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글
상당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분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말을 했느냐고 질문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국어(國語)와 국자(國字)를 혼동하여 묻는 말이다.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없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지, 언제 우리말을 만들었던가?
그와 같은 생각은, 아마도 한글날이 되면 글자 자체보다는 우리말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하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맞춤법 문제가 나오면, 정말 우리 국어가 너무 어렵다고 하는 말도 종종 하는데, 이것도 같은 예다. 우리말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써오던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없었다. 중국에서 한자가 들어온 이후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적으려고 시도하였다. 앞에서 본 이두, 구결, 향찰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말을 적는 데에 너무 불편하였다. 그래서 성왕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반포하였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한글 이름이란 말도 가끔 하는데 이 역시 말과 글을 혼동하는 경우다. 한글 이름이 아니라, 우리말 이름이라 해야 옳다. 이처럼 우리말과 한글은 구별해서 써야겠다.
한글은 우리말을 적는데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전산화에도 아주 적합한 글자다. 모음은 하늘[․], 땅[ㅡ], 사람[ㅣ]을 본뜨고 자음은 발음기관을 형상화한 과학적인 문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늘을 뜻하는 글자를 동그란 점 [․]으로 표시했다는 것은 천재가 아니면 나타낼 수 없는 글자다. 땅[ㅡ], 사람[ㅣ]도 마찬가지다. 모음 11자는 천(天), 지(地), 인(人)을 본떠서 ‘․, ㅡ, ㅣ’의 기본자 석 자를 만든 다음, 나머지는 그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자음 17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ㄱ, ㄴ, ㅁ, ㅅ, ㅇ’의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고,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다.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에 널리 알려져, 유네스코(UNESCO)에서 해마다 문맹을 없애는 데 공이 큰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 상’이라 부르게까지 되었다. 이 상의 이름에 ‘세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세종이 만든 한글이 배우기 쉬워서 문맹자를 없애는데 탁월하다는 사실을 세계가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한글은 아마도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문자’라고 하였고,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포스 교수는 ‘한국 알파벳은 간단하면서도 논리적이며, 더욱이 고도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또 시카고대학의 맥콜리 교수는 ‘한글이 벨의 보이는 음성(Visible speech)이란 책에서 제시한 것보다 무려 400년 이상 앞섰다’고 격찬했다. 여기서 보이는 음성이란 영국의 언어 치료사인 알렉산더 멜빌 벨(1819~1905)이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새로운 글자를 말한다. 벨은 그가 지도하는 농아 학생들을 치료하면서 그들도 알 수 있는 문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발음기관을 본뜬 상형문자를 만들었다. 발음기관의 위치와 발음기관이 움직이는 모양을 그림으로 만든 문자였다.
이것은 이미 15세기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방법이다. 즉 ㄱ은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ㄴ은 혀끝이 윗니에 닿는 모습을, ㅁ은 입 모양을, ㅅ은 아랫니 모양을, ㅇ은 목구멍 모양을 본뜬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맥코리 교수는 한글이 벨의 「보이는 음성」보다 400년이나 앞섰다고 한 것이다.
세계 최강국 미국인은 79%만 글자를 읽고 쓴다. 우리 문맹률은 0%에 가깝다. 쉽고 간결한 한글 덕분이다. 정인지가 말했듯이 한글은 슬기로운 사람이면 하루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글자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인 이유는, 역동적 국민성과 함께 발음 그대로 표기하며 자음 모음을 환상적으로 조합해 빠르게 언어를 정보화할 수 있는 한글 덕분이다. 국보 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은 한국의 세계기록유산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밖에서는 이처럼 우리 한글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는 말로는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면이 많다.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쩔 뻔했는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