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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1-35 야곱이 라반에게
본문은 야곱이 끌려간 이중 결혼장면과 레아가 야곱에게서 낳은 아들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라반이 행한 처사가 극히 비루하였던 것을 보여줍니다.
(1) 야곱에게 라헬을 주기로 약속하였던 것을 위반하고 레아를 준 사실이 그렇습니다.
(2) 라헬을 또 다시 보수를 받고 팔아먹은 일, 또한 그렇습니다.
라반은 이렇게 물질에 대한 탐심과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족속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결혼을 통하여 난 야곱의 열두 자녀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게 하시고 자기 택한 백성으로 세우셨습니다.
1. 본문 21-24절은
“(21)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겠나이다
(22) 라반이 그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하고 기다린 후에 결혼을 요청합니다. 그 일을 위해 잔치가 배설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만찬이 준비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당시 혼인 풍습대로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라반은 틀림없이 이 잔치를 성대히 치루기 위해 아주 열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염치를 의식하는 방식에 묶어두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야곱이 속아서 혼인한 것을 알더라도 감히 그 혼인을 멸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혼인 잠자리가 종교적인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속임을 당한 것은 바로 혼인 잠자리 풍습 때문이었습니다. 신부의 정결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 당시 신부는 얼굴을 가리운 채 혼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옛날 기율이 배격 당하고 있는 요즘에는 사람들이 거의 금수로 화하고 있습니다.
2. 본문 25-26절은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26)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입니다.
야곱이 자기에게 가해진 기만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라반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구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행한 사기에 대한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합니다. 큰 딸보다 작은 딸을 먼저 혼인시키는 것은 그 당시 풍습이 아니었습니다. 이 관습화된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그것은 처음난 자에게 대한 불평등 행위가 될 터였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라헬을 야곱과 정혼시키고 나서 교활하게 레아를 대신 신방에 들여보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적당한 때에 야곱에게 생각을 레아로 바꾸도록 주의를 주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그 둘 중 어느 하나와 혼인하는 것도 금지시켰어야 옳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례에서 간사한 악인들이 진실에서 곁길로 벗어날 때에는 한없이 범죄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속이는 중에도 비난과 책임을 면할 심산에서 항상 어떤 구실을 내놓기 마련입니다. 라반은 전에도 자기 생질에게 부당한 일을 행했습니다.
라반은 자기 딸을 미끼로 야곱에게 칠 년간의 수고를 요구했습니다. 또 부당하게도 자기 딸을 지참금도 주지 않고 팔아 넘긴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가치한 행위는 표리부동하게도 자기 생질과 혼인 약속을 맺는 딸을 빼돌려서 결혼의 신성한 율법을 외곡시키고 아무 것도 무사히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형보다 아우를 우선적으로 혼인시키는 것이 그 나라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기 행위를 명예롭게 이 방어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3. 본문 27-29절은
“(27)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 여종 발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입니다.
라반은 이제 악에 대해 무감각해졌습니다. 자기 생질한테서 또 칠년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작은 딸 라헬과 혼인을 허락해 줄테니 칠 년을 더 봉사하라고 합니다. 만약 라반에게 딸이 열명 더 있었더라면 아마 그는 기꺼이 이런 식으로 그 모두를 처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불법적인 매매결혼의 수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이익의 원천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딸도 장사하는 대상물로 내어 밉니다. 그는 자기 생질을 일부다처제로 몸 담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과 자기 딸들을 근친 결혼으로 오염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무서운 죄를 짓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굳이 사랑하지 않고 배척하는 경우 아내를 죄수처럼 가두어 두고 둘째 아내를 맞아 들임으로써 수많은 근심과 슬픔을 주느니 차라리 그 아내와의 인연을 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중혼보다 이혼이 더 용납할 만하다고 선언하십니다(말2:14). 이삭의 경우처럼 라반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자기 두 딸로 하여금 평생을 서로 반목질시하면서 살게 만듭니다. 그는 또 두 자매를 한 혼인 침상에 던짐으로써 모든 자연 법칙을 외곡시켜 버립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 서두에서 이런 범죄를 그들 앞에 제시하는 이상 그들은 자기들 귀족 의식에 들떠서 거룩한 조상들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이 아무리 훌륭했다고 해도 그에게는 순수하지 못한 근원에서 나온 자손 외에 달리 자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에 어긋나게도 두 자매가 한 침상에서 뒤섞이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 외에도 두 첩이 그 무리에 가세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대로 이런 방종은 동양 여러 민족 사이에 아주 흔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 욕망대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가하신 결혼 법칙을 타락한 관습에 따라서 파기한다는 것은 용인 받지 못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어느 모로 보든지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결혼에 대한 불가피성이 야곱이 행한 잘못에 대해 어느 정도의 변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대한 비난을 완전히 씻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레아를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합법적인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남녀 상호간에 동의가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실수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야곱에게도 과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아무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또 야곱은 그녀에게서 자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싫어하면서도 자기 아내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중혼에 의해 자기 잘못을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또 근친결혼에 의해 삼중으로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라헬에 대한 사랑이 야곱의 마음에서 일단 불붙기 시작하자 그는 절제심도 판단력도 소유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에 대해서 해석가들은 구구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이 지시대명사가 일 주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레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야곱은 레아와 일주간을 함께 보낼 때까지는 라헬을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라헬에 관한 말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야곱은 칠 년간을 더 봉사해야 라헬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라반이 칠 년의 기한이 다 찰 때까지 혼례식을 연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야곱이 새로운 봉사를 계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4. 본문 30절은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입니다.
모세가 야곱이 가진 죄를 나타내 보이려고 의도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우리 모든 행위를 하나님 말씀의 유일한 규칙에 맞추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족장들도 그토록 심하게 실족한다면 하나님의 수호와 돌보심이 지켜 주시지 않을 경우, 우리들 중 어느 누구가 그 같은 실족에서 안전합니까?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소홀히 보면서 그저 막연하게 신앙의 조상들을 모방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매한 카톨릭 교도들은 이런 것을 모방하고서 크게 즐거워합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행한 것이라 싶으면 무엇이든지 율법으로 간주하기를 서슴치 않습니다. 그 외에도 그들은 그런 자손이라고 할 만한 자들을 조상으로 인정합니다. 그들에게는 정신 없이 날뛰는 수도승이 모든 족장들보다 더 중요한 존재입니다.
레아 편에도 그녀가 남편에게 멸시받았다는 것은 그녀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징계하신 것은 지당하신 일이었습니다. 레아는 자기 아버지의 사기 행위를 번연히 알면서도 자기 동생의 남편 될 자를 소유하는 불명예를 감수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아의 과실도 야곱의 욕정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5. 본문 31절은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야곱의 지나친 사랑이 여호와께 징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도들의 애정이 도가 지나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이 채찍으로 길들이게 됩니다. 라헬은 남편 야곱에게서 총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총애는 자기 언니에게 돌려야 할 영예를 돌리지 않고 부당하게 대우함으로써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레아의 변호자로서 등장하십니다. 또 적절한 치료 방책으로 야곱의 마음을 그가 극히 싫어하는 방향으로 돌리십니다. 라헬에게는 자식을 주시지 않고 레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또 이 구절은 우리에게 자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하신 은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한 사람은 자녀를 많이 낳게 하시고 다른 사람은 아이를 전혀 낳지 못하게 저주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자녀 출산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화해를 돕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관찰해야 합니다.
아이로 인해 고대인들 역시 자녀를 부부 사이에 두신 ‘서약’ 혹은 ‘담보물’ 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자녀들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을 증가시키고 소중히 간직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야곱이 레아를 미워한다고 주장할 때 그가 말하는 의미는 레아가 의당 받아야 할 사랑만큼 총애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용납 받지 못할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 또한 그녀를 증오하면서 따라다니지도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의 사용을 통해서 야곱이 행한 과오를 더욱 더 증대시킵니다.
야곱은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 첫 아내에게 충분한 자애와 존귀로서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일 정도의 증오심으로 자기 행위가 폭발되지 않는다면, 자기 의무를 다 이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충분하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는 미움을 받는 자라고 선언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우리는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자 이외에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증오하는 죄를 범한 자로 간주될 것입니다.
남몰래 불쾌해 하는 것도 증오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형제에게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태만한 것과 아직껏 세상에서 판을 치고 있는 냉담한 자비심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누구라도 다른 사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에 비례하여 보다 신성한 사랑의 결속으로 서로를 굳게 붙잡아 주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더욱이 결혼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이 공공연하게 불화가 있을 수는 없더라도 만일 서로의 애정이 냉담하다면 이렇게 불쾌해 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것 역시 증오와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본문 32-35절은
“(32)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입니다.
모세는 레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기술합니다. 사실 당시는 요즘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보편적으로 감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거의 모든 사람의 미음이 세속적인 무감각에 점령당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말이나 소처럼 하나님께서 인자하신 가운데 내려 주시는 모든 은총을 집어 삼켜 버리고 그저 모른 척 합니다. 레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자기 다산에 대한 장본인으로서 인정하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이유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레아 자신의 고난을 돌아 보시었다고 말합니다. 또 자기 남편의 애정을 끌어오도록 하기 위해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아가 자신이 멸시 당하는 줄 알았을 때 하늘로부터 더 많은 구조를 받기 위해서 기도에 의지했을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사람들이 이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하지 않는 것까지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쪽으로까지 나아간 자는 하나님의 더 크신 은총과 위대하심에 감사하는 자로 남을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들한테 부여하신 모든 은총을 게으름으로 인해 망각 속에 묻어버리는 자입니다. 레아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에 대한 기념물로 삼습니다.
이는 그녀가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로서 스스로 분발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사람들에게 부당한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여호와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고 존중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본문 말씀은 신자들에게 유난히 유익한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신자들은 대다수가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오만불손한 취급을 받을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더욱 호의를 베푸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기들을 위한 피난처를 삼아야 합니다.
레아는 자기 둘째 아들에 대해서도 꼭 같이 처신하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차자에게 ‘들으심’ 이란 의미가 있는 이름을 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한숨을 들어 주셨다는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을 때 그녀는 자기 근심과 슬픔을 하나님 품에 맡겼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레아는 자기 셋째 아들에게는 ‘연합함’이란 의미가 있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자기와 남편 사이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연결이 개입되어 남편에게서 사랑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녀는 자기 넷째 아들의 경우에서도 다시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그녀는 넷째 아들에게 ‘찬송함’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자기에게 특별하신 호의를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녀는 그 이전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찬송할 더욱 풍성한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다는 것을 단지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방법으로 자주 깨닫고 있습니다.
사실상 레아는 라헬처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사 낮아진 자를 높여주십니다. 낮은 자리에 처한 자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감지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데 그것을 쉬임 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1:9-10절에 말하기를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감지한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말한 바 찬송과 감사는 모든 성도들의 모든 삶의 정황에서 드러나게 되는 “마무리” 라는 뜻으로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제하고서 나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