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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직업발달사 -김병숙
이 책의 저자는 "여자"분이고...교육 심리학인가 아무튼 이것을 전공했다고 한다. 이 분의 책을 보다 보면.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무궁한 자부심, 열광을 엿볼수 있다.
심지어, 나무, 자연환경 등에서도 중국 지역과 한반도를 비교 하며..한반도가 매우 뛰어남을 주장한다.
가령 보통 사람들의 중국인등에 대해 (인터넷등에서) 언급하는 것들을 보면 짱깨들은 머릿수만 많고..좀 부실해 보이고. 쌍용, 현대, 그리고 세계적 브랜드 삼성, 최고의 LCD 등의 제품과 메디 인 차이나로 연상되는 부실해 보이는 중국산 차, 짝퉁, 싸구려, 단골메뉴로 자주 언급되는 저질 중국산 먹거리들과 최고의 효능과, 우리 몸에 잘 맞는다는 그렇지만 좀 비싼 식품들...이외에도...객관적으론 정말 웅장하고 붉그스럼 하고..광대한 자금성과 경복궁의 비교(자금성은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만든것이고, 경복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한국식의 뭣이라는 것) 뭐 이런것 들 .....
중국의 자연, 생물, 지리, 품성 등이 한국에 비해 영 꽝이라면서 중국쪽으로 영토를 조금이라도 넓혀 잡으려고 발광하는지...
또, 내가 알기론 우리나라는 기름 한방울 안나는 나라라고 아는데..무슨 삼삼이고 토종 배추김치인가?
중국은 그래도...천연자원은 우리나라 보단 훨씬 풍부한것으로 아는데...
이외에도 반만년, 아니..구석기 시대부터 즉 몇십만년전부터 뛰어난 한국인의 바탕이 드러난다거나..
중원보다 훨씬 얼마 빠른 청동기 문명이라는 제목들...
차라리 이런 주장을 남자가 했다면 이해한다. 그런데..여자분이 이런 주장을 했다.
그리고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분이..솔직히 난 철학 하는 인간들은 좀 특이한 정신구조를 가진듯 하다는 생각들을 가지고도 있는데 철학(심리학등도 대충 여기에 포함시켜)하는 인간들이 치우니 아사달, 위대한 고조선이니..하는 것을 보면..할말을 잃는다.
어떻게 저렇게 됐을까...
이 책을 보면 근대 일본관련 통계 자료가 많이 나오는데..솔직히 난 믿음이 안 간다.
이상하게 미리 일본을 철저하게 악으로 보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일본 경제, 사회 , 문화 관련 통계 자료에 대해서는 신뢰감이 별로 이다.
좀 뻥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고구려나 영토 문제라고 주장하는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아주 최근에 나온것이다. 책은 매우 두껍다(900페이지가 넘음). 한장씩 잃다가는 제때에 전체를 대충이나마 알수 없을 듯하여..어쩔수 없이..빨리 빨리 넘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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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100년 밖에 되지 않는 나무 침대에 대하여 장황하게 열심히 설명하는 안내인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100년을 이렇게 아낄진대,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어떻게 대했는지 새삼 돌이켜 보게 된다. 더욱이 현대에서 자주 대하는 역사는 삼국 시대 이후이므로 반만년 역사 중에서 3500여 년에 대한 역사를 혹시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리 선조 중에 칸트보다 더 위대한 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있는 줄은 잘 알지 못한다.
말 위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고구려의 기마병에서 우리는 올림픽 양궁선수(양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울산 반구대는 6000년 전 우리 서조들이 주된 생업에 대해 대를 이어 가르치기 위하여 각종....
70만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인류가 살기 시작하였으며....(10여 만년전 아프리카 현생 인류)
우리와 인접한 중국을 방문하여 역사적 유물을 보면 디자인의 독특함에 흥미를 갖게 되나, 빼곡이 구현한 반복적 문양들을 보고 있자면 곧 싫증을 느끼게 되낟. 중국의 장가계는 끝없이 펼쳐지는 기묘한 산봉우리의 경관으로 감탄을 자아내지만 똑같은 느낌의 산봉우리의 모습이 슾며시 감탄을 멈추게 한다. 이는 우리가 여백의 미를 즐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 우리나라 5000년 역사를 이야기 할 때 그 출발점을 고조선에 두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광할한 영토를 가졌던 고구려!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군총을 조성한 고구려! 이러한 고구려의 역사는 전쟁 그 자체였다.
중국의 장안성이 16km에 비해 고구려의 장안성은 둘레가 약 16km이며, 성벽의 총 연장 길이는 약 23km의 걷한 성이었다(KBS, 2001)
『일본서기』에 이중천황 5년(404)에는 고구려의 일본 열도 침공 기록이 있다.
수나라 수군은 68년 대만을 공격하고 말레이 반도의 적토국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항해술과 상륙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났다. 5층 높이에 8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는 거대한 함선을 만들 정도의 조선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중앙 행정기구는 집사성이다.
『삼국사기』직관지에 의하면, 내관인 궁내부에는 115개의 관청이 있었는데 이중 수공업과 관련된 관청은 약 30여개에 이른다. 이곳에서 관장한 생산품들은 다양하였다.
우편제도의 기원은 우역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우역제도가 문헌에 나타난 것은 신라 소지왕 9년(487)의 일이다.
공연이란 가호의 단위로서 신라의 거주민들을 빈부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각종 부담을 지게 한 것이다. (신라 촌락 문서)
궁정 수공업 관청에는 두 종류의 관리들이 있엇는데, 그 하나는 간(干)·사(史)·종사지(從舍知) 등의 행정관리와 옹(옹)·모(母)·여자(女子)·조(助) 등과 같은 기술관리이다. 기술관리들은 본피궁에서 통제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본피궁에는 가장 높은 관리인 우(虞)와 그 밑에 사모(私母)·공옹(工翁)·전옹(典翁)등과 같은 다른 기술관리보다 지위가 높아을 관리가 계층적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는 궁정 수공업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가장 높은 관리였고, ‘사모’는 상층의 여성기술자인 ‘모’들을 지휘하는 가장 높은 여성 기술관이며, ‘옹’은 남성 기술공들의 총책임자였을 것이다. ‘조’는 나이가 적은 미숙련공으로서 ‘모’나 ‘옹’의 지휘 아래서 기술을 익히고 일을 도와주던 견습공으로 추측된다.
신라 전 시기에 걸쳐 각종 공사는 주로 1~3월과 7~10월에 집중되어 있다. 제방 축조의 경우는 모든 공사가 1~4월에 집중되어 있다.
법흥왕 18년(558)에는 ‘유사(有司)’가 제방의 수축을 관장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장상과 유사는 관련된 관리로 생각된다(박남수, 1996)
울진의 지방 호족인 ‘진’씨는 전재을 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일본어 발음으로 ‘히타’씨로 일본 고대사에 남게 되었다.
828년 12월 차나무 씨앗이 우리나라에들어와 차문화를 발달시켰다.
발해의 건축에 쓰인 자의 기본 단위(尺)가 고구려와 같은 35cm 이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압록강 어귀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른다.
왜구는 고종 10년(1223)에서 공양왕 4년(1392)까지 162년간 519회 침입하였다. 이것을 다시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충정왕 2년(1350)부터 본다면, 42년 동안 506회로 연평균 12회 침입하였다. 왜구가 가장 많이 침입했던 우왕시절은 연간 평균 27회였으며, 가장 극심했던 해는 우왕 9년 50회로 월평균 4회가 넘었다. 왜는 주로 충청·전라·경상지방 드에 집중되었다.
신라에는『이방부격(理方府格)』60조(664, 무열왕 원년)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고려사』형법지가 있어 율 69개조, 경 2개 조로 모두 71개조의 고려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윤국일, 2000).
과거제도의 일종인 음서제는 5품 이상의 귀족관료들이 자신들의 자손을 가음에 의해 관도로 나가게 할 수 있는 길이며 조기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음서를 통하여 진출한 관인들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승진하였다. 으서로 시작한 대부분의 관이이 5품 이상관으로 진급하였고, 특히 음직 63인중에 재상급인 2품 이상으로 승진한 사람만해도 39명이나 되어 60%를 상회한다. 이는 과거수석 합격자 중에서 아무런 관력도 남기지 못한 자가 60%에 가깝다는 사실과 극히 대조를 이룬다(박용운, 1998)
시전의 감독과 물가 조절을 맡아보는 관부로는 경시서(京市署)가 있었다.
수공업자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공장안(工匠案)을 만들어 그들을 등록시키고,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법까지 제정하였다.
소(所)는 필요로 하는 금·은·동·철·종이·자기·묵 등 특정 공납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들 공납품과 관련된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형식상으로는 해당 군·현에 소속되었으나 실질상으로 중앙관청, 특히 국왕에게 직속된 궁정관청의 통제 하에서 공물을 생산하였다.
주금사(한자가 呪禁師과 呪噤師 둘중 하나인데...고려시대의 의료 관련 기구임..)
초기의 과거시험은 제술과[製述科: 진사과(進士科) · 명경과 · 잡과(雜科:명법·명산업·명서업·의업·주금업·지리업 등] 등 3과로 분류되었으며, 1136년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문관 등용시험이었으나 제술과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제술과 합격자 수가 6000여 명이나 되는데 비해, 명경과 합격자는 450명 정도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에 경학(經學)보다 문학을 숭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리들에게 매달 1일, 8일, 15일, 23일 등이 정기 휴일이었고, 이 밖에 설날, 입춘, 한식, 입하, 칠석, 입후, 추석, 추분, 연등, 팔관 등 연간 54일 이상을 특별휴가로 주었다. 하지만 휴가의 전체 일수는 100일을 넘지 못하였다.
임금 산정은 매년 3월 전에 산출되어 그해 6월 전에 임용할 경우는 녹봉의 전액을 지급받으나, 6월에 부임할 경우 반액밖에 받지 못하며, 또 3~6월 사이에 차출되어 10월 전에 취임할 때에는 반록을 받으나 10월 후에 임용할 경우는 그 해의 녹봉은 전혀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초임은 적어도 연 3월 이상 근무하여야 녹봉이 지급되었다.(박용운, 1998)
이부(吏部)는 문관의 서발 배치를 담당하고 병부는 무관의 선발을 맡았으며, 관리들은 근속년월수를고려하여 근면과 태만을 구별하고 공로와 허물을 표준하였으며,재능의 유무를 평가하여 서면에 기록하여 두고 이를정안(政案)이라 불렀다. 이것을 가지고 중서성에서 벼슬을 올릴 것인가, 파직할 것인가를 토의하여 왕에게 보고하면 문하부에서는 왕명을 받아 집행하였다.
산관(散官):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
고려시대의 정년이 70세이며, 비록 일부이지만 정년이후 연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군량 4000섬은 현대 단위로 약 600t에 해당 된다.
고려시대의 균이란 무게단위인데, 1균은 30근(1근은 0.6kg)이다.
성종 6년 전국 병종별 군정의 수
갑사 14000명
별사우위 1500명
파적위 2500명
팽배 5000명
대졸 3000명
취라적 640명
태평소 60명
친군위 40명
정병 72109명
수군 48800명
계:148449명
이재룡(1999)
『세종실록지리지』지리지의 전국 22만 6310호의 5.5~7.5배는 대체로 120~170만 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전기의 이구수는 12~17만 호에다 4.5인을 곱한 540만~740만 명이었다고 추산해 볼 수 있다(이종일, 1983)
숙종 10년(1684)은 144만 4377호, 657만 3107명
영조 50년(1774)은 170만 3030호, 709만 8441명
순조 7년(18070은 176만 4504호, 756만 1403명
광무 8년(1904)은 141먼 9899호, 592먼 8802명 등이었다.
1910년 일본에 의한 호구조사 결과, 274만 9956호, 1312만 8780명으로 광무 8년보다 2배 이상이 된다(善生永助, 1925). 이는 누호·은정(隱丁)의 현상에 기인한다.
년도 인구비율 평균가구수
1727년 2.70 5.76
1729년 2.61 5.76
1733년 2.86 5.81
1735년 2.69 5.55
1739년 2.76 5.47
1741년 2.85 5.45
1753년 2.39 4.98
1756년 2.70 5.18
1759년 2.47 4.72
1762년 2.63 4.60
1766년 2.79 4.95
1768년 2.70 4.87
1771년 2.80 5.10
1774년 2.81 5.13
1783년 2.83 4.90
1786년 2.67 4.57
1789년 2.55 4.31
1792년 2.54 4.30
1799년 2.61 4.31
권태환·신용하(1977)
보고된 서울의 인구, 서울 인구로부터 전국인구 추정치 및 보정추정치
1426년 103328 7944000
1669년 194030 14917000
1723년 199018 15300000
1727년 188597 14492000 15034000
1729년 186305 14323000 14783000
1733년 207733 15970000 16191000
1735년 187756 14434000 15248000
1739년 194432 14948000 15872000
1741년 189985 14606000 15592000
1753년 174202 13392000 15104000
1756년 197452 15180000 16338000
1759년 172166 13236000 15519000
1762년 183782 14129000 16872000
1766년 194634 14963000 16439000
1768년 188884 14521000 16134000
1771년 196219 15085000 1883000
1774년 197558 15188000 1776000
1777년 197957 15219000
1783년 207265 15939000 16551000
1786년 195731 15048000 17004000
1789년 189153 14542000 17285000
1792년 189287 14552000 17199000
1799년 193783 14898000 17235000
보고된 서울인구가 정호가하고 조선시대 전반을 통해 그리고 1925년까지 전국과 서울인구의 증가율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추정된 수치임.
위의 가정을 가구원수에 대한 관찰을 통해 완화시켜 추정한 수치임
권태환·신용하(1977)
육군 정병 7만 2109명, 해군인 수군 4만 8800명으로 합계 12만 909명이나 되어 전국 군정의 수가 14만 8449명 중 약 81%를 차지하였다. 시취(試取)에 의한 병종인 갑사·별시위·파적위·팽배·대졸·친군위 등은 이종의 직업군인이라 할 수 있다.
1799년은 총인구가 1723만 5000명이다.
영조의 탕평정책 이후 서울로 권력이 집중되어 서울과 교외의 근기지역을 생활기반으로 한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을 형성하고 독자적 학문풍토와 정치참여방식을 가지게 된 세력이 형성되어 이를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 일컬었다.
1692~1713년(숙종 18~39년)간에 건립된 서원의 수가 급증하게 된다. 이 기간에만 전국에 총 122개의 서원이 건립되었다.
『화성성역의궤』(1801년 발간)에 따르면 쌀 1섬(당시 1섬은 15말)은 5냥 정도였으며, 소는 1마리에 20.35냥, 무명 1필이 2냥, 숯 1석이 6전 3푼, 쇠고기 1근이 5전, 돼지 1마리가 5.34냥이었다.
연도 추정전결 추정면적 추정인구 추정인구/추정면적
1550 1516 4337 9503 2.19
1650 1378 3783 9020 2.38
1725 1320 3712 12130 3.27
1775 1445 4259 14093 3.31
1825 1445 4148 15277 3.68
1875 1487 4325 15884 3.67
국사편찬위원회(1994)
1550년에서 1875년에 이르는 기간 토지면적은 큰 변동이 없었으나 인구는 69%나 증가하였다.
백성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고 고용하게 된 것은 영조 때부터 이다. (18세기)
무명이나 삼베 1필은 모두 2냥으로 정해졌고 이것을 쌀로 환산하면 6말이다. 조선시대 1섬은 오늘날 화폐로 10만원 남짓하였다. 조선시대의 1섬은 15~20말을 기준으로 한다.(하헌장, 1996). 15말을 기준으로 볼때 쌀 6말과 무명 1필의 한달 급료는 오늘날 화폐로 대략 8만원이다.
토지생산성과 노동생산성 추이
시대 자연인구당 자연호당 토지생산성지수 사례1 사례2 평균
8~9세기 509.2 0.9 11.4 57.4 87.4 57.7
992~1301년 727. 723.3 16.0 116.4 115.7 116.1
1391~1432년 135.8 162.3 94.0 12.6 152.6 140.2
세종연간(1432년) 143.4 161.8 72.4 117.1 117.1 110.5
청안현(1444년) 130.5 209.8 7.0 157.4 157.4 127.7
1444~1543년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7세기 전 111.2 74.4 75.0 55.8 55.8 69.6
18세기 전 82.2 69.3 119.7 83.0 83.0 90.7
18세기 후 81.6 67.5 125.9 85.0 85.0 93.9
19세기 전 80.0 68.2 142.5 97.2 97.2 105.6
국사편찬위원회(1994)
서리는 조선시대 관아의 하급관리인 이서(吏胥)와 군교(軍校)를 하하여 이르는 말 아전의 일종으로서 일체의 녹봉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백성을 착취하거나 부정과 비리를 행하는 일이 잦았다.
1678년의 은 1냥 값은 동전으로는 4백문이었고 쌀로 환산하면 10말이엇다. 당하관은 2천냥 팔포(인삼 80근)는 쌀로 환산하면 2만 말로서 1섬은 15말로 본다면 1333섬이 되었고, 당상관의ㅏ 3000냥 팔포는 쌀 2000섬에 해당 되었다.
잡과방목에 기재되어 있는 부치·조부·증조부의 과거합격 실태를 조사해 보면, 부친 전체 5951명 중에서 과거 합격 사실을 알 수 있는 인원 2589명(역과 1448명과 의과 701명, 음양과 351명, 율과 89명), 조부는 전체 3968명 중에서 과거합격 사실을 알 수 있는 인원 1644명(역과 272명, 의과 572명, 음양과 228명, 율과 6명), 증조부는 전체 3635명 중에서 과거 합격 사실을 알 수 있는 인원 902명(역과 217명, 의과 601명, 음양과 163명, 율과 11명)이다. 이들 3대에 걸친 합격률은 전체적으로 38.5%(5225명)에 이른다. 3대의 개별 과거 합격률은 부친 2589명으로43.5%, 조부 1644명으로 41.4%, 증조부 992명으로 27.3%등으로 나타났다. 부친의 경우, 45.1%로 잡과입격자 10명 중 4~5명 중은 2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했다. 3대에 걸친 각 부분별 실태를 보면, 우선 본이과 동일한 잡과에 합격한 경우는 20.5%로서 다른 잡과에 합격한 경우(14.2%)나 문무과 등에 합격한 경우(3.8%)보다 높다. 이는 다른 잡과나 문·무·생원진사시에 합격한 경우보다 2~6배 정도 높아 잡과중인 신분배경이 같은 과목으로 세습되는 비중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이남희, 1999)
교육을 담당하였던 사역원의 교수와 훈도의 경우, 교수가 종6품, 훈도(訓導)가 정9품으로 직급은 낮았으나 사역원의 모든 관원이 녹관체아직(祿官遞兒職)이나 군직체아직(軍職遞兒職)을 받은데 대하여 교수와 훈도는 정직으로 우대를 받았다. 교수나 훈도가 우대되었다는 것은 정직이라는 이유뿐만은 아니다. 교수로서 첨정(僉正) 이상으로서 교회(敎誨)를 지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학관들의 사표(師表)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공해(公廨)를 관장하고 원시(院試)를 주관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었다. 그런데 첨정은 정4품직이며, 교회는 정(正)·상통사(上通事) 등 칠사(七事)의 경력을 요하였으므로 종4품이나 되는 첨정이나 정3품직인 정을 지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교수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교수를 그만큼 우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수의 임기는 30개월이었는데 1752년 이후는 45개월로 되었으며 임기는 일정치 않았다. 이 임기가 끝나면 도제조의 추천에 의해서 동반직으로 전직되기도 하였다.
박사는 교서관, 승문원, 성균관, 홍문관 등에 둔 정7품 벼슬이었다.
1911년 일제의 헌병기관수는 935개소에 7749명이었으나, 1911년 일반 경찰관서는 667개소였으며, 일반 경찰수는 6222명이었다. 이렇게 헌병경찰 1만 3971명, 조선주둔 일본정규군 약 2만 3000여명, 조선총독부 행정요원 1만 5115명 등 총 약 5만 2086명에 달하였다.
1931년 9·18 만주침략 이후부터 조선주둔 일본군을 2개 사단에서 5개 사단으로 증가시켰다.
1933년 미곡생산량은 1819만 석이었는데 일본으로 약탈해 간 미곡은 943만 석으로 그 비율은 51.8%에 달하였으며, 그 후 생산량에 대한 약탈량의 비율이 50%를 항상 초과하여 점점 증가하였다.
1940년대 제조업 생산의 94%를 일본인들이 차지하였었다.
일본 이외의 제3국의 무역은 1910년에 450여 만원에 불과하였으나, 그후 매년 증가하여 1939년 2억 6990여만 원에 달하여 기간 중 약 59배나 증가하였다. 수입도 1910년 1440여만 원이던 것이 1939년 1억 5900만 원에 달함으로써 기간 중 약 11배가 증가햇다.
1910년 수출액 1990여 만원, 수입액 3970여만 원
1920년 수출액 1억 9700여만 원, 수입액 2억 4920여만 원
1939년 수출액 53억 9170여만 원, 수입액은 66억 1090여만 원 증가하여 1910년과 대비해볼때 수출은 약 50배, 수입은 약 35배나 크게 증가하였다.
1877~1882년간 총 460만 3000원, 연평균 76만 7000원이던 수입규모는 1910년 3978만 1000원으로 52배 가량이나 늘어났고, 1886~1910년간 수입총액은 무려 3억 9142만 1000원에 달하였다.
1877~1882년 사이 총 510만 5000원, 연평균 85만 1000원으로 출초를 보였던 수출은 1910년 1991만 3000원으로 23배 밖에 늘어나지 않았고, 1886~1910년의 수출총액은 1억 7251만 5000원으로 이 기간을 통하여 총 2억 1890만 6000원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다.
농산물의 수출은 1893~1902년 수출총액의 93.4%인 5334만 7000원에 이른다.
1911년 말 당시 1008만 2842원의 자본금을 가진 270개의 근대공업기업 중 한국인 공장은 86개(31.9%), 자본금 72만 2632원(7.2%)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인 공장은 183개(67.3%), 자본금 920만 9850원(91.3%)으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1911년의 공업생산규모는 1963만 9655원으로 집계되었다.
유형재(有形財) 생산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년 간, 즉 1911년의 10.6%에서 1930년에는 23.9%로 13.3%가 커졌을 뿐이다.
1911년 전체 공장수는 25%였던 조선인 공장이 1921년에 46%로 증가하였으나 생산액은 전체의 15%에 불과하였다.
자본주의 공업의 성장(1910~1930)
연도 공장수 자본금(천원) 노동자수 공장생산액(천원) 농작물생산액에 대한 비중(%)
1910 151 7987 8203 9277 4.2
1914 654 17372 20963 28790 6.9
1917 1358 39039 41543 84732 13.4
1919 1900 129378 48705 228495 18.6
1922 2900 183570 54677 223343 21.3
1925 4238 265853 80375 269364 22.4
1930 4261 생략 101943 280964 39.7
이헌창(1999)
1930년 공업구조는 공업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정미공업이 중심이 된 식료품공업이 전체의 57.8%를 차지하였고,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전략산업인 방직공업은 12.8%에 불과하였으며, 제지업과 인쇄업 및 기타를 합한 경공업의 비중이 77.3%를 차지하였다.
1933 4838 생략 120320 304822 54.6
1936 5297 생략 188250 709866 72.7
1938 6624 생략 230996 1167115 90.1
1940 7142 1725325 294971 1645047 111.3
1943 14856 생략 549751 2050000 98.8
이헌창(1999)
1941년에는 1만 4856개로 1911~1930년 사이 연평균 200개 증가에서 연평균 815개 증가로 급증하였고, 종사자 수도 총 54만 9751명으로 연평균 3만 4447명이 증가하였다. 생산액은 20억5000만 원으로 7.8배, 연평균 1억 3745만 7000원 씩 증가하였고, 산업상비중도 37.1%로 커졌다.
공업에 있어서 1940년 말 당시 한국인 소유의 비율은 5.9%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당시의 전략산업인 금속공업은 1.65, 방직공업은 15.5% 등이었다.
한국공업의 자급률은 1941년 당시 평균 72.7%에 불과하였고, 자주적 공업화의 전략산업인 기계공업 자급률은 24.75, 인쇄공업은 7.8%등으로 낮았다.
1933년 공장 수는 4838개소 였는데 10년이 지난 1943년에는 1만 4856개로서 3배 신장 했으며, 근로자수를 보면 1933년 12만 320명, 1943년 54만 9751명으로 4.5배의 신장 했다.
1945년에는 전국 74개 도시에 500여 만 명의 인구가 거주해 거의 20%에 육박하는 도시화를 기록하였다.
1915년 현재 보통학교 399개교, 학생 수는 남자 5만 6253명, 여자 5976명인데 비해, 일본인 소학교는 291개교에 학생 수는 남자 3만 1442명, 여자 2만 8206명이었다.
또한 고등보통학교는 2객에 학생 수는 822명이었음에 비해, 일본인 중학교는 2개교에 학생 수는 1034명이었으며, 여자고등학교도 2개교에 250명에 불과했는데, 일본인 고등여학교는 7개교에 1191명이었다.
교원의 구성비에 있어서도 보통학교 교사 중 전체의 30%가 일본인 교사이고 고등보통학교에서는 60%이었으며, 관립전문학교에 있어서는 한국인 직원 7명에 대하여 일본인 59명이었다.
사립학교 수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여, 1910년에 1973개교 였던 것이 1912년에는 1317개교, 1914년에는 1240개교, 1919년에는 690개교가 되었다.
연도 초등학생수 , 초등학교취학률 중등학교 학생수 조선인의 비중 대학교 학생수 조선인의 비중
1925 440299 12.2 25544 54.9 1946 57.2
1930 560866 14.5 44911 57.2 3362 58.2
1935 840848 19.7 60104 62.8 5176 56.6
1940 1582846 33.8 94.665 67.5 6090 60.1
안병직
1940년에는 5년 전보다 약2배에 이르는 학생의 증가를 보였다.
중등학교의 조선인 비중은 점점 증가하였다. 그러나 대학교는 조선인 비중이 1935년에는 낮았으나 1940년에는 60%에 육박하였다.
조선내 현역기술자 수는 1941년 이후 감소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김인호, 1989)
참고로, 일본 식민지 시대의 교육 관련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었는데, 한번 소개하겠다. 책 제목은 일본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 : 한ㆍ일 공동의 집짓기를 꿈꾸며 (저자: 김진현) 이다..
대한제국시대에 관비유학생으로 도쿄제국대학 조선학과와 교토제국대학 제조화학과에서 각각 1명씩 2명의 학사를 배출되었다.
1914년, 1915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를 보면 조선학생을 위한 학교는 공립고등보통학교가 2곳, 사립고등보통학교가 2곳 이었다. 즉 4곳 뿐이었다.
또 다른 자료(유봉호·김융자)에 의하면 1915년 당시 사립고등보통학교는 서울에 2곳, 함흥에 1곳이 있고, 공립 여자고등보통학교는 서울 1곳, 평양 1곳에 있다. 그리고 사립여자고등학교는 서울에만 2곳이 있었다.
1910년 당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은 17만 1543명으로 당시 조선인 이구에 비해 1%를 약간 넘었다. 당시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는 2곳이었다.
(1910~19년 사이에 1개의 공업전문학교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다수의 공업보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이 공업전문학교의 경우 조선이은 생생막 내기 우해 일부만 받아들일 뿐 일본인 중심의 학교로, 그에 반해 공업보습학교는 철저히 조선인 대상의 학교로 운영되어 민족에 따라 과학기술교육에 차등을 두는 현상이 나타난다.)
일본학교는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으로 11년의 수업기간을 거쳤지만 조선인 학생은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합계 8년으로 일본 학생보다 3년이 짧았다. 초등교육의 경우 적령아동의 취학률을 보면 10%를 넘어선 것이 1923년부터 였고 1929년이 되어도 17.4%에 였다. 20%를 넘어선 것은 1934년이었다.
취학률이 높아져 1938년 33.2%, 1942년에는 47.7%가 된다.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는 1941년에 개설되었으며, 1943년에 14명, 1944년에 9명, 1945년 11명으로 총 34명의 한국인 학생을 졸업시켰다. 같은 기간 동대학에서 졸업한 일본인 학생들은 76명이었다.
전문학교 수준의 이공계로는 서울의 경성공업고등학교와 경성광업전문학교 그리고 사립으로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평양의 대동공업고등학교가 있는 정도 였다. 부산수산학교의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전 이 학교에 입학한 한국한생은 매년 한두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친일파 또는 일본이 신임하는 사람들의 보증이 있어야함 입학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철도종사원양성소, 체신리원양성소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기가 호황을 보이고 많은 일본인이 본토로 귀환함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선인을 일부 받아들여 하급 기술인력으로 교육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조선인 중에는 교원으로 나아간 사람들이 많아 전체 조선인 졸업생의 44.2%를 차지하였다. 이는 일본인 7.8%와 비교해볼대 대단히 높은 비율이었다. 아울러 일본인은 모두가 관공립학교 교원인데 반해 조선인은 93.9%가 조선인을 위한 사립학교 교원이었던 점도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였다.
전북대 김근배 교수에 의하면 1910~194년간 이공계대학생은 약 400명 정도 배출되었다. 지역별로는 일본과 만주에 230명, 국내 37명이고 미국과 유럽은 120명, 기타 10~20명이고 전공별로는 이학 10명, 공학 300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은 1940년 당시 이공계 졸업생이 5만 5834명이었다.
일본 대학에서 조선인 조업자 중 이공학 전공자의 수가 극히 적었던 것은 이공계 학부가 극히 드문 사립대학에 불가피하게도 대거 진학한 결과였다. 주요 관립대학으로 도쿄제대와 교코제대의 경우에 이공학 전공자의 비율은 각각 12.4%와 13.8%로 전체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물론 이는 일본인의 비율이 각각 21.9%와 23.0%였던 것에 비하면 낮은 것이었다.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는 일본의 제국 대학 중 가장 많은 대만인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을 교토제대의 경우 이공학 전공자는 전체 대만인 졸업생의 6.4%에 불과하였다.
1938년 조선과학기술자들 명부에 의하면 한국인은 360명(대학졸업자는 95명, 전문학교 졸업자 260)으로 조선 내 거주하던 전체과학기술자의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
1943년겨에는 약 175만 명의 임금 노동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 내용을 보면 39만 명의 공장노동자, 28만 명의 광부, 17만 명의 운수노동자, 38만 명의 건축노동자, 53만 명의 기타 노동자 등이다. 여기에 1944~1945년 사이에 강제 노역된 약 4만 명의 노동자를 추가하면 1945년 8월 무렵에는 약 200만 명의 임금 노동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철도협회 조사자료의 1928년 노동자의 직종별 구성을 살펴보면, 공장노동자(4만 2184명(는 전체 노동자(118만 5004명)의 3.4%에 불과하며, 인부·토공(土工) 등 토목노동자와 잡업직 종사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945년 우리나라의 노동자수는 212만 2374며으로 대폭 증가했는데 공업 27.9%, 토목건축 20.6%, 육상운수 8.5%, 임업 9.7%, 수산업 10%, 광산 12.95, 탄광 3.45, 농업 6.1%, 해상운수 0.9%등을 차지하였다.
1930년대 조선공업의 동태
년도 생산액 공장수 종업원수
1930 263034 4261 83900
1936 709861 5927 148799
전국경제조사기관연합회 조선지부(1939)
1939년에는 일본인 회사의 조선인 기술자 4.5%인데, 조선인 회사의 기술자는 81.5%이나 전체기술자의 분포는 조선인 대 일본인이 7 : 93이었다.
1942년 조선에서의 근로자와 기술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노무자는 조선인이 92.25에 달하나 기술자는 18.1%에 불과하다.
『식은조사월보』의 1933년과 1938년 노동자 수를 비교해 보면, 공장노동자는 9만 9430명에서 18만 2771명으로 1.8배, 광산노동자는 7만 711명에서 22만 3790명으로 약 3.2배, 토건노동자는 4만 3588명에서 19만 3237명으로 4.4배나 증가하였다.
1931년의 호구조사에 의하면 농업인구는 모두 1579만 2104명으로 총인구의 80.1%를 차지했는데, 1938년에는 각각 1665만 9894명으로 73.6%를 차지하였다.
1943년 우리나라 인구는 2439만 명이다.
194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국내인구 2354만 명 중 2202만 명(93.5%)이 본적지도에 거주하였으며, 단지 6.2%에 불과한 152만 며이 타도에 이주하였다.
본적지 인구 중 가장 많이 유출된 지역은 충청북도로 본적지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4만 명이 타도로 이동하였고, 다음이 충청남도(10%), 전라북도 및 경상남도(각각 8%), 황해도, 강원도 및 평안남도(각각 7%) 등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함경북도는 1%로 가장 낮다. 현주지인구 중 타도본적지인구가 가장 많은 도는 함경북도 25%, 경기도 12%, 함경남도·강원도·평안남도가 각각 9% 이었다.
1909년『한국직원록』에 수록된 조선인관료 3624명 중 67.6%의 2449명이 조선총독부의 관료로 재임용되었다.
1945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1946년 봄 인천항에 들어온 중국인들의 정크선은 하루에 30~40척에 달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정크무역선은 천진·대련·청도 등지의 군소상인들이 이끌고 왔으나, 1947년 이후 상해 등지에서 거상들이 진출하여 양국간의 물자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무역선은 과거의 정크선과 같은 소형선박이 아니고 2000t급 이상의 대형 상선이었으며 교역량도 격증하였다.
미군정 3년 동안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약 4억 6034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았다. 이 원조에 다라 도입된 물자는 식량·피복·직물 등 가계와 직결되는 생활필수품이 전체금액의 49.2%였고, 그 다음이 농업용품 17.7%로서 비교적 많은 금액이 책정되었다. 그 밖의 물자는 석유 등의 연료와 철도·해운·자동차·통신용기재·의료약품·건축자재 등이 도입되었다.
1946년의 강습회는 1만 5555회였으나 1947년에는 3만 508회로서 그 횟수가 2배로 증가하였으며, 교원은 1946년에는 1만 6656명이었다가 1949년에는 9만 3167명으로 약 5배 가량 증가하였다. 그 결과, 1948년 문맹률은 12세 이상 전 인구의 41%인 541만 1080명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이 숫자는 결국 군정 2년간에 문맹 78%에서 약 37%의 감소를 가져왔으며, 문맹 교육을 지도해 나갈 지도자 양성도 시급하였다. 당시 각·시·군에 파견 될 남녀 성인교육사의 양성도 364명에 이르렀다.
1943년 공장 내 유년노동력의 구성을 보면 전체 노동자 중에 유년 노동자가 10.3%를 차지하며, 그 중에서도 30인 이상의 공장은 그 이하인 공장보다유년동력 특히 여성노동력의 비중이 높았다.
1947년 3월 남한의 기업체는 4500개, 근로자는 13만 3979명인데 , 1943년 6월에 비하여 각각 44%, 59%에 정도였다.
1933년을 100으로 본다면 1939년에는 실질임금이 103이었으나 1944년에는 93.1, 1945년 12월 62.5, 1947년 12월에는 29.3으로 급속히 하강했다.
1938년 농업인구는 1665만 9894명으로 전체인구의 73.6%에 해당했다.
전후 5개월간 피해는 24억 2000만 다러, 1951년 8월까지는 30억 3200만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그 과정에서 GNP는 1950년 -15.1%, 1951년 -10.6%, 1952년 -34.2%, 1953년 -15.2%씩 감소하였다. 1951년 8월말 현재 직접 피해를 본 공업시설은 생산시설 42%, 공장건물 44%이었다(이종원, 2004).
1950년 10월 경 이씨이에시(ECEA) 원조당국이 산업복구용 소요 원조규모를 사정하기 위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때 이미 방직공업(염생가공 포함) 70%, 화학공업 70%, 농기구공업 40%, 고무공업 10%등의 시설피해율을 나타났다.
1958년의 경제성장률은 6%로 1950년대 가장 높은 기록이었다.
서울시 인구는 1960~1965년 120만 명, 1966~1970년 173만 명, 1970~1975년 232만 명 등으로 급증하였다.
1945년 8월 문맹률은 78%에 달하였으나, 1960년에는 28%로 급격히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