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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취한 연구원들
자동차의 운전법과 정비법을 배웠다고 자동차를 만들 수는 없는 것처럼 추진제 제조 설비가 있고 이 기계들의 운전방법을 알았다고 실제로 추진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론과 기술이 필요했고, 이 기술의 습득은 프랑스를 통해 획득하게 됐다. 이에 앞서 이경서 박사의 의견에 따라 프랑스의 추진제 제조 회사인 SNPE와 ADD는 추진제 제조 기술 이전에 관한 협약을 맺은 바 있는데, 1단계는 우리 연구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단계로 그 금액은 100만 달러였다. 2단계는 50갤런 용량의 믹서 수출입 단계로 그 금액은 2000만 달러였다. 1단계 계약의 실제 이행을 위해 목영일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우리 연구팀은 1975년 9월 프랑스로 떠났고, 이들은 6개월의 연수를 통해 추진제 제조 기술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SNPE가 프랑스의 방산업체인 MBDA와 손잡고 만든 군사용 고체 추진제 전문 업체인 록셀의 연구시설. 사진 Roxel
이들 프랑스 연수팀이 현장에 도착해 처음 받은 교육은 기본적인 이론교육이었다. 모든 연구원이 강의실에 앉아 로켓 시스템ㆍ탄도ㆍ내탄도ㆍ추진제와 관련된 화학 등 유도탄 관련 이론 전체를 공부했는데, 당연히 자기 전공이나 자기가 맡은 분야와 무관한 수업이 진행될 때면 지루해서 조는 이가 많았다. 대부분의 연구원에게는 해외여행이 처음이었고,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온종일 강의를 들어야 하니 졸음이 쏟아지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SNPE의 직원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뿐이어서 연구원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식사를 해내기 위해서는 포도주가 필수였는데, 다행히 이 식당에선 물값보다 포도주 가격이 더 저렴했다. 이에 연구원들은 포도주를 곁들여 점심을 먹기 일쑤였고, 오후가 되면 강의실에서 조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연구원들의 이런 태도와 관련된 문제가 SNPE의 고위직들에게까지 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국에서 온 연구원들이 대낮부터 포도주에 취해 강의실에서 잠만 잔다.
이런 소식은 팀장인 목영일 박사에게도 전해졌고, 한밤중에 비상이 걸려 전 연구원이 집합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목영일 박사는 연구원들에게 금주령과 더불어 매 주말에 1주일간 수업한 내용에 관해 시험을 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자기 분야와 상관없는 내용까지 시험을 보게 된 연구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이미 잘못한 게 있으니 다들 유구무언이 됐다. 결국 연구원들은 이튿날부터 와인보다 비싼 물을 사서 마시고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한 달간의 이론수업이 끝나자 연구원들은 SNPE의 실제 생산라인에 투입돼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실기교육을 받았다. 내탄도, 추진제, 라이너(liner), 치공구, 물성 및 비파괴검사의 5개 분야로 나뉘어 각자 맡은 분야의 라인에서 프랑스 노동자들과 똑같이 일하면서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추진제 제조는 대체로 준비 과정, 혼합(mixing), 캐스팅(casting), 큐어링(curing), 트리밍(trimming), 물성실험, 연소시험, 포장의 과정을 거치는데, 개별 연구원들의 입장에서는 저마다 하나의 공정에만 참여하고 배우게 되므로 이 일련의 과정을 모두 알기는 어려웠다.
이에 연구원들은 밤마다 모여 각자 배우고 익힌 것들을 발표하고, 이를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저마다 맡은 분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배우되 각자 배운 것을 하나로 합쳐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렇게 6개월의 연수를 마친 연구원들은 많은 자료와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귀국했고, 이들의 땀과 열정으로 실제 백곰의 추진제가 개발되고 완성될 수 있었다.
은인이 된 미국 기술자들
미사일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 ADD의 대전기계창을 방문했는데, 어느 날 청와대로부터 박 대통령이 지상연소시험의 참관을 희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 무렵 지상연소시험을 위한 필수장비인 300갤런 믹서는 설치 후 시험가동 전이었고, 캐스팅이나 큐어링을 위한 시설 역시 설치를 위한 공사 중에 있었다. 오늘날 같으면 당연히 상황을 설명하고 참관 일정을 미루자고 하겠지만, 당시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박 대통령이 보기 원하는 연소시험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1970년대 대전 중앙통시장 주변 풍경. 중앙포토
다행히 당시 대전기계창에는 미국에서 뜯어온 추진제 제조 공장의 이전 설치를 위해 LPC의 기술자들이 와 있었다. 우리 연구원들은 이 미국인 기술자들을 차에 태우고 우선 대전 시내로 나가 비싼 갈비를 잔뜩 사주고 술도 적당히 먹였다. 그렇게 흥이 오르자 사정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미국인 엔지니어 한 사람이 되물었다.
당신네는 대통령이 시키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도 우리 정부의 명령을 어기면 안 된다. 우리는 장비의 설치와 작동 이외에 미사일 개발과 관련된 어떠한 조언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미사일을 만들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소시험 한 번만 하자는 것이다. 이게 실패하면 우리가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제발 우리 사정 좀 봐달라.
그렇게 사정에 사정을 거듭하니 그동안 이들과 정이 든 미국인 엔지니어들이 먼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홍릉에서 가져온 25갤런 믹서로 추진제를 만들 수 있었다. 워낙 용량이 작은 믹서여서 5회에 걸쳐 조금씩 추진제를 만들어야 했고, 이렇게 만든 추진제를 차례차례 연소관에 넣어야 했다. 정상적인 미사일의 경우 이렇게 추진제를 충진하면 큰 문제가 되지만 며칠 안에 재빠르게 사용할 예정이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시행했다.
대통령의 참관 예정일이 워낙 촉박한지라 연구원들은 인근 공군부대에서 빌려온 제빙용 히터를 틀어놓고 3교대로 24시간 시험 준비를 했다. 그런 우리 연구원들을 보며 미국인 엔지니어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결국 우리 연구원들은 8일 만에 1단 로켓을 완성하고 비파괴검사까지 했다. 이어 실제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지상연소시험이 행해졌고, 결과적으로 큰 문제 없이 시험이 마무리됐다. 본격적인 미사일 개발의 서막이 올라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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