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의 삼원당(三願堂)
김성문
가야 땅에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올 때 불교도 함께 들어왔다. 가락국의 수로왕은 세 개의 절을 지어 소원을 빌었다.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김해에는 명월산(보배산)이 있다. 명월산은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 보면, 수로왕이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산신령에게 비단 바지를 폐백으로 바치는 신령함에 산 이름을 명월산으로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일부 사학자는 인도에 폐백 풍습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들에게 바치는 가장 오래된 경전인 『리그 베다』 혼인 찬가에는 혼인을 앞둔 신부의 의식이 기록되어 있다.
“몸으로 더러워진 얼룩진 겉옷은 벗어버려라. 재물은 브라만에게 주어라.”
선문대학교 대학원 이거룡 교수는,
“옷을 바친 이유는 폐백, 선물의 의미가 아니고, 입고 온 옷에 붙어 있는 악귀들을 정화하기 위해 정화 능력이 있는 브라만에게 그 옷을 주는 전통이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옷을 벗어서 산신령에게 줬다는 내용은 인도의 혼인 풍습과도 상당히 유사하다.”고 한다.
『리그 베다』는 인도 문화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인도인의 삶의 방식이 되고 있다.
그 후 수로왕은 명월산에 세 절을 창건했다. 즉 신국사, 진국사, 흥국사이다. 신국사는 왕자를 위해 산 서쪽 언덕에, 진국사는 왕후를 위해 산 동쪽 골짜기에 지었다. 흥국사는 수로왕 자신을 위해 산 중앙에 지었다. 나라의 융성을 비는 ‘삼 원당’ 이라 했다. 아마도 세 절이 모두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절들은 높은 언덕 아래 북서쪽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골짜기가 깊숙하고 냇물과 돌이 깨끗하며 맑았다. 봉우리에 숲이 울창하므로 참으로 인간 세상과는 다른 곳이라 했다.
「김해 명월사 사적비」는 현재 흥국사 경내에 있고, 글자를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다. 사적비 내용은 서기 1708년 증원 스님이 지었다.
수로왕이 창건한 흥국사는 명월산 기슭인 주포마을 뒤쪽에 있었다고 전하나, 마을이 형성된 관계로 터를 찾을 길은 없다. 하지만 진국사와 신국사는 터만 남아 있어 그 흔적을 겨우 찾아볼 수 있다.
김해 여여정사 도명 주지 스님은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절터를 찾아 나섰다. 절터로 추정할 수 있는 곳에는 길도 인적도 없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수목을 헤치고 겨우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그 자리에는 높이 3m 정도의 석축이 길게 있었고 기와 조각이 출토됐다. 맞은 편에는 절이 들어설 만한 제법 큰 공간도 있었다. 주춧돌도 있었다. 지표에서 얼마 파지 않아도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다. 명월산 중허리에서 두 절터로 추정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기와 조각은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라 삼국, 고려, 조선 시대의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다면 처음 절이 창건된 후로 여러 차례 중건됐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주춧돌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어서 건물이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터로 추정한다. 이러한 발견으로 삼 원당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강력히 시사한 것으로 본다.
서기 1983년에 세운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 에는 명월산 서봉 밑에 수로왕이 명월사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스님에 의해 유지 보존됐다. 그러나 서기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는데 서기 1618년에 새로 지었다. 그 뒤 중수할 때 「건강원년갑신 삼월남색(健康元年甲申 三月藍色)」이라고 새겨진 기왓장이 무너진 담장 아래서 발견되었다. 건강원년은 수로왕 103년(서기 144년)이다. 이때 허왕후 오빠인 장유화상에 의해서 일찍이 이 땅에 서역불교가 전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명월사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 이유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후 김삼두(金三斗)가 명월사 옛터를 되찾아 방치되어 있던 유적을 수습하였다. 서기 1942년 우담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중건한 것이 흥국사이다. 수로왕이 세운 흥국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사찰명이 같아서 헷갈릴 수 있다.
현재 흥국사 대웅전을 바라보아 왼쪽에는 「김해 명월사 사적비」, 「가락국 태조왕 영후 유허비」, 「흥국사 중건 공로자 기념비」,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어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대웅전 앞에는 서기 1986년에 세운 오층관세음보탑과 석등 등이 있다. 관세음 보탑 앞에 합장하고, 내 주위의 모든 분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빌었다.
흥국사 극락전 안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있고, 바로 옆에는 「명월사 사왕석」이 있다. 양각했지만 마모가 심하여 선명하지는 않다. 중앙에 석불 좌상이 보인다. 그 양쪽을 뱀인 코브라 한 마리가 불상을 보호하는 듯하다. 이 형상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리디아’ 라는 사왕(蛇王)과 같다. 이 사왕이 삼매에 들어있는 불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왕석은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과의 문화 교류를 입증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방 불교가 전해진 근거로 보기도 한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불법을 매우 숭상하였다. 허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서기 452년에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라 했다. 이 왕후사는 창건한 지 500년 후에 폐했다고도 하나, 폐하지 않고 경내에 장유화상을 기리는 별도의 장유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 당시 장유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김해 용지봉에 있는 장유사와는 다르다.
흥국사 대웅전 왼쪽에 있는 극락전 안에서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두 손을 모았다. 입원한 장모님이 내일 퇴원을 하신다니 듣는 순간부터 행복해지는 것 같다.
밖에는 노을로 물든 서쪽 하늘이 유난히 붉다.
첫댓글 가락국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롭습니다.
조 선생님! 과찬이십니다. 모든 국민이 우리의 가야사를
조금이라고 아시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쓰고 있습니다.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신국사, 진국사, 흥국사 ~~
삼 원당의 가락국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수선화 선생님!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