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놓은 덫, 의인의 소명
지혜 2,1-22; 요한 7,1-30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2024.3.15.
악인들은 의인을 모함하려고 덫을 놓는데 그로 인해 의인은 고난에 빠집니다. 하지만 의인은 신앙으로 그 고난을 받아들이면 그뿐, 악인의 덫에서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제 꾀에 빠지면 자기가 놓은 그 덫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인 지혜서에서 저자는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내부에서 겪어야 했던 박해를 모함의 덫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덫을 놓는 악한 유다인들이 자기 꾀로 만든 그 함정에 빠진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최고의회에 속한 권력층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피해 초막절에서 군중을 상대로 직접 생명의 물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셨습니다. 진리의 권위는 겸손하게 하느님께로 돌리시면서 당신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군중을 설득하고자 하셨는데, 중산층이자 여론주도층인 예루살렘 유다인들은 아직도 그분을 믿지 못하고 눈치 보며 망설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그에 응답하여 선택을 받고서도 그에 합당한 역사를 이루어내지 못해 답답해하던 이스라엘 역사의 의인들이 비록 모함도 받고 악인의 덫에 갇혀 고난의 삶을 살아갔지만, 그 덕분에 인류와 교회는 구약성경이라는 귀하디 귀한 보물을 역사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지녔던 이름에서 유래된 우리의 세례명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나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한이나 마리아 등 같은 이름들이 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서양식 이름인 줄 알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만난 이스라엘의 의인들 이름이거나 또는 그로부터 유래된 이름들이지요. 아브라함은 에이브러햄 링컨에서 계승되었고, 이사악은 아이작 뉴턴에서 또 야곱은 제임스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는가 하며 요한은 존 내지 쟝 같은 이름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워낙 대중화되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존귀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감은 우리의 명예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의인들과 같은 고난의 운명을 겪으셔야 했고 끝내 십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죽음을 물리치는 부활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축제를 맞이하여 군중에게 생명의 물에 관한 가르침을 펴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면서도 최고의회 의원들의 눈을 피하는 작전을 펴셨고, 당신이 고난을 당해야 함을 아시면서도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적 깨달음을 주시려고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십자가가 주어질 무렵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순순히 그 고난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이 용기야말로 그분의 진면목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야말로 그 이전의 어느 의인도 불평 없이는 해내지 못했던 모습이요 그래서 부활한 사랑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한 사랑으로써만, 세상의 죄악에 대한 의로운 분노로써만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굳센 용기와 담대한 믿음으로 본받아야 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겠습니다. 백 년 간의 박해로써 민족 사회로부터 한국 천주교가 받았던 모욕과 고통은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쟁취함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민족이 외세의 지배를 받고 분단된 채로 전쟁과 독재의 굴레를 뒤집어써야 했던 또 다른 백 년의 역사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민주 정부가 힘겹게 들어섰던 지난 20여 년 동안, 독재정부가 쌓아놓은 쓰레기를 청소도 하고 설거지까지 하면서 사회의 구조는 물론 시민들의 의식구조까지 민주화시켜 자신감을 불어 넣은 결과 산업과 경제에 있어서, 국방안보 그리고 외교에 있어서, 문화와 정치에 있어서까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속도로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갔던 대한민국의 국격이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겨우 2 년 만에 목도한 국격의 추락은 물론 내정의 실패, 경제의 폭망과 물가 폭등, 구걸외교의 참상과 연달은 국제적 망신, 국민적 자부심의 훼손, 게다가 과도한 검찰권 행사로 사회 공동선마저 무너지는 이때에도 십자가의 진리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고난은 의로움을 드러내야 하는 계기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로움을 드러낼 것입니까? 악인들이 놓은 고난의 덫에서 의인으로서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예수님처럼 작전이 필요합니다.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지금은 현 정권의 터무니 없는 폭정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선거에서 정치적 심판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정치의 발전이나 공동선의 증진을 불가능합니다. 주권자들이 투표로 민심을 드러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적 상상력으로 기획을 해야 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성장을 하는 한편 사회와 소통을 하면서 필요한 조직도 해야 하며, 사후 평가도 하고 반성과 성찰을 반영하여 조정을 해서 조직의 재생과 발전을 꾀하는 일은 무릇 공동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어느 조직과 단체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요청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요구되는 역량입니다. 특히 민족복음화의 과업을 앞두고 2백 년 만에 모처럼 상승했던 국운이 추락하고 사회 공동선까지 무너지려 하는 이 위기를 맞이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위기는 곧 지나갈 것입니다. 그래서도 개별 신앙인이건 전체 교회이건 예외없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역량이 십자가 속에서 부활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중요합니다. 굳센 용기와 담대한 믿음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