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조선시대
1) 조선시대는 비교적 많은 양의 바둑자료가 남아있어, 그 시대의 바둑문화를 잘 엿볼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둑시의 창작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바둑시는 총 18편인데 비해, 조선시대의 바둑시는 무려 64편이나 된다.
특히 조선시대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허난설헌(許蘭雪軒)이 바둑시를 읊은 것은 한국 바둑사에 귀중한 자료이고, 어느 나라에서도 여류시인이 바둑을 읊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하니, 그 가치를 살리고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민요의 주체가 서민 대중이라고 볼 때, 바둑은 대중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 대중화의 폭은 상류계층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2) 바둑이 조선시대의 상류계층 여가생활이나, 문학에서 큰 몫을 하고 있을 때, 신의왕후(神懿王后 : 태조 이성계의 정부인이며 양녕대군의 조모) 기일에 양영대군의 바둑기행(세자로서 조모제사에 관심 없이 바둑만 즐기고 있는 행위)을 정치적 수단으로 보는 해석도 있으니, 당시 바둑이 상류계층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연국해 볼만하다 하겠다.
3)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은 바둑을 아주 심도 있게 연구했던 영의정이다.
그는 기설(棋設)이라는 글을 통해 바둑을 동양철약인 음양, 도덕, 역학에 비교하기도 하였으며 행정, 용병, 양생법이 바둑과 같다고 까지 말했으니 그의 바둑에 대한 관심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바둑에서의 승리의 근본이 대세를 보는 데 있다고 갈파한 대목을 보면 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수의 바둑시를 남기기도 했다.
4) 조선시대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바둑이 많이 활성화 되는 가운데 바둑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많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조선조 중기(1537-1584)의 대 성리학자다.
성리학자 율곡은 바둑, 거금고, 술 같은 풍류를 멀리했다.
그는 제자를 가르칠 때 지침서로 지은 격몽요결(擊夢要訣)에 나쁜 습관 8계(八戒)가 있는데, 그 중 여섯 째에 한가롭게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바둑 두고 장기 두는 것을 일삼으며 배불리 먹고 마시면서 날을 보내고 남과 타투기를 꾀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성리학자로서 공자와 맹자의 바둑관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시대의 바둑 상황에 중요한 대목으로 바둑이 성장하는데 성리학이 큰 장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실학자(實學者) 중 이덕무(李德懋)는 혁기론(奕棋論)이라는 글을 통해 바둑두는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내기만 하지 않으면 바둑이란 기예 중에서 우아한 것이다. 라는 말을 덧붙였다.
또 한 명의 유명한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노년에 바둑을 배우기 전, 청년시절에는 바둑에 대해 상당이 비판적이었다.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은 위기변증설(圍棋辯證設)로 바둑을 비난했다.
그 내용은 지나치게 바둑을 두는 것과 바둑을 권력층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풍조를 매도한 것이다.
이 시대에 이처럼 바둑에 대한 비판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바둑이 성행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바둑이 성행하면서 바둑의 본래 순기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강한 오락성과 고위층과의 교류수단으로 악용되는 역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자료 출처 : 바둑월드(http://www.badukworld.co.kr/biz/lesson1/history.html 2014-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