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한(恨)많은 왕국’ 백제가 멸망한 이후 망국의 왕자 한 분이 일본으로 피란한다. 의자왕의 서(庶)왕자 41명 중 한 분이었다. 그는 일본 미야자키현 남향촌에 둥지를 틀어 백제마을을 가꾸었다. 마을사람들은 신다이(神門)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93년 10월26일, 이 남향촌 주민들은 보자기에 싼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았다. 실로 1,330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 이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신체는 세습신관과 그 아들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다. 협의를 통해 이 신성한 신체는 김포공항 검색대마저 통과하지 않는 특전을 누렸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날, 바로 그 곁에서는 또다른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장비의 만행을 피한 백제의 혼=‘망국의 한’을 담은 백제왕자의 혼이 깨어났을까. 고유제와 개토제가 동시에 열린 지 17일 만인 12월12일, 1,330여년이나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이 홀연히 기지개를 켤 줄이야. 사실 이 발굴은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원래 이 이름없는 절터의 발굴은 92년 12월 윤무병 충남대 박물관장이 시굴조사에서 유구·유물들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과 부여나성(夫餘羅城·사적 58호)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원래 계단식 논이었는데,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 추세에 있었다. 부여군은 이 절터 부근에 주차장을 마련하려 했고, 유구·유물 확인을 위해 사전시굴조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본격발굴을 위한 조사 예산을 따는 데는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 노태섭 과장(현 문화재청장)의 공이 컸다.
원래 92년 시굴조사에서는 건물터와 재를 비롯한 불 탄 흔적, 그리고 금속유물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건물터가 금속제품을 만드는 공방 정도의 건물로 판단됐지, 사찰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굴단의 고민은 컸다. 당장 주차장 공사를 중단시킬 결정적인 유구·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되는데 고고학도의 양심상 그냥 공사를 강행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현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장)의 회고.
“시굴조사 결과 결정적인 중요한 유구가 없기에 그냥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뭔가 예감이 이상했던 윤무병 선생 등 전문가들이 ‘딱 한번만 파보자’고 건의했어요. 당시 노태섭 과장은 군말없이 수용했고, 2천만원이 넘는 발굴비를 배정했지요”.
그때 만약 “무슨 소리냐”며 중장비로 싹 쓸어 주차장을 조성했다면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이는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유적정비에서 철저한 사전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큰 교훈을 안겨주었다.
◇물구덩이에서 잡은 고고학적 ‘월척’=우여곡절 끝에 발굴이 시작됐지만 현장은 최악이었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인 데다 항상 습기와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이런 곳에 백제시대의 중요한 시설이나 유물이 묻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굴단은 추위와 싸우면서, 발굴구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임시방편으로 고랑을 마련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조사지역은 여전히 물로 질퍽거려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12월12일 오후 4시30분.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사(현 학예실장)는 그야말로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는다.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났어요.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처음엔 광배편 같은 유물인 줄 알았어요. 꽃삽으로 천천히 노출시켜 나가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분명하다는 것만 느꼈죠”
김종만씨는 즉시 김정완 학예실장과 신광섭 관장에 보고했다. 신관장의 말.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밤 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뭔지도 밝혀지지 않은 유물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나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히 있어 인부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귀가 조치하고 학예연구직들만 모두 모여 오후 5시께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 30분께야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지요”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폰지로 적셔내면서 1m20㎝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같은 흙을 걷어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틀 듯 시리고 아팠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 땅을 팠다.
“아!”. 발굴단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넋을 빼놓을 정도의 감동의 물결이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유물.
“자, 다들 정신차려. 빨리 마무리해야 해”. 신관장의 명령에 발굴단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온전하게 발굴해 들어내 놓고도 사실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뭔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뒤에 가서야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이었고,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됐어요.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차츰차츰 드러나는 찬란한 백제의 역사=사실 작업인부를 모두 귀가시킨 뒤 야간작업을 택한 것은 1971년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재판이 된 셈이다. 세계 고고학 발굴사에 남아 있는 독일 슐리만 부부의 트로이 유적 발굴 당시 중요유물이 발견되자 바로 인부들에게 보너스를 주어 며칠간 강제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중요 유물발굴은 슐리만 부부가 했다. 이 야간작업은 엄청난 발굴 때 혹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미연에 막기 위한 전통인지도 모른다.
수습을 끝내고 사진작업 등 연장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이 유물을 곱게 싸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그제서야 유물의 올바른 모습이 드러났다. 신관장을 비롯한 발굴단의 일성이 터졌다.
“이거 박산로(博山爐·중국 한나라때 향로·박산은 중국인들의 이상향) 아니야?”. 이렇게 잘 만든 물건이라면 응당 ‘중국 것’이라는 문화패배주의가 은연중 배어나왔다. 하지만 중국 것은 이 ‘물건’처럼 섬세하지도, 크지도 않다. 분명 중국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진정 백제의 것이란 말인가.
발굴단은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귀이개)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얼굴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