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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사상가 列傳 (6) -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을 간파한 빌헬름 뢰프케
『대중사회와 대중민주주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들의 최종적인 형태는
전체주의』
●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해 철십자 훈장 받아, 25세 때 독일 역사상 최연소 대학교수
가 됨
● 나치 집권 후 해직교수 1호, 터키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
● 제2차 세계대전 終戰 前 『유럽의 의도적 분할을 통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
야만 한다』고 주장, 1960년대에는 『30년內에 공산주의 붕괴』 예견
● 『私有재산, 경제적 자유, 상속 등이 흔들리는 사회는 자유사회로서의 종말을 눈앞
에 두고 있는 위험한 상태』
● 『공산주의자들과의 교류는 공산주의의 핵심인사들과 西方의 줏대 없는 공상가와
환상가들 간의 교류가 되기 십상』
● 『국가의 後見을 받는 사람들의 범주를 자꾸만 확대하는 것이 진정한 進步인가? 아
니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득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자
신의 책임下에 자신의 삶을 건설하도록 하고, 그에 따라 복지국가를 점차 축소시켜 나
가는 것이 진정한 進步인가?』
『자기 책임下에 스스로의 삶을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進步』
『산업사회로 넘어오던 과도기에는 공장근로자들이 대부분 無産者(무산자)로서 생활
이 너무 빈궁하여 삶의 위험에 스스로 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돕던 人工義手(인공의수)나 人工義足(인공의족)과 같은 비상수
단이 바로 국가에 의해 조직화한 대중보호였다.
그러나 현대 복지국가에서 시행되는 국가에 의한 대중보호는 이미 그 한계를 벗어났
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발전된 현대국가에서 그러한 과도기적 상황은 이미 극복이
되었으며, 자발적인 자기 책임下의 자기 보호 내지 소규모 그룹부조의 가능성이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날에는 이미 거의 다 극복된, 과거 과도기에서 도출된 복지국가 원래
의 기능과 의미를 「進步(진보)」라고 부른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은 進步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의 저축과 보
험을 통해 자신의 책임下에 또는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인 그룹부조를 통해 삶의 위험
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가에 進步의 진정한 뜻이 있다. 인간으로 하여금 계
속해서 국가와 정부의 도움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도록 함으로써 결국에는 납세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에 寄生(기생)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스
스로 건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아니겠는
가?
국가라고 하는 거대한 後見人(후견인)의 후견을 받는 사람들의 범주를 자꾸만 확대
하는 것이 진정한 進步인가? 아니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득을 바탕으로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책임下에 자신의 삶을 건설하도록 하고, 그에 따
라 복지국가를 점차 축소시켜 나가는 것이 진정한 進步인가?』
평생을 不義(불의)와 不自由(부자유), 집단주의, 통제주의에 꼿꼿하고도 용감하게 저
항하였고, 死後(사후)에는 『異物質(이물질)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과 같은 자
유주의자였다』는 평가를 받는 빌헬름 뢰프케(Wilhelm Roepke)가 「사이비 혹은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뢰프케는 1899년 10월10일 독일 북부지역 하노버의 슈바름스테트에서 지역민들의 존
경을 받는 시골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뢰프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8세에 입대, 전투 중 부상당해 철십자 훈장을 받고
전역했다. 그 후 괴팅겐 대학, 튀빙겐 대학을 거쳐 1919년부터는 마부르크 대학에서 경
제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1921년 마부르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뢰프케
는 이듬해 23세의 나이로 대학교수자격을 획득했다. 25세 때인 1924년 뢰프케는 예나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연소 교수였다. 뢰프케는 5년 후인 1929년 母校인 마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33년 해외로 망명할 때까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뢰프케보다 먼저 나치의 위험에 대해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 그는 나치가 집권하기 전에 이미 나치가 독일에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라고 내
다보면서 강연이나 신문촵잡지 기고를 통해 나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1930년 선거가 실시되자 자신의 고향인 니더작센에서 「니더작센의 아들이 주민들에
게 드리는 글」을 통해 나치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했다.
『이번에 나치를 뽑는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 「나치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우리가 어
떻게 事前에 알 수 있었겠느냐」는 말로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말
씀드리지만 나치를 뽑는 것은 질서 대신 혼돈을, 건설 대신 파괴를 선택하는 행위입니
다』
뢰프케는 울리히 운프리드(Ulrich Unfried)라는 筆名(필명)을 사용했다. 운프리드는
프리드(Fried)의 반대말로 당시 나치에 적극 협력하고 있던 저술가 페르디난드 프리드
(Ferdinand Fried)에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운프리드를 사용한 것이었다. 뢰프
케는 『나치는 자유의 파괴자이며, 프리드와 같이 나치에 협력하는 지식인들은 「知識
社會主義」(지식사회주의: Intellektuellensozialismus)의 대표자들이다』라고 비판했다.
나치에 의한 해직교수 1호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뢰프케는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나치가 소위 「직업공무원
제도 개선을 위한 법률」을 만들어 反나치 교수들을 해직시킬 때, 해직교수 명단에 제
일 먼저 오른 사람도 뢰프케였다.
그의 知人(지인)들은 생계와 복직을 위해 나치와 타협할 것을 권했지만, 뢰프케는 이
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치에 대한 저항도 저항이었지만 유대인인 그가 더 이상 독일에 머무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뢰프케는 1933년 10월, 동료 해직교수들과 함께 터키로 망명길에 올
랐다.
뢰프케 등이 터키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터키의 케말 파샤 대통령으로부터 터키
의 고등교육, 특히 이스탄불大 재건 책임을 일임받은 제네바大 교수 말체 덕분이었다.
말체 교수는 獨逸非常學者協會(독일비상학자협회)를 통해 나치의 박해를 받고 있는 교
수들의 명단을 입수, 그들 중 상당수를 이스탄불大 교수로 영입했던 것이다.
일체의 통제주의, 자급자족주의, 財政膨脹主義(재정팽창주의)에 비판적이던 뢰프케는
당시 터키의 집권당이던 통일당의 국가개입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뢰프케의 명성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키 정부는 정부정책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학문과 강의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았다.
1937년 뢰프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관계대학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66년 2월12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母校인
마부르크大에서 복귀제안이 있었지만, 이미 스위스에서 자리잡고 있었던 뢰프케는 오
랜 고민 끝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람들은 왜 집단주의자가 되는가
공산주의와 나치즘은, 19세기 이후 나타난 대중사회의 病的인 모습인 「집단주의」
가 극단적으로 진행된 형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뢰프케에 있어 「집단주의」란 「자유경쟁원칙을 배제시키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
다. 자원의 배분과 생산계획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시장에서의 수요·공급과 경쟁에 기반을 둔 가격결정 메커니즘에 의해 자유롭게 결정
되는 「시장경제」와 독재적인 당국의 강제적인 지시와 명령에 의해 결정되는 「집단
주의 경제」가 그것이다.
「시장경제 체제」는 각각의 이해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選好
(선호)를 표시할 수 있는 독립적인 경제주체들을 전제로 하며, 근본적으로 개인의 권리
를 존중하는 자유로운 사회구조에 속하는 체제이다.
반면에 「집단주의」는 국가의 지배력을 통해 「국가적인 대중보호」라는 원칙을 보
장하기 위해 分權的이고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부정하고, 그 자리를 집단적 의사결정으
로, 최종적으로는 국가적인 제도로 대체해 버린다. 결국 집단주의는 개인의 권리가 무
시되고 少數가 多數를 지배하는 反민주적인 경제체제나 다름 없다.
뢰프케는 집단주의자가 되는 동기 또는 집단주의를 선호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구
분했다.
첫째, 순전히 개인적 이익 때문에 집단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집단주의 下에서
재산과 소득이 강제로 분배될 때 이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
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 권력에 대한 야망이다. 대중들을 자신의 의지 아래에 묶어 두고, 자신의 권력
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셋째, 주로 과학주의와 기술만능주의에 물든 지식인들의 「知的 교만」에서 비롯된
집단주의 경향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정신적·도덕적 개체」로서의 인간을 무자
비하게 무시한다. 또 인간과 사회의 가치와 문제들,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관계들에 대
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사회와 인간을 기계와 동일시하면서, 사회도 理性
에 의한 계획에 입각하여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개조할 수 있다고 본다.
뢰프케는 이러한 과학주의의 최후 결과는 무자비하고 非인간화된 무겁고 음산한 집
단주의 세계라고 보았다.
넷째, 美學的 또는 예술적 동기에 이끌려 집단주의자가 되는 경우이다. 이들은 자신
들이 그려 본 이상적인 사회계획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이끌려 집단주의를 동경하는 사
람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집단주의자 그룹인 다섯 번째 유형은 人本主義的 동기를 가
진 집단주의자들이다. 이들은 人本主?廈? 평등, 정의에서 출발하여 현실사회에서 나타
나는 非인간성과 不평등, 不義를 제거해야 한다는 정의감에서 집단주의자가 되는 경우
이다.
집단주의의 문제점
뢰프케는 『그들이 나름대로 고매한 理想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이들의
생각은 인간의 理性 및 경험과 배치되며, 집단주의는 결코 代案이 될 수 없다』고 비
판한다.
뢰프케가 보는 집단주의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집단주의에서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장가격 기구를 인간의 두뇌에
의존한 계획으로 대체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 복잡하다. 결국 집
단주의 경제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계획하고 운영하는 사람이 대단히 도
덕적일 뿐만 아니라 지능도 無限한 천사가 되어야만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로 경제문제의 효율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긴급성과 중요성이라
고 하는 기준에 따른 욕구의 선발」과 이에 따른 가격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며, 여기에
는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무시한 채 중앙집권적
국가의 계획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실패를 예약해 놓은 것과
같다.
경쟁의 不在(부재)와 동기유발의 부족으로 인한 효율성의 저하도 집단주의의 치명적
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다.
집단주의 경제에서는 자원을 강제적으로 배분하고, 또 경쟁의 不在와 동기유발 부족
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계획과 成果 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강압적인 정치
권력의 등장이 불가피해진다. 이로 인해 국가권력의 횡포가 발생하고, 지배자와 피지배
자 간의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뢰프케는 「집단주의는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폭군, 분열, 중앙
집중, 전제군주적인 조직화, 개성의 파괴, 전체주의, 非효율 및 인간사회의 경직된 기계
화를 가져오며, 시스템의 내재적인 치명적 문제로 인해 결국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
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분석과 확신을 기반으로 뢰프케는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1960년대 초에 저
술한 「인본적 경제학」에서 정확하게 그 시기까지 예언했다.
『스탈린의 죽음 이후 위성국가뿐만 아니라 러시아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근의
일련의 사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해 보면 교리, 신앙 및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
력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적
어도 공산주의가 이미 해체과정에 들어서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약 30
년 안에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라는 우리의 희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戰後 유럽의 분열과 사회주의의 붕괴 예언
뢰프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도 당시 연합국이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戰後에 어떻게 바뀌고, 유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분명하게 예견함으로써
그의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 준 바 있었다.
1945년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는 무렵 뢰프케는 「독일문제」라는 책을 발표
했다. 이 책에서 뢰프케는 『독일이 항복하자마자 승전국들 사이에는 커다란 의견 차
이가 생길 것이며, 全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요구가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
라고 경고하면서 『이때 西유럽이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독일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線을 긋고 그 오른편의 東유럽을 기독교적·서구적인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유럽의 의도적 분할을 통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뢰프케의 이러한 예견은 곧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에서 미국의 장기적 역
할에 대한 정책수립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뢰프케는 공산주의의 붕괴라는 분석을 내놓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나
아가 공산주의 붕괴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고 자유세계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가일층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성의 주체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대중 속에 매몰된 채 정신적 고향을 잃고
도덕적으로 난파되어 버린 현대 대중사회의 인간은 寬容(관용)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촵사회적 이데올로기에서 그 代案을 찾고 있으며, 이 이데올로기의 선
두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라고 지적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교류는 결국 惡을 연장시켜줄 뿐』
뢰프케는 이러한 대체종교로서의 공산주의가 스스로 내부로부터 붕괴될 것이라는 전
망이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비겁함, 두려움 그리고 심리적 혼란을 미화하고
공산주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하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을 덜어 주
는 하나의 면죄부로 誤用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러한 희망이 자칫 잘못 이해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확고하고도 단호한 거부와 감
시 및 경계가 소홀해지고, 그 대신 경솔함, 비겁함 및 심리적 혼돈을 초래하여 공산주
의와 共存의 유혹에 빠지는 愚(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공산주의 몰락에 대한
기대는 오랫동안 무시되고 잊혀져 왔던 자유세계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과 용기를 되살
리는 방향으로 적극 활용돼야 한다』
뢰프케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테러와 詐欺(사기)로 구성된 시스템을 통해 개성과 자
기 이익의 추구라고 하는 인간본성의 核(핵)을 파괴하고, 그 대신에 집단적인 국가, 집
단적인 거대경제, 집단적인 거대사회에 매몰되도록 하는 절대 불가능한 「인간개조」
라는 엄청난 오류를 저질렀던 것이며,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개조」가
가능하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일관된 중심 테제(These)였으며, 이것이야말로 공산주의
의 가장 흉악하고 위협적이며 反인본주의적 교리이다.
그런데 非공산권 국가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교리를 共有하고 있는 자들이 있
다. 공산주의에 현혹된 우둔한 자들과 공산주의 세력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겁쟁이들
이 바로 그들이다. 뢰프케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
는 기독교적·인본주의적 신념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뢰프케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화해협력과 교류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공산국가의 집권
세력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그는 『「공산주의라고
하는 얼음을 녹여 개방으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혹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세
계의 저항력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학생·예술가·교수 및 정치인들을 초청하거나
보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는 것보다 더 순진한 짓은 없다』고 우려했다.
『그러한 교류는 통상적으로 공산주의의 핵심인사들이 참여하고 여기에 西方의 줏대
없는 공상가와 환상가들이 동참하는 교류가 되기 십상이며, 이를 통해 공산주의 폭압
자들의 내부 권력은 강화되는 반면 자유세계의 저항력은 약화시켜 결국은 공산주의라
고 하는 害惡을 연장시키는 역할만을 한다. 이러한 잘못된 낙관주의는 의도는 善하지
만 결과적으로는 惡을 연장시켜줄 뿐이다』
『私有재산, 경제적 자유가 흔들리는 것은 자유사회의 종말』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론」에서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전
제정치로 발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뢰프케도 『대중사회와 대중민주주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들의 최종적
인 형태는 전체주의』라고 밝혔다. 그는 『현대 대중사회에 들어오면서 자유민주주의
가 쇠퇴하고 대신 자코뱅(Jacobian)式의 대중민주주의가 점점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
하고 있다』면서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이며, 동시에 정부
가 被지배자의 동의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야
말로 자유의 원천인 반면 「대중민주주의」는 자유의 최종적인 붕괴를 의미한다고 뢰
프케는 평가했다. 그 이유는 「대중민주주의」의 인민主權이 다수결에 의해 전체주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의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뢰프케의 우려가
杞憂(기우)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적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뢰프케는 어떤 궁극적인 규범과 원칙들이 있으며, 이 원칙들이 그
어떠한 민주적 결정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는 경우에만 민주주의와 자유는 양립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대중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게 된다고 보았다.
뢰프케는 私有재산이나 경제의 자유, 상속 등을,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근본적
인 제도들로 꼽으면서, 이것이 흔들리는 사회는 자유사회로서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위험한 상태라고 진단하고 있다.
『만일 私有재산이 행정부의 恣意(자의)에 의해서나 아니면 선거에 의해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지면, 또 만일 그것이 재산을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의 人質(인질)이 되어
버리면, 또 만일 私有재산 및 그것과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 상속권이 더 이상의 어떠
한 정당화의 필요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근본적인 권리로서의 위치가 흔들리게 된다면
자유사회의 終焉(종언)이 눈에 보인다』
뢰프케는 『이러한 근본적인 제도와 원칙들이 결코 훼손될 수 없다는 鐵則(철칙)을
제거하고 투표를 통한 결정에 그 운명을 맡겨 버리자고 하는 사람은 자유민주주의의
前提(전제)를 파괴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파기하고, 그것을 혁명, 특히 영구혁명의 수단
으로 만드는 자』라고 비판했다. 뢰프케는 『사회적 근본과 뿌리, 근본철칙, 역사적으
로 형성된 것 등 확고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 항상 모든 것에 대
해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현대 대중사회의 이러한 「정신적 급진주의」는 순간적인
오락과 쾌락, 천박한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거창한 말솜씨로 잘 치장하는 지도자
에게 힘을 실어 주며, 이렇게 해서 현대 대중민주주의는 혁명적 사회종교의 토양이 된
다』고 보았다.
윤리의 이름으로 자유로운 경제의 흐름을 막는「도덕주의」不信
뢰프케는 『현대국가의 과도한 사회보장제도와 정부의 경제개입 등 집단주의적 행태
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사회
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그 집단주의적 요소를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어
그 위험성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끓는 물에 집어 넣으면 순간적으로
튀어나와 목숨을 건지지만, 미지근한 물에 집어 넣고 서서히 끓이면 자신이 죽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는 현상과도 같다. 뢰프케는
『우리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인플레처럼 점진적으로 차근차근 은밀히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을 통해 안전과 편안함이 자유·법·개성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자유라
는 이름 아래 방종, 개인 및 집단이기주의, 전통의 파괴, 자의와 태만 그리고 무제한의
요구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또한 개인의 의미는 축소되고, 반대로 대중과 집단의 의
미는 점점 증대된다. 이에 따라 의사결정의 중심점도 개인, 가족, 소집단으로부터 위로
이동하여 국가기관으로 이전된다.
뢰프케는 『강대한 권한을 차지하게 되는 정부와 정치권력은 곧 부패하여 신뢰를 상
실하고, 원칙과 근본을 무시한 채 선동과 집단이기주의의 압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
법, 순간을 모면하는 방법만을 찾아 내는 일종의 「예술가」가 되어 버렸다』고 꼬집
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자유로운 경제의 흐름을 막는 「도덕주
의」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하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개발하며, 도덕적이라 생각되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을 억제하고,
반대로 국가권력을 동원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뢰프케는 『도덕주의가 암묵적이든 공개적이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의도
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일체의 의심도 품지 않는 지식인들에
의해 주창된다면 더더욱 고려해 볼 가치조차 없다』고 보았다.
『오늘날 복지국가는 사회혁명의 수단으로 전락』
뢰프케는 과도하게 추진되는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특성을, 한 영국 사회비
평가의 표현을 빌어 「용돈국가(Pocket-money State)」라고 불렀다. 「용돈국가」란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可處分(가처분) 소득의 상당 부분을 세금
과 사회보험료 등을 통해 국가가 차지해 버리고, 그 대신 교육·의료·주택·식품 등
중요한 욕구들을 국가가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보장해 줌으로써, 개인들에게는 사소한
몇 가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몇 푼 되지 않는 용돈만이 남겨지는 것을 뜻한다. 복지
국가가 비교적 잘 발달됐다는 西歐유럽의 경우 소득의 약 50% 이상을 정부가 차지하
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그리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라고 본다.
뢰프케는 『오늘날의 복지국가는 단순히 재래의 급여 크기와 범주를 확대하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사회혁명 도구로 전락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이 사회혁명의 목적은 소득과 재산의 좀더 완전한 均等化를 이루는 것으로 이를 추
진하는 지배적인 동기는 시기와 질투이다.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수와 범주가 줄어들게 되면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사회혁명가들
은 가진 자들의 재산을 평균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사회적 증오심을 만족시키는 압력
을 소위 「도덕과 윤리」라는 상투어를 동원하여 美化시키고 정당화시킬 수 있는 무언
가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발견해 낸다.
일반 국민들은 여전히 재래의 사회복지 카테고리들을 생각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이미 무대 뒤로 사라졌으며, 소득·자산·능력 등을 평균수준으로 균등화시키려는 새
로운 戰場(전장)이 형성된다.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차이가 있게 되면 사회적 증오
가 발발하므로 모든 것이 균등하게 되기 전에는 이 사회혁명은 아직 달성된 것이 아니
며,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에 대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알고 보면 他人의 돈, 他人의 구매력을 내놓으
라고 하는 간접적인 요구나 다름없다. 뢰프케는 『이 간단한 이치가 복지국가라는 미
명하에 어떻게 그렇게도 오랫동안 감춰질 수 있었는지 경이롭다』고 비꼬았다. 그는
『복지국가는 의사결정과 생활의 중심 축을 인간으로부터 국가로, 인간성으로 충만한
진정한 공동체로부터 非인간적인 관료제 및 대중조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비판
했다.
복지국가는 브레이크 없는 車
따라서 국가에 의해 조직된 대중적 안전을 최소화하고, 인간 중심의 진정한 공동체
를 복원시키는 일이 불가결하다. 하지만 현대의 대중민주주의, 급증하는 평등추구 요
구, 그리고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선거를 통해 他人의 것을 강탈할 수 있게 된 현대
대중사회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건강성과 경제시스템의 활력을 위협할 정도로 복지국가가 과도
하게 확대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왜냐하면 복지국가의 확장은 매력적으로 보여 저항
은커녕 환영을 받으며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일단 확대된 것을 축소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지국가에 빌붙어 기생하는 사람들의 저항도 거셀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다름 아닌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관료들과 자신들이 他人의 주머니를 털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
명한 이치를 감추어야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뢰프케는 『복지국가는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고 표현하면
서, 『복지제도의 시행은 원칙은 무엇이고 예외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기준은 무엇
이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편차는 무엇인가에
관한 명확하고도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결코 섣불리 실행에 옮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일단 실행해 보면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차차 고쳐 나가
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의 어설픈 접근은 禁物이며, 이러한 태도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
을 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자유란 우선적으로 개인의 자유이며, 이 자유가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중심적인 가치로 체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뢰프케가 나치와 사회주의 등 통
제주의, 집단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뢰프케는 경제와 사회를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계획경제
주의자와 경제학 엔지니어,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의 가능성을 광범위하게 열어 주는
케인즈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케인즈의 재정정책(Fiscal
Policy)을 재정사회주의(Fiskalsozialismus)로 번역할 정도로 정부 개입에 대해 강한 거
부감을 보였다.
그의 입장이 소위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뢰프케는 전혀 개의
치 않았다.
2003년의 한국에 대해 뢰프케는 뭐라고 말할까?
1947년 뢰프케는 하이에크, 오이켄, 미제스 등과 더불어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몽펠
린 회의의 창립 멤버로 참석했다. 같은 해 국제자유주의자모임(Die Liberale
Internationale)은 그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뢰프케는 평생을 걸쳐 약 800여 편의 저작과 논문을 발표했다. 67세인 1966년 2월12
일 뢰프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이름과 그가 언급했던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독일 역사에서 가장 참혹
했던 기간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이 절망적이고도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저는 당시 불온서적이었던 그의 저서들을 어
렵게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치 사막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그의 사상을 단숨에 흡수
했습니다.
그 속에는 폭력과 야만이 난무하는 시절에 인간에게, 민족에, 또 각국의 정부에 절름
발이가 되어 버리고 잠들어 버린 양심을 깨워 일으켜 자유의 가치와 은혜를 새롭게 부
활시키라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의 친구이기도 한 뢰프케입니다』
이상은 뢰프케의 사상을 실천에 옮겨 「라인江의 기적」을 이룩했던 西獨 수상 에르
하르트가 행한 추도사의 일부분이다.
2003년 현재 서울에 뢰프케가 나타나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
을 줄 수 있을까?
『붕괴의 길을 걷고 있는 사회주의 북한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면서, 한편
으로는 자유시장경제의 정당성 확보에 가일층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남북한 교류
가 북한 지배자들의 내부권력은 강화시켜 주는 반면 남한의 저항력은 약화시키는 쪽으
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이 흔들리면 자유사회의 終焉이 눈에 보인다고 내가
우려했던 궁극적인 규범과 원칙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훼손되고 있지는 않는가?
자유롭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을 갖고 개척하도록 하고, 그에
따라 복지국가를 점차 축소시켜 나가는 진정한 자유 우익적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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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Röpke, as his companions Walter Eucken, Franz Böhm and Alexander Rüstow e.g., was one of the intellectual fathers of the German Market Economy, implemented by Ludwig Erhard as “Social Market Economy”. Although always an enemy of being put in any Procrustean box, he was proud to be called a “great Austrian economist” inter-nationally, in the tradition of Ludwig von Mises. In Germany, champions of the Market Economy as Röpke were called “Neoliberals” or “Ordoliberals”, summarized in Röpke´s own words: “I champion an economic order ruled by free prices and markets ... the only economic order compatible with human freedom.”
Röpke was an outstanding example of personal courage in fighting National Socialists and any kind of collectivism, a brilliant analyst of the complex economic and social crises of his times, and a political man of foresight. In 1930 e.g., before the elections to the Reichstag, he warned: “Nobody who votes National Socialists on September 14 may tell later on that he had not known what could be the result. He must know that he votes for chaos instead of order, destruction instead of building up ... for war inwards and outwards”. Röpke not only was an excellent expert in trade - cycle theory e.g., in the tradition of monetary and capital theories of Mises, Böhm-Bawerk and Hayek, he also advised the German Government on practical means to overcome depression and un-employment in the Brauns-Commission (1930-1931) long before the “General Theory” of Keynes (1936).
For his uncompromising opposition to the Nazis he had to leave his homeland in 1933, first to Istanbul, then in 1937 to the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in Geneva. Röpke´s great reputation with Chancellor Adenauer helped Ludwig Erhard to implement the German Market Economy against socialists in all parties; inter-nationally he paved the diplomatic way for Germany´s come back: morally and economically. As a founding member of Hayeks Mont Pelerin Society (1947) and as a free trader, Röpke was convinced that freedom, peace and wealth are promoted best by competition on open markets, rule of law, private property, stable money, and a federal system as in Switzerland - nationally and internationally: people living peacefully together in all their rich variety of culture and religion, in a social system of freedom and self-responsi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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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in 1899 in Schwarmstedt, Germany, Wilhelm Röpke would become one of the most distinguished economists of his day. Acknowledged as a peer by such eminents as Ludwig von Mises and Friedrich von Hayek, Röpke was a key intellectual architect of postwar prosperity in Europe. Ludwig Erhard, economic director in postwar western Germany[1] (and later Chancellor of the Federal Republic), unabashedly credited Röpke as the most formative single influence on his policies.
In the ruined Germany of 1948, when expert opinion, the largest German political parties, most of the Allied Occupation officials, and even a majority of Germans were calling for socialism and the planned economy, Ludwig Erhard rejected the popular wisdom. His administration halted a disastrous postwar inflation and stagnation by issuing in 1948 a new, sound currency--the Deutschmark--and abolishing at one stroke the wage and price controls which had survived the fall of the Third Reich. This launched the West German polity as a federal, free-market democracy. It sparked a rebirth of that shattered nation which astonished the world--and inspired similar reforms in Italy, France, and other countries.
Erhard's economic reforms are now widely acknowledged as masterstrokes--more important to German prosperity than the aid received through the Marshall Plan. In these decisions, Erhard followed the principles which Röpke had explained in major theoretical works and reinforced in a flurry of articles from the late 1920s on through the postwar crisis.
In the darkest hours of Hitler's war, when Erhard worked as an obscure adviser to a cigarette company, he schooled himself in market economics on Röpke's works--which, banned by the Gestapo, had to be smuggled in from Switzerland. Speaking in 1967 at a memorial service for Röpke, Erhard would sum up what he'd gained from his friend and mentor:
Wilhelm Röpke exhausted himself offering--to those trapped in socialist-collectivist thought, to those unable to escape such thought, to all those involved in the constitution or glorification of the totalitarian state, to those who have comfortably excused themselves from responsibility and pangs of conscience--words of transformation, offering them once more firm ground under their feet and an inner faith in the value and blessings of freedom, justice and morality. [2]
Ludwig von Mises, the grand theoretician of Austrian economics, wrote this at Röpke's death:
For most of what is reasonable and beneficial in present-day Germany's monetary and commercial policy credit is to be attributed to Röpke's influence. He--and the later Walter Eucken--are rightly thought of as the intellectual authors of Germany's economic resurrection. . . . [A] fearless man who was never afraid to profess what he considered to be true and right, in the midst of moral and intellectual decay, he was an inflexible harbinger of the return to reason, honesty and sound political practice.[3]
Wilhelm Röpke made it his life's work to help construct and defend the free society, to diagnose the ills of capitalism, and to suggest concrete solutions. Like a stern country doctor--his father's profession-- Röpke was never shy about criticizing the abuses of the body politic which endangered its health and rendered it defenseless against infections from far Right and far Left. Röpke was blunt, even caustic, when he wrote about the abuses that had encrusted two centuries of capitalist practice, culminating in the crisis of the Great Depression.
He sharply criticized the probusiness parties of Weimar Germany that supposedly stood for economic freedom but relied on the state to impose protectionism and shore up monopolies. These groups, more than anyone else, had given credibility to the Marxist charge that market economics was merely an ideology, a rhetorical construct that served the class interests of the bourgeoisie, who violated its principles the moment they proved inconvenient.
Röpke found common ground both with socialists and libertarians in exposing the inconsistencies of contemporary capitalism. He shared with socialists their outrage at hypocrisy, intellectual subterfuge, and social injustice; along with libertarians, he held a deep respect for the wealth-creating free market. But he departed from both in his analysis of where the West had gone astray, and what measures must be taken to restore Europe to health. Unlike most free-market advocates, Röpke seconded complaints made by counterrevolutionary thinkers on the Right. He too was appalled at the brutality and suddenness with which old lifestyles and mores had been uprooted through the political and economic revolutions that swept Europe after 1789. Röpke infused his detailed analyses of modernity with a sensitive respect for the values of tradition and religious faith, and their critical importance in building social and economic order.
Because of his intellectual openness, Röpke's work eludes easy categories, and repays careful reading and rereading by students of history, economics, and culture, regardless of where their intellectual sympathies may lie. Röpke was a master of many languages and vernaculars; well-versed in technical economics, romantic poetry, classical literature, and the history of science, he has aptly been called a Renaissance man.[4] While signs of this learning bejewel his books--including lengthy Latin and French quotes given in the old style, untranslated--they never seem pretentious.
His broad, humane erudition--which Röpke betrays incidentally, while simply trying to make a point--may well have saved him from the intellectual extremes to which so many of his fellow social reformers fell prey. It also partly explains the breadth of his influence among educated Europeans--such as Ludwig Erhard.
One of the first writers exiled by the Nazis for his ideas, Röpke subsequently worked in Turkey and Switzerland, writing books that helped preserve the spark of free thought in Germany and throughout occupied Europe. After the war, Röpke was one of the founding thinkers of the newly created Christian Democratic movement, the strongest European voice for resistance to the next totalitarian menace, the expansionist Soviet Union. While remaining a strong advocate of the free market, Röpke was also a keen critic of its abuses, and an advocate for minimalist, effective intervention by the state to preserve vital social goods neglected by markets. Indeed, it was Röpke who first coined the (later much-abused) term "the Third Way" to denote a market-friendly, socially responsible economic policy--one aimed at encouraging the widespread ownership of property, capital, real estate, and small businesses throughout the population.
Appalled by all forms of monopoly, Röpke considered the economic power of colossal corporations almost as dangerous as the political might of collectivist governments. Always a cosmopolitan, Röpke favored untrammeled free trade, regional liberties, and respect for traditional peoples and ways of life. (For instance, he was an outspoken advocate of allowing Japan to retain her monarchy after the Second World War.) Ever a foe of nationalism, Röpke pointed to the eighteenth century as the zenith of European civilization--before ideas were branded by their country of origin and yoked to the service of intolerant nation-states.
On the other hand, suspicious as any Swiss peasant of imperial governments, Röpke opposed attempts to abolish borders and concentrate power in the hands of transnational bureaucracies. Just as the market economy had been built by small businessmen, farmers, inventors, and entrepreneurs--at the expense of monopolists, mercantilist kings, and rationalist philosophes--so Röpke saw international order and liberty as arising from free regions federated within nation-states, whose relations must be governed by standards (written or unwritten) of international law and enforced by a balance of power.
In light of the tragic failure of the post-Versailles commissions appointed to protect ethnic minorities in Europe, Röpke saw extra-governmental institutions (such as churches, civic, and social organizations, often maintained by local elites) as the best defenders of human dignity against oppression by intolerant majorities. In this as in many other questions, he was inspired by the example near at hand--the healthy diversity and peculiarity of Switzerland, whose liberties had grown not from international guarantees or utopian schemes, but from concrete institutions, alliances of convenience, and ancient privileges fiercely guarded by peasant militias over centuries.
Instead of a multinational currency administered by a central authority (like today's Euro), Röpke favored a worldwide gold standard that offered a single touchstone of value for many currencies--and wrested the critical power over the money supply from the hands of politicians and financial elites, leaving it to move spontaneously with the billions of daily decisions made by free men and women in free markets.
Röpke was a successful popularizer, making clear the workings of the market economy in writings aimed at the educated layman. His works went through many editions and were swiftly translated into French, English, Hungarian, even Japanese. American editions of his major works have remained in print for decades, and several neglected titles have been or soon will be reprinted in English. Unlike some other free-market advocates, Röpke understood that economics had been irreversibly politicized; there was no going back to the old, nineteenth-century view that had placed the function of a nation's productive capacities entirely beyond the reach of popular sovereignty.
The growth of mass democracy, the mobilization of millions of men of every social class during the First World War, rising nationalist sentiment, and class mistrust--all these currents had joined to overwhelm the levee behind which classical liberals had hoped to protect economic life from the turbulence of politics. No longer would it be enough to convince the economics professors, the king's ministers, and the responsible classes of the virtues of a free market.
Röpke began his academic career with very definite views about the tradition in European intellectual history with which he identified. Like many who rejected fascism and statist socialism, Röpke considered himself a good liberal. Sadly, this term had become so broad even by the 1930s that when used without qualification it conveyed very little. Indeed, "liberal" is currently used to describe thinkers as disparate as Montesquieu, Rousseau, Thomas Jefferson, Lord Acton, Alexis de Tocqueville, Herbert Spencer, Walter Lippmann, Francis Fukuyama, Christopher Lasch, and Michael Lerner. [5]
Röpke employed the word "liberal" in a very different, and considerably more specific, sense. In the Continental parlance of his day, "liberalism" could be taken in at least two ways:
1) As referring to the general movement away from feudal institutions, toward greater social mobility and personal freedom.
2) As pointing to the particular form which that movement took in the nineteenth century--specifically, the advocacy of laissez-faire capitalism, a radically individualist view of the social order, and a government whose role was to serve as a "night-watchman," deputized to defend property rights and national borders-and to do little else.[6]
Even as a young scholar, Röpke embraced "liberalism" in the first sense, and rejected it in the second. Because of the profound confusion which had been caused in the minds of Europeans--to the detriment of true liberalism, he would point out--by this dual meaning, Röpke became ambivalent about the very word. While he began his career with a wholehearted embrace of the liberal tradition, he would soon feel the need to modify the term, to qualify his loyalties and make clear that he did not identify with the caricatured form which liberalism had attained historically. Hence, terms such as "neo-liberal," and, later, "social market[7]," "humane economy" and "Third Way," which Röpke and his allies would adopt to describe their programs.
In an unfriendly age, during which the most influential intellectuals set their courses by the stars of Stalin, Trotsky, and even Hitler in pursuit of revolutionary transformations of society and human nature, Röpke made himself the champion of dustier, less glamorous ideals, such as individual liberty, political moderation,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ethnic tolerance. Few thinkers in this century have better understood the interaction between economics and culture than he.
Röpke knew that if true liberalism--including its economic component, the free market--was going to survive after the First World War, or be restored where it had collapsed, it would only be where its partisans could win over the voter. Therefore, Röpke reasoned, economists would have to make the case, over and over again, that prosperity and justice, freedom and progress, would be best served by the preservation of individual economic freedom, within the limits of social order and the common good.
This social and economic synthesis Röpke called his "Third Way" between collectivism and historical capitalism. In using this term, Röpke did not mean a welfare state or mixed economy, but rather a free-market system which did not rely solely upon economics as the source of order. In that reliance lay the great mistake of nineteenth-century apologists for capitalism (such as Herbert Spencer), as Röpke would argue over the course of his career; in fact, only a solid social structure predicated upon individual virtue, cohesive families, and local communities could counterbalance the frequently disruptive side-effects of the dynamic, highly efficient market system. A decay in those fundamental building blocks of social order must lead to atomization, alienation and ever increasing demands for state control over the economy.
Röpke's critique of modernity mirrored in some respects that of G.K. Chesterton, Hillaire Belloc, and Pope Pius XI.[8] (This makes for a curious irony, since Röpke was the scion of a long line of Lutheran pastors, and chose to make his home in the Protestant capital, Geneva.) Röpke sought to allow the maximum economic freedom and self-determination for each citizen. He also saw that the boundaries of this autonomy must exclude actions that weaken the social order and undermine the civic foundations of the market system.
His thought left room for state interventions in the economy, provided that they did not radically distort the incentives that drove private enterprise. It was Röpke's view that prudence and politics must sometimes dictate the behavior of statesmen in economic matters. So rather than offer a "purist" position, Röpke laid down strict principles such as those given above, and then in his voluminous works provided criteria by which his readers could judge each case of possible intervention on its own merits.
However, Röpke rejected as "incompatible" with a free market every kind of intervention which:
by paralysing the price mechanism . . . creates a situation which immediately calls for further and even greater intervention, transferring the regulating function so far carried out by the market to a government agency. If the government introduces rent ceilings, the divergence between supply and demand in the housing market grows ever greater as rents remain below the level which is necessary to promote construction and lessen demand. Consequently, the state is forced to go further and ration housing, as at the same time building activity collapses under these conditions, it must finally take over housing construction under its own management. In addition, this tends to lead to a "freezing" of the housing situation--everyone clinging to the home which he was lucky enough to get hold of, without making any adjustments if his family should decrease--and to a progressive diminution of mobility. This should teach us that the price mechanism is an essential part of the mechanism of our whole economic system and that one cannot do away with it without in the end being forced down a path leading to pure collectivism. (The Social Crisis of Our Time, p. 161)
Röpke did more than explain the benefits of a market economy to the general public. More important, he suggested ways in which modern life in a market economy could be made more congenial to man, more natural, less inimical to his family and cultural life. His constant touchstone for political and social reform was not abstraction or ideology but experience, the historical experience of real countries--such as Switzerland and the United States before the advent of the welfare state--that have enjoyed a growth of freedom and prosperity.
As Röpke never tired of pointing out, these goals are usually attained through evolution rather than revolution, through the slow exertions of thousands of yeomen at hundreds of Swiss or New England town meetings, rather than the oratory of a demagogue or the wrath of a Jacobin mob. More ominously, these goals are usually endangered by the growth of bureaucracies--especially multinational commissions responsive to elites.
Röpke warned early and often against the creation of a European "super-state." The citizens of the spurious new nations now encompassed in "Euro-Land" ought to take heed, as their leaders trade away their sovereignty piecemeal. Submerged peoples from the Basque country to Kurdistan have learned that nationhood is one good it is bloody hard to reclaim.
[1] Erhard helped administer the Anglo-American "Bizone" of occupation.
[2]Erhard, Ludwig, "Veröffentlichung von Wilhelm Röpke," in In Memoriam Wilhelm Röpke, Ed. by Universität Marburg,Rechts-und-Staatswissenschaftlice Fakultät, p. 22 ff. Unpublished translation prepared by Dr. Paul Joseph Chu specially for this volume.
[3] Mises, Ludwig von, "Wilhelm Röpke, RIP," National Review, Mar. 8, 1966, p. 200. Quoted by Richard M. Ebeling in "Wilhelm Röpke: A Centenary Appreciation," The Freeman, Oct. 1999, p. 20.
[4] As Russell Kirk wrote in his Foreword to SCOT: "Röpke seemed to have read everything in the field of social thought. He was familiar, for instance, with the political writings of Calhoun and of Fenimore Cooper--of which most American university graduates are thoroughly ignorant. He knew history and poetry, ethics and religion." (p. ix)
[5] In popular parlance, this has rendered the L-word almost as meaningless as the F-word, "Fascist," now a term of indiscriminate abuse generally used to indicate a reprehensible person whom one wishes generally to discredit.
[6] A similar semantic confusion arose during the Cold War. The totalitarian regimes in the Soviet Bloc styled themselves "socialist," in accordance with Marxist theory--which viewed the "communist" state as under construction. Parties and their programs might style themselves as "Communist," but the states were invariably referred to as "socialist." This caused some confusion with the programs of those on the moderate Left, who increasingly adopted the title "democratic socialist" or "social democratic." This concealed the fact that many of them, especially the German SPD, had long kept ties to Marxist theory--even as their members became increasingly appalled at "socialist" reality as practiced in the East.
[7] This term was invented by Alfred Müller-Armack in 1947, reports Patrick M. Boarman, "Apostle of a Humane Economy: Wilhelm Röpke," Humanitas XIII: 1, 2000.
[8] As he got older and more pessimistic about the effects of modernity on European man, Röpke came increasingly to cite conservative thinkers such as Edmund Burke, G.K. Chesterton, Hillaire Belloc and Christopher Daw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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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 나의 춤 (현대시)>
2007. 9.8 맑은샘 지음
선열하 (先烈下), 천년 전부터
나 피로써 물려 받은 것은
크나 큰 다함이 지극히 없고,
움직여라 빛을 낳아
움직여라 지극히 고요하여 물을 낳았다
고요함이 지극하면 다시 움직이나니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뿌리 되었네
물로 나뉘고 빛으로 나뉘어 두 모양이어라
빛이 변하고 물을 합해 다시 차가운 물, 뜨거운 불, 강한 쇠, 부드러운 흙이 되더니
다섯 자식 골고루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사랑
다섯 색동은 하나의 빛과 물
빛과 물은 다함이 없어 지극해 본래가 끝이 없어라
다섯 변화 생성은 저마다 성품을 갖추고 큰 다함없는 성품과 이루니 하늘의 길이라
축복하고 찬양하라 나의 마음 이어라
땅의 길이라 내 사랑 이어라
두 영혼 만나 만물을 변화 만들어 내나니
태어나고 태어나 변화가 끝이 없어라
오직, 사람이 빛의 주인이니 형체가 있어 정신과 앎을 드러 내나니
어질고 의롭고 예의 있고 알고 믿는 다섯 가지라
이어 좋고 나쁨이 구분 되더라
거룩한 이 중앙의 바름과 어짊과 의로움을 바르게 정해
고요히, 지극히 사람의 다함을 세우라
거룩한 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그 德을 합했고, 해와 달과 더불어 밝음을 합했고,
사계절과 더불어 그 차례를 합했고, 귀신과 더불어 길흉을 합했으니
의롭고 의로운 길 그를 닦아 하늘의 靈으로 사람의 魂과 肉을 움직이노라
작은 사람 그를 거슬러 흉하도다 흉하도다
하늘 의 길 세우는 것 빛과 물이라 하고
땅의 길 세우는 것 부드러움과 강함이라
사람의 길 세우는 것 어짊과 의로움이라
시작에 근원하여 나 아비들의 끝으로 돌아가리
위대하다 사랑이여 크나 큰 천년 전 劍의 사랑이여
하늘과 땅의 만물은 그 때가 모두 나뉘어 졌는데
정결한 삶 스스로 자신을 잊어도 사악함은 그 때를 알수가 없네
진실하고 크나큰 칼
하늘의 시간에 그 아름다운 빛 춤을 추어라 춤을 추어라
황홀하고 아름다운 춤
끝없는 춤을 추어라
*감상음악 : 첼로명곡 (모드 작곡 : 사랑의 찬가)
첫댓글 맑은샘님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저 혼자만 보게 비공개로 스크랩 해가겠습니다.^^
아이고, 새벽3시 어중간한 시간이네요....하하 방문 감사합니다. 늘 즐거운 일상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