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 보도·연재(報道·連載) ▷ 기획·연재(企劃·連載) ▷ 기사(記事)]
음악대 결성 70주년 묘음(妙音)을 울리는 광포의 악웅(樂雄)
2024년 5월 6일
https://www.youtube.com/watch?v=ERFK3rooFgQ
1954년 5월 6일,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제안으로 음악대(音樂隊)가 결성되었다. 3일 후인 9일, 대원 십 수 명으로 첫 출동. 음악대의 날의 연원(淵源)이다. 현재 취주악(吹奏樂), 관현악(管絃樂), 마칭, 합창, 경음악(輕音樂), 태북 등 100여 개의 단체가 소속되어 명실상부한 일본을 대표하는 청년 음악단체로 발전했다. 또 세계 30여 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도 음악대가 활약하고 있다. 결성 70년의 발걸음 - 그것은 이케다 선생님과 혼(魂)의 공명(共鳴)을 계속 울린 공전(共戰)의 발자취(足跡)다.
혼(魂)과 혼의 공명음(共鳴音)
“훌륭한(뛰어난) 종교(宗敎)가 있는 곳, 반드시 위대한 문화(文化), 예술(藝術)이 태어난다.” - 이것은,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신념(信念)이다.
1954년, 청년부(靑年部)의 실장(室長)에 취임한 이케다 선생님은 음악대(音樂隊) 결성(結成)을 제안(提案)했다. 선생님은 결성에 대한 생각을 적었다.
“힘찬 음악의 선율은 광선유포(廣宣流布)를 위해 나아가는 동지(同志)의 마음을, 얼마나 고무(鼓舞)시키고 용기(勇氣)를 북돋아 주는지 헤아릴 수 없다.”
“숙려(熟廬: 심사숙고)에 숙려를 거듭한 끝에, 음악대(音樂隊)는 절대(絶對)로 필요(必要)하다는 결론(結論)을 내렸다.”
주위는 “음악이 광선유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난색(難色)을 표했다. 그러나 도다(戶田) 선생님은 애제자를 신뢰해, “다이사쿠(大作)가 하겠다면, 하게나!”라고 찬동(贊同)했다.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師弟)의 호흡(呼吸)에 의해 음악대는 결성된 것이다.
그해 5월 6일, 탄생한 음악대는 사흘 뒤인 9일, 5000명이 넘는 청년 모임에 첫 출동(出動)한다.
악기는 빌린 것. 제대로 된 시설도 없었다. 악보(樂譜)를 읽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게다가 당일은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럼에도 십 수 명의 대원(隊員)들은 흠뻑 젖으며 학회가(學會歌)를 연주했다.
음악대의 열연(熱演)에 맞춰 이케다 선생님은 지휘를 잡았다. 이케다 선생님과 ‘혼(魂)과 혼(魂)의 공명음(共鳴音)’을 울리는 것으로, 음악대의 발걸음은 시작됐던 것이다.
이케다 선생님은 음악대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테이케(Carl Albert Hermann Teike, 1864~1922) 작곡의 행진곡 ‘옛 친구’의 연주다. 그 마음을 “그대들이야말로 영원히 신앙(信仰)과 음악(音樂)으로 맺어진 ‘옛(오랜) 친구’다, 라는 의의(意義)를 호소하고 싶었다.”라고 적었다. 나중에 음악대 벗이 ‘옛 친구’를 피로(披露)하자 선생님은 최대로 상찬했다.
1957년, 홋카이도(北海道), 간사이(關西)에서 음악대가 탄생. 이듬해인 1958년에는 규슈(九州)에서도 결성되었다.
출진(出陣)의 동라(銅鑼: 징)와 같이
오사카(大阪)를 흐르는 도지마가와(堂島川)의 강변에서 음악대의 유지(有志)가, 무고한 죄로 오사카구치소에 구류(拘留)되어 있던 이케다 선생님에게 전하려 하듯 학회가(學會歌)를 연주했다.
1957년 7월 17일 이른 아침, 그들은 도쿄(東京)에서 야간열차로 오사카에 도착했다. 누군가에게 지시받은 것은 아니다. 스스로 발안(發案)하여 자신들의 의지로 용기를 내어 오사카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멤버들은 구(舊) 간사이본부에서 근행(勤行)을 마친 후, 나카노시마(中之島)의 오사카시(大阪市) 중앙공회당(中央公會堂)으로 향해, 연주를 개시했다.
선생님은 술회했다.
“그날(1957년 7월 17일)은 일찍부터 음악대(音樂隊)가 있는 힘을 다해 학회가(學會歌)를 연주(演奏)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부당한 구치(拘置)에 대한 분노(忿怒), 즉시 석방(釋放)의 외침을 담은 울림이었다. 이런 동지의 진심(眞心)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958년 3월 16일, ‘광선유포(廣宣流布)의 기념식전(記念式典)’ 종료 후, 이케다 선생님은 음악대에게 “참석한 벗을 배웅하자.”라고 제안. 선생님 스스로 행진하는 음악대의 선두에 섰다. 웃는 얼굴로 연주하는 대원이 뒤를 이었다. 이케다 선생님과 음악대에 의한 ‘이체동심(異體同心)의 퍼레이드’였다.
버스로 귀로(歸路)에 오르는 청년들을 배웅하자 선생님은 음악대장에게 의뢰했다.
“미안하지만 한 곡 더 연주해 주지 않겠나. 2층에 도다(戶田) 선생님께서 계신다.”
음악대는 도다 선생님께서 사랑한 ‘성락추풍오장원(星落秋風五丈原)’을 연주했다. 도다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맹세가 넘치는 선율을 들으며 이케다 선생님은 가슴속으로 은사에게 외쳤다.
“청년부(靑年部)는, 제자들은 의기헌고(意氣軒高)합니다. 안심해 주십시오!”
이듬해인 1959년 4월, 도다 선생님의 1회기(回忌) 법요(法要)에서, 음악대(音樂隊)·고적대(鼓笛隊)는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은사(恩師)의 묘전(墓前)으로 향해, ‘성락추풍오장원’을 연주. 성묘한 벗의 보은(報恩)의 노랫소리가 높이 메아리쳤다.
선생님은 말했다.
“음악대, 고적대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동안은 창가학회(創價學會)는 괜찮습니다.”
이 만감(萬感)의 기대(期待) 그대로, 음악대는 동지에게 용기를 보내는 희망(希望)의 선율을 연주해 간다. 1960년 5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의 제3대 회장 취임식도 음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졌다.
취임식을 마치고 이케다 선생님의 퇴장에 맞춰 연주된 것이 ‘위풍당당(威風堂堂)의 노래’였다. 출진(出陣)의 동라(銅鑼: 징)와 같이 우렁찬 음률(音律)이 회장을 울렸다.
둘도 없는 전우(戰友)
1964년, 이케다 선생님은 월간지 「제3문명」 8월호에, ‘음악대에게’를 기고(起稿). 현재의 ‘음악대훈(音樂隊訓)’이다. 선생님은 호소했다.
“힘든(괴로운) 동지(同志)에게, 고민하는 동지에게 희망(希望)을 주고 용기(勇氣)를 주는 음악대(音樂隊)의 사명(使命)을, 다해 주길 바란다.”
음악대의 벗이, 이 구절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은 것이,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때다.
도호쿠(東北) 음악대의 벗은 지진재해(地震災害)가 발생한지 23일 후, 미야기(夜氣) 이시노마키시(石巻市)의 중학교에서 연주회를 실시했다. 자신도 피해를 입었으면서, ‘음악대의 사명’을 완수하자고, 일어선 벗도 있었다.
지진 재해로부터 2년이 경과한 2013년, 음악대는 ‘복광(福光)의 봄 콘서트’를 개최. 이듬해인 2014년 3월에는, ‘희망(希望)의 유대(絆)’ 콘서트를 처음 열었다. 현재까지 도호쿠를 비롯해 극심한 재해 등으로 피해를 입은 전국 79개 시구정촌(市區町村[시쿠죠손])에서 총 7만8000명 이상이 감상했다.
2015년 5월 6일, ‘음악대 결성의 날’에 즈음해, 이케다 선생님은 지침을 보냈다.
“음악대는 모두, 나의 둘도 없는(가장 소중한) 전우(戰友)다. 어떤 폭풍우에도 절대로 겁내지 않는 불패(不敗)의 악단(樂團)인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음악대(音樂隊)의 혼(魂)은 ‘사제(師弟)’다. 스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하여, 벗은 마음을 닦고, 기술을 연마해, 사제(師弟)의 개가(凱歌)를 계속 연주한다.
〈지침 「음악대가 있어 창가(創價)의 개가(凱歌)가 있다」에서〉
“내 마음을 누구보다 아는 그대들의 역주(力奏: 힘찬 연주)에 맞춰 학회가(學會歌)의 지휘를 잡아온 한번 한번이 잊을 수 없는 사제(師弟)의 세션(session: 연주)인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하신 선생님이 음악대를 만드신 역사를 읽고 깊이 감동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의노고에 진심으로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항상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