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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4월 21일(계해)
난의 전말을 진달하는 주문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삼가 아룁니다.
곧 소방(小邦)이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난리를 일으키매 주토(誅討)한 전말을 두루 진달하고 우러러 황람(皇覽)을 번독(煩瀆)하는 일입니다.
의정부의 장계(狀啓)에 ‘지난해 12월 22일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해우(李海愚)의 비보(飛報)에 의거하건대, 그곳 가산군(嘉山郡)의 토적(土賊) 홍경래(洪景來)·이희저(李禧著)·우군칙(禹君則)·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이제초(李齊初)·정경행(鄭敬行)·홍이팔(洪二八) 등이 광비(礦匪)를 불러모아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하고는, 이달 18일 밤에 본군(本郡)에 틈입(闖入)하여 쉬신(倅臣) 정시(鄭蓍)를 죽이고, 흉봉(凶鋒)을 마구 펼쳐 사방으로 나가서 겁략을 하면서 잇달아 정주(定州)·박천(博川)·태천(泰川)·곽산(郭山)·선천(宣川)·철산(鐵山)·용천(龍川)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있는데, 그 세력이 심히 성합니다.’라고 하였기에 놀라움을 견디지 못하여, 이에 의거해 즉시 그 절도사가 도내(道內)의 병변(兵弁)을 전파(專派)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나아가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원임 대장(原任大將) 이요헌(李堯憲)을 차임하여 양서(兩西)·개부(開府)·왕성(王城)을 순무(巡撫)하게 하고, 선봉 유효원(柳孝源)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적들을 토멸하게 하였습니다.
이달 29일에는 안주 병우후(安州兵虞候) 이해승(李海昇) 등이 박천 지경으로 진박(進薄)하여 적병을 대파하니, 적들이 마침내 밤에 달아나 정주성으로 들어가 웅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유효원 등은 경외의 군사를 나누어 보내 본성(本城)을 에워싸고 있고, 곽산 군수(郭山郡守) 이영식(李永植) 등을 조발해 보내어, 의주 영병장(領兵將) 김견신(金見臣)과 허항(許沆) 등과 회합(會合)해 선천과 철산 등의 지방에 주둔한 적들을 초격(剿擊)하게 했던 바, 적장(賊將) 김창시와 이제초 등을 참하고 정경행 등을 생포하여 함거(檻車)로 왕성에 보냈습니다.
함락된 바 열군(列郡)도 모두 수복되었는데, 오로지 정주 한 성만이 함락되지 않아 저윽이 도적들이 험한 지형을 믿고 흉악한 짓을 할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약 독전(督戰)하면 안행(顔行)3042) 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여러 장령(將領)들에게 신칙하여 목책(木柵)을 세우고 매복을 설치해 함부로 진격하지 못하게 하고, 흉추(凶醜)들이 향화(向化)하여 잘못을 고쳐 변할 줄을 알게 만들려고 했습니다만,
단지 저 적이 악을 쌓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어리석고 사나와 뉘우치지 않는지라 몇 달 동안 계속 포위하여 사졸들이 폭로(暴露)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것을 걱정하고 고민하여 밤낮으로 안절부절하던 차에 성명(聖明)께서 소방을 굽어 보호하시는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특별히 도통(都統)에게 하유하여 변문(邊門)과 강 연안의 험한 곳에 진거(鎭據)하여 순사(巡査)·방수(防守)토록 하셨던 것입니다.
천위(天威)가 미치는 바에 흉도(凶徒)들의 간담이 떨어졌고, 황령(皇靈)이 도우시는 바에 장사(壯士)들이 더욱 용감해져, 이에 이해 4월 19일에 그 성을 공파(攻破)하고, 적괴 홍경래 등은 잡아서 참하고, 적의 선봉 홍이팔 등은 생포하여 칼을 씌워 왕성으로 보냈으며, 적의 소굴을 소탕하여 남은 흉추들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흉적들이 성을 차지함이 본디 굳어 오랫동안 관병에 항거하였으니, 만약 천조(天朝)에서 굽어 자휼(字恤)하시어 성무(聖武)를 혁연(赫然)히 펼치지 않았더라면, 소방의 미약한 힘으로 어떻게 제때에 초멸(剿滅)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대소 배신(陪臣)과 함께 승첩(勝捷)의 소식을 듣자마자 더욱 황은(皇恩)을 찬송하고 감격해 마음에 새겼습니다만,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의정 대신(議政大臣)이 조사해서 아뢴 데 의거하건대, ‘이번의 역변(逆變)은 평소 쌓아온 별다른 모의가 아니라 모두 불령(不逞)한 추류(醜類)들이 처음에는 산골짜기의 잠채(潛採)하는 무리들을 꾀고, 마침내는 흉년의 유개(流丐)가 된 백성들과 체결(締結)해 기회를 타서 절발(竊發)하고 갑자기 창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봉채(蜂蠆 벌과 전갈. 작지만 무서운 것)의 독에 쏘여 여러 군(郡)이 분궤(奔潰)하여 마침내 성조(聖朝)에 근심을 끼쳐 동쪽을 돌아보게 만들었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두려움을 견딜 수 없나이다.
이제 수모(首謀)한 역적 이희저·우군칙·정경행·김사용·홍이팔 등과 지당(支黨)인 정성한(鄭聖翰)·정복일(鄭復一)·최봉관(崔鳳寬)·김이대(金履大)·윤언섭(尹彦涉)·양시위(楊時緯) 등에 대해 전형(典刑)을 밝게 바르게 하고, 그 밖의 한 번이라도 관련된 자 및 연좌된 지속(支屬)은 그 경중에 따라 의의(議擬)하여 허물을 단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속으로서 법망을 빠져 나간 자들에 대해서는 따로 집포(緝捕)하는 것 외에 위에서 말한 전말을 천청(天聽)에 아뢰는 것이 실로 편익(便益)하겠습니다.’라고 하였기에 이에 의거해 갖추어 아뢰는 것입니다.
이제 저윽이 찬찬하게 생각하건대, 신은 선조의 서업(緖業)을 이어 지키면서 이런 역란(逆亂)을 만났으니, 신의 부덕이 환란을 방지하는 데서 실수한 소치가 아님이 없는지라, 제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허물하건대 마음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소방의 변고는 진실로 감히 진독(塵瀆)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신이 용렬함에도 능히 흉추를 섬멸한 것은 실로 황상(皇上)의 위덕(威德)이 멀리까지 입혀져 이미 내복(內服)과 같은 데 힘입은 것이며, 또 전례가 있어 무릇 크고 작은 사정에 관계된 것을 상문(上聞)하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전후의 사장(事狀)을 감히 이렇게 진주(陳奏)하는 것입니다.
신이 지극히 긍황(兢惶 조심스럽고 황공해 함)하고 병영(屛營 방황하는 모양)하는 것은, 소방이 불행하여 흉역이 난을 일으킨 나머지 주토(誅討)한 전말을 두루 진달하여 황람(皇覽)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리가 이러한지라,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홍경래의 난
조선 후기에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1728년(영조 4)의 이인좌난(李麟佐亂)은 주도층이 비록 과격한 소론 중심의 지배층이었지만 중간층 및 하층민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기층 세력의 저항이 격화되는 양상을 반영하였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지역민들의 불만이 더욱 컸다.
홍경래는 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多美面)의 평민 출신으로 평양 향시를 통과하고 유교와 풍수지리를 익힌 지식인이었다.
입신양명을 위해 한양에서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당시 한양에서 치뤄지는 대과에서 시골 선비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평안도 서북출신인 홍경래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초 서북출신들은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등용되지 못했고 이후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다.
이런 현실에 낙담하여 세상을 바꿀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경래는 봉기 10년 전부터 각처를 다니며 사회 실정을 파악하고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비슷한 성격의 지식인이자 상인인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 가문 출신의 지식인 김사용(金士用)·김창시(金昌始), 역노(驛奴) 출신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李禧著), 장사로서 평민 출신의 홍총각(洪總角)과 몰락한 향족(鄕族) 출신의 이제초(李濟初) 등이 최고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의 신분과 생업은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용력을 갖춘 지식인이 총지휘를 하고 저항적 지식인이 참모를 맡았으며, 부호가 봉기 자금을 대고 뛰어난 장사들이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楊時緯), 영변의 김운룡(金雲龍)을 비롯한 장사들이 군사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金惠哲), 안주의 나대곤(羅大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鄭敬行), 선천의 유문제(劉文濟)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嘉山)의 대정강(大定江) 인근 다복동(多福洞)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군사력과 군비를 마련한 주도층은 1811년(순조 11) 12월 15일에 봉기하기로 결정하고 평양 대동관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행하였다. 하지만 화약통의 불발로 계획이 성사되지 못하고 12월 18일에 다시 거병하였다.
홍경래가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우군칙이 총참모, 김창시가 참모,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都摠)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선봉대를 맡은 홍총각은 단숨에 가산·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의견 대립으로 홍경래를 살해하려는 세력들이 발각되어 김대린 등이 처형되었다. 봉기군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느라 전략적 요충지인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안주의 관군과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격돌하였으나 패하였고 그날 밤 정주성으로 퇴각해 들어가 전략상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관군의 노략질을 두려워한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겨울 정주성으로 쫓겨간 봉기군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식량이 떨어져 죽는이가 속출했다. 그 후 정주성의 봉기군은 서울에서 파견한 순무영(巡撫營) 군사와 지방에서 동원된 관군의 연합 부대에 맞서 전투를 계속하면서 오랫동안 성을 지켰으나, 땅굴을 파들어가 성을 파괴한 관군에 의해 1812년 4월 19일 진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서울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지도자들이 내세운 봉기의 이념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鄭眞人)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토호 관속을 향해서는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전개 과정에서 일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그러나 이 농민항쟁은 당시 사회 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지식인과 장사들이 주체적으로 봉기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세 말기의 지배체제를 허물어가는 데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그 후로도 사회 변혁 세력은 민중들의 희원을 담아 홍경래가 죽지 않고 섬에서 봉기를 준비한다고 믿고 있었다.
[출처] 홍경래의 난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