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을 뒤집다, 주인의 무모한 행위를 옹호함
바타유가 헤겔의 이러한 태도에 동조할 리 없었다. 오히려 바타유는 헤겔의 이 거창하고도 의미심장한 부정의 활동이 사실상 덧없는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바타유는 헤겔이 말하는 의미심장한 죽음이야말로 도박과 같은 유희의 측면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 등장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바타유의 거부감에서 잘 드러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어렵기로 소문난 헤겔의 이론 중에서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헤겔이 전달하고자 하는 요지는 ‘부정’ 혹은 ‘죽음’이라는 계기가 인간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삶을 영위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두 명만 있어도 둘 중에 한 사람은 주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노예라는 말이 있다. 이는 원래부터 사람들 사이에 평등한 관계는 성립하기 힘들며 주종의 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인이 되고 누가 노예가 되는 것일까? 사랑하는 연인의 경우에는 상대방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노예가 된다. 아마도 상대방에게 더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그 관계를 청산할 배짱이나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청산된다는 것은 이 사람에게 곧 죽음과도 같은 파국을 의미하며, 그는 이 파국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헤겔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모든 것을 잃을 각오가 덜 된 사람이 궁극적으로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론상으로 두 사람이 치열하게 대립한다면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무모한 사람 앞에 대부분의 사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파국적 결말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사람이 주인이 되며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노예가 된다. 즉 죽음을 도박의 판돈처럼 걸 수 있는 사람이 주인이 되며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인은 승자이고 노예는 패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주는 묘미는 승자와 패자의 역전관계에 있다. 주인은 죽음을 마치 도박의 판돈처럼 놀이의 대상으로 걸었지만, 노예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앞서 말한 대로 죽음의 공포란 인간을 현재의 상태가 아닌 다른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힘, 즉 변증법적 ‘부정’의 힘이다. 사랑의 패자는 사랑이라는 게임에서는 패자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계기를 얻음으로써 실질적인 승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가령 실연은 예술가에게 상처를 주지만 예술적 영감이라는 큰 선물도 안겨준다. 노예의 굴종은 곧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며 주인을 위한 봉사를 통해서 항상 자신을 변화시키고 발전해간다. 이에 반해서 주인은 노예를 부리기만 하면 되므로 오히려 모든 면에서 노예에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과 같은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 할수록 무능력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리하여 주인과 노예의 역전이 발생한다. 주인은 노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죽음에 공포를 느낀 노예는 타의든 자의든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서 자립적인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바타유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주인의 행위를 무의미하고 무모한 행위로 묘사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를 비난한다. 헤겔은 목숨을 거는 주인의 행위가 도박과 같은 무모한 행위이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서 결국은 이러한 무모한 행위가 무의미한 행위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주인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한 것도 ‘부정성(否定性)’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부정성은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부정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부정성은 단지 삶에 대한 위반이자 무의미한 거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헤겔의 철학에서 무모한 것 혹은 무의미한 것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주인이 목숨을 거는 것은 그저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이다.
바타유는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의 본질을 삶에서 웃음이나 무의미, 즉 찌꺼기를 제거하고자 하는 엄숙주의로 보았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부정, 즉 죽음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삶의 자양소가 되는 부정인 것이며 이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노예의 태도에서 발견된다.
반대로 바타유는 헤겔이 무시한 주인의 무의미하고도 무모한 부정에 주목하고 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도박과 같은 무모한 행위이며 삶의 진지한 태도에 대한 위반이자 금기로부터의 일탈이다. 말하자면 삶 자체를 의미심장하게 여기는 엄숙주의에 대한 위반이자 비웃음인 것이다. 헤겔은 노예가 생각하는 죽음에서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지만, 바타유는 죽음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주인의 태도에서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
바타유가 보기에 죽음은 변증법적 부정이라는 위대하고도 사변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저 생물학적인 죽음이자 동시에 삶이 정지되는 사건, 즉 해프닝인 것이다. 말 그대로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처럼 모든 것이 부정되는 사건이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마치 고상하고 숙연한 사건처럼 둔갑시키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다.
바타유에게 죽음은 삶의 의미심장함에 대한 ‘무화(無化, Vernichtung)’이자 비웃음이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은 덧없다. 그렇기에 죽음 자체는 심각한 일일 수 없는 것이다. 바타유는 이렇게 삶의 모든 의미들을 한꺼번에 덧없는 것으로 만드는 부정성 혹은 죽음의 본질을 ‘위반(transgression)’이라고 하였다. 주인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이 무모한 행위는 삶의 진지함을 비웃는 위반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변증법을 뒤집다, 주인의 무모한 행위를 옹호함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