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울음 숲
강소이
종로 지하도 광장, 붉고 푸른 의상 작은 키 남자, 잉카제국의 산뽀니아 붉은 소리 들린다
소리는 계단을 따라 올라 햇살 속으로 사라진다, 하늬바람에 머리카락 엉키듯,
산뽀니아 피리 앞에 놓인, 검게 절은 헝겊 바구니 너댓 동전닢이 지하도 어둠 속을 밝히고 있다
지하계단 끝난 곳, 파뿌리처럼 하얀 노파들이 상추며 고구마줄기 산 앞에 쭈그리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 길 맑은 어둠이 눌렀다, 붉은 치마 뒤집어 두르듯.
아치 모양 금강교 밑으로 흐르는 물결마다 달이 찍혔다
자잘한 자갈돌 씻고 뚫어 흐르는 물결들의 모세혈관,
모세혈관 하나하나에 금강검金鋼劍으로 박히는 달빛.
다리 아래로 흐르는 달빛들의 혈관과 혈관을 타고 월정사 물결 속에서 피리 소리
가을이 물결따라 팔딱이는 것을 본다
현저동 앞 안산 오월 햇살이 에두른 서대문 독립공원 한나절.
아파트 나서면 공원으로 소나무길, 솔잎 사이사이로 붉은 벽돌들.
길에는 앞뒤 섞여 유모차 끌며 오가는 젊은 여인들 웃음소리, 공원 연못에 작은 새가 꽁치 찍어 날아간다, 가볍다
맷돌 모양 분수에서 솟는 오월의 솔 향.
솔길 따라 독립공원 서대문 형무소 길, 안에서 맷돌 심문에 갈렸을 붉은 손톱을 생각한다, 몹시 아프다
서대문 공원은 허여멀건 여인들 목덜미와 다시 아기들의 옹알이로 찰찰거린다
솔향기 실어오는 붉은 칸타타 소리, 현저동 길
* 산뽀니야 : 페루의 악기. 길이가 다른 대나무 조각 6~7개르 나란히 이어 만든 취주악기로 팬프룻과 유사하나 음색의 그윽함은 산뽀니아가 더 깊다.
* 칸타타 :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내용을 몇 개의 악장으로 나누어 구성한 큰 규모의 성악곡.
사북역
사북역에 내려 막차가 올 때까지
기찻길에 서너 시간을 앉아
검은 역사驛舍에 풀꽃들만
가슴에 담는다
폐광이라도 보고 싶다고 편지해 놓고
사자 혀보다 붉은 노을
기차에 가득 싣고
청량리역에 붉게
내려 본 적이 있는가
낮은 땅 사북역
석탄가루와 소주
비곗덩어리 돼지고기로
검은 가루이야기 발라낸
노을 이야기
사북역 막차
문밖에 세워진 기억
하오 2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서둘러 올라타는 외포리 선착장
가을 햇살 아래서 중년여자가 깡마른 남자 팔을 잡아 흔든다
"배 타고 싶어, 저 배를 타고 싶어, 저기 저 사람들은 배를 타고 있잖아, 저렇게 차도 배에 싣고" 가을 한 날 코맹맹이 중년 여자가 핑크빛 스카프로 가을빛을 가르는 소리
배는 떠나고 하얀 갈매기들도 따라 떠나고, 남겨진 것은 그녀와 깡마른 사내의 그림자만 늘어진 외포리 선착장
가슴에 숨겨 온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는다
하얀 색으로 변한 해가 빨간 노을에 스러질 무렵
가슴팍으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개펄에 버렸던 기억의 뼈들.
얼어붙은 뼈 깊숙이 파고든다 문밖에 세워진 서늘한 기억의 가시들이.
평생 개펄에 주눅이 든 그녀는
가슴 속 노을이 허물어지기를 기다린다
허물어지는 낮은 툇마루에 걸리는 어둠,
그녀는 혼자 가슴에 소주를 붓는다.
냉동실 깊숙이 숨겨두었던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다
강화도 지석묘
청동시대 돌 속에서 걸어 나온 한 사내
기운 햇살 아래, 땀을 닦는 고인돌 사내가 하얀 그녀를 보고 있다.
- 『시문학』2013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