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자료인데 원본이 없어서 옮기는 과정중에 오류가 발생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님은 황해도 해주 출생인데 이것을 海外란 표현을 쓴 사실과 수천리장도 란 표현이 어색하네요.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7권 안중근편Ⅱ > 一一. 安重根 및 關聯被告에 대한 裁判及刑執行關係件 > 大韓每日申報
大韓每日申報
<一九一◯年 二月 二十三日>
安ㆍ禹 兩氏의 公判審問에 對한 陳述의 詳報
在旅順 傍聽生
韓國의 獨立을 恢復하며 東洋의 平和를 維持함에는 爲先 伊藤氏를 害除한 後에야 長進之策이 될줄로 認定하고 又 主辱臣死는 乃是 當然底事니 死亦無恨이라고 決心하야 國家에 對하야 獻身的精神을 抱하고 海外에 出遊하면서 同胞를 遊說하야 壯年은 義兵으로 日軍과 戰鬪하고 幼年은 敎育을 施하야 後備에 補充하고 一邊으로 實業을 勉勵하야 國民의 義務를 覺悟케 하기로 努力하였노라고 法廷에서 自白한 安重根ㆍ禹德淳 兩氏의 公判은 世界視聽을 惹起하는 一大 栽判이라 其 審問에 對한 陳述 槪要는 如左하다.
本年 二月 七日에 安重根 等의 公判을 日本 關東都督府 地方法院에서 開廷하였는데(此公判의 順序는 電報에 連續 揭載하였기 此를 省略한다.)
檢察官이 犯罪事實의 陳述을 終하매 裁判長이 先히 被告 安重根을 審問한즉 曰 重根은 本名이오, 三年 前 海港에 赴한 時에 兒名 應七로 行世하고 父 安泰勳은 進士로 五年 前에 歿하고 母 趙氏는 生存하였고 海外에서 出生하야 信川으로 移轉하였다가 四年 前에 鎭南浦로 移居하였고 弟二人이 有하니 其名은 定根ㆍ恭根이라 十六歲에 娶妻하야 所生이 二男一女요, 十七歲에 天主敎에 入하야 宣敎師 洪神父에게 洗禮를 受하였노라 하고 仍하야 勵聲曰 曩者 日露戰爭할 當時에 日本 天皇陛下의 宣戰詔書 中에 韓國의 獨立을 扶植하고 東洋의 平和를 維持한다 한 故로 韓國 一般人民이 感激하여 日軍의 勝利를 祝하야 數千里長途에 軍糧 器械를 輸運하며 道路 橋梁을 修治하야 日ㆍ露의 媾和가 成立된 結果로 日軍이 凱旋하매 韓人이 自國의 凱旋과 如히 歡迎하야 自是로 韓國의 獨立은 鞏固할줄로 確信하였더니 不意 千九百五年 十一月에 至하야 伊藤이 大使로 韓國에 來하야 國賊 一進會 頭領 幾名을 金錢을 多數히 與하고 使嗾하야 所謂 宣言兇書를 發表케 하고 且 其兵力으로써 皇室과 政府를 威脅하야 五條約을 倡提하매 我 皇帝陛下는 裁可치 아니하시고 參政大臣은 調印치 아니하고 但 世所謂 五賊 卽 五大臣만 捺印할 뿐인대 似此無効한 條紉을 完全히 成立되었다 稱하고 堂堂한 我大韓帝國을 國權을 剝奪하야 四千年 國家와 二千萬 生靈이 邱墟魚肉을 未免하였스니 寧不憤慨리오. 自是로 全國 人民이 一切 慷慨의 志를 懷하야 共히 不服을 唱하고 有志紳士는 時事를 痛論하야 或 上疏도 하고 或 長書도 하다가 忠憤攸激에 或 自刎而死하고 或 飮藥而死하고 或 被幽而死하고 或 却食而死하야 如此殉節한 者 不知 幾十人이오, 四方에서 義兵이 蜂起하야 日兵과 交戰하야 死亡者 亦 不知幾十萬名인데 猶且 不滿足하야 七協約을 强制로 締結하고 軍隊를 解散하고 太皇帝陛下를 廢位케 하고 司法權을 稱以委任하고 奪去할 뿐더러 國內의 各般利益을 沒收攫取함으로 韓國人民은 上下를 不問하고 其痛怨이 骨髓에 達하야 切齒腐心하니 此는 韓國의 不幸뿐 아니라 抑亦 東洋全局의 不幸이라. 伊藤의 罪惡이 如斯히 貫盈한데 尙히 其 奸搰한 手段으로 日本의 保護政策을 韓國人民이 樂從한다고 各國에 發表하야 世界를 欺瞞함으로 於乎是 韓國有志者輩가 伊藤의 殘忍한 行爲와 韓人의 不服하는 意思를 發表하기 爲하야 多數이 外國에 出遊한지라. 予는 思維하기를 伊藤은 元來 日本의 第一級의 人物로 非常한 權力이 有함을 持하고 我國에 對하야 暴惡한 行動이 最甚한 者인즉, 爲先 此를 誅한 後에야 韓國의 獨立을 恢復하고 東洋의 平和를 維持할줄로 認定하고 三年 前에 本國을 離하야 常히 此志를 懷하고 海蔘威 附近에 往來하다가 今 其目的을 達하였으니 主辱臣死는 乃是 當然底事라 死亦何恨고 하고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