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 꽤 많다. 미술작품이 곳곳에 그려진 시골마을도 있고, 도심 한복판에 진짜 보물이 보관된 고택도 있다. 영천의 '보석'인 포도로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들어내는 농가도 만날 수 있다.
오전 10시 40분 영천공용버스터미널에서 화산면 가상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가상리에는 시안미술관과 마을 전체를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꾸민 별별미술마을이 있다. 241번과 241-1번, 242번, 242-1번, 242-2번을 타면 되는데 화산면을 빙 둘러오는 코스는 같고, 방향이 다르다. 화산면 소재지를 먼저 들르느냐, 가상리 쪽으로 도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별별미술마을까지 화산면 소재지를 경유하면 45분 걸리지만, 가상리로 바로 가면 25분이면 충분하다.
◆몽유도원도를 걸으며 즐기는 여유
버스에서 내리니 버스정류장 자체가 작품이다. 작품명은 '풍선을 타고 떠나는 환상여행'. 거실처럼 꾸민 정류장 안은 노란색 벽에 소파와 탁자가 그려졌고, 지붕에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풍선 모양의 조형물이 달려 있다. 아마 전국에서 가장 예쁜 버스정류장이 아닐까 싶다.
마을 초입에는 시안미술관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1999년 폐교된 화산초교 가상분교를 단장한 미술관으로 전시실과 잔디조각공원, 카페 등을 갖추고 있다. 아름다운 미술관 주변의 나무그늘은 자녀들과 함께 나온 나들이객들의 차지였다. 아이들은 설치작품 주변을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이곳에서부터 화산면 가상리와 화산 1`2리, 화남면 귀호리 일대가 모두 별별미술마을이다. 이곳은 2011년 일상생활 공간을 공공미술로 가꾸는 '2011 마을미술 행복프로젝트 사업' 대상 마을로 선정되면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오래된 담장과 빈집, 정미소와 우물이 예술작품이 됐고, 마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담은 박물관도 세워졌다.
마을의 미술은 '신몽유도원도-다섯 갈래 행복길'로 구성된다. 다섯 개의 길은 '걷는 길' '바람길' '스무골길' '귀호마을길' '도화원길'이다. 그중 가상리 마을 곳곳에 설치된 미술작품을 둘러보는 '걷는 길'을 택했다. 마을 안길 표지판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은 벽화다. 조금 더 걸어가면 알록달록 만물상과 마을 한복판에 '우리 동네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안에는 마을 사람들의 사진과 옛 모습, 마을 역사 등이 전시돼 있다. 고무신과 맷돌, 녹슨 철모, 농기계 등 주민들이 쓰던 물건들이 시간의 흔적을 머금고 있다. 오래된 한옥을 고쳐 지은 바람카페는 커피와 차가 준비된 양심 카페다. 마시고 돈통에 돈을 넣으면 된다.
지금은 미술마을로 꽤 유명세를 탔지만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골이니까 미술 작품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죠. 농사 짓기도 바쁜데 무슨 예술이냐고. 막상 작품들이 설치되고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오니까 주민들도 많이 바뀌었어요. 조용하던 마을에 활기가 돌고 있죠." 이희진 가상리 이장의 설명이다.
◆포도는 정성으로 익어 와인이 된다
오후 2시 시안미술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공용버스터미널로 되돌아와 고경면 방면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육군3사관학교 앞에서 내려 400m가량 걸으면 최봉학 씨가 와인을 제조하는 '고도리 와이너리'다. 와이너리로 들어가는 길 양쪽으로는 끝도 없이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포도나무 비닐 씌우기 작업을 하던 최 씨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최 씨는 직접 재배한 거봉으로 화이트와인을, 머루포도(MBA)로 레드와인을 만든다. 식용으로 판매하는 포도와 와인 제조용 포도는 모양과 당도에서 차이가 난다. 식용포도는 포도송이가 예쁘고 알이 굵어야 상품성이 높다. 반면 와인용 포도는 껍질이 두껍고 알맹이가 작아야 한다. 식용 포도의 당도가 20브릭스(Brix) 정도인 데 비해 와인용 포도는 27~28브릭스다. 먹기엔 '달아서 아리다'는 표현이 나오는 수준이다. 포도에 있는 당분을 미생물이 먹고 알코올을 내놓는다. 미생물이 먹을 양식이 풍부해야 알코올 도수가 높아진다는 의미다.
"와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원료예요. '떼루아'. 즉 포도가 자라는 데 영향을 주는 토양, 강수량, 태양, 바람, 배수, 재배법까지 모두 포함하는 건데요. 똑같은 품종이라도 떼루아가 다르기 때문에 와인의 맛도 달라져요. 고도리 와인은 2009년 떼루아가 가장 좋았고요."
그가 와인을 처음 배운 건 7년 전 농업기술센터에서 와인 강좌를 수강하면서였다. 2년간 강의를 들은 그는 농민사관학교에서 와인 강좌를 수강하며 재미를 느꼈다. 미국 소믈리에 자격증 CSW와 영국 소믈리에 자격증인 WSET를 땄고, 2008년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한 해 그가 생산하는 와인은 1만7천 병. 최 씨가 거봉으로 만든 화이트와인은 '2011년 우리술 품평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와인에는 만드는 이의 개성이 담긴다"고 했다. "술을 담글 때는 보름간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합니다. 알코올 도수나 색상이 안 나오면 모두 버립니다.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요." 스스로 평가하는 자신의 와인은 어떨까. 최 씨는 "고도리 화이트와인은 향이 좋은 점이 강점이다. 하지만 레드와인은 아직 부족하다. 와인의 묵직한 무게감이 약하고 여성미가 강하다. 품종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고 자평했다. "포도가 술로 변할 때 느끼는 오묘한 과정이 재미있어요. 술을 담가본 사람만 아는 느낌이죠."
◆보물이 모인 영천 도심
영천시내로 돌아왔다. 영천문화원 앞에 내리면 금호강을 따라 남아있는 옛 흔적들을 둘러볼 수 있다. 영천문화원 바로 옆에는 조양각이 있다. 조선 인조 16년에 중건된 이곳에는 영천을 거쳐 간 풍류객들의 시구가 조각된 현판 80여 개가 걸려 있다. 문화원 경내에는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지구전승비 등도 있다. 조양각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보물 제521호로 지정된 숭렬당을 만난다. 세종 15년에 건립된 건물로 무장이었던 이순몽(1366~1449)이 살던 집이다.
숭렬당에서 길을 건너면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병와 이형상(1653~1733)이 살았던 호연정이 있다.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형상은 제주목사와 경주 부윤 등을 지내고 선조를 모신 상주로 돌아가려다 영천에서 30여 년간 머물렀다. 호연정 안에 있는 전시관에는 이형상의 저서인 보물 제652호 병와유고와 인장, 호패, 거문고 등 유품 12종, 59점이 있다. 일반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호연정에 마루에 서면 아래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형상은 영천시를 관통하는 금호강에 성고구곡을 정하고 각각 이름 붙였다. 일대가 도시화되고 개발되면서 지형이 변하고 유적이 사라졌지만 제3곡인 하수구(下水龜)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다. 거북이 형상인 하수구 위에 호연정이 있으니, 거북 등껍질에 올라탄 형상이다. 지금 호연정은 후손이자 향토사학자인 이임괄(54) 씨가 지키고 있다. 사실 호연정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된 건 보물 652-6호인 '탐라순력도'다. 이형상이 제주목사를 지내던 시절 제주도 각 고을을 순시하며 제주 곳곳을 그림으로 남긴 채색 화첩인데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왜 영천에 있어야 할 이형상의 유품이 제주도까지 간 것일까. 이 씨는 "종손이 마음대로 팔아먹었다"고 했다. 유물을 보관해둔 전시관의 열쇠를 갖고 있던 종손이 문중과 상의 없이 임의로 꺼내다가 팔았다는 것이다. 반면 제주도는 탐락순력도 소장자와 정당한 협의 절차를 거쳐 매입했다는 입장이다. 법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문중 재산의 관리 책임은 소장자인 종손과 종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씨가 굳게 닫힌 전시관의 자물쇠를 열었다. 보물까지 내보이진 않았지만 가야금과 칼, 도장 등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들을 보여줬다. 이 씨는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할아버지의 학문적 업적이 아직 크게 조명받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며 "좀 더 많은 연구와 합당한 평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