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1일
말씀 : 슥12:10
제목 : 십자가로 시작되는 회개
우리는 일반적으로 죄를 윤리나 법을 기준으로 인지합니다. 그러나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즉 윤리적,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죄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때로는 죄를 인식하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값을 치르고 용서 받을 필요는 없지만 양심 안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 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새로운 죄를 발견할 수 있으며,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죄를 어떻게 씻어낼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죄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죄에 대한 용서와 해결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바라보면 얼마나 흉측하고, 잔인하며, 사악한지 모릅니다.
그런 관점에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인 동시에 가장 놀라운 사건입니다. 물론 십자가만 보면 그것은 저주, 수치, 심판이며 그 속에는 잔인함과 추악함이 들어있지만 주님의 못 박히심으로 인해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과 영광이 되었습니다. 즉 죄의 추악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십자가를 통해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와 사랑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만들어 놓은 이 땅에는 교활하고, 파괴적이며, 소름 끼치는 일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악들은 십자가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지옥에서나 정확하게 계산될 모든 죄가 하나하나 정확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완벽하게 사하고 남겨두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외에 죄를 완전하게 씻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옥은 형벌을 받는 곳이지 죄를 씻는 곳은 아닙니다. 세상의 법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모든 죄를 완벽하게 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의 실상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벽하게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알고 누린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영광과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죄가 없으신 동시에 이보다 더 큰 죄를 짊어지신 분을 온 우주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죄의 흉측함의 무게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죄를 모르시는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짊어지신 모든 인류의 죄의 무게를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 무게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리시며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이유입니다. 이처럼 흉측하고, 잔인하며, 저주와 수치로 표현할 만큼 영적으로 엄청난 죄가 드러나 있는 십자가는 죄 사함을 넘어 모든 자들의 죄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죄 사함에 대해 감사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한 비유를 통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18:21-27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데나리온’과 ‘달란트’는 신약 시대의 화폐 단위입니다. 1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 정도의 액수입니다. 반면 1달란트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보통 20~40㎏ 정도의 금의 무게를 가리킵니다. 즉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6,000일(약 16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1달란트를 우리나라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하루 품삯을 70,000원으로 정했을 때 약 4억 2천만원 정도가 되기 때문에 1만 달란트는 조 단위를 훌쩍 넘기게 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첫째, 이 빚은 우리의 능력으로 절대 갚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죄를 1만 달란트로 표현말 만큼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액수, 즉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탕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는 이것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적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의 무게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저도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면서 ‘내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서 죄의 무게와 지옥 형벌을 면하는 보혈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피상적으로 전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긴장하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만약 십자가의 복음을 피상적, 이론적으로 전한다면 저 또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강력하고, 보배롭고, 놀라운 일들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의 무한한 깊이와 보배로움과 강력함을 알 때 우리는 능력과 거룩의 삶을 누릴 수 있으며 견고한 소망을 붙들고 나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은 신앙의 핵심이며, 사실상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씀의 지혜를 알고 천국을 소망하고 확신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죄 씻음이 없으면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아직도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전혀 기억하시지 않는데 우리가 기억하고 괴로워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십자가로 말미암은 거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죄와 싸우고 그것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늘 죄와 십자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의 죄를 본다는 것은 복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보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죄를 통해 십자가를 봅니다. 이것이 거룩으로 가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죄가 아닌 율법을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낙담할 뿐만 아니라 그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쪽 눈으로는 우리의 죄를, 다른 쪽 눈으로는 십자가를 볼 수 있다면 속죄의 은혜를 누리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영적 균형을 잘 유지하며 '오직 복음'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명백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전에는 결코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죄의 존재와 권세를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사악함을 알아야 그리스도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죄를 견디지 못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그리스도께로 이끄실 때 죄 씻음을 받고 안식을 누릴 수 있으며,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고 흉측한지를 보게 됩니다. 결국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에게 은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균형 잡힌 신앙의 삶을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개의 은혜를 강하게 깨닫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믿음 없이,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할수록 회개의 자세와 내용과 깊이가 달라져야 합니다. 첫째, 복음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둘째, 상세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깊고 참된 회개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바라보는 회개는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것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이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똑같기 때문에 이것은 현재의 말씀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재해석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죄가 철저히 깨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19:36-37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이 놀라운 예언이 복음을 통해 지금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너무나 큰 복입니다.
초기 단계의 회개는 율법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는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위압감에서 나오는 회개입니다. 물론 회개할 때 두려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끝내야 합니다. 징계나 심판을 피하기 위한 정죄가 아닌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거룩해지기 위해 회개하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의 첫 단계와 그 다음 단계를 설명하는 이유는 심판과 형벌을 두려워하면 시련과 아픔을 회개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100% 틀린 말은 아니고 이런 이유로 회개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분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의 축복과 은혜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들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합니다. 약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회개를 통해 소유하게 되는 의인의 특권 중 하나는 간구할 때 역사하는 힘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회개 운동이 일어나면 병 고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에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회개하고 의로운 자로 세움 받아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통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이루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환자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은 더욱 회개하며 중보기도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회개하면 영적 감각이 새로워집니다. 너무나 암울하여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실에서 영적 감각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이단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접근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들 교육에도 침투하여 유혹하고 있는데, 특히 신천지가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김선헤 집사님께 연락이 왔는데 학교에서 ‘제5회 평화 사랑 그림 그리기 국제대회 안내’라는 공고가 떠서 이상히 여기고 대회를 개최하는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보니 이만희가 나타나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단이라고 항의하거나 막으면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왜 막느냐며 법정 대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고발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우리나라 기독교는 체계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자녀를 철저하게 양육해야 할 때입니다. 자녀들을 온전하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원받아 십자가 가까이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상황, 사건, 선택 등의 길에서 올바른 영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회개의 삶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여신 길을 걸으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을 이루는 복된 심령들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십자가 가까이에 머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