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6.
어떻게 그 하찮아 보이고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는 듯한, 그리하여
소위 스스로 지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반 이성적으로까지
여겨지는 방언이 그런 능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몹시 궁금해 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주님이 보내주신 '보혜사'시다.
진정 성령님이 그런 분이시고 바로 내 삶과 내 안에 계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힘이 나고 능력이 넘칠 것인가?
성령님은 우리의 그 어떤 연약함이라도 돕기를 원하신다.
영적인 연약함, 육신의 연약함, 가정과 직장과 교회, 생(生)의 모든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대기중인 '사랑의 5분대기조'시다.
만일 우리가 그 성령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믿고 우리 약함을 의탁할 수 있다면
언제든 전능자의 손을 벌려 도와 주실 터이다.
그런데 그 성령님은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까?
바울은 마땅히 빌 바를..진정으로 기도할 줄을 모르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탄식하시며 중보하심으로 도와 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성령님의 탄식과 중보를 우리가 믿고 영으로 연합하여 드리는
그 간구를 '방언'이라고 믿는다.
물론 성령님이 도와 주시는 유일한 통로가 방언만은 아닐터이다.
역시 그정도의 상식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 방언은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행2:4)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7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여 주시는 성령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여 주신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주님이 경계하신 이방인들의 기도와 흡사하다.
자기의 유익, 필요, 물질, 도움만을 일방적으로 구한다.
하나님은 그저 그 필요를 채우시는 능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성경을 조금만 살펴도 고난이나 시험, 문제들은 우리를 정금같이 연단하는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십자가가 없이는 온전힌 구원과 은혜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일이든...오직 주님처럼 "내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구할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그렇게 마땅히 구할 바를 깊이 알지도 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알고자 하기 보다는 내 뜻만을 중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필요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본질을
우리 영을 통하여 간구하여 주신다.
문득 생각나는 간증이 있다.
부산대학교의 K교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이 뜨거운 분이시다.
그분의 처제는 의사인데, 불행하게도 우울증으로 가정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 우울증의 근원속에 어릴적 부터 앓아 온 소아마비가 있었다.
"어린 시절..아이들이 ..다리 병신이라고 놀리고...
끼워 주지 말라고 왕따시킨 그 상처가 결혼 후에도 여전히...
그 심령을 묶고 힘들게 했지요."
K교수는 그렇게 말했다.
예수를 믿지만, 마귀는 어린시절 상처들을 들추어 내어 공격하였다.
그런 일들은 주변에서 비일비재하다.
과거의 상처, 쓴뿌리, 고정관념, 잘못된 교육이나 지나친 가부장적인 분위기 같은 것조차
마귀는 거짓의 조장과 속임수로 계속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귀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거짓의 아비'(요8:44)라고 선언하신 것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며, 깨어 있으라. 너희의 적대자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경고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와 성령안에서 철저히 깨어 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마귀가 틈타고
들어와서 온갖 속임수로 공격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그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그들이 하는 일임을 간파해야만 한다.
어린시절 왕따당한 그 상처가 이 의사선생에게는 현실에 적응 못하고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 않게 방언을 받게 되었다.
"처음엔..슈슈슈슈...하는 이상한 방언이 나왔는데...
그래도 주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열심히 했지요."
방언이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것'이라 믿고 날마다 30분 이상을 기도에 투자했다.
'슈슈슈슈'하는 기도는 쉬운게 아니지만, 점차로 익숙해 지고 그 삶에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그 우울증에서 점차 해방되기 시작한 것인데, 놀랍게도 그 원인이 되던 어린시절
그 상처로 부터 자신이 점차 자유로워 지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이 맑아지고 기쁨이 샘솟아 더욱더 기도에 집중하게 되었다.
기도가 회복되자 삶에 윤기와 생동감이 넘치고, 우울증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이상한 일이 벌어 졌다.
"갑자기 원인도 모르게 계속 설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배탈이 난 것도 아닌데...그로 인해 밥도 잘 못 먹고 허리가
잘룩하게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몸무게를 재보니 그대로 였다고 한다.
분명 허리가 쑥 들어갔는데 체중이 그대로라는게 이해가 안되었는데,
문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체에 변화가 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 나려면..벽을 짚거나..한쪽 발가락을 다른 쪽에 끼어서
힘겹게 일어서야 했지요..그런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일어나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소아마비로 앙상하던 다리에 살이 붙고 근육에
힘이 생겨나서 일어나기가 쉬워 진 것이다.
허리의 살이 다리로 내려간 것을 발견하고 너무나 놀란 것이다.
K교수님은 성령께서 방언기도로 처제의 어릴적 그 상처를 회복시키시자,
소아마비가 점차 호전되었다고 말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것들과 필요들을 위해..
아버지께 구해 주신다는 것을 그떄 깨달았습니다."
그 간증은 내게도 큰 힘이 되었다.
방언의 기도는 그 성령님과 더불어 나의 영이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기도하는 놀라운 역사로 나아간다.
성령님은 우리의 소망과 뜻을 넘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신다.
그러므로 생각지 않은 역사들로 응답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그 어리석어 보이는 방언의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리라.
Y권사님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무수한 시간을 방언으로 기도하자,
그의 가정의 문제가 풀리고 곤고하던 삶이 즐거움의 기름부음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다 해도 우리의 본질적 문제와 약함과 필요를
채우시는 성령님이 중보를 통하여 그것을 해결해 주신 것이다.
"방언의 기도를 깊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은 지식이나..생각으로는 전혀 알수 없는 ..성령님과 더불어 깊은 기도를
함으로 누리는 능력인것 같아요."
Y권사님은 그렇게 말했다.
평범한 권사님이 깊은 방언의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주님의 능력을 터득한 것이다.
그의 삶은 그전과는 너무나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역시 자신의 문제와 갈등구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된 것이다.
사실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들을 나타낸 조용기 목사님 같은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들이 엄청난 방언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Y권사님 역시 그런 순종을 다하자, 언제부터인가 방언 통변이 열리고, 대언과 신유,
축사의 은사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 전화로 권사님께 방언 통역을 부탁한 적이 있다.
그 깊은 방언 기도로 놀라운 은사들이 열렸다고 해서 검증도 해볼겸 부탁한 것이다.
"감독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러나 순종하여 그냥 아버지가 주시는 대로 기도해 볼게요."
라고 말하시더니 방언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 하기 시작했다.
난 너무나 놀랐다.
그동안 대언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 보았다.
사실 나는 그런 은사들을 인정하긴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대언이나
통변의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날마다의 기도 가운데..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은사도 중요하지만...꼭 그런 것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말씀만으로도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알고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권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아버지의 마음은 내 영혼을 감동시켰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이 성령님이 주시는 음성을 대언할 때에, 보리밭을
맨발로 걸어 가듯 내 영혼이 쿡쿡 쑤시고 눈물이 흐를 뻔 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진정 나의 영광과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애쓰지만..
요즘 너의 기도가 부족하구나...
그 역사를 이루는 능력은..그 전략은...오직 기도를 통해 이루어 진단다."
이 얼마나 평범한 알인가!
그러나 그 대언은 나의 영혼을 강타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일본 오사카의 큰 집회를 치르고 나서 약간은 탈진하여
기도를 깊이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상태임을 명확히 집어 내며, 하나님의 전력은 사람, 물질, 환경 보다도
깊은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 짐을 ..그 상식적인 본질의 위대함을
나는 그 대언을 통하여 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다시 깊은 기도에 집중하게 되었고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나를 향해 해주시는 사명과 말씀들은 나만의 애틋한 비밀이지만....
"아들아..최근에 네게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고 있구나..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알고..많은것을 연구하고 사람을 만난다 해도...
기도의 양이 채워 지지 않으면...역사를 이룰 수가 없다.
기도가 곧 나의 전략이고..영적전쟁이며...네가 소망하는 나의 나라를
이루는 길이란다..기도에 집중하라.."
란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것 같지만...내 영혼을 흔들고 회개에 이르게 하였다.
그때, 마침 일본 오사카의 전쟁같은 큰 집회를 치루고 와서 나는 잠시 기도에
집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권고로 나는 긴장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아침을 금식하며 다시 기도에 집중하였다.
특히 그동안 많이 하지 않던 방언의 기도에 전념을 다하였다.
이름모를 권사님이 방언이 '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말함'(고전14:2)이란
말씀에 순종하여 그런 놀라운 은혜를 누린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얼마나 악하고 게으른 존재였던가?
다음날 부터 다시 골목길과 산을 누비며 간절히 기도이 양을 채워갔다.
그러자 나의 영이 충만하여 집회를 할 때에 너무나 달라진 능력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역사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모세..다니엘..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시고 말씀해 주신 하나님...
제 이름을 부르시고...말씀해 주세요...라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세상은 야구에..컴퓨터에..돈에 미쳐있지만...전 하나님께 미칠래요..
그렇게 갈망하며..영으로 날마다 많이 기도하자..아버지가 정말 제게..
말씀해 주셨지요."
얼마나 아름다운 간증인가?
진정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말씀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아버지는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신다.
우리는 현실과 세상에 묶여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 사랑을 갈망하여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Y권사님은 방언기도를 통해 음성을 듣게 되자...혹시 그것이 잘못된 길로 갈까봐
기도할 때마다 "주의 보혈"을 외치고 그것으로 온전히 덮어 주시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어떤 이들은 특히 주로 자매들 중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다가 이상한 음성을 듣고
두려움을 느꼈다고 내게 알려왔다.
방언만이 아니라..우리를 공격하는 흑암의 영은 언제나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향하고 있다.
권사님처럼 '주님의 보혈'을 항상 구하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다.
그분은 방언 기도만이 아니라..대언기도..그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약함을 구하고
오직 주님께서 보혈로 친히 덮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다고 한다.
염소와 암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또한 이와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쓴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하심이 없느니라 히9:13-15, 21,22
성령님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 진리를 깊이 이해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너무나 쉽게, 그저 은사나 체험을 위해 성령님을 구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분은 어떤 능력이나 도구, 체험이 아니다.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으므로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요7:39)라고
기록했다.
성령님은 주님의 영광위에 임하시는 것이다.
그 '영광'은 헬라어로 '독사'(doxa)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뜻과 권위에 맞는 삶',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이 말한 주님이 받으실 '영광'이란 그분이 아버지의 언약에 복종하여 드릴,
십자가와 보혈의 희생, 그리고 부활의 영광인 것이다.
성령님은 주님의 그 영광, 엄청나고 고귀한 희생의 댓가를 축사하시어 우리에게 오신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8,20
주님의 값을 치루시는 그 영광으로 인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이다.
주님이 온전히 드리신 그 어린양의 속죄제물..그 피흘리심 위에 하나님은 영광의
'불'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를 구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보혈'을 같이 구해야 한다.
그러면 흑암의 세력으로 부터 안전하다.
안전할 뿐 아니라, 보혈 그 자체의 놀라운 능력들...치유, 회복, 기름부음으로 나타나난 것이다.
방언이나 치유, 예언등 성령님의 은사를 나타내는 데에 여러가지 악한 세력의
방해나 비인격적인 모습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일면을 보고 성령님의 역사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확산해야만 한다.
그것은 주님의 보혈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의 능력을 우리는 아주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더욱 더 성령님께 구하여 그 능력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
"부모와 자식안에도 대화와 의논이 가능한 사이가 있고..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 아는 자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도 그런 자식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지만...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오직 자기의 유익..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붙들고 그 역사를 의논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게 제 꿈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꿈 속에라도 주님의 연인이 되는...
그런 영혼이 되도록...날마다 기도로 나아가렵니다."
아아...
실로 그것은 나의 꿈이기도 하다.
나는 날마다 그것을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하는 것이다.
다름 무어보다 아버지의 그 마음, 주님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그 역사를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구하고 또 구할 뿐이다.
실로 방언은 '그 영으로 (하나님의)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다.
그 영의 기도가 깊어지면..우리는 영이신 아버지의 존재를 깊이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 누가 뭐라해도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 또한 아버지가 그 나라와 의의 본질을 의논하고 그 마음을 부어 주시는
그런 아들이 되기 위하여 더욱 더 깊은 기도에 들어가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7.
"형님의 책을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오랜 동안 가져 온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깨졌고...
많은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푸우곰처럼 둥그란 얼굴과 몸을 한 김영표목사가 그렇게 말했다.
예전의 나처럼 늘 '후기 인상파'의 진지한 표정인 그라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했는데 <하늘의 언어>를 읽었다는 것이다.
"아니..그 책을 읽고 ..뭘 새삼스럽게 회개까지..."
약간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울뻔 하였다.
그는 유명한 교회의 찬양 인도자이자 찬양 사역자들을 배출하는 팀을
이끌고 있었다.
< 예수원 가는 길>이란 음반등 매우 독특한 자기만의 질감이
뭍어나는 작업들을 해왔다.
그는 나를 형님이라 부르는데..언제 부터 이런 목사 동생을 두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지만 같이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되었다.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는 늘 그렇게 말했고 기도하였다.
나는 그 삶이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인도하심을 받는 것임을
늘 나누어 주었다.
나는 그의 지나쳐 보일 정도로 진지한 모습이 이젠 귀엽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는 목회자로서 '진실'이란 본질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마 나를 찾아왔고...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나의 작은 둥지에
자연스레 깃든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표정이 더욱 심각해 보였다.
"무슨 일인데..그러는 거요?"
나는 약간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진지하게 그 속내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영표 목사가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어느날 이웃 교회의 권사님들이 집에 찾아 오셨다.
그 때, 그의 어머니는 '루푸스'(lupus)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면역계통의 질환인 그 병은 병원에서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영표야...방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 권사님들은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 가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방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방언을 하는 소리였다.
짐승의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내쫓기도 하는 듯한 아주 이상한
그 소리가 어린 영표에게는 매우 충격이었다.
저녁 노을이 서러운 선지자의 울음처럼 물들어 갈 때,
그 권사님들은 방안에서 나왔다.
그 이상한 소리들로 몇 시간을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잠 시 후에 어머니가 나왔는데, 정말 폭탄을 맞은 것처럼
그 머리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기도로 어머니는 불치병인 루푸스에서 치유 되었다.
그것은 놀랍고 충격이었지만, 그 방언의 기도 소리는 영표에게 안좋은
이미지로 남아 방언을 제한하고 무시하는 삶을 살아 온 것이다.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불교에다가 남표 호렝개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병을 고치기 위해 굿도 많이하고 그렇게 무속에 집착하던 분이,
방언의 기도로 병이 치유되자 이젠 헌신적으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영표도 교회에 나가게 되고, 후에 찬양 사역을 하는 목회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추억과 이미지의 고정관념이 상처로 남아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형님 책을 읽고..방언이 그런 것이 아니구나...
깨닫게 되었고..그동안 성령님을 제한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방언이 터지고..방언 찬양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찬양은 방언이 열리자 그전 보다 더욱 깊은 기름 부음 가운데 들어갔다.
나는 농담삼아 방언을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방언은 아주 특이한 것이었다.
"툭..탁..틱..톡...파하.."
흉내내기도 힘든 처음 들어 보는 그런 방언이었는데, 매우 힘이 느껴지고
원수를 파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후에 그의 삶은 더욱 놀랍게 변화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함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영표 목사를 향한 아버지의 부르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스라엘에서 찬양하는 통로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이스라엘에 가 있다.
그 땅을 정탐하며, 예루살렘에서 찬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
김목사가 간증을 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지난 날의 여러 추억들에 쓸려
흔들리듯 가고 있었다.
나 또한 방언에 얽힌 여러 충경들과 그로인한 부정적 관념들이 있던 것이다.
내가 교회에 다니던 70년대에는 방언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이 찾던 한얼산 기도원에서는 '방언은 개나 소도
다 할 수 있다'는 유행어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와 친구들은 방언을 사모했지만 받지 못했다.
그 당시 로이든 존스의 <성령세례>라는 책을 선배들이 번역해서 읽었다.
70년대 말에 로이든 존스는 우리의 우상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죽었대..."
어느날 한 선배가 와서 그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우리는 그가 설교한 테이프롤 알아 듣지도 못하면서 들으며 그를 추모하였다.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는 예수를 믿고 구원의 표징으로 받는 물세례외에
하나님 나라를 능력으로 섬기기 위해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통찰력은 참으로 지식의 은사 가운데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 조차 그의 전유물이 아닌, 그전에 D.L무디나 R.A 토레이 같은
이들의 통찰력에서 이어 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 책을 읽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였다.
당시 헌책방에서 자주 사보던 잡지가 <신앙계>였다.
거기엔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의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가 연재 되었다.
R.A 토레이 박사의 손자인 그는 하나님 나라와 이 민족, 그리고 성경적 토지와
사회정의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지만 강력한 성령세례를 체험한 분으로
방언의 은사를 중요시 여긴 분이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 방언을 무척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 한명이 순복음 계통에서 나온 <성령세례 받는 법>이란
소책자를 구해왔다.
신앙서적도 흔치 않던 시절이다.
그 책자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하게 된다고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는 장면에는 항상 '방언'의
은사가 동반하여 나타났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빙인들 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 행10:44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방언이 동반되어
따라와야 한다고 강조되어 있었다.
지금은 성령세례가 곧 방언이라는 등식을 가지지 않지만,
그당시엔 어린 시절이라 그런 책들에 민감하였다.
우리는 모여서 그 책자에 나온 대로 따라 기도하며 방언을 간절히 구했다.
그러나 단 한명도 방언을 하지 못했다.
많은 부흥회를 찾아 다니며 기도하고 기도원에서 나뭇뿌리를 뽑겠노라
호기를 부리며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른 어른 들이나 선,후배들은 방언으로 마구 기도하는데, 우리만 무언가
신앙이 부족한것 같은 기분에 죽을 맛이었다.
누구보다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다했던 시절이어서 더욱 절망감이 컸다.
"우리는 개나 소보다 못한 가 보다.
걔네들도 받는다는 것을 우리만 못받고..."
하며 어린 마음에 자조섞인 시퍼런 농담을 지껄였다.
20대 초반에 총신대학에 다니는 한 신학생이 방언을 잘 받게 한다 하여
그의 하숙집에 찾아 갔다.
"성령님께 충만함을 구하고...방언을 받게 해달라고 한 후에..
무슨 말이든 나오는 데로 기도 하세요."
먼저 기도를 받기 시작한 선배에게 그 신학생이 그렇게 말했다.
그가 기도를 한 후에 입을 벌리고 "아아아.."라고 말하자 신학생이 외쳤다.
"그냥..아아아..가 아니라..영어든 아프리카 말이든..
어떤 말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선배가 갑자기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i am a boy ..your are a girl...teacher..teacher.."
그러자 그 신학생이 놀라며 다시 외쳤다.
"오! 할렐루야!
지금 영어 방언을 받으셨네요.
주님 감사합니다."
그 때, 그 선배가 산통을 깨는 말을 하였다.
"아니요..영어든 무슨 일이든 하라 해서...
생각나는 영어가 그것 뿐 이라서..."
우리는 배꼽을 잡고 나뒹굴었다.
너무 웃어버려서 그 신학생은 더 기도를 하지 못하였고 결국 방언을 받지 못했다.
한편의 어이없는 코메디같은 추억이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방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아마 나만이 이런 추억의 그림을 가지진 않았으리라.
그 당시엔 많은 이들이 방언을 사모했다.
그것은 성령님을 체험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즉물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방언에 대한 성경적 지식도 거의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체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20대 때, 서초동에서 식당을 하게 되었다.
나는 틈이 나면 설렁탕이며 육개장을 배달하였는데, 같은 상가건물에
방언등 성령체험으로 유명한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 집에 배달을 하면서, 성령체험을 많이 했다는 사람치고 인격이나
섬김의 자세가 거의 없는 것에 놀랐었다.
그 때, 나는 '제자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자 훈련의 기본은 주님처럼 종이 되어 다름 이들을 섬기는
'섬김의 도'(servant ship)임을 배웠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인격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신앙인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그도 방언을 깊이 한다고 들었고 많은 성령체험을 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에게 '성령'은 자기 자랑이나, 물질의 복을 비는
수단같아 보였다.
나는 점차 성령님에 대하여 멀어졌다.
새벽기도 같은 고요히 주님을 찾는 시간에 큰소리로 방언을 하는
여자 집사님들을 눈살을 찌푸리며 째려 보았다.
점점 성령님을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보다 , 마치 은사나 체험, 열광주의의
영역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하는 분들을 몰지각한, 혹은 반지성적인 신앙인이라는
곡해(曲解)로 몰아 부쳤다.
김영표 목사만이 아니라, 나 자신도 오랜동안 그렇게 성령님이나
방언, 또는 그런 신앙인들을 수준 낮은 것이라 치부해온 것을 깨달았다.
그런 기도를 해온 분들 중에 체험에만 매몰된 부족한 이들도 많지만,
사실 그들의 기도가 이땅에서 흑암의 세력과 대적하여 싸운 것들임을
나는 김목사의 간증으로 새삼 깨달았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본 땅에 가서 섬기면서,
그 땅에 얼마나 영적으로 묶여 있는가를 절감하였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았고 , 엘리트 선교사들의 집중적인
선교적 투자를 받은 곳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교회는 그들과 비교가 안될 만큼 성장하였고, 세계가
주목하게 되었다.
나는 그 이면에 오직 성령으로 간절히 기도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식을 가지고, 지성적인 신앙생활을 한 분들만 그 터를 닦은 것이 아니다.
솔직히 한국 교회 성장의 영적인 토대는 기도원이나 그런 부흥회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이 성령님과 더불어 부르짖은 그 기도들...
60년대 70년대에는 대부분의 기도원에서 강력한 치유와 방언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이 민족의 회복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의 성령 축제와 같은 것이었다.
이 글을 쓰기 얼마전 나는 생각지도 않은 YWCA의 집회를 다녀 왔다.
그곳 실무자가 연락을 했을 때,
"그런 곳에서도 집회를 하시나요?"
하고 물었었다.
YWCA를 기독교 단체라기 보다, 그저 의식있는 여성 사회운동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어떤 집회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저희 회장님이 '하늘의 언어'를 읽고 감독님을 꼭 모셔야 한다고
특별히 부탁하셨습니다."
라고 답을 했다.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가겠노라고 했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그 회장님은 총리까지 지낸 유명한 사회학자의 부인이었다.
두분 다 의식있는 저명한 인사였다.
그런 분이 <하늘의 언어>를 읽고 방언에 대한 집회를 하겠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명동의 YWCA강당에서 집회가 열렸다.
모두가 여성들 뿐인 집회는 난생 처음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이사급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가진 분들이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미 3:8
나는 이 말씀을 나누었다.
성령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저 방언이나 은사체험의 영역에 갇히는
분이 아니심을 강조했다.
그분은 우리가 꿈꾸는 이 부조리하고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그 어둠들을 부수고 회복하고 치유하는 '권능'과
그 본질적인 것들을 이루는 전략적 '재능'을 주시는 분이시다.
진정 YWCA가 그리스도를 닮아 세상의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을 섬기려면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전략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며, 그분의 제자 된 우리들이 역시
살아내야 할 삶이다.
그 치유와 회복과 희년의 역사는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 진다고
전하고 우리도 주님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자고 요청했다.
많은 이들이 앞으로 나와서 간절히 기도했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놀랍게 임하시어 방언과 여러가지 기름부음 가운데 잠겼다.
"저는 그렇게 많은 분들이 방언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YWCA는 방언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 생각했거든요."
집회가 끝나고 회장님과 몇 이사들과 교제의 시간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회장님이 너무나 뜻밖의 간증을 했다.
"이제 저희 YWCA가 10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는 않된다는 생각에 날마다 주님께 엎드려
그 비젼과 전략을 달라고 구했지요."
놀랍게도 그 회장님은 하루에 2시간을 기도하는 분이셨다.
날마다 기도하는데, 어느날 미국에서 온 딸이 <하늘의 언어>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 책을 읽는데, "이것이 네가 구한 나의 전략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영'이 회복되는 것 이었습니다.
아무리 의식이 있고..인간적인 열심을 내어도 기도가 회복되지 않으면
진정한 능력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았지요."
그러면서 역시 생각지 못한 간증을 하셨다.
70년대 초반에 YWCA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사가 집회에 왔다고 한다.
그는 당시 유명한 한얼산 기도원의 이천석목사였다.
이 목사님은 당시의 부흥사들이 그렇듯 말이 거칠고 신유나 방언같은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는 분이셨다.
정말 그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분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집회는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하도 개인들에게 험한 말을 해서 몇 명은 모독감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장님은 당신 사무총장이라는 실무자여서 가지도 못했는데,
그날 놀랍게도 30명이 강력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방언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체험은 YWCA에 생각지 않은 기름부음으로 작용했다.
"70년대..그 어두운 군사독재 시절에 ..그 방언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안에서 강하게 기도하는 영으로 부어진 겁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날마다 기도했고..그 후부터 오랜동안 뛸 수 있는
힘이 되었지요."
< 하늘의 언어>를 읽는데, 주님께서 갑자기 그것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너희가 성령과 더불어 기도하는 영을 가질 때,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실감하였다.
정말 그 시절에는 힘겹고 어두움의 장막이 드리워진 때였다.
그러나 그 시절 성령님이 이 땅을 찾아 오셔서 이 고달프고 가난한
백성들을 그렇게 위로하시고 치유와 회복으로 이끄신 것이다.
그 당시 방언의 기도는 불치의 병처럼 가난과 절망으로 신음하던 세상을
물리치고 개인과 교회, 세상에서 부흥을 경험하게 하던 힘이었다.
늘 강조하지만, 방언이 결코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수많은 주의 평범한 '남종'과 '여종'들이
그 기도로 점차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그것이 이 땅의 그 악한 영들을 물리친 능력이었음을 부인치 못한다.
그러나 이젠 '지성'이나 '문화'라는 세련된 포장 아래, 그런 역사들을 천박하고
수준낮은 것이라 매도하는 것이다.
"나도 그들을 오래 판단하고...지성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미명아래...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살아 왔는데..
나도 회개 합니다."
나는 김영표 목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실, 뒤늦게 성령님을 체험하고 변화 되어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2007년 에서야 뉴욕의 맨하탄에서 '방언'에 대하여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 때도 방언에 대한 인식은 약했었다.
"주님..이 시대에 가장 주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강력한 성령의 권능을 부어 주세요."
나의 간구는 그것이었는데, 너무나 생각지도 못한 방언에 대하여
응답하신 것이다.
그 때 까지도 나에게 방언은 기도 가운데 저절로 터져 나오는 그저
영적인 기도에 불과했다.
그것을 무시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큰 의미를 부여 하지도 않았다.
역시 어릴적 부터 방언에 대하여 가져 온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http://www.3-rd.net/....김우현의 [야생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