됐든 남성이 됐든 제가 엄지로 걷자고 해요. 엄지로 걷자고 하는데, 저는 같이 걸으면 그분이 엄지로 걷는지 안 걷는지를 그분의 숨소리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알아요. 근데 그렇게 3분 가는 분을 못 봤어요. 엄지! 엄지! 했는데 3분 이내에 다 흩어져 있어요.
다시 그러면 얘기하죠. 엄지요! 그러면 또 이제 아차! 그러고 또 걸어요. 역시 작심 3분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작심 3일이라니! 작심 3일과 3분의 격차는 수명으로 치면 하루살이와 인간의 수명 차이입니다. 얼마나 차이가 심해요 그런데도 우리가 작심 3일이라고 그러는 것은 의지로는 안 되기 때문이에요.
몸이 받쳐 주어야 새로움을 쌓아갈 수 있는 것
몸이 받쳐줘야 돼요. 그렇게 몸이 받쳐줬을 때, 어떠한 것이 패턴이 돼서 유지가 되면 그게 이제 새로움을 쌓아갈 수 있는 또 그런 시스템이 되는 거죠. 시스템 없이 정신적 영역에서 버텨보자! 버텨보자!
그런데 해도 한도가 있는 거예요. 쉽지 않아요. 달마라는 이름 자체가 법(法)인데요. 우리 옛날식 표현으로 법이고 경전이라는 의미를 가진 달마가 있어요. 달마가 동쪽으로 와서 9년 면벽했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9년 면벽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의 제자였던 나중에 법명이 혜가로 바뀐, 2조 혜가가 자기 팔을 끊어서 피의 비를 뿌리잖아요. 그런 혜가는 9년 면벽할 줄 몰라 가지고 그랬을까요?
그게 그건 아닌 거죠. 달마의 9년 면벽은 9년 내내 같은 상태를 유지한 거예요. 늘 새로워지고 있는 그 상태가 그가 마음먹고 있지 않는 가운데서도 이루어진 거예요. 작심 9년이 간 거예요. 행위로도 9년이 간 거예요. 그게 어렵다는 거죠.
그게 안 되니까 어렵겠지만, 그가 작심 9년을 했다! 작심 3분밖에 안 되는 사람이 그걸 했다면 그럼 뭐가 되죠? 작심 3분의 9년 축적이에요. 작심 3분하고, 작심 3분 하고 해서 하나도 진화 없는 짓을 9년을 한 거예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혜가가 그걸 원해서 그렇게 배우고 싶어 했던 건 아닌 거예요.
우리가 이런 말을 쓰잖아요. 일일신(日日新)! 날마다 새로워지고! 그리고 우일신(又日新)! 또 하루가 새로워지고! 이게 그렇게 하려고 ‘내가 마음 먹어’라는 의미도 현실적으로 될 수 있죠. 근데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2분 작심, 3분 작심, 작심 4분까지밖에 안 돼요. 작심 6분 되기는 어려워요.
자기는 작심 3일은 그래도 끌고 간다고 그러는데 중간에 이미 생각을 놓았어요. 중간에 생각을 놓았어요. 그렇게 되려면 몸 자체가 바뀌어 있어야 돼요. 작심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하는 몸으로, 몸 자체가 자기도 모르게 자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오토메이션이 일어나야 돼요. 자동으로 그렇게 돼야 돼요.
몸 자체가 자동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체계가 되게
자동으로 그런 몸이 되게끔 하라는 것이 더 중요한 명제인 거죠. 억지로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늘 또 새로워지고, 내일 또 새로워지라는 것이지,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라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노력마저 안 한 것과 노력도 안 한 건 차이가 있어요. 노력도 안 하잖아요. 일신우일신 하고 있지 않는 모습에 대해서 답답함이 없어요. ‘뭐 그러고 사는 거지!’ ‘뭐! 사람 그러고 사는 거지.’
그런데 일일신 우일신 하려고 노력이라도 많이 해 보잖아요. ‘왜? 나는 안 되고 있을까?’에 대한 답답함과 어떤 때는 자기 실망과 그게 안 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와 이런 것들이 끓어요. 끓어서 나는 왜 안 될까? 왜 안 될까! 왜 안 될까를 외치게 돼요.
그러면 언젠가는 이제 원인을 찾아 나서거나, 어느 순간 남들보다 뒤늦게 포기를 하거나 이렇게 되겠죠. 어쨌든 일일신우일신 하려고 해보다 보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돼요. 자꾸 중간중간에 놓치고 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초지일관이라는 것이 어거지를 부려서 끝까지 가라는 뜻은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사회적으로 쓰고 있는 의미로만 초지일관이 간다면 그건 고집이죠.
실제로 11자로 공원에서 한번 걸어보셨나요? 11자로 정말 3분이라도 걸어 보시는 분은, 그 3분 동안은 세상이 달라요. 내 옆에 있는 나무가 다가와요. 그건 관념이 아니에요. 확 다가와요. 옆에 지나가는 사람도 그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나와 함께 숨 쉬고 이 자리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느낌이 와요.
그런데 그 순간 다시 8자로 풀어버렸어요. 8자로 풀잖아요. 그러면 느낌이 뭐가 있냐면 뱃속에 있던 복막의 딴딴함이 11자로 섰을 때 엄지로 특히 엄지로 디딜 때 그 딴딴함이 바로 무너져요. 엄지로 디딜 때 그때는 복막이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푸는 순간 복막이 밑으로 쭉 풀어지면서 멀리 다 도망가 버려요. 나무도 도망가고, 사람도 도망가 버려요.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동물인 것뿐이에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나중에 안 남아요. 짧게 만나도 만난 것이고 길게 만나도 만난 것인데, 만난 것이 자기에게 이미지도 안 남아 있다는 거죠. 저 깊은 무의식의 세계까지 하나하나 내려가 봐도 흔적이 없어요. 내가 그 사람을 접촉했다는 기억이 아예 없어요.
기억은 안 하더라도 그렇게 엄지로 디디며 갔던 사람들은 언젠가 그가 나를 지나갔다는 걸 알아요. 어느 순간 무심결에 나오기도 해요.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하는 자세가 자신을 새로운 것과 만나게 하는 기본이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것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늙지 않고 삭는다는 의미죠.
그러니까 삭음은 물같이! 늙음은 나무가 새벽에 전 사방의 공기를 빨아들이고 토하듯이! 밤이 되면 이산화탄소를 쭉 뿜었다가 새벽이 되면 산소를 쫙 내 뱉어 놓는 것처럼! 그렇게 늘 숨 쉬듯이! 우리도 숨 쉬듯이!
내 숨 하나하나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가까이 있는 새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거죠. 이렇게 해야 늙어가요. 그렇지 않으면 삭아가요.
새로운 것과 만나는 이유는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왜, 굳이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보면 당연히 있을 법한 이야기죠. 왜 굳이 힘들게 어쩌면 힘들게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그건 고통스럽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들, 주변에도 아픈 분들도 많이 봤고 정신과 몸이 무너진 분들도 많이 봤잖아요. 그 정도 아픔은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픔이고 그 아픔마저도 너무 힘들 수 있어요. 그보다 훨씬 힘든 것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
개들에게 유물론자 개가 있을까요? 유심론자 개가 있을까요? 개나 고양이에게는 유물론 자도 없고 유심론자도 없어요. 그냥 자기의 형편대로 살아요. 개가 죽잖아요. 개는 개답게 죽고 개다운 범위 내에서 그냥 남은 세계가 있겠죠.
그런데 사람은 달라요. 유물론자도 있고 유심론자도 있고, 자기가 만든 세상이 존재해요. 그런데 사람은 아메바가 가질 수 있는 정도의 영혼도 없을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어요. 무한대일 수도 있어요.
<티벳사자의 서>라는 책을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읽어 보시지 않았더라도 들어 보셨을 것 같아요. <티벳 사자의 서>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시겠지만, 그리고 그 사람이 진짜 쓴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 책을 따르기로 해보조.
그 시대에는 49일이라는 게,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오는 49일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 사회 공동체일 수 있어요.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라마교를 믿으면서 집단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았거든요. 유심론자들이죠. 그 속에서는 49일 자체가 의미 있을 수 있어요.
지금은 다르죠. 여러분들이 (티벳 사자의 서 내용을) 듣고, 그냥 “저건 뭐 우리 삶에서 직접 확인도 안 되는 얘기인데!” 하셔도 좋아요. 그냥 저는 하기만 하고 지나갈 테니까요. 내가 죽었어요. 문 밖을 나섰더니, 내 몸을 떠났다는 걸 알고 문 밖을 나섰더니, 이미 내가 소멸돼 가고 있는 거예요. 문 밖도 나서기 전에, 내 몸으로부터 내가 떠나는 순간 즉 내 소멸이 바로 순간일 수도 있어요.
그런 사람에게 49일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49일 동안 유지가 안 되는데요. 몸을 끌고 가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뭔가 다른 것이 끌고 가는데 이미 그것이 의심이 돼 있고 의심이 확신이 돼 있어요. 의심이 확신이 돼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개가 언제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을 했겠어요? 언제 확신을 했겠어요? 자기의 느낌 동물적인 느낌 그런 걸로 살았죠. 그게 그들의 몸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그들의 본래 능력이었죠.
우리는 집단적 지성 또는 이성에 기초해서 본능이 만들어졌다고 그랬잖아요. 이 본능이 불확실한 게, 경우에 따라서는 이 이성 때문에 우리는 내 삶의 영역에서 몸이 아닌 영역은 아메바까지로 되돌아갈 수도 있죠.
우리가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개는 죽으면 최소한 개로 태어나요. 사람은 죽으면 아메바로도 못 태어날 수도 있어요. 분열됐는데요. 분해됐는데요. 어떤 존재는 거꾸로 이성이라는 것이 이성마저 버릴 정도로 이성에서 결별할 수도 있고, 그 이성을 느끼는 정도로도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이성 너머의 강에 다리를 한 짝 갖다 얹었을 수도 있고, 그 근처에 근접도 못할 수도 있는, 너무나도 스펙트럼이 넓고 극단적일 수 있는 본능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거죠.
본능의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거의 신에 가깝게 되거나 거의 무(無)에 가깝게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과도기적인 존재예요. 그 근거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매일매일 새 거를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영혼의 성장이에요.
매일매일 새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영혼의 성장
개들은 개들만큼의 범위 내에서 매일매일 새것을 만나요. 늙어가요. 삭아 가지만 늙어가요. 그럴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 진화가 멈췄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만나 갈 수도 있고 소극적으로 만나 가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예 안 만나려고 할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안 만나게 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게 편하니까요.
그렇게 얘기하죠. “내 이렇게 살다 가게 냅둬!” 뭐라고 하면은 “엄지 엄지하면 허리 덜 아파요.”라고 하면, “냅둬요. 그냥 편하게 걷다 제 마음대로 살다 제 마음대로 죽을래요.”라고 그러죠. “아플 수도 있는데?” 그러면 “뭐 아프면 아프라죠.” 그렇게 답을 하죠. 그런 사람들이 아프면, 험한 이야기로 하면 제일 발광을 떨어요. 감당도 안 되는 소리를 자신 있게 했던 거예요. 제가 아픈 분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쩌다 조우를 하게 되죠. 인연 따라서 아픈 분을 만나게 되죠.
그렇게 보게 되면 “냅둬! 나 이렇게 살게!” 자기는 그게 아닐지 몰라도, 그 유사하 게 살았던 분들이 대다수예요. 그리고 그렇지 않게 살았던 분은 아파도 담담해요. 내가 살아온 결과이거니 하고서요.
실제로 어떤 분이 많이 아프셔서 어쩌다 우연히 뵙게 된 적이 있어요. 근래예요. 그런데 그분한테 제가 그 얘기를 할 수 있나요? 그분은 사회적 생활과 자기 몸에 관련된 생활에서 한쪽을 선택했죠. 그 결과 무지외반증이 왔죠. 무지외반증이 심해도 너무 심하면 내장의 병이 안 올 수가 없어요. 어떻게 안 올 수가 있나요? 전족을 했던 여성들이 오래 산 적이 있나요? 동양에서 중국에서 억지로 자기를 그렇게 물질적으로 만들었는데요. 다른 걸 얻기 위해서죠. 사회 생활을 얻기 위해서죠.
그러니까 우리의 50대와 60대 여성들이 그런 면에서 발과 관련해서는 가장 불행한 세대예요. 지금 30대 이하층에서는 그런 신발을 안 신죠. 신으라고 누가 갖다 줘도 ㅇㅇㅇ 같은 신발 안 신죠. 그래도 그런 건 아닌가 본 게 ㅇㅇㅇ와 함께 딱딱한 신발의 대명사로 지미추가 있죠. 그것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비싼 쇼핑센터 한가운데에 있겠죠. 그런데 병을 만드는 거죠.
먼 것을 가까이로 오게 하는 것이 문명
아무튼 이렇게 병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새것을 못 받아들여요. 사람은 이성적 지성적으로 새것을 받아들이는 상당한 능력 공간이 있는 존재예요. 그런데 새것을 못 받아들이면, 그러면 딴 게 그걸 채워요. 동물에게는 없는 무언가가 와서 내가 새로운 것과 대화해야 되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 열려 있어야 되는 그 작용의 공간에 딴 것이 채워져요. 그게 사람의 병을 만들죠.
한번 볼까요? 사람들이 어떻게 먹는 것을 또는 먼 것을 가깝게 해서 받아들인다는 걸 알게 됐을까요? 다쳐보고 아는 거죠. 해보고 아니니까 아는 거죠. 그런데 여전히 안 해요. 그리고 그냥 먼 것을 그냥 가까운 데로 오는데 얼마나 더 가깝게 오느냐가 우리 문명사잖아요.
우리가 만들어 온 문명과 써온 문명이 크게 보면, 내게서 멀리 있는 것을 내게 가까이 끌어오는 그 역사 그리고 그 정밀함의 발전사거든요. 그래서 예전에는 이렇게 먹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먹고, 오늘날의 시대는 좀 역으로 되돌아감도 있습니다만. 뭔가 물건을 만들어 쓰더라도 내 멀리 저 멀리 있는 물푸레나무를 내가 쓸 수 있는 도구로, 가령 도끼 자루로 다듬고 점점 가까이 갖고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멀리 있는 것을 내게 가까이 갖고 오는 것이 문명이에요.
문명의 특징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로 갖고 오는 능력이고, 가까이로 갖고 오는 것을 더 정밀하게 좀 더 세밀하게 좀 더 가까이 끌고 오는 정도죠.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지나친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문명의 원 뜻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어두웠던 것을 끌고 오는 거예요.
과거가 나를 끌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고집
그런데 이걸 안 끌고 와요. 안 끌고 오는 건 뭐해서 안 끌고 오느냐면, 고집이죠. 새것을 안 만나겠다는 거죠. 새것을 안 만나고 그냥 그대로 쓰겠다는 거예요. 그냥 푸성귀 뜯어다 그냥 먹으면 푸성귀 뜯어다 먹고, 그냥 그걸 데치고 그리고 스며들게 하고, 뭔가 양념을 얹어서 더 가까이 오고, 어떤 양념을 쓰니까 더 가까이 오고, 심지어 볶으니까 더 가까이 오고 하는 그런 기법들! 그걸 안 쓰는 거죠. 멋대로 나 이렇게 먹고 살다 가게 냅둬! 이건 뭐죠?
빙의된 거예요. 빙의라는 건 귀신에 빙의 된 게 빙의 된 것은 아니에요. 무언가 이미 규정을 내릴 수 있는 것, 뭔가 정체성이 이미 규정된 것, 그 과거가 나를 빙의 되게 해요. 그러니까 과거에 빙의 된 거예요. 죽은 자에게 빙의 됐다는 것도 죽은 자는 현재가 없잖아요. 그의 과거의 모습이 응어리진 게 그러면 죽은 자라고 해요. 그러면 누가 옛날처럼 죽은 귀신이 있다고 해서 빙의 댔다고 쳐요. 그거나 옛날에 지나간 과거에 의해서 자기가 새로운 것을 안 받아들이고 빙의 된 거나 뭐가 달라요?
빙의 됐다는 건 내가 없다는 것과 똑같아요. 과거가 나를 끌고 가는 거죠. 새로워진다는 것, 새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과거를 버린다는 게 아니라 과거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거죠. 과거의 과거로 하여금 나 혹은 나의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거죠. 어린 아이들은 꿈꾸면서 미래에 의해서 지배되기도 해요. 그런데 미래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다는 거죠.
새로운 것을 느끼는 이 순간이 살아 있는 영원한 순간
일일신 우일신의 상태가 스스로 되어 있지 않으면 ‘까르페 디엠’은 불가능한 거예요. 오늘을 즐기라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거죠. 오늘을 즐긴다는 것은, 결국 내가 오늘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생각과 늘 소통한다는 것이고, 내 가까운 데 있는 것과 내가 지금 다가온 것과 소통한다는 거죠. 그렇게 소통도 안 되는 사람이 어느 날 나와서 외쳐요.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사회 동포를 위해서!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서! 다 거짓이에요. 그는 진실로 말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거짓이에요.
왜냐하면 그의 몸에 안 배어 있어요. 어떤 평화주의자의 얘기를 듣고 그것이 그 어느 순간에 멈추어서 영원히 그 상태에 있는 것뿐이지, 자기 몸에서는 평화도 지금 바뀌고 있는 이 현재 속에서 되고 나야 되는 거고, 전쟁도 그 이루어지고 있는 범위 내에서 막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과거에 매인 거예요.
과거에 매여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각이 없어요. 손을 잡고 인사를 했는데도 지나가 보면 아무런, 자기가 천만과 인사를 하고 서로 악수를 했으면 천만의 이름은 몰라도 그 천만의 느낌이 안에 다 쌓여 있는 사람이 일일신 우일신 한 사람이에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노력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좀 남아 있어요.
그게 전혀 없이 어느 날 나서서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서! 누구도 누구를 빼앗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그런 얘기를 한다면 어떻게 믿을까요? 그의 말을 믿을까요? 그의 몸을 믿어야 될까요? 그의 몸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의 말도 따라서 알 수가 없죠.
그럴 때 뭘 보고 믿죠? 하는 수 없이 그 집단을 보고 믿죠. 그런데 그 집단은 어떤 사람이 이루어져 있는지 아나요? 알 수가 없잖아요. 어쨌든 똘똘 뭉쳐 있는 집단이면 믿을 수가 없는 거죠. 왕성하게 새것을 받아들이는 집단은 결코 똘똘 뭉치지 않아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을까
새것은 너무나도 한순간 한순간 공기 세포 하나처럼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과 반응하는 존재들은 똘똘 뭉쳐 있을 수가 없어요.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을 보고 똘똘 뭉쳐 있으면 일단 믿으면 안 돼요. 그냥 입으로 말하는 구호일 뿐이에요.
제 생각과 다른 분도 계실 수 있지만, 요 근래 검찰들이 너무 똘똘 뭉치지 않아요? 제가 그랬죠. 똘똘 뭉칠 때는 ‘찐다’고 얘기 했었죠. ‘찌다’는 ‘가두어져 있다’라고 했던 거 기억나시죠? 찌다는 가두어져 있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전체 영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랬는데요. 그래서 적체가 돼 있으면 똘똘 뭉친다! 죽어가는 세포는 힘이 부족하면 뭉친다! 자기들끼리 단결한다! 단결하자고 외치거나 그런다! 단 너무 단결되고 있으면 그 집단은 새로워지지 않고 있는 거 쪄지고 있는 집단이다!
어쨌든 가두어지고 있는 집단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대한민국에는 솔직히 말해서 믿을 집단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나와 하는 말을 믿자고요? 그 사람이 하는 정책을 믿자고요?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어요. 그래도 뭐 갈 건 가고 있는 거죠.
갈 거 가고 있지만 새것이 만나지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해요. 아까 말했죠. 말씀드리겠습니다. 낡은 내가 조금씩 해소가 돼야 돼요. 내 안에 적체가 이루어지고 있으면 새로워질 수가 없어 내 안에 뭉쳐 있는 것이 있다면 새로워질 수가 없어요. 쪄져 있는 게 있다면, 가두어져 있는 게 있다면 새로워질 수가 없어요.
내 안에 쪄진 적체가 바로 고집
그 가두어진 것은 덩어리지고 뭉쳐 있죠. 이 덩어리들과 뭉쳐져 있는 것들이 해소되지 않으면 일일신우일신의 상태로 나갈 수가 없어요. 바르게 걷고 선근후원으로 바르게 먹어도 되지 않아요. 그게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걸 뭐라고 그러느냐 그걸 고집이라고 그래요.
쪄져 있는 상태에서 많이 남아 있는 것, 가두어져 있고 적체되어 있는 것이 내 몸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몸에 남아 있으면 마음에도 남아 있어요. 안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걸 고집(固執)이라고 불러요. 고집이라는 건 우리의 심리적인 영역만이 아니에요. 뭉칠 고(固), 잡을 집(執)이잖아요. 몸에서 고집이 있으니까, 딱딱 뭉쳐서 집착되어 있는 것이 있으니까 생각에도 반영되는 거예요.
내 몸이 그게 받침 안 되면 작심 3분이 되듯이, 내 몸에 집착이 있으면 그 집착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작심 3분 이외의 모든 시간을 그게 움직이는 거예요. 왜? 흩어져서 자유롭게 새것들과 만나고 있는, 선근후원해서 들어오는 존재들을 만나고 있는 이것들은 각각의 하나의 알갱이들이에요. 필요하면 협력하죠. 그렇지만 늘 협력하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움직이다가 길에서 협력도 하고 분업도 하고 하는 거죠.
근데 다 죽어가느라 뭉친 세포들은 수백 개, 수천 개, 수만 개 수억 개가 뭉칠 수도 있죠. 얘들은 뭉쳤기 때문에 다 죽어가고 있어도 힘이 좋아요. 암 세포는 정상 세포보다 힘이 없어요. 근데 암이 왜 정상인들의 건강을 무너뜨리느냐? 암세포는 뭉쳐 있잖아요. 암은 세포이기 전에 그런 질의 세포로 만들어진 덩어리이잖아요.
덩어리가 아닐 때는 암이 따라서 아무 문제가 안 돼요. 암이 조금 적체돼서 과도기적 적체를 겪고 있는 정도의 그 힘이 없어진 것들이라면, 새것들이 들어오면 다 쫓겨나게 돼요. 부분적으로 찌고 있는 것이 조금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크게 보면 뭉치지 않았기 때문에 다 쫓겨나요. 얘들이 뭉치면 나를 움직이는 거예요.
그 뭉쳐진 것이 나를 움직이는 현상이 뭐죠? 병적 덩어리들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거죠. 그게 몸에서 나를 움직이고 있는 그 몸 상태 그것을 고집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심리적으로 고집은 바로 그 상태에서 오는 거죠. 내가 고집스럽다! 얘기를 듣는다는 건 내 안에 쪄가지고 덩어리 지어져 가고 있는 세포들이 많다! 이런 의미에요.
고집스러운 사람들! 집착하고 붙잡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아픈 것을 해결하고 나서도 그 집착했고 고집했던 영역으로 되돌아가려고 해요. 그래서 원래 나의 몸으로 돌아간다가 아니라 원래 나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를 하게 돼요. 결국은 끝이죠. 그런 분들은 다 돌아가세요. 그분들에게는 삶이 없어요. 불가능해요.
그분들은 암 1기라도 지금 뭐 조그마한 용종에서 잘라냈더라도 더 큰 거 금방 생겨요. 작은 용종을 잘라냈더니 더 큰 게 생겨요. 조그마한 게 생기더니 전신에 번져 있어요. 전신에 왜 번지나요? 여기 있으면 잘라내는 걸 걔들도 아는데요. 이미 겪었는데요. 딴 데로 가 숨어야죠. 거기까지 찾아올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또 다른 데로 가서 숨죠.
근본적으로 내 몸이 찌고 있는 상태(살찌다가 아니고요), 어 몸이 찌고 있는 거죠. 적체되어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살 찌는 거하고 무슨 살 붙는 거하고 아무 상관없는 몸 속에서 에너지를 잃은 것이 쌓여 있다! 내가 고집스럽다는 평을 듣는 이유입니다. 그게 그리고 고통을 만들어요.
그래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그러잖아요. 뭉쳐지고 어딘가에 집착하고 그러면 소멸되죠. 그게 길이에요. 그러면 그건 사라지는 거예요. 그 물 건널 도(渡) 자는 사라지는 거예요.
뭉치지 않는 삶을 살자는 것
그러니까 안 뭉치려고 해야 된다는 거죠. 안 뭉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몸 이야기예요. 결국은 몸이 나를 유물론자로 만들어요. 내 몸을 떠나서 어디선가 누군가의 영향만으로 유물론자가 잠시 됐다면, 그 사람은 7, 8년 안 돼서 돌아와요. 유물론도 유심론도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살고 있는 회색의 물질이라는 거예요. 유물이니 유심이니 하는 게 기본적으로 흑백을 가리잖아요. 흑백 속에는 생명이 없어요.
오직 생명은 푸른 소나무에 있는 게 아니고, 진정한 생명은 흑색도 백색도 다 있는 회색 속에, 기회주의 속에, 계량주의 속에만 있어요.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그 속에는 고집이 있을 뿐이에요.
그냥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고집을 하는 건 다르죠. 오늘 말하는 것이 내일 똑같은 사람, 그 사람은 변심한 게 아니라 때로는 적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집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어디서 오느냐? 그런 고집이 어디서 오느냐? 마음의 고집은 몸의 고집에서 오는데, 그러면 몸의 고집은 어디서 오느냐? 멀리 있는 것을 나에게 당겨쓰지 않기 때문이에요.
가까이에 있는 새것을 만나야 당겨쓰는 걸 습득할 거 아니에요. 나에게 당겨쓰지 않기 때문에 어느 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갈등이 생겨요. 그러면 만나야 돼요. 근데 만났잖아요. 그럼 이 사람을 나에게 가까운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에, 내가 저 사람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저 사람은 그대로 있는 것 같고 내가 다가간 것 같지만, 그게 저 사람을 나에게 가까이 만든 거예요. 꼭 일방적으로 그 사물을 변화시키는 건 아니에요. 어떤 관계에서는 내가 변화시킬 수도 있어요. 어떤 관계에서는 내가 다가가지 않고 저를 당겨와야 되는 것도 있죠. 음식 먹을 땐 그래야죠. 내가 갑자기 ‘어, 사자는 생고기를 먹더라! 오늘은 내가 사자가 되어 버려!’ 이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사람 관계라든가 생각에서는 그게 가능해요. 내가 저 사람에게 다가가면 저 사람이 나에게 가까운 존재가 된 거죠.
어리석음
관계성에서는 서로 다를 수 있는데요. 그렇게 나에게 가까운 것으로 변화를 안 시키는 것 또는 못 시키는 것 그걸 뭐라고 그러느냐?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그래요. 어리석음이라는 건 다른 게 아니에요. 나에게 먼 것을 나에게 가깝게 만드는 방법이 없거나, 방법을 무시하거나, 방법대로 안 하면서 그냥 나를 해하고 있는 것, 그게 무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걸 무명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이라는 것, 어둡다는 것은 그런 의미예요.
멀리 있는 것을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해야 내가 존재하죠.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루도 멀다 하지 않고, 1초를 멀다 않고, 찰나와 순간을 멀다 않고, 계속 멀리 있는 것을 나에게 가까이 당기는 작업이에요. 그게 내가 생존하는 이유예요. 생존이 가능한 방법이에요.
그걸 안 하는 순간 생존이 안 돼요. 바로 무너지니까요. 그러니까 생존을 위한 최소의 방법이 무명을 벗어나는 거예요. 정말 그래서 무명을 벗어나서 새로워지잖아요. 그러면 거기에는 무명도 없고 무명이 아닌 것도 없고 무명이 다 아는 것도 없는 데가 와요.
그 그렇게 앉았던 9년과 그냥 작심 3분을 반복을 하면서 9년 동안 앉아 있는 것, 그 이후 즉 달마 이후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작심 3분을 반복하면서 9년을 앉아 있었을까요? 달마를 흉내내서 9년 앉아 있기를 거듭한 사람들은 달마 이래로 적어도 수만 명은 될 겁니다. 근데 그들 중에서 다 폄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마는 불과 몇을 빼고 나면 전부 작심 3분을, 조금 나아져서 작심 5분 6분을, 아니요 어떤 경우는 작심 3분도 안 가요. 숨 두 번 쉬고 내뱉는 사이에 무너져요.
숨을 억지로 스스로 컨트롤 하지 않으면 바로 무너져요. 숨을 억지로 집어넣고 빼기를 한없이 반복하잖아요. 그걸 얼마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쉬지 않고 몇 분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을까요? 그게 길어야 15분이에요.
해봐서 알아요. 15분 동안 유지 못해요. 15분 이상을 유지하면 돌아요. 주화입마고 뭐고 간에 그냥 일단 돌아요. 바로 도는 느낌이 와요.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나, 도는구나!’ 하는 느낌이 와요. 15분 이상을 붙잡고 못 있어요. 그러면 15분 이상 붙잡고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되는 거죠. 그 상태가 되신 분이니까 들어가 9년 앉아 있었던 거예요.
나는 몸을 완성했노라! 선근후원이 내 안에서는 되었고, 이미 몸으로서는 일신우일신하는 존재가 되었노라! 나는 일신 우일신한 존재가 되었으니, 한 번도 끊기지 않는, 끊임없는 반복이 아니라 쭉 중단 없는 파장이 아니라 빛과 같은 형태로 9년을 보내리라! 그렇게 작정한 거죠.
그 9년을 흉내내는 작심 3분의 반복으로 버틴다면 힘들어서 또 못 해요. 그래서 힘들어도 못하고 억지로 버티다가 그 시간만 버티기 하는 거죠. 그러다가 나와가지고 지대방 같은 데서 차나 마시고 노닥거리기나 하다가 또 시간 되면 점잖게 들어가는 거죠. 요즘 그 하한가와 동안거에 왜 들어가는지 아시나요? 나올 때 해제비를 주거든요.
정말로 내가 제대로 일일신우일신하는 존재가 돼 보겠다! 더 이상 끊김이 없는 존재가 되겠다! 왜 여래(如來)라 그러겠습니까? 한자로 번역할 때 ‘깨친 이’를 왜 여래라고 그러겠습니까? 저절로 오는 것처럼, 다가오는 것대로예요. 오고 가는 것이 그냥 그대로인 거예요. 끊김이 없는 거죠. 근데 끊김이 있더라도 그 끊김이 좀 길면 어때요?
어쨌든 전체적으로 아까 말한 대로 뭉쳐지면 몸의 고집이 되고, 고집은 몸을 망가뜨리는 병도 되지만, 사람의 삶에서도 고집을 만들어요. 그래서 늙은이에게는 없어야 되는 항목 중에 첫 번째 항목이 고집이에요. 늙은이가 고집을 갖고 있다! 이미 그는 무너진 거예요. 더 이상 늙은이가 아니라 나는 삭다리라는 것을 선언하는 거예요. 늙은이에게 절대 고집이 있어서는 안 돼요.
뭉침이 막힘이라는 장애로
그 다음에 가까이 오는 것을 알았어요. 가까이 오는 걸 아는데 가까이 온다면 그게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게 있어요. 내게 필요한 만큼이라는 게 있는 거죠. 이 세상 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니죠. 오는 것만큼만 낡은 것을 먼 것을 가까이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는 것만큼만!
이 세상이 망할까 봐 라면 30박스를 사다 놨는데 그거 30박스 다 썩어 나가죠. 아니면 평상시에 먹겠죠. 세상이 잘 안 망해 갖고 그렇게 보관할 필요 없어요. 망할 때도 살아가는 길이 있고 안 망해도 그렇게 쌓아 놔도 그거 못 먹어보고 죽어요.
그런데 내게 다가오지 않을 정도의 양을 계속 법제를 하는 거예요. 아니면 법제된 것을 자꾸 내 곁에 쌓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역시 하나의 뭉침이에요. 그런 뭉침이 뭐가 되느냐? 그런 뭉침이 결국은 그 어딘가에서 트래픽 잼을 만들어요. 정체를 만들어요.
사람의 삶은 최소한으로 살아가야 돼요. 경제학도 그래야 되는데 경제도 그런 걸 주장하는 분들이 있죠. 어딘가 막 가다 보면 여기는 둘의 길, 여기는 그냥 컴퓨터로 게 16비트 갔다가 8비트 갔다가 32비트 갔다가 64비트 갔다가 2비트 갔다가 4비트 막 해요. 이 컴퓨터는 절대 안 돌아가요.
예전에 그 386 SX라는 거, 386 DX라는 거, 이거 모르죠? 젊으신 분들은 586 나온 다음에 태어나지 않았어요? 486도 못 겪었을 것 같아요. 옛날에 386 SX는 뭐냐면, 32비트의 정보를 16비트의 통로로 보내는 거죠. 버벅거릴 수밖에 없죠. 32비트를 32비트로 보내면 이게 이제 DX였죠. 사람 몸이 컴퓨터보다 더 복잡하다고는 해도 컴퓨터가 객관적으로 주어진 장치인데 두 배의 정보를 그 2분의 1의 통로로 보내면 벌써 버벅거리는데요.
사람 몸에서 이걸 굳이 비유하자면, 32비트로 왔다, 16비트 갔다, 8비트 갔다, 2비트 갔다, 64비트 갔다, 그렇게 막 섞여요. 그러면 반드시 어디선가가 터지죠.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사람이 어떻게 하냐면 그럴 때는 가장 잘하는 게 2비트라는 걸 알아냈어요. 내 몸에서 예를 들어서 4비트라는 걸 알아냈어요. 나머지를 4비트로 조정하는 거예요. 나머지 4비트로 조정하지 않고 내가 빛나는 어느 부분이 있어요? 버벅거리고 탈나고 하더라도 32비트 64비트에 매달려요. 심지어 128비트 1 256비트에 집착해요. 어느 통로가 2비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탈나죠.
그걸 뭐라고 그러느냐? 그걸 이른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뭉친다고 하죠. 뭉침인데, 이건 장애죠. 일종의 막힘이죠. 막힘이 생겨요. 막힘이 생기면 뭐가 될까요? 막힘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요? 막힘이 생기는 건 몸에 조정을 그렇게 안 해서 그렇죠. 몸도 그래서 최소 이론, 최소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정리하고, 최소가 4가 되면 4로 키우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안 가고 어느 한쪽에 욕심이 나니까 256비트 그러다가 막 1280비트 욕심을 내는 거죠. 기본적으로 2비트를 지나가야 되는 위험한 곡선이 있는데요. 그 어딘가에서 그것들이 가서 2비트 통로에서 딱 돌덩이처럼 막혀버리죠. 그렇게 몸 자체에서 막히면 뭐가 오느냐? 현실적으로는 신경이 뭉친 담이 와요. 나이 들어 담이 왔다는 건 막혔다는 얘기죠. 어디선가 막혔다는 것은 욕심이 많았다는 거죠.
자기 자신이 전체적인 사회생활에서 욕심없이 살았는데도 그게 와요. 왜냐면 몸의 받침이 안 되면 그래요. 그래서 나이 들었고 몸은 받쳐주지 않는데 욕심이 많잖아요. 그건 사망이에요.
이건 내가 삭다리일 뿐만 아니라 그냥 한꺼번에 삭고 있고 삭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태에 근접했다는 거예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고집이 있어서도 안 되고요. 늙어간다는 것은 젊고 나이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월을 새것을 축적시켜가는 여행이잖아요. 그 여행에서 최대를 중심으로 욕심 부리는 사람은 욕심 때문에 무너져요.
그래서 그런 것을 자꾸 끌고 와 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더 많이 법제해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이미 법제된 걸 내가 더 많이 가져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최소 이론에 맞췄을 때만 문제가 해결하는 거예요. 너무 많이 갖고 억지로 집어넣잖아요. 결국은 그게 고집, 적체, 찜으로 가겠죠. 서로 연결되죠.
그렇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요. 사람의 몸은 대칭입니다. 사람의 몸이 대칭인데 사람의 몸이 대칭을 만들고 동물들이 대칭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 애를 쓴 결과 원시 동물에서부터, 삼엽충에서부터 대칭을 만들어 옵니다.
대칭을 만들어 온다고 그러니까 이런 얘기가 생각나네요. 예전에 어느 분이 “사람에게 팔다리가 있고 머리도 있는데 왜 더 큰 존재인 달 태양에는 그런 게 없을까요?” 그러셨어요.
엄청난 질문 같지만 엄청나게 황당한 질문이에요. 사람이 큰 것을 기준으로 놓고 작은 것을 비유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작은 것을 기준으로 놓고 큰 것을 비유하면 안 돼요. 오히려 이렇게 물어봤어야 돼요. “달이나 해나 지구에는 팔다리 같은 게 머리 같은 게 없는데, 왜 우리는 팔다리 머리가 있나요?”라고 물어야 맞는 거죠.
우리를 기준으로 놓고 있다는 거죠. 아무튼 우리를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대칭이에요. 물론 완전 대칭은 아니에요. 좌우만 대칭이에요. 앞뒤 대칭은 아니에요. 몸 안은 심지어 대칭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 대칭이 몸의 대칭을 얻기 위해서 비대칭이 얼마나 애썼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야 돼요.
저도 쉽게 말하죠. “사람은 내부적 비대칭과 외부적 대칭에 완벽한 대칭은 없지만 대칭의 공존이다!”
그런데 살면서 그냥 시간만 흘려보내고, 삭아가기만 해도 대칭은 조금씩 무너진다는 거죠. 물론 어쩌다가 그 대칭이 아닌 상태로 태어나신 분도 있고 사고로 대칭을 잃어버린 분도 있지만, 그러나 이 몸이 비대칭의 내부에 있는 것이 지향했던 건 대칭이었어요.
미처 배 안에 어머니 배 안에서 그 대칭을 완성시키지 못했고 나와서 회복하지 못했고, 원래 대칭에 가까웠으나 사고가 나서 잃어버렸을 수도 있어요. 기본적으로는 비대칭은 대칭을 만들려고 애써왔고, 동물계에서 그 비대칭에서 대칭을 만들려고 애쓴 역사가 수억 년이에요.
그 수억 년 사이에 대칭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요? 죽죠. 대칭이 완벽하게 무너져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대칭이 무너지면, 그건 뭐 생존할 수가 없죠. 원래부터 그런 것이 부족했던 분들은 그걸 극복하면서 살아가요. 왜나면 안에서 비대층은 여전히 대칭을 극복하고자 애쓰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애씀과 상관없이 이미 한도를 지나서 대칭이 무너져요. 있던 대칭이 무너져요. 비대칭이 부족한 분에게도 더 무너질 수도 있고, 원래 대칭에 가까웠던 분이 더 무너질 수도 있죠. 죽어요. 그런데 끊임없이 비대칭에 의해서 대칭이 무너져 가면서 조정되고 있어요. 어느 순간 매 순간 그런데 그게 적절한 선이기 때문에 유지하는 거예요.
왼쪽이 오른쪽보다 더 커버리려고 하거나, 오른쪽이 왼쪽을 보면서 자기를 컨트롤 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맞춰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왼쪽이 줄어드니까 오른쪽을 더 키워버리면 어떻게 되죠? 바로 무너져요. 우리는 대칭이 끊임없이 조정되고 있다고 그랬잖아요. 조정 사이에 영향을 받아요. 영향을 받아서 이성을 통해서 이것을 굳혀요. 이성이라는 게 무섭게 작용하는 거죠.
그게 뭐냐? 비교심이에요. 비교라는 것은 내 몸의 대칭에서부터 왔던 거예요. 대칭이 조정되는 과정 속에서 비교하죠. 이 비교가 내 안에 있는 비대칭의 존재에 의해서 이성적으로 영향을 줘버리고 내 가치 판단에 영향을 미치면 이게 심리적으로 비교가 되죠. 비교하는 심보가 강해지면 사람은 결국은 무너져요.
노인에게는 비교심이 없어야 돼요. 노인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새로워져 가는 존재한테는 이 비교심은 독약 중에 독약이에요.
무명(無明)이라고 그랬죠. 무명은 탐진치(貪瞋癡-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불교에서 얘기한다면 진이에요. 비교 심리는 치(癡)예요. 이거는 무지가 아니고 진짜 어리석음이에요.
대칭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비교 심리를 내는 순간 세상에 평화가 어디 있어요?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세계 평화를 외치는데 그게 진짜로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안 돼요. 내 오른손과 왼손이 최대한 대칭이, 내가 타고난 정도를 기준으로 대칭이, 내가 사고가 안 났다면 또 사고가 났다면 각각에 맞게 만들어진 그 대칭이, 최대한 유지되고 있어야 나는 늙어갈 수 있어요. 삭아 가는 게 아니라 늙어갈 수가 있어요. 급격하게 삭아 가는 게 아니라 물 흐르듯이 삭으면서 새것들과 만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면 다 됐다는 거죠. 그거는 늙다리도 삭다리도 아니라 그건 이미 죽은 자가 몸 갖고 움직이는 좀비예요. 좀비의 특성이 그런 거예요. 좀비병이 진짜 한번 나오면 안 되겠죠. 광견병이 인간에게 옮기면 좀비병이지 뭐 별거 있겠어요. 사람이 광견병 걸리면 무조건 물려고 안 할 것 같습니까? 진짜 우리가 영화에 나오는 좀비는 없죠. 뭘 먹고 소화를 해야 살 거 아닙니까? 진짜 좀비나 광견병 걸린 개는 먹어요.
그러니까 영화에서 점점 그런 좀비 개념이 생기는 거죠. 처음에는 28일 후 하더니 28주 후 하더니 이제 28년 후가 나왔대요. 그들도 살아가는 생명이라는 식으로 나오는 거죠. 아무튼 세련되게 진짜 sf가 돼가고 있는 거죠. 28일 후라는 영화에서는 28일 지나니까 다 죽었잖아요. 좀비가 28주 후에는 28주 후에 거의 다 해결되잖아요 28년은 그들은 그들대로 살아요. 그들의 생태대로 살아요. 그런 식으로 나와요.(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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