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 1862년)

'리처드 조던 개틀링(Richard Jordan Gatling, 1818년∼1903년)’박사는 원래 의사였지만 의술 대신 공학에 삶을 받쳤던 사람이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개틀링은 자신의 고향 인디애나에서 무수한 사상자들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들뿐 아니라, 질병과 영양부족으로 고통 받는 병사들도 많았다. 병사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개틀링은 발사속도를 높인 새로운 총을 개발하기로 한다. 그는 병사 한사람이 100명의 몫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고, 자신의 이름을 따 개틀링 기관총이라고 명명했다. 이 총의 특징은 개별 발사장치가 부착 된 여러 개의 총신이었다. 손으로 돌리는 L자형 손잡이가 총신을 돌리면서 총 위쪽에 있는 탄창 밑을 지나게 한다. 각각의 총신은 12시위치에서 장전되고 1시위치에 왔을 때 용수철이 장착된 핀이 총알을 발사한다. 그 후 총신은 아래쪽으로 움직이게 사용한 탄피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결과 한 총신이 발사하는 동안 다른 총신은 자동으로 장전되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사격이 가능하다. 개틀링은 이 기관총이라는 기계가 소총 여러 자루의 화력을 대체해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의 수를 크게 줄일 수 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그 반대가 되었다. 병사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고, 개틀링 기관총의 숫자도 늘어나면서 사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전을 치루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들어났다. 흥분한 사수가 너무 빨리 손잡이를 돌릴 경우 작동불량이 일어나기 일쑤였고, 너무 크고 무거워 마치 대포처럼 운용해야했기 때문에 쉽게 다룰 물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개틀링 기관총은 신뢰를 잃고 창고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탄환을 연속 발사한다는 개념은 공학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도전과제였고, 드디어 1883년 ‘하이람 맥심(Hiram Stevens Maxim, 1840년∼1916년)’이란 발명가는 제대로 된 기관총을 세상에 내놓았다. 당대 에디슨과 견줄 정도로 뛰어난 발명가였던 하이람 맥심은 친구들과 사격연습을 하던 중 기관총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즉, 발사시마다 어깨로 전해지는 반동의 충격에너지를 이용해 탄환을 재장전하는 전자동식 기관총을 고안해낸 것이다. 맥심의 친구들은 돈을 긁어모으고 싶으면 유럽 사람들이 대규모 시설에서 생산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을 만들라고 얘기해줬고, 맥심은 기관총의 시제품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 ‘쇼 케이스’를 벌이며 열심히 홍보했다. 당시 맥심기관총은 1분에 무려 45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맥심은 전 세계 군관계자들을 불러모아놓고 기관총으로 나무를 쓰러뜨리는 시범을 보여주는 탁월한 마케팅 능력으로 사업을 진행시켰다. 곧 맥심기관총은 유럽의 표준 기관총이 되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야말로 빅히트(?)를 쳤다. 기관총 앞에 적의 돌격과 진격은 번번이 가로막혔고 이는 곧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적을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단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대대 하나가 기관총에 녹아 없어지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헬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