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많은 만큼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일화도 많다. "유재학 감독은 똑똑한 사람이에요. 중학교 1학년때 처음 봤는데 농구도 잘하고 머리도 좋아요. 운동을 하면서도 학급에서 5등 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좋았을 정도로 끈기도 있었죠. 그런데 1학년을 마치자마자 가족회의를 통해 농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제가 영등포에 있는 유재학 감독 집 앞까지 가서 통사정을 했어요. 밤새 애원했죠. 결국 부모님께서 나오시더니 '이제는 양 선생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하더군요." 만약 당시 양문의 선생이 유 감독을 놨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공부를 워낙 잘했기에 다른 쪽으로 갔어도 훌륭한 사람이 됐을 겁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면면을 꼼꼼히 지켜보고 있었다. KBL 경기분석위원으로 활동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중고농구는 물론이고 대학리그와 KBL까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지도자로 성장한 제자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모순이에요. 다만 전창진 감독은 선수들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대단한 것 같아요. 선수 관리도 탁월한 것 같고요. 허재 감독은 선수운영을 잘 하고 있지요. 다른 후배들도 악착같은 면이 있어요. '끝장 농구'라고들 하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게 완성될 때까지 물고늘어지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후배들이 이러한 '끝장 농구'를 계승(?)하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바로 열악한 팀 사정 탓이었다. 워낙 단신들이다 보니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큰 선수가 없었어요. 다른 팀 가면 포워드 봐야 할 선수들이 센터를 봤죠. 이민형(190cm), 김재훈(193cm), 양경민(193cm) 등이 모두 작은 키에 고생했어요. 자신들보다 훨씬 큰 서장훈(207cm), 현주엽(195cm) 같은 선수들을 막아야 했으니까요. 큰 선수들을 막으려다보니 작은 선수들은 몇 걸음 더 움직여야 했지요."
용산의 모토인 '수비'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는 용산고 농구를 한 마디로 '수비'라 표현한다. "최고의 수비를 펼치기 위해선 강한 체력이 필수였죠. 그래서 택한 훈련지가 학교 위쪽에 위치한 남산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학교 출신들은 '남산'하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일겁니다. 납조끼, 모래주머니를 차고서 한바퀴를 돌고, 그것도 모자라 계단 오르내리기를 했어요. 30대까지는 저도 함께 달렸답니다." 힘든 훈련 끝에 얻은 근성은 결국 명장들의 DNA에 녹아들었다. 전창진, 유재학, 허재, 유도훈 감독 모두 '한 발 더 뛰는' 농구가 모토다. 제 아무리 잘해도 수비를 못하면 경기에 뛸 수 없다는 점도 비슷하다.
지도자들의 덕목도 빼놓지 않았다. "프로감독은 누구나 원하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개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갔던 지도자들은 '프로'라는 조직의 생리를 제대로 모르고 도전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준비가 필요한데 너무 쉽게 봤던 것입니다. 프로는 선수, 감독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합니다. 전창진, 허재, 유도훈 감독을 보세요. 결코 그냥 타협하지 않고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몰아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선수단을 감싸고 아우를 수 있는 것도 감독으로서 필요한 덕목입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용산 중,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삼광초등학교까지 관심을 갖고 고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다. 고려대에 진학한 이승현의 성장에도 양문의 선생의 역할이 컸다. 그는 장신 선수들의 발굴과 성장에는 아마추어 지도자들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아마추어 선수들은 기본기가 중요합니다. 지도자들이 이 시기에 기본기를 얼마나 잘 가르쳐주느냐가 선수 커리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장신 선수들은 아무리 기초가 부족해도 대학을 거쳐 프로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더 발전이 없습니다. 기초가 없기 때문에 답답한 겁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은 아마추어 지도자들이 노력해줘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나라 농구에 이런 레전드가 계셨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