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와 나의 이야기
소매치기와 나의 이야기를 논하기에 앞서 성악설, 성선설이란 말을 빌려 생각해 보려 합니다.
*성악설(性惡說)은 고대 중국의 유학자 순자(筍子)가 주장한 학설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惡)하다고 생각 하는 학설이고
*성선설(性善說)은 맹자(孟子)가 주장한 중국 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성론(性論)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는 학설에서 비롯되었지요.
그렇다면 원래 인간의 본성은 선하게 태어났을까? 악하게 태어났을까? 묻는다면 나는 성선설에
손을 들고 싶습니다. 모두가 저의 생각에 동의하기를 바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물음에 과학자들은 달걀이 먼저일 거라 한다지요. 그렇다고 그 답이 진실이
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그처럼 뚜렷한 정답이 없는 것처럼,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늘 선과 악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태생부터가 죄를
짓고 태어났다고 하지요. 아담의 죄는 결코 따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선과 악을 구분하는 과일)
를 따먹은 죄를 말하지요. 그로 인해 인간 사회는 죄가 만연하게 됐다는 주장입니다. 이 설에 더하여
또 하나의 설인 고자(告子)가 주장한 '성무선악 설'(性 無 善惡 說)에 있습니다.
고자(告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교육하고 수양하기 나름이며, 수행의 과정에서
그 어느 품성으로도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지만 환경에 의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소매치기가 직접 당한 이야기로 자기는 결코 앞으로는 소매치기를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올린 글이었습니다.
그는 평상시처럼 버스에 올라 어느 여인의 가방에서 돈을 훔쳤고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려 가고 있는데, 얼마쯤 갔을 때 (타고 온 버스가 지나간 후) 어느 여인이 그의 앞에 서서 가는 길을
막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손을 포개어 자기 앞에 내밀더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기만
하더랍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렇다면 그 여인은 버스에서 자기(여인) 돈을 자기(소매치기)가 훔치는 것을
알고도 어떤 소란도 피우지 않고 따라왔다는 게 아닌가? 보통 사람이라면 차 속에서 '도둑이야' 하고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고 그랬다면 소매치기인 자기가 순순히 응하고 있었겠는가? 틀림없이 소동과 함께
자기는 그 여인에게 가만히 있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고 자기의 체면을 살려 준 그 여인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아 훔친 돈은 소리
없이 돌려주고 다시는 소매치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반성의 글이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 여인의 용서를 곁들인 자애로움이 악한 삶을 살던 소매치기를 선량한
사람으로 인도했다는 것에 감명 받았습니다. 브라보.
이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이고 그 중 한 이야기는 나의 삶에서 얼마나 큰 충격이었나를 말하고자
합니다.
내가 처음 당한 소매치기 이야기는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 다닐 어린 때 이야기입니다.
어머님은 평상시처럼 수박을 이고 집에서 30 리나 되는 군산 청과물 시장으로 팔러 가셨는데 마침
일요일이라 따라 갔던 날이었습니다. 어머님을 따라가면 아이스 케이크 정도는 얻어 먹는 재미로
그 먼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볼펜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이야 볼펜 몇 개씩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겠냐만 1946년에는
볼펜 하나 갖는 것은 얼마나 큰 선물이었고 자랑인지 모를 때입니다. 더구나 그 볼펜은 천연색인 예쁜 볼펜
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볼펜을 잃어버렸으니 한동안 나는 그 볼펜 생각에 잠을 설칠 정도였고 꿈에서도 나타날 정도
였습니다.
이야기는 훌쩍 뛰어 대학교 다닐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이야 시계 몇 개씩 없는 사람 없겠지만 1960년대만
해도 시계는 아주 중요한 소지품이었습니다. 심지어 손목에 시계를 차면 눈 여겨 보던 시절이었지요. 버스를
타고 가다 자랑(?)이라도 하려는 마음으로 시계 찬 손을 창 밖에 내놓으면, 어느 새 손목에서 시계를 채 가는
시절이었습니다.
창 밖에 시계 찬 손을 내놓을 수 없던 시절이었지요. 지금이야 시계 차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절이
되었으니 우스운 이야기네요.
다음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이야기입니다. 1학년 때 징집 영장이 나왔지만 가정교사를 하면서 겨우 대학을
다니던 나는 중도에 군에 가면 가정교사를 다시 구할 보장이 없어 미루며 다니던 대학이었습니다. 4학년
여름 귀가했더니 종로 경찰서 형사들이 집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자 기피자 단속 차 왔다며
종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만 받으면 곧 돌려보내겠다며 동행을 요청했습니다. 믿고 따라갔지요.
그러나 형사가 한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조사를 마치고 유치장에 있을 때입니다. 조사만 마치면 귀가할 것을 믿고 따라갔던 내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으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처럼 어렵게 얻은 대학 생활을 멈추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깜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쳐갔습니다. 그런데 그 유치장에는 온갖 잡범들이 같이 있었겠지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가지고 간 돈을 누가 훔쳐갔습니다.
세상에 몇 평 남짓 한 그 좁은 속에서 어떻게 감쪽같이 돈을 훔쳐갔단 말인가? 기가 막혔지만 도리가 없었지요.
분노가 치밀었지만 사실을 밝히면 대소동이 날 것이 예견되어 참았지만 가슴은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대학을 마치고 자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직장을 얻기 전까지 군복무를 같이 한
김상철 친구 집에서 처남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하다가, 이듬 해 직장을 구한 후 시골에 있던 아내와
첫 아기를 데려와 같이 살 집을 구하려고 다니던 때입니다. 매일 퇴근하면 단 돈 1만 원을 들고 전세 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가진 돈이 적다 보니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매일 허 탕을 치고 집에 들어갈 때는 완전히 지친 상태로 도착하여 주머니를 살펴보니 1만 원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 6만 원으로 전세 집을 구했고 급여라고 해야
8500원 받던 내가 1만 원을 잃었으니 그 충격은 어떠했겠습니까?
다음날 직장에 출근하여 사정을 얘기했더니 주 영철이라는 대리가 보더니 주머니를 살펴보고 여기로 훔쳐
갔네 하는 거였습니다. 세상에 어떤 돈인데 얼마나 크고 값을 따질 수 없는 돈인데 훔쳐가다니 아내와 첫
아기와 살 집을 구하는 그 귀한 돈을 훔쳐가다니 그때처럼 소매치기한테 적개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1968년의 일인데도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정말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 것이냐?
악하게 태어난 것이냐? 모두에 말씀드린 선과 악의 이야기는 지금도 내게 남아있는 숙제입니다.
어찌 작은 동기가 한 소매치기를 새 삶으로 인도한 것처럼 지금도 소매치기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고 그로 인해 아픔을 겪는 사람 또한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88올림픽 때 있었던 이야기를 여기에 옮기며 소매치기에 대한 추억을 생각해 보렵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올림픽을 할 때는 전국의 소매치기와 홈리스들이 모여들어 물 호스를 대고 쫓아내느라
난리를 쳤는데,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있었지요. 1988년, 인천에서 소매치기들이 전부 모인다는
연락을 듣고 경찰서에는 비상이 났답니다.
아- 얘네 들이 서울에서 모이면 잡히니까 인천에서 모여서 작전을 짜는구나.
그래서 그 정보를 듣고 경찰이 몰래 잠입했더니 뜻밖의 소리가 나왔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매치기지만 대한민국이 겨우 여기까지 와서 올림픽을 하게 됐는데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꺼다. 이번에 외국인 관광객의 주머니를 터는 녀석은 영원히 소매치기 업계에서 매장 시키자.'하고
토론하더라는 얘기를 어느 글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국민은 그런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실소를 머금
기도 했습니다.
소매치기나 절도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니 제가 겪은 절도 이야기 몇 토막도 옮겨보렵니다.
역시 제가 직장 생활을 할 때입니다. 저는 한 직장에 26년을 근무하고 임원으로 정년 퇴임했지만 사주가
5번이나 바뀌고 18명의 사장을 모시는 삶을 산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에서 한 적이 있습니다. 역시 사주가
바뀌고 좌천을 당하여 광주 동명동에서 살던 때입니다.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요. 명절이 되어
고향 부모님을 뵈러 가면서 전세 집 단속을 한답시고 하고 갔다 오니 방안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고향에 간 것을 알고 그렇게 와서 도둑질을 했단 말입니까?
우리말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있지요. 고향에 가면서 소중한 것은 어수룩하게 두고 갔지요.
그랬더니 도둑은 찾지 못하고 잃어버린 물건이 없었던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도 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획부장으로 있을 때 과장 한 사람을 채용했습니다.
후배라고 채용했고 그래서 좀 아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서에서 자꾸 돈이 없어지고 해서 유심히
살피기 시작하고 기회를 보고 있는데, 점심 시간 이런 때 바쁘다고 같이 나가지 않더니 실은 그 시간을 이용
하여 직원들 주머니에서 돈을 훔치는 것이었습니다. 훔친 돈으로 밤이면 한남 대교 남쪽 강남에 있는 리베라
호텔 술집에 가서 탕진하는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K대학 나왔다는 것도 위조 서류였
습니다. 좋은 머리를 왜 그렇게 활용했는지 실소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내가 직장 정년 퇴임을 하고 노래방을 7년 운영했습니다. 1994년부터 입니다.
처음에 시작한 후 한 달 수입이 제 임원 봉급보다 많아서 신이 나게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종업원에게
가게를 맡기고 해외여행까지 하였지요.
아시다시피 매월 신곡을 업데이트 하지요. 그런데 하루는 잠바에 넣어둔 돈이 없어진 거였지요. 누구도 온
손님이 없던 시간인데 그래서 신곡 넣는 사장한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종업원이 훔쳤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였습니다. 당장 받아내고 싶었지만 거래를 끊는 것으로 마감하고 그 종업원은 자르지 말고 타이르기만 하라
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ㅎㅎ
내가 집에 페인트 칠을 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견적서를 받을 때 페인트 몇 통을 사용한다 하지요.
그런데 일을 하다 말고 페인트 통을 싣고 가는 거였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통을 가지고 오고요. 바꿔치기
하는 거였습니다. 그렇다고 무어라 하면 그 사람 체면이 무어가 되겠습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마지막 이야기로 내가 역촌동에서 26년을 살던 집을 헐값에 팔고 의정부로 이사하던 2005년은 내 생애에서
모든 것을 잃고 죽지 못해 떠나던 때입니다. 짐을 이삿짐 센터에서 옮기는데 옮긴 후 보니 결혼 반지가 없어
졌습니다. 그 절망의 시기에 결혼 반지까지 이삿짐 옮기는 사람들이 훔쳐간 거지요. 그러나 어떻게 찾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가장 어려운 때 결혼 반지를 도둑 맞다니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가 그랬지요.
"세상에는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도 가득하다." 고.
미국에서 어느 사형수가 형장에 나와 마지막 남길 말이 있거든 하라 했더니
"내 가슴속에는 피곤한 심장이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을 착한 양심이 있다." 했습니다.
양심을 속이고 살며 힘들어 하시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회개하고 참된 삶을 살기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