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동안을 죽어라고 일만 했다 -
● 성모병원의 의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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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과대학 외과학교실 동료들과 (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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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과대학 외과학교실 교수진의 회식자리.
왼쪽부터 이용각, 윤덕선, 이홍균, 배수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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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과대학 제1회 종업기념 사진(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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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중반 윤덕선 박사의 가족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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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선(尹德善) 박사는 1956년 미국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병원의 유학생활을 하던 중 일시적으로 귀국했던 바 성신대학 의학부(1959년 가톨릭대학 의학부로 개명)의 운영을 책임맡고 있던 양기섭 신부의 권유로 의과대학 교무과장 겸 부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또한 부임 당시에는 외과 과장으로 다음 해 1957년에는 외과학교실이 창설되면서 초대 주임교수로 발령을 받아서 외과 진료에 매진하게 된다.
1961년 군사혁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사정부는 무의촌을 해결한다고 군대에 가지 않았던 모든 봉직의사를 무의촌에 징집하였다. 외과학교실에 있던 모든 교수들이 다 동원되어 나갔고 윤덕선 교수만 혼자 남았다. 7명의 레지던트를 데리고 하루에 대수술 7-8건, 소수술까지 합하면 10-20건의 수술을 해냈다. 젊은 레지던트 중에 도저히 이 힘든 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고 그만 둔 사람도 있었다.
윤덕선 교수는 성모병원에 근무하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야말로 잠시의 휴식도 없이 맹렬히 뛰었다. 환자를 보고 병원행정을 하는 등 모든 일을 쉬지 않고 했다. 밤 1시면 일어나서 병원과 대학을 순찰하였다. 레지던트를 데리고 아침 7시반이면 모두 출근을 하여 초독회를 했다. 최근 의학 문헌을 읽어야 했고 젊은 사람들에게 과제를 내주어 매일 아침 보고를 들었다. 그것이 끝나면 회진을 하고 회진이 끝나면 외래를 보거나 입원환자의 뒷처리를 하고 그 다음부터 종일 수술을 하였다. 말할 수 없는 고된 생활이었다.
윤덕선 교수는 명동성당 구내 지하 움막과 같은 곳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이 곳은 의과대학 시체 탱크가 있는 지하층으로 아주 습하고 어둡고 대문도 없는 그야말로 지하 움막이었다. 따라서 다른 교수들이나 학생들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가톨릭의대 학생교육
윤덕선 선생은 양기섭 신부의 권유로 의과대학 교육을 얼떨결에 떠맞게 되었을 때는 예과 2학년이 시작되었을 때였는데 전임교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기용숙(奇龍肅), 전종휘, 김희규, 이동규 등 경성의전 출신 선배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서울의대 기용숙 교수께서는 대학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의학개론 강의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다.
가톨릭의대 의예과의 입학정원은 50명이었으나 실제로 제1회 입학시험을 통해 선발한 인원은 79명에 달했고, 여기에 편입생(청강생)까지 합쳐 146명이었다. 첫해에 30명이 유급하고, 다음 해에는 50여명이 탈락하게 되면서 예과 수료식에는 59명만 참가할 수 있었다. 당시 가톨릭의과대학 의학부는 명동성당 구내에 있으면서 등록만 하고 제때에 등교도 하지않았고 심지어는 명동거리의 불량 청소년들까지 학생 행세를 하면서 잠입해 들어와 있을 때였다.
당시 의학부장 겸 성모병원장은 양기섭 신부였으나 1957년 1월 9일에 의학부 교무과장으로 취임한 윤덕선 교수가 실질적으로 대학과 병원운영을 담당하면서 첫해에 180명의 학생을 퇴학시키는 일을 주도하였다. 이때 부임하자말자 조회를 하면서 등록하지 않거나 출석하지 않는 학생은 기한을 두고 제적할 것이라고 선언했더니, 돈 없는 학생은 공부하지 말라는 곳이냐며 학부형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고 문교부에서는 감사까지 나왔다.
그러나 윤덕선 교수는 "대학에서 공부하려면 똑똑하고 그러지 못하면 그만두어야지,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등록금만 받아먹는 행위는 도저히 나의 양심으로는 할 수 없다"면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1960년 3월 30일 제2회 학위수여식에는 단지 39명만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다음 4월에 치루어진 의사국가고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이들 가운데서도 예과 1학년부터 들어온 사람은 단지 12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타대학에서 편입한 학생들이었다. 결국 1954년에 입학한 146여명의 학생 가운데서 10%도 안되는 학생만이 제대로 졸업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 중앙의료원 50년사에서도 의학부가 초기에 맞이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정비하는데 기여한 사람으로 오직 윤덕선 교수임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당시 윤덕선 교수의 나이는 단지 36세였다. 의학부는 서울의대 교수진 일부와 항공의학연구소에 복무중이던 학자들을 강사로 불러들였는데, 이때 심봉섭(沈鳳燮, 생화학), 정성장(鄭聖璋, 생리학), 조규상(趙圭常, 예방의학) 등이 임명되었고, 서울의대의 이명복(李明馥), 기용숙(奇龍肅) 교수 등이 해부학과 미생물학 강의를 담당해 주었다.
또한 윤덕선 교수는 전남대학에서 조규찬(曺圭讚, 약리학), 부산대학에서 윤기녕(尹基寧, 약리학) 교수 등에게 출강을 부탁했으며, 해부학은 이현수(李鉉秀) 교수와 위동열(魏同烈) 교수, 약리학은 노병림(魯炳林) 조교수가 교실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병리학은 안부호(安富浩) 교수와 김영제(金永濟) 교수가 담당 했는데 대부분의 교실 책임자들은 30대의 젊은 교수들이었다.
숱한 학생들이 그 분으로 부터 꾸중을 듣고 매를 얻어 맞기도 했다. 지금 가톨릭 의과대학 1회부터 4회까지 졸업생들은 윤덕선 교수의 불 같은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그 중 많은 학생들은 주먹으로 얻어 맞거나 따귀를 얻어 맞기도 했다. 극히 야만적이고 폐쇄적인 교육방법이었지만 그 분의 능력으로는 그 때 그외의 길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분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 그 교육방법이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혼자 부끄러워 할 때가 많다고 술회하였다.
● 임상의학 교실의 탄생
임상의학은 1958년 4월 본과 3학년 학생들이 개강함과 더불어 정식으로 교실활동을 하게되었다. 이미 성모병원에는 내과와 소아과가 진료활동을 하고 있었고, 개교 후 시작한 과목으로는 윤덕선 교수의 외과가 1956년 7월 1일이며, 임상각과에 정식으로 교실 명칭을 부여한 것은 1960년 10월1일이다. 윤덕선 박사가 성모병원 의료진으로 제일 먼저 초빙한 의사는 전남대학의 안부호 교수였고, 1958년에 이재춘(내과), 손정균(안과), 김영진(소아과), 김중환(이비인후과), 유훈(산부인과) 등으로 의료진을 구성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61년 12월 성모병원이 신축 개원하는데 신축전 성모병원은 단지 72병상, 일반직원 163명이었지만 신축 후에는 300병상 규모로 일반직원 429명, 의사 106명으로 재탄생되었다. 이때 외과학교실 의료진은 윤덕선 교수외 조덕환, 백계원, 배수동 교수로 구성되었다.
● "10년 동안을 죽어라고 일만 했다"
윤덕선 교수는 가톨릭 의과대학 부속 성모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한 지 10년째 되던 1966년을 회고하면서 "그 10년 동안을 나는 죽어라고 일을 했다. 5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고, 밤 1시면 일어나서 병원을 한 바퀴 돌아야만 적성이 풀렸다"고 회상했다. 그 분은 젊음의 정열을 모두 바쳐서 가톨릭 의과대학을 대학답게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다. 수많은 고초도 겪었고, 모든 일들이 순조롭지만은 않았겠지만 보람도 컸다.
병원을 짓고 경운동에 대학을 짓고 사업이 자꾸 확장되기 시작했다. 성신대학 의학부는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고 병원은 환자들로 만원이었다. 그 동안 1960년 성신대학이 가톨릭대학으로 명칭 변경이 있었고, 윤덕선 박사는 의학부 부학장 겸 동부속 성모병원 부원장 직책을 갖는데 학장과 병원장은 모두 신부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실무는 윤덕선 박사가 담당하였다. 1962년 2월에는 다른 가톨릭 계통의 병원들을 아우르는 가톨릭 중앙의료원이 발족하는데 의무원장으로 취임하였고, 1965년 다시 2대 의무원장으로 유임하였다.
1968년 5월, 윤덕선 교수가 사표를 내고 물러날 당시 의학부 초창기에 공이 컸던 성모병원의 중진이자 주임교수 14명도 다같이 사표를 내었다. 그 분을 따르고 신망했는 분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후 가톨릭 의과대학 재단측에서는 의료원장 신부가 의학부장과 병원장을 겸임하던 것을 신부가 아닌 의사출신 교수로 임명하도록 하고 지금까지 이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편집자 주]
가톨릭대 역사에는 윤덕선 박사가 1954년 3월 성신대학 의학부 초대 외과과장으로 부임했다고 했는데 그 분의 회고록에는 1956년 미국 유학도중 잠시 귀국했던 1956년 양기섭 신부의 부름에 따라 성신대학 성모병원에 몸을 담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양기섭 신부와 직접적인 관계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이삼열 교수는 미국 유학생활 중 임창영 박사의 소개로 피츠버그에서 이미 가톨릭 의과대학에서 일할 약속을 했다는 언급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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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덕선 박사는 서울의대 출신이다 총 동창회장을 역임했지
백인제 제자 아닌가..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