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세종시대의 측우기에 대한 박성래 교수의 글입니다.
요약하자면..
조선의 측우가가 조선과학의 근거가 아니라는 주장인데...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전문가들뿐만아니라 과학자들도 대부분이 공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감은 조선 측우기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편견에 불과합니다.
물론 측우기가 단순하게 강수량의 측정도구에 불과하다면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환단역학의 측정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라에서는 금척이라고 했습니다.
수학적인 우주모형도입니다.
이를 실물로 모형화한 것이 바로 앙부일구입니다.
부연하자면...
당시 금척의 원리에 맞게 실제로 제작한 분은 장열실이지만...
그 설계자는 이향입니다.
바로 문종대왕입니다.
그 분이 실제의 설계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금척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실제 환단역학의 대가인 셈입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세자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첨사원을 세워서 국정에 나서게 한 것입니다.
측우기는 단순하게 강수량을 측정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환단문명의 지도자인 환인과 환웅, 단군의 영혼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종의 측우기는 단순한 측정기구가 아니라는 것은 무엇으로 근거로 주장할 수가 있는것일까요?
바로 환단문명의 천문학은 인류초고대문명의 천문학중에서 도 가자 오래된 것이고 가장 과학적인 역학원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우리 후손들이 알지못할 뿐이지요.
그래서 그 역학모형은 현재에 우리들이 놀이로 사용합니다.
그게 바로 윷판이고 바둑판입니다.
윷판과 바둑판이 바로 환역의 기하학적인 모형입니다.
이를 간단하게 모형화한 것이 바로 측우기입니다.
즉 측우기의 높이와 지름이 아무렇게 설정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주모형을 아주 간단 한 상수로 표현 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우주모형을 간단한 모형으로 표현한 철학자 수학자가 누구인가요?
공식적으로 인전된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동양에서는 정밀한 수학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주비산경입니다.
주비산경과 플라톤의 정다면체가 바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우주모형입니다.
특히 플라톤의 우주모형인 정12면체는 현재에도 공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향의 측우기는 그 정 12면체보다 더 간단하게 표현한 우주모형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증거할 수가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58= 21+ 37의 등식으로 표현합니다.
이 등식은 정12면체와 비교해서 너무도 간단합니다.
삼칠의 수는 우리들에게 아주 익한 한 수입니다.
왜 익숙한 것일까요?
37의 수가 환단역학의 가장 중요한 상수이기때문입니다.
-------------------------------------------------------------------------------
우리 과학기술의 기원이라고 하면 여러 역사적 유물을 떠올릴 겁니다.
첨성대와 금속활자, 거북선, 측우기 등을 예로 들죠.
하지만 과학의 정의를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라고 한다면,
이 사례들은 한국 과학기술의 기원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과학을 지나치게 오래전의 전통적인 현상으로 확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서양의 경우는 조금 나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가는 것 역시 마땅치는 않습니다.
측우기
측우기는 우리나라 전통 과학과 관련해 굉장히 유명한 물건입니다.
그러나 측우기 하나 가지고 과학이 발달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죠.
측우기는 아시는 대로 강우량, 비가 내린 양을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오늘 얼마 내렸고, 그제는 얼마 내렸고 통계를 내기 위해서죠.
그러면 연중 강우량 분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측우기는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문종이 만든 거예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41년 8월에 호조의 건의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세자(훗날 문종)가 이를 만들어서 궁궐 안에서 비의 양을 측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 측우기의 발명자는 문종이라 할 수 있죠.
강우량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또 하천의 수량을 정확하게 재는 것은
근대 과학의 계량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리고 자연 현상의 정밀 측정이란 근대 과학의 시작으로 꼽히기도 하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통계를 낸 사실이 없다는 겁니다.
측우기로 그저 측정만 했어요.
아무리 뒤져도 강우량 통계를 낸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측우기를 조선 과학의 근거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는 17세기에 기압계, 고도계, 온도계, 시계, 망원경, 현미경 등
자연 관측기구들이 발명됐습니다.
이런 관측과 예측을 바탕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죠.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몇 가지의 단편적인 발달이 있었을 뿐,
그것이 근대 과학의 발생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일본과 우리나라는 가깝지만, 불과 200년 전에는 전혀 교류가 없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임진왜란 이후에 열두 번 일본에 갔지만,
그건 일본이 간청해서 간 것일 뿐, 무언가를 교류할 기회는 없었어요.
말이 달라서 커뮤니케이션이 어렵고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일본도 쇄국을 심하게 했고, 우리도 쇄국을 심하게 했어요.
중국에서는 500년쯤 전에 서양 선교사가 이미 드나들었습니다.
1601년에 마테오리치라는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가 중국에 갔고,
그 이후부터 북경에 선교사가 끊임없이 주재를 했죠.
일본은 그보다 조금 뒤부터 선교사들이 와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임진왜란 후에는 수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희생됐지만 그 뒤로는
서양 선교사를 통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에 성공하게 됩니다.
(선교사라기보다는 서양 장사꾼들이죠.)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죠.
중국에서는 마테오리치 이후 1800년대 후반까지
200년 동안 서양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전부 선교사가 중국말을 배워 옮기면 중국 사람이 그걸 한자로 쓴 거지,
중국 사람이 서양말을 배워서 번역한 책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혀 서양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요.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해체신서》. 중국은 일본과 달리 다양한 학문의 발달로
서양의 언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중국은 자신의 나라에 이국적인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서양의 말을 배울 필요도, 문물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아편전쟁의 패배를 통해 군대를 근대화하고,
청일전쟁의 패배를 통해 제도까지 바꿔야겠다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1900년대 초부터는 바꿀 수밖에 없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그 대표적인 노력이 과학이 제일이라는 ‘과학주의’입니다.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중국은 과학주의가 왕성하게 일어나서
1923년에는 대규모의 지식인 논쟁이 벌어지는데,
그게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논쟁입니다.
과학이 중요하냐, 인생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냐는 거였죠.
그 논쟁을 통해 과학과 민주주의가 중국 지식인들의 중심에 자리잡게 됩니다.
과학주의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공산주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전폭적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이 마오쩌둥을 낳게 됩니다. 조선시대에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학갔던 식자들도
이를 통해 공산주의를 알게 되고, 그 영향을 받아 이 운동을 일제강점기에도 했죠.
그 잔재가 결국 해방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된 것이죠.
결국 일본을 통한 서양 문물의 접근은 쇄국 정책으로 힘들었으며,
서양의 문물이 필요 없었던 중국은
전쟁의 패배를 통한 수용으로 과학주의를 낳고
그 영향으로 일본과 우리나라까지 공산주의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