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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국사 복구(復丘)와 불교계 동향
윤 기 엽 / 연세대학교 강사
목 차
Ⅰ. 서론
Ⅱ. 고성(固城) 이씨(李氏) 가계와 복구
Ⅲ. 각진국사 복구와 고려 불교계
Ⅳ. 결론
국문요약
본 연구는 수선사의 제13세 각진국사 복구(復丘)의 생애와 그가 활동했던 고려 원간섭기(元干涉期)의 불교계 동향을 고찰한 것으로 복구의 가계인 고성(固城) 이씨의 내력과 그가 주석한 백암사(白巖寺, 현 백양사)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원간섭기에 명문사족(名門士族)의 가문에서 태어나 고려후기의 대표적 사원인 수선사(修禪社)를 비롯해 백암사, 불갑사(佛甲寺) 등에 주석하며 활동한 복구의 행적은 당시 불교계의 다양한 변화 양상과, 정치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서 연구의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존비(李尊庇) 대에 명문가로 부상한 고성 이씨 가문에서 태어난 복구는 친인척으로 백이정, 박충좌와 같은 성리학자도 있었지만, 불교신앙이 돈독했던 어머니와 외가(外家)인 이행검 가계의 영향을 받아 불가에 귀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선사의 제5세 천영(天英)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한 복구는 1320년경 수선사 제13세 주지로 부임하여 1340년경 백암사로 옮겨갈 때까지 약 20년간 주석하였다. 수선사는 당시 원간섭기 불교계의 전반적인 동향에 비추어볼 때 무인정권기와는 달리 사세(寺勢)는 쇠락한 상태에 있었고, 지눌보다는 몽산(蒙山)의 선사상에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예견된다. 몽산선은 원간섭기에 들어와 수선사뿐만 아니라 가지산문에서도 적극 수용되면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복구는 만년인 1340년경 유년시절과 20대에 머물었던 백암사(白巖寺)에 주지하였을 때 친조카 이암(李嵒)과 함께 발원하여 중창(重創) 불사를 크게 열었다. 이것은 후대에 백암사가 이씨 가계의 원찰(願刹)로 변모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복구는 불갑사에 주석하던 때인 충정왕 2년(1350)과 공민왕 1년(1352)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공민왕 4년(1355) 백암사에서 입적하였고 시호를 각진국사(覺眞國師)라 하였다. 백암사는 복구와 이암 후대에도 이씨 가문에 의해 운영, 유지되며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기도 했는데, 이처럼 한 사원이 특정 가계의 원찰로 변모된 사실에서 당시 불교계 세속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주제어
복구, 고성 이씨, 원간섭기, 원찰, 수선사, 백암사, 불갑사
Ⅰ. 서론
수선사(修禪社)의 제13세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는 한국의 역사나 불교사(佛敎史)에서 매우 이질적인 시기였던 원간섭기(元干涉期, 1270-1356)에 고스란히 한 평생을 보낸 고승이었다. 이 때문에 복구의 한 생애(生涯)에 대한 연구는 원(元) 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고려 불교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端初)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특히 복구가 출생한 고성(固城) 이씨(李氏) 가계가 이존비(李尊庇, 1233-1287), 행촌 이암(李嵒, 1297-1364), 도촌 이교(李嶠, 1301-1361)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명문세족이었던 관계로 원간섭기와 고려 말 정치계의 동향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더욱이 복구가 활동하던 시기의 고려는 다양한 루트를 통한 원과의 교류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신유학인 성리학(性理學)을 수용, 연구하였고 또 선승(禪僧)들은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의 사상을 수용하여 보급시키는 등 사상계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관계로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복구에 대한 연구성과가 그다지 축적되지 않은 까닭은 원간섭기의 불교계에 대한 관심 부족과 비문(碑文)이나 사찰의 사적기(事蹟記) 정도에 불과한 사료상의 부족에서 오는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복구의 저술이나 문집 등이 특별히 전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본 연구 또한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복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었던 주요 사찰이나 고승, 이씨(李氏) 가계 내외의 인물들, 그리고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불교계의 동향 등을 통해서 이 연구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연구방법에 의한 결론이 상당 부분 개연성을 띠기 마련이지만, 한 인물의 사상이나 행적 등이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차선책으로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먼저 고성 이씨의 가계의 세대별 흐름을 살펴가면서 복구의 위치와 출가의 배경 등을 알아보고, 누대에 걸친 이씨 가문의 친불교적 성향과 주요 인물들을 알아보도록 한다. 복구가 수선사에 출가하고, 주지하던 시기에 수선사의 위상이나 사상적 경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 원간섭기의 불교계와 수선사의 전반적인 동향을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구의 생애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백암사(白巖寺)에서의 행적을 고찰하여 이씨 가계와 백암사의 관계 속에 비쳐진 불교계의 또 다른 면도 파악해 보고자 한다.
Ⅱ. 고성(固城) 이씨(李氏) 가계와 복구
1. 이씨 가계의 중앙 진출- 6세 이진(李瑨), 7세 이존비(李尊庇) 세대-
수선사 제13세 각진국사 복구의 생애는 이달충(李達衷, 1309-1385)이 지은 비문(碑文)을 통해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복구는 원종 11년(1270) 고성 이씨 가계에서 아버지 이존비(李尊庇, 1233-1287)와 어머니 이씨(李湊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을 정(精)이라고 했다. 복구가 태어난 그 해는 고려왕조가 강화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하여 원간섭기(元干涉期)로 접어든 해였다. 고려후기의 문신인 이존비를 아버지로 둔 복구의 가계가 지방에서 중앙정계에 진출을 시도한 것은 복구의 조부가 되는 이진(李瑨, 1216-1284) 때였다. 고성 이씨(혹은 鐵城 李氏)의 6세가 되는 이진은 최씨 무인정권기(1196-1258)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 진출한 인물로 보고 있다. 당시 최씨 정권은 과거를 통해 행정실무와 학문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발탁함으로써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신진관리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진도 이러한 부류에 속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진은 과거에 합격했을 뿐 벼슬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진이 일찍 사망하였거나, 또는 그의 가문이 문벌(門閥)이 아닌 지방 향리(鄕吏) 출신인 까닭에 과거에 급제한 후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인 동정직(同正職)만을 갖고 있은 채 임용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진은 과거에 급제하여 사족(士族)의 반열에 들게 되어 역시 사족인 백경선(白景瑄)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이씨 가계가 후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백경선은 고려 후기에 안향(安珦, 1243-1306)과 함께 원(元)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용한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의 조부가 되는 인물로 좌복야(左僕射), 예부낭중(禮部郎中) 등을 지낸 고관이었다. 또한 백경선의 아들이고 백이정의 아버지인 백문절(白文節, ?-1282)은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사의대부(思議大夫)를 거쳐 이부시랑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지냈다. 이진은 남포군(藍浦郡) 사람인 백씨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어 후손들이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학자적 관료로 활동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복구의 아버지가 되고, 고성 이씨의 7세인 이존비(李尊庇)는 일찍 아버지 이진을 여의고 개경에서 벼슬을 하던 외삼촌 백문절(白文節)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외사촌인 백이정과도 자연스럽게 교류하면서 학자적 소양을 쌓아갔다. 이존비는 익산(益山) 사람인 이주(李湊)의 큰 딸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고, 복구는 바로 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복구의 외가(外家)가 되는 이주 가문은 익산의 향리 출신으로 이주의 아버지 대에 중앙에 진출하였고 이주, 이행검(李行儉, 1225-1310) 부자가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했다. 그런데 이행검의 딸(이존비의 처조카)이 기자오(奇子敖)와 혼인하여 기식(奇軾), 기철(奇徹), 기원, 기주, 기륜을 낳았고, 막내 딸은 원나라 순제(順帝, 재위 1333~1368년)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였다. 이처럼 이존비의 처가인 이행검 가문은 원간섭기의 대표적 부원세력(附元勢力)인 기씨 가문과 가까운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존비 가문과 기철과 기황후를 대표로 하는 기씨 일족과의 혈연관계도 결코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복구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이행검은 손수 사경(寫經)을 할 정도로 불심이 매우 돈독했던 것으로 전한다. 복구와 이행검 사이의 교류에 관해서 전하는 내용은 없지만 복구의 출가에는 외가 쪽 이행검 가문의 돈독한 불심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존비는 원종 1년(1260; 28세)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아갔는데 충렬왕 1년에 좌승지에 오르고, 충렬왕 7년(1281)에는 일본을 토벌하는데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동왕 8년(1282)에 지공거(知貢擧)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진 대에 중앙에 진출한 고성 이씨 가계는 이존비 대에 이르러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명문가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것은 이존비 자녀의 혼인 관계를 통해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2. 이씨 가계의 융성과 복구의 출가- 8세 복구(復丘), 9세 이암(李嵒) 세대-
1) 이존비의 자녀와 복구
이존비의 장남인 이우(李瑀)는 아버지가 고관이었던 관계로 일찍 원(元)나라의 인질인 독노화(禿魯花)가 되어 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존비가 사망한 후 고국에 돌아와 재능을 인정받아 회양과 김해 부사(府使), 전주와 진주 목사(牧使)를 역임했고 말년에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이우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관계로 그는 고관직에 오르지 못해 특별한 족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장남 이암(李嵒, 1297-1364)이 충혜왕 대 이후 국왕의 최측근에서 정계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존비의 차남은 이정(李精)으로 10살 때(1279년) 수선사의 5세인 원오국사 천영(天英, 1215-1286)에게서 삭발, 수계(受戒)한 복구(復丘)였다. 당시 명문가의 사대부 문인(文人) 집안에서 태어난 복구가 특별히 어린 나이에 출가한 이유에 대해 알려지는 바는 없지만, 어머니 이씨 부인(이주의 딸)이 항상 대승불경(大乘佛經)을 외우면서 생활했다는 그녀의 돈독한 불교신앙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앞서 이행검(복구의 외삼촌)의 신앙생활에서도 보았듯이 복구의 출가는 외가 쪽인 이행검 가문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존비의 셋째 아들은 이숙(李璹)으로 이존비가 사망할 때에도 결혼하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이존비의 3녀 중 장녀는 박장(朴莊)에게 시집 가 박충좌(朴忠佐, 1287-1349)를 낳았다. 이존비에게 외손이 되는 박충좌는 백이정(이존비의 외사촌)에게서 성리학을 공부한 성리학자였다. 박충좌가 원에서 수용된 성리학을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한 성리학자였다는 평가를 감안할 때, 이존비가 박장을 큰 사위로 맞으면서 이씨 가문은 백이정 가문에 이어 또 다시 성리학자 박충좌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존비의 둘째 딸은 유인명(柳仁明)에게 시집갔는데, 유인명은 문화(文化) 유씨 유경(柳璥)의 손자로 당대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유경은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감 대사성(大司成)에 이른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4대실록(신종,희종,강종,고종)의 편찬에 참여한 문인이었다. 유경은 이존비가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하였을 때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있어서 두 사람은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이라는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방 향리 출신의 가문이었던 이존비가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데에는 좌주인 유경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두 가문의 혼사도 유경과 이존비 사이의 좌주, 문생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본다. 이처럼 고성 이씨 가계는 6세 이진을 이어 7세 이존비가 과거에 합격하여 고위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자녀들이 명문가의 자제들과 혼인함으로써 그 가문도 명문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2) 복구의 출가 배경
앞에서 개관한 고성 이씨의 가계에서 출생한 복구가 10세 때(1279년, 충렬왕5) 수선사의 5세 원오국사 천영(天英, 주지시기: 1256-1286년)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했다. 복구의 친가(親家)는 고성 지방의 향리에서 과거를 통해 중앙의 정계에 진출한 가계였고, 외가(外家)는 익산 지방의 향리에서 역시 과거를 통해 중앙에 자리를 잡은 가계로 양가 모두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이었다. 복구가 출가 때 스승으로 삼았던 원오국사 천영은 수선사 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출가하여 3세 청진국사 몽여, 4세 진명국사 혼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선사의 별원(別院)으로 일컫던 강화 선원사(禪源寺)의 제2세 주지(1252-1256)를 거쳐 수선사 5세 주지(1256-1296)를 역임한 정통의 수선사계 고승이었다. 또한 천영이 선원사의 주지로 있을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충지(沖止, 1226-1293)는 감로사(甘露寺), 정혜사(定慧寺)의 주지를 거쳐 수선사의 6세 주지를 역임했다. 복구가 천영의 입적(1286년)으로 제2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던 자각국사 도영(道英, ?)은 수선사의 제8세로 알려진 고승이다. 이렇게 보면 천영을 스승으로 하여 삭발, 수계한 복구는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법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수선사계 승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만 복구가 수선사에 출가한 시기가 원간섭기(元干涉期, 1270-1356)였던 만큼 내적으로는 이전의 수선사 시절과는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대부 가문의 성향을 띤 가계에서 태어난 복구가 불문(佛門)에 출가하게 된 동기는 우선 친가보다는 외가 이행검 가문의 친불교적 성향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복구의 아버지 이존비가 성리학자 백이정(복구의 5촌 진외당숙)과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여건에서 성리학적 분위기에 보다 친숙한 학자적 관리였지만, 선사(禪師)에게 시문(詩文)을 전할 정도의 불교적 소양도 갖춘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을 듯하다. 또한 복구의 출가에는 무인난(武人亂)과 몽고 침입 이후 급속한 사회변화로 인해 유불(儒佛)이 대립 관계에 있기 보다는 밀착되고 혼합되는 경향을 띠면서 유학적 교양을 갖춘 지식인 중에도 출가(出家) 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도 일정 부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진각국사 혜심(慧諶)이나 사마시를 거쳐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몸담고 있다가 원오국사 천영(天英)의 문하에 들어온 원감국사 충지(沖止)는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3) 이암(李嵒)과 청수(淸叟)
복구의 수선사 출가를 계기로 이존비 가문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도 불교와 매우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며 한층 번창해 갔는데, 그것은 이존비의 손자인 이암 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존비의 장남 이우(李瑀)는 무인 박지량(朴之亮)의 딸과 결혼하여 장남 이암(李嵒), 차남 이교(李嶠), 삼남 이징(李澄)을 낳았다.
이우의 장남이고 복구에게 큰 조카가 되는 이암(1297-1364)은 초명이 군해(君侅), 호는 행촌(杏村)이라 하였다. 17세인 충선왕 5년(1313, 충선왕)에 과거에 급제했다. 충숙왕과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밀직대언, 정당문학, 첨의평리 등을 지냈고, 충목왕, 충정왕 대에도 정방제조, 좌정승 등을 역임하며 국왕의 측근에서 활동했다. 충정왕 2년(1350)에 이암의 숙부인 복구가 왕사(王師)에 책봉된 데에는 충정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이암의 정치 활동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암은 공민왕이 즉위하자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지기도 했지만, 정치의 혼란으로 공민왕 2년(1353, 57세) 벼슬을 사직하고 춘천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충정왕의 폐위와 공민왕의 즉위로 이암의 정치적 입지도 그만큼 좁아졌던 것이다. 당시 이암이 청평산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바로 문수사(文殊寺)에 은거했음을 의미한다. 이암은 충숙왕 14년(1327)에 이제현이 지은「문수사시장경비(文殊寺施藏經碑文)」의 글씨를 쓴 적이 있어 문수사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청평산 문수사는 고려 중기에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유행을 불러온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은거했던 사원으로 원간섭기에 황실부터 보시를 받고 공덕비를 세운 사실이 있었다. 물론 이암이 비문의 글씨를 쓰고, 또 그곳에 은거하는 등 불교와 가까이 지낸 것은 숙부 복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복구가 공민왕 1년(1352)에 재차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암은 공민왕 7년(1358, 62세)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종1품)으로 관직에 복귀하였는데, 그가 정계에 복귀했을 때는 공민왕의 반원(反元)운동으로 6촌 재종간인 기철이 제거된(1356년) 후였다. 이암은 성리학자 이곡, 이색, 백문보 등과 교류하기도 했지만, 성리학을 공부하거나 사대부가 주도한 개혁정치에 적극 참여한 흔적이 없는 까닭에 고려말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것은 이암의 부계(父系)로부터 이어져 온 친불교적 분위기와 그의 진외가(陳外家)가 되는 이행검 가문의 친불교적이며 친원적(親元的) 성향 등의 영향으로 그리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우의 차남인 이교(1301-1361)는 형부와 이부의 상서(尙書, 정3품)에 올랐고, 문신 이조년(李兆年)의 딸과 결혼했다. 이교의 장남 이림(李琳)은 그의 딸을 우왕(禑王)에게 시집보내며 이씨 가계는 고려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우의 삼남 이징(李澄)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종2품)를 지냈고, 후에 숙부인 복구에게 출가하여 운암 청수(雲巖淸叟)라 하였다. 정도전의「백암산정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1377년)에 의하면 청수는 복구의 친조카(親姪)가 되고, 숙부인 복구를 이어 정토사(淨土寺)를 주관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이존비(7世)의 아들 세대에 이어 손자 세대에도 출가 승을 배출함으로써 고성 이씨 가문의 불가와의 인연은 한층 깊어지게 되었다.
3. 이암의 후손-10세 이강(李岡), 11세 이원(李原) 세대 -
이암 대(9世)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명문가로 성장한 이씨 가문의 명성은 그 후대에도 지속되었다. 이암은 홍승서의 딸과 결혼하여 4남을 2녀를 두었는데 그 네 아들은, 장남 이인(李寅), 차남 이숭(李崇), 삼남 이음(李蔭), 사남 이강(李岡)이었다. 이씨 가계의 10세인 이인은 종부령을 지냈고, 이숭은 제2차 홍건적 침입 때 종군하여 판전객시사를 지냈다. 이음은 제2차 홍건적 침입 때 상장군으로 있다가 안주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넷째 이강(1333-1368)은 이곡의 문생(門生)으로 입사하여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측근에서 일했다. 밀직부사로 있다가 이른 나이인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씨 가계의 11세이고 이강의 아들인 이원(李原, 1368-1429)은 정몽주의 문생으로 예조 좌랑과 공조 정랑을 지냈고, 조선조에서도 크게 활동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봉해지고 태종 때 대사헌, 세종 때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특히 이원은 이씨 가문의 원찰인 백암사(현 백양사)에 대한 국가 관리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그 사원의 사적(私的) 지배를 관철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이암 후대에도 이씨 가계는 백암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대와 같이 친불교적 성향을 그대로 지속해 갔던 것이다.
Ⅲ. 각진국사 복구와 고려 불교계
1. 복구의 행적과 수선사(修禪社) 주지시기
고려 원종 11년(1270) 이존비(이인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복구(1270-1355)는 수선사의 제5세 원오국사 천영(天英)에게 정식 출가 전인 8세 때(1277년) 백암사(白巖寺; 淨土寺)의 중창주 중연(中延)의 문도인 일린(一麟)에게 공부하였다. 고성 이씨 가계의 백암사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일린에게 공부한 복구는 10세 때(1279년) 수선사의 천영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했다. 당시 천영은 단속사(斷俗寺)와 강화 선원사(禪源寺)를 거쳐 수선사의 주지로 있던(1256-1286) 때로 만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복구가 후에 천영의 유촉(遺囑)으로 제2의 스승 도영(道英)을 모시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복구가 천영에게 출가하던 때 수선사의 경제적 형편은 매우 열악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고려왕조가 개경에 환도한(1270) 후 원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충렬왕 즉위년(1274)에 있은 제1차 일본정벌을 위해 고려에서 막대한 양의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선사도 적지 않은 부담을 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사원의 재정은 심각한 타격을 입어 곤궁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천영의 제자인 원감국사 충지(沖止, 1226-1293)가 수선사를 대신해 원(元) 세조(世祖)에게 쓴 표문(表文)에 따르면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이 거의 없어 낮에 밥 먹고 새벽에 죽 먹는 것도 지탱하기 어렵다”고 하거나, “형세는 물을 잃은 붕어의 부르짖음과 같고, 정황은 하늘에 들리는 학의 울음처럼 절박하다”고 했다. 사원에서 수확하는 식량이 거의 없어서 생존 자체가 위협 받고 있는 절박한 사정을 토로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원전에서 수확되는 식량 대부분이 군량미로 징수되었기 때문이다. 충지의 표문을 통해 결국 수선사는 원 황제의 배려로 이전의 토지를 회복할 수 있었지만, 일본원정을 전후한 시기의 수선사의 사정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정혜결사운동에 입각하여 개창된 조계산 수선사(曹溪山 修禪社)는 지눌 이후로 2세 진각 혜심(眞覺慧諶), 3세 청진 몽여(淸眞夢如), 4세 진명 혼원(眞明混元) 등이 주지하면서 고려후기 선종의 중흥을 몰고 온 주역이었다. 하지만 무인정권이 붕괴된 후 5세 천영의 주지 후반기에 해당하는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수선사는 많은 굴절된 변화를 겪게 되어 이전과 같은 결사정신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복구가 천영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한 시기의 수선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원황실과의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며 사세(寺勢)를 유지하던 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복구가 스승 천영을 통해 지눌의 사상을 이어 받고 있었음은 천영이 입적할 때 남긴 문답 속에서나마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천영이 충렬왕 12년(1286; 복구 17세) 세수 72세로 입적함에 따라 복구는 선사 도영(道英)을 스승으로 모시시고 20세(1289)때까지 수학하게 되었다. 복구가 도영을 제2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시기의 수선사는 천영의 뒤를 이어 원감국사 충지가 6세로 주지하던 때(1286-1293)였다. 복구는 두 스승 밑에서 공부한지 10년 만에 배움을 이루고 21세 때(1290년) 승과 선선(禪選)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후 선(禪)의 진리 탐구를 위해 자신이 출가했던 백암사(정토사)로 돌아가 수행하였다. 복구의 백암사와의 인연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어 10여 년간 계속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후 복구는 월남사(月南寺)와 수선사에서 총 40여 년을 머물게 되는데, 수선사에 주지한 기간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 대략 파악할 수 있다.
① 庚寅年(1290) 가을, 禪選 上上科에 합격하였으니 나이가 21세였다. … 白巖寺에 가서 동지 몇 명과 함께 밤낮으로 참구하기를 또 10여 년이나 하였다. 月南·松廣大道場에 주석한 것이 전후 모두 40여 년이었다. 李達衷,「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② 처음으로 月南寺에 있으면서 法席을 주재했다. 얼마 후 뜻을 받들어 松廣寺로 옮겨가 20여 년을 머물었다. 그의 道가 크게 일어나 庚寅年(1350, 81세) 10월 15일 王師로서 부처님 말씀을 贊하게 되었다. 鄭道傳,
「白巖山淨土寺橋樓記」
위의 글을 종합해 보면 먼저 복구는 21세(1290년)에 과거에 합격한 후 동지들과 10여 년을 백암사에서(1290-1300년경) 보냈다. 그리고 월남사에서 20여 년(1300-1320년경), 송광사에서 20여 년(1320-1340년경), 즉 두 사원에서 총 40여년(1300-1340년경)을 주석했던 것이다. 따라서 복구가 송광사의 제13세로 주지한 기간은 1320-1340년경까지 대략 20여 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선사의 주지직을 마친 복구는 1340년경부터 1350년경까지 약 10년 동안 백암사에 주석하였고, 그가 왕사에 책봉된 충정왕 2년(1350)을 전후해 입적하던 공민왕 4년(1355)까지 영광 불갑사(佛岬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약 5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백암사와 이씨 가계의 관계는 장을 바꾸어서 논하도록 한다.
2. 복구 이전의 수선사와 불교계 동향
복구가 수선사의 원오국사 천영에게 출가하여 공부를 마치고(1289년경) 수선사의 제13세 주지로 부임하기(1320년) 전까지의 수선사의 정황과 불교계의 동향을 살펴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복구가 주지한 시기의 수선사 근황과 분위기 등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원오국사 천영을 이어 원감국사 충지가 수선사에 주지하던 시기(1286-1293)는 천영 대 후반기에 시작되고 있던 원간섭기(1270-1356)였던 까닭에 사원의 주변 환경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충지(1226-1292)는 예부시에 장원급제하고 관직 생활을 하다가 강화 선원사(禪源寺)의 주지로 있던 천영에게 출가하여(1254년), 이후 감로사(甘露寺), 계족산 정혜사(定慧寺)를 거쳐 천영의 입적으로 수선사 주지에 부임하였다. 충지는 목우자(牧牛子)를 정통으로 계승하며 원간섭기 이후 기울어져 가는 수선사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태도나 사상이 지눌과는 상당한 괴리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곧 원간섭기 이후 변화된 수선사의 한 단면이 될 것이다.
충지 이후의 수선사는 7세 자정국사(慈靜國師), 8세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 9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뒤를 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행장이나 비문은 전하지 않고 있으며 생몰년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실정이다. 이것은 곧 수선사의 쇠락이 충지 대 이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가속화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간섭기에 이러한 수선사 쇠락의 한 원인으로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의 활약에 의해 힘입어 가지산문(迦智山門)이 크게 부상하며 선종계를 주도해 간 사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일연은 고려정부가 몽고와 강화(講和)를 맺은 강화시기인 원종 2년(1261)에 왕명을 받고 제2의 수선사 혹은 수선사의 별원(別院)으로 불리던 강화 선원사(禪源寺)에 주지하였다(1261-1264). 또한 원간섭기에 일연은 고려 초부터 가지산문의 근거지가 된 운문사(雲門寺)에 주지하면서(1277-1281) 충렬왕으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가지산문의 선풍을 진작시켰고, 또 그곳에서 삼국유사의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도 했다. 특히 일연은 충렬왕 9년(1283) 국사(國師; 國尊)에 책봉되자 군위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주석하면서(1284-1289) 2회에 걸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충렬왕 때(재위 1274-1308) 운문사의 중흥과 구산문도회의 개최 등은 과거 무인정권기 수선사계 사원을 중심으로 융성했던 사굴산문(闍堀山門)을 압도하며 가지산문이 선종계를 주도해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원간섭기의 고려 불교계는 가지산문의 발전과 함께 개경 묘련사(妙蓮寺)를 중심으로 한 천태종(天台宗)의 급성장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될 것이다.
원간섭기에 접어들며 5세 천영, 6세 충지를 거치면서 수선사의 쇠락이 지속되어 오다가 그 사세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10세 혜감국사 만항(萬恒, 1249-1319) 때였다. 만항은 유학자의 집에서 태어나 5세 원오국사 천영(天英)에게 출가해 승과(僧科)에 합격한 후 낭월사, 운흥사, 선원사 등의 주지를 지냈다. 그는 경(經)을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해 그의 문도가 700명에 이르고 배움을 청한 사대부(士大夫)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만항이 5세 원오국사 천영을 스승으로 하고, 6세 원감국사 충지의 탑비(塔碑)를 세우는 등 수선사의 법맥을 정통으로 계승하기도 했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원나라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의 선승인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와의 교류를 통해 몽산사상을 수용, 보급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만항은 충렬왕 24년(1298)에 몽산이 보낸 덕이본(德異本)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상인으로부터 입수하여 그것을 충렬왕 26년(1300) 강화도 선원사에서 간행하였다. 선원사와 수선사 두 사원 간의 관계를 생각할 때 몽산선(蒙山禪)의 영향은 수선사에도 컸음에 분명하다. 사실 고려에서 육조단경은 지눌, 담묵이 중간(重刊)하고(1207년) 천영이 재차 중간한(1256년) 설숭본 계통의 법보기단경(法寶記壇經)이 유통되었다. 그러던 것이 만항에 의해 덕이본 육조단경이 유입되어 선원사에서 간행, 보급된 이후에는 이 판본만이 계속 간행, 유통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13세기 말 몽산선의 수용은 수선사만이 아니라 가지산문에서도 수용되어 일연의 사법 제자인 보감국사 혼구(混丘, 1250-1322)는 몽산을 직접 친견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몽산선은 13세기 말 수선사와 가지산문의 고승을 통해 수용되며 이후 크게 확산되어 선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0세 만항 대에 수선사의 사세가 회복되기 시작한 시기는 수선사 정통의 지눌선이 아닌 몽산선이 풍미하던 때로 원간섭기에 들어와 수선사가 원황실과의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며 후원을 받은 데에 이은 또 하나의 큰 변화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선사 내에도 새로운 선사상이 급격히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10세 만항의 뒤를 이어 11세 묘엄국사(妙嚴國師), 12세 혜각국사(慧覺國師)가 주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 전하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항 이후의 사세 회복도 그리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구가 수선사의 5세 천영과 8세 도영의 가르침을 받고 정토사, 월남사를 거쳐 수선사에 주지한 1320년(충숙왕 7)경은 고려가 이미 원의 간섭 아래에 놓인 지 벌써 반세기가 흘러서 수선사의 변화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복구가 정통의 수선사계 고승인 5세 천영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고, 8세 도영을 제2의 스승으로 모시는 등 외적으로는 수선사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불교계 전반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수선사도 지눌의 사상보다는 몽산선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3. 백암사(白巖寺)와 복구 대 이후의 이씨(李氏) 가계
1) 복구(復丘) 대의 백암사
복구가 공민왕으로부터 왕사에 책봉되던 때(1352, 공민왕1) 영광 불갑사(佛岬寺)에 주석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불갑사 주석 직전에는 어린 시절에 일린(一麟)에게 공부하고, 승과에 합격 후에는 진리 탐구의 도량이기도 했던 백암사에 주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복구의 생애에서 백암사 주지시기는 그의 만년에 해당되지만, 그 시기의 여러 가지 행적과 그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불교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복구가 백양사에서 수행한 대표적인 행적은 전장법회(轉藏法會)였다.
① 아! 우리의 스승 왕사 覺儼尊者가 문도 및 산중의 碩德尊者를 불러 모아놓고 … 이 절(백암사)은 창건한지 오래 되어 절의 건물들이 모두 퇴락하고 불상, 법보 및 천인상이 모두 훼손되었으니 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문인 心白과 智孚 등에게 바다를 건너 宋으로 들어가 大藏經을 갖추어 오도록 하였더니 1년이 안 되어 대장경이 이루어졌고 낭함(琅函), 향낭(香囊), 사폭(紗幅) 등 모든 장엄구가 갖추어졌다. 신사년(1341, 충혜왕 복위2) 봄이 되어 諸山의 碩德을 불러 모아 轉藏法會를 열어 이를 낙성하였다.「白巖山淨土寺事蹟」
② 轉藏經第三會榜, 전 조정의 임금(충정왕)이 스님(복구)의 도덕을 흠모하여 특별히 스승의 예로 오성의 佛岬寺를 하산소로 삼았다. 今上(공민왕)이 왕위에 즉위하여 왕사에 책봉하고, … 曹溪大和尙을 주맹으로 삼아 제산의 長老 천여 명을 초청하여 至正(1341-1368) 癸巳年(1353, 공민왕 2) 3월 11일에 처음 약 10일을 기한으로 불사를 장황하게 하였다. 낮에는 대장경을 전독(轉讀)하고, 밤에는 祖師의 가르침을 담론하며 혹은 참선하고 혹은 강론했다.「白巖山淨土寺事蹟」
위의 글 중 ①은 복구가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백암사의 중창공사를 낙성하고 전장법회를 열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복구가 백암사에서 개최한 제1회 전장법회이다. 이처럼 복구가 백양사를 중창하고 이것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법회를 연 것을 보면 당시 그는 수선사가 아닌 백암사에 주석한 것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복구는 월남사와 수선사에서 40여년(1320-1340년경)을 주석한 직후 1340년경(70세) 백암사에 돌아와 중창불사를 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 때 이암의 손자들(최유경,이원,이숙번)이「장성감무관자(長城監務官字)」(1407년)에서 언급한 “문정공 이암(李嵒)이 삼촌 숙부인 복구와 함께 발원하여 사재(私財)를 들여 백암사를 영건(營建)하였다”는 불사는 바로 신사년(1341)의 백암사 중창공사를 가리킨 것이다. 여기서 복구가 백암사에서 중창불사를 열 때 그의 속가(俗家)인 이씨 가문의 사재를 후원 받아 중창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 사실은 후대에 백암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백암사가 이암 가계의 원찰(願刹)로 변모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후대 백암사의 실상을 비추어 본다면 사재의 후원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위의 글 ②는 복구가 자신을 다시 왕사(王師)에 책봉해준 공민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공민왕 2년(1353)에 전장법회를 열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백암사에서 개최된 제3회 전장법회였다. 그런데 복구는 제3회의 전장법회가 열리던 때에 백암사에 주석하지 않았다. 복구는 충정왕 때 처음으로 왕사에 책봉되어(1350년) 영광 불갑사에 주석했던 것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구의 불갑사 불사(佛事)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차후의 과제로 미루기로 하고, 일단 복구가 왕명을 받고 불갑사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그곳에 주석한 시기는 1350년경부터 그가 입적한 해인 1355년까지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복구는 1355년(을미년, 공민왕 4) 다시 백암사로 옮겨가 있다가 그 해 6월에 병이 들어 7월에 입적하였고, 다비된 유골은 불갑사로 다시 돌아와 봉안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공민왕으로부터 각진국사(覺眞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때는 원의 정치적 간섭을 종결지은 공민왕의 반원(反元) 개혁이 단행되기 한 해 전이었다.
복구는 생전에 주석했던 어떤 사원보다도 백암사에 대한 애정은 두터웠다. 복구는 유년 시절에 백암사와 인연을 맺어 20대 청년기에는 진리 탐구의 도량으로 삼았다. 그리고 만년인 70대의 주지 시기에는 중창불사를 열었는가 하면 생을 마감한 열반(涅槃)의 장소이기도 했다.
2) 청수(淸叟) 대의 백암사
복구의 백암사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당대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에도 계속되어 사원은 이씨 가계와 더욱 밀착된 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했다. 다음의 글은 복구에게 작은 조카가 되는 청수가 주지하던 시기에 백암사에서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① 尊者(복구)는 三韓名家의 출신으로 淸叟가 친조카인데 一國의 宗師였으므로 歸依하는 학자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청수는 곁에서 모신지가 오래여서 은혜나 의리로 봐서 청수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 절을 부탁하여 뒷일을 주관도록 하였다. 청수가 이를 잘 이어 받아 절에 있은 지 오래되지 않아 폐기되었던 모든 것이 온전히 좋아졌다. 鄭道傳,「白巖山淨土寺橋樓記」(1377년)
② 경술년(1370) 여름에 큰물이 들어 돌 제방이 무너지자 누각도 따라 무너졌다. 청수(淸叟)가 이르기를, “누각은 나의 스승이 세운 것인데, 이래서야 되겠는가? …” 하였다. 이에 날짜를 기약하고 공장을 고용하여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李穡,「白巖山淨土寺雙溪樓記」(1381년)
위의 글에 ①에서 존자(복구)의 친조카라고 한 청수(淸叟)는 바로 이우(李瑀, 복구의 형)의 셋째 아들이 되고, 이암의 동생인 이징(李澄)을 가리킨다. 청수는 사적으로는 숙부(叔父)가 되고, 출가한 이후 스승으로 모셔오던 복구의 뒤를 이어서 백암사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②는 백암사에 주지하던 청수가 경술년(1370)의 홍수로 인해 무너져버린 백암사 쌍계루(雙溪樓)를 복구했다는 내용으로 1370년경 청수에 의해 그것이 중수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즉 백암사는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복구와 이암의 발원으로 중창(重創)된 데 이어서, 청수가 주지하였을 때 중수(重修)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고성 이씨 가문 출신의 승려가 대를 이어 백암사에 주지하며 이들의 주도 아래 사찰이 운영, 유지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3) 이암 후대의 백암사
청수 대이후에도 백암사는 고성 이씨 가계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절이 운영되었는데, 다음의 글이 그것을 전해주고 있다.
문정공 李嵒의 손자인 崔有慶, 李原, 李叔蕃의 等狀에서, “전라도 長城 땅의 백암사를 조상 문정공이 삼촌숙부 王師 復丘와 같이 발원하여 私財로 영건하고 대장경을 잘 마련해 놓았습니다. 우리들 부모 일동은 長年寶, 大藏寶, 忌日寶를 합쳐 300석이 된 후, 우리 사촌 형으로 전에 兩街에 있었던 中晧가 傳住하면서 대중을 거느리고 작법하며 祝上하였습니다”「長城監務官字」(1407년)
위의 글은 조선(朝鮮) 태종 때 이암의 내외손(內外孫)인 최유경(이암의 손녀사위), 이원(이암의 친손자), 이숙번(이암의 離孫) 등이 관(官)에 청원서를 올려 당시 국가에서 취한 백암사의 주지 임명을 철회해달라는 내용의 일부분이다. 이암의 손자들은 청원서에서 조부인 이암(李巖)이 숙부인 복구(復丘)를 도와 백암사를 중창하였고, 또 그들의 부모 대에서는 장년보(長年寶), 대장보(大藏寶), 기일보(忌日寶)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보(寶)를 조성하였으며 자신들의 세대에는 사촌인 중호(中晧)가 주지가 되어 절을 운영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백암사가 증조부인 복구 대로부터 누대에 걸쳐 이씨 가계에 의해서 절이 운영되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백암사는 복구와 이암에 의해 중창되고, 청수에 의해 중수된 이후에도 이씨 가문에 의해 운영, 유지되며 고성 이씨 가계의 원찰(願刹, 혹은 願堂)이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암의 후손들은 백암사에 대한 관(官)의 일방적인 지시를 철회하려는 목적으로 진정서를 올렸던 것이고, 결국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까지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초 태종(太宗) 대의 이원(1368-1429), 이숙번(1373-1440) 등과 같은 이암 후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으리라고 본다. 이렇게 백암사는 고려 멸망 후에도 이씨 가문에 의해서 그 사세(寺勢)를 그대로 유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복구가 말년인 1340년경 백암사에 주지하여 절을 중창한 이후 그것은 조선 태종 대에도 고성 이씨 가문에 의해 운영되었다. 여기서 고려 말 명문세족의 원찰이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그 후손들이 세도가를 유지함에 따라 원찰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Ⅳ. 결론
각진국사 복구(復丘)가 태어난 고성 이씨 가계는 원래 지방의 향리(鄕吏) 출신으로 조부 이진(李瑨) 대에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고, 아버지 이존비(李尊庇) 대에 이르러 명문 사족(士族)의 반열에 올랐다. 복구는 고려후기의 성리학자 백이정(5촌 진외당숙), 박충좌(3촌 생질) 등을 가까운 친척으로 둔 까닭에 언뜻 성리학적 분위기가 지배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존비나 이암(李嵒, 복구의 조카)의 정치적 성향이나 학문적 관심 등을 검토할 때 복구의 가문을 신진사대부가(新進士大夫家)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가 하면 복구의 외가(外家)는 불교신앙이 매우 돈독한 집안이었다. 어머니 이씨 부인(이주의 딸)과 외삼촌 이행검(李行儉) 모두 불교를 독실히 신앙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구의 출가에는 친가(親家)보다는 외가인 이행검 가계의 친불교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복구의 출가를 계기로 본격화된 이씨 가계의 친불교적 성향은 원간섭기, 고려말 백암사(白巖寺, 현 백양사)의 여러 불사(佛事)를 통해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백암사는 복구가 백암사에 주석한 이후, 대를 이어서 청수(淸叟), 중호(中皓) 등이 주지직을 승계했고, 또 적지 않은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한 가문의 원찰(願刹)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복구가 수선사(修禪社)에 출가하여 천영(天英)과 도영(道英)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한 후 월남사를 거쳐 수선사, 백암사에 주석하던 당시 원간섭기 불교계의 큰 흐름은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수선사의 쇠퇴가 급격히 지속되었다. 수선사의 쇠퇴와 더불어 원황실(元皇室)의 후원 아래서 사세를 유지해 가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무인정권기의 수선사와는 많이 변질된 모습이었다. 둘째 보각국사 일연(一然)의 활발한 활동으로 가지산문이 급격히 부상하며 선종계를 주도해 가는 형국이었다. 운문사, 인각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의 중흥과 더불어 원황실과 밀착하여 묘련사(妙蓮寺)를 중심으로 한 천태종(天台宗)의 급성장도 두드러졌다. 셋째 충렬왕 때 원으로부터 몽산선(蒙山禪)이 수용되며 이후 크게 확산되어 갔다. 몽산선은 가지산문의 혼구(混丘)나 수선사의 만항(萬恒)도 적극 수용하면서 당시 고려 선종계를 풍미하였다. 원간섭기의 이상과 같은 불교계의 분위기에서 복구가 주지하던 시기(1320-1340년경)의 수선사 역시 지눌선보다는 몽산선의 영향 아래에 있었을 것으로 예견된다. 복구는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수선사의 발전을 꾀했기 때문에 무인정권기에 볼 수 있었던 개혁 성향의 결사정신이나 사상이 부흥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이것은 복구가 만년에 백암사에서 활동한 행적이나, 백암사 자체의 변모 과정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즉, 복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전통 고사찰(古寺刹)이었던 백암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큰 조카인 이암 가계의 사재(私財)를 동원하였고, 또 작은 조카인 청수에게 사원의 주지직을 승계하도록 하여 후대에 백암사가 고성 이씨 가문의 원당으로 변모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무인정권기 이후 특히 원간섭기에 확대되어 간 불교계 세속화(世俗化)의 한 일면이었다. 당시 국가적 차원의 우대와 혜택은 고승 한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출가하기 전의 속가(俗家)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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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national preceptor Gakjin Bokgu(覺眞復丘) and the trend of Buddhism circle in Goryeo dynasty
Yoon, Ki-yeop / A lecturer of Yonsei University
This research looked into the career of the national preceptor Gakjin Bokgu(覺眞復丘), the 13th abbot of Suseonsa Temple(修禪社), and the trend of Buddhism circle of Won(元) intervention period in Goryeo dynasty, focusing on the history of Goseong(固城)-Yi(李) family and Baekamsa Temple(白巖寺). It is a very meaningful because the achievements of Bokgu who was born into a good family in the Won intervention period and resided in the Suseonsa which was the typical temple in the late Goryeo including Baekamsa, Bulgapsa Temple(佛甲寺), reflected many kinds of changes of Buddhism circle and politics at that time.
Bokgu who was born into Yi family, which leaped into a good clan in the Bokgu's father generation, had relatives of new Confucianism scholars such as Baek i-jung(白頤正), Park chung-jwa(朴忠佐), but it seems that he became a Buddhist monk because he was influenced by his mother and uncle Yi haeng-geom(李行儉) on his mother's side, both of them had devout faith in Buddhism. He who made the 5th abbot of Suseonsa, Wono Cheonyeong(圓悟天英), his mater and became a monk, resided in the Suseonsa as the 13th abbot for twenty years until he moved in Baekamsa in 1320 or thereabouts.
Suseonsa was declining in those days, and it is speculated that Suseonsa was influenced by the thought of Mongsan(蒙山) than Jinul(知訥) unlike the soldier government period in the context of the general trend of Buddhism circle. The thought of Mongsan was actively accepted by Mt. Gaji-san(迦智山) sect as well as Suseonsa, and was very popular among Goryeo monks during the Ueon intervention period.
Bokgu resided in the Baekamsa in his infancy and twenties, and he greatly reconstructed the temple with his cousin Yi am(李嵒) in 1340 or thereabouts. This fact was a starting point that Baekamsa was changed into the temple of being managed by Yi family. When Bokgu resided in Bulgapsa, he was proclaimed royal preceptor in 1350, 1352. He died at Baekamsa in 1355, and was granted a posthumous epithet, national preceptor Gakjin(覺眞). Deviated from the control of the government, Baekamsa was also managed by descendants of Yi family since Bokgu and Yi am generation. We can get a glimpse of Buddhist secularization from the fact that Baekamsa was transformed into the temple for praying to Buddha for the happiness and good luck of one family.
* Key Words
Bokgu, Goseong-Yi family, the Won intervention period, Wonchal, Suseonsa Temple, Baekamsa Temple, Bulgap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