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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예종 원년(1106년)에 두 차례.
조선 선조 30년(1597년)에 한차례 커다란 지진이 나서
인수봉이 무너져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고 적고있다.
구한 말, 법무대신을 지낸 신기선 作., 유북한산기.
1889년 10월 북한산을 들른 신기선은 '영남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홀로 인수봉을 오른 후에 깃발을
꽂았다.'는 순검(경찰)의 이야기를 유북한산기에 적고있다.
인수봉 정상에 세워진 돌탑이나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는.,마애불.
이는 예전에 누구인가 올랐다는 증거.
조선 숙종때 노적봉 밑에 있었던.,중흥사 주지.
도총섭 '성능' 作 <북한지>에는.,11 사찰, 2 암자.
북한산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그러한 흔적을 남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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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3월, 약관 20세 김정태는 등반을 목적으로
한국인으로는 처음 인수봉 전면 '인수 B'를 올랐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 등반 역사 초석이 된., 첫등반.
인수봉 첫등반은 '영국인 외교관'이었던 '아처'가
'1929년 5월에 인수봉의 북면으로 처음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구전(口傳) 기록일 뿐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이 맞다.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 옹의 부친 이해문씨 말에 의하면,
1924년 봄 인수봉 정상에서 누군가 쌓아 올린 돌탑을 발견.
아처 역시 인수봉 등반 전, 정상에 선 사람을 목격했다는 기록.'
그러나, 1995년 5월에 발견된 아처의 등반기.
영국 알파인 클럽 고문실에서 잠자던 등반기.
김우선 씨가 번역해 그간의 초등설은 뒤집혔다.
아처는 '1919 ~1934'년 한일 양국에서 외교관 생활.
1922년 인수봉을 처음 보았고 1929년 9월에 경성 주재
영국 총영사관 부영사관으로 근무할때 인수봉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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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가을 기록 상 인수봉 초등.
설교벽, 고독의 길, 인수 c 등
다양한 루트로 수차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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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울의 산을 보자. 서울의 산들은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어느 모로 보나 등반성에서 금강산의 봉우리들에 뒤처지지 않는다.
‘북쪽 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북한산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시내에서 8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해 있고 한국 고대 왕들의 피난처.
목적으로 원형경기장 같은 능선에 석벽이 쌓아 올려 있다.
수도의 북문과는 별도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최고봉은 백운대(일: 하쿤다이, 841m)로, 최근 바위를 파서
설치한 계단 및 쇠난간을 잡고 쉽게 오를 수 있다.
인수봉(805m)은 백운대보다 약간 낮지만 훨씬 멋지다.
1939년에 아처가 촬영한.,인수봉 사진.
마치 콜럼부스의 달걀처럼 모양이 독특하다.
이와 같은 높이의 만경대(일: 반케이다이)도 있다.
.
만경대는 톱니 모양으로 능선이 솟았는데,
세 봉우리가 정상부를 형성하고 그 중 두 개는
필시 아직 아무도 오른 이가 없었던 것 같다.'
....C.H 아처.,글(번역 : 오영훈 서울농대OB).......
7년 전(주:1922년) 왔을 때부터 인수봉에 관심이 있었지만
오를 기회가 없었다. 남면에서 보면, 공략할데 없는 거대한 슬랩.
이곳 주민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은 제각각이어서 쓸데가 없었다.
누구는 전혀 오를 수 없다고 하고,
누구는 북쪽에 어려운 어떤 길이 있어
사람들이 종종 오르곤 했었다고도 한다.
또 누군가가 한 얘기는 이렇다.
어느 모험심 넘치는 학생이 정상에 올라
깃발을 꼽고 내려와 관리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 깃발을 뽑으러 갈 수 없어 결국 원래 학생을 시켜
다시 오르도록 했다는데 아마도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백운대에서
인수봉을 볼 때
누군가 올라왔다.
사람들이 인수봉을 올랐던 건 분명 확실한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백운대에 올라 인수봉을 바라볼 때
인수봉 정상에 어떤이가 올라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가 어느 길로
올라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남면은 가망이 없어 보여 북쪽을 탐사해 보기로 했다.
등반을 시도해보기 전 장비에 관해 생각했다. (중략)
처음 생각해 낸 건 쇠갈고리였다.
가운데에는 로프를 매다는 구멍이 있고,
세 갈고리는 각각 120도로 벌어져 있으면 될듯.
이걸 오르기 어려운 구간에서 맞은편으로 던져
나무에 걸면 오르기가 쉬워지지 않겠느냐는 계산.
하지만 갈고리를 만들자마자 예상못했던 생각에 포기.
즉, 이 장비가 필요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이면
던졌다가 걸치지 못하면 도로 떨어지는 갈고리에
머리를 다치거나 발을 헛디딜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갈고리를 긴 대나무 끝에 매달아 걸치기로 하였다.
로프는 여전히 매달아
잡아당길 수 있고 대나무는
위치를 잡게끔 하는 용도인 셈.(중략)
첫시도 실패후.,장비개선 재도전
1929년 9월의 어느 날 서울을 나섰다.
갈고리와 5m 장대, 로프 두 동을 챙겼다.
두 명의 동료(F. R. 페이시, S. 야마나까)와 함께
한 시간 반을 차로 이동해 인수봉 주봉들의 동쪽에
벚꽃으로 이름난 우이동 계곡에 다다른 뒤에
서쪽으로 이어진 괜찮은 산길을 걸었다.
인수봉 북쪽 기슭으로 이렇게
가깝게 접근해 본적은 없었다.
언덕에 가려 인수봉이 보이지 않기에
적당한 길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하지만 언덕에 올라섰을 때
드디어 눈에 들어온 인수봉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중략)
'설교벽~북면' 크랙으로., 갈고리 등반
몇 주 뒤에는 야마나카와 함께 우리의 최초 시도에
못 올랐던 곳 바로 바깥쪽의 크랙을 골라 북서릉 공략.
이 루트는 경치가 좋고 정상까지 어려운 부분이 없었다.
하산은 다시 북서릉을 탔는데
그러다가 서벽으로 내려섰고
이제껏 오른 중 가장 짧고 쉬웠다.
결국 이 길을 통해 사람들이 이전에
인수봉을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속 등반에 나서면서 암벽 하단부 자연 동굴 통과
등 다양한 변형루트를 통해 올랐지만, 마지막 부분은
북서릉 아니면 개구리 귀 후면의 어려운 구간 둘 중 하나.
인수봉 상단부 나머지 부분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갑옷.
두 쉬운 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양한 흥미를 유발하는
대단한 등반이 될듯., 등반 고도로 치자면 북서릉 가장 쉬운 루트가
90미터, 길게는 북벽의 동굴 루트 약 270m까지 다양하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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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처는 인수봉을 오르기에 앞서
동서남북에서 정찰하며
루트를 찾았다.
결국, 아처는 인수봉을 맴돌다가
'고독의 길' 이외에도 설교벽, 인수 c
등 다양한 루트로 여러차례 인수봉 등정.
인수C(인수릿지)
연대설립자 언더우드 외 4명.,1927년 ‘고독의 길’초등.
1926년에 임무씨 외 2인이., 인수봉 후면 C코스로 초등.
그러나, 등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공인된 기록이 아니다.
아처의 기록에 의하면
인수봉 초등에 관한 기록은
향후 바뀔 가능성이 열려있다.
"1922년
백운대에서
인수봉을 볼때
누군가 올랐다."
"하지만 지금도 그가 어느 길로
올라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아처.
'구한 말~조선실록' 속에 잠자고 있을지 모를
인수봉 초등 기록이 언제 발견될지 모르기 때문.
향후, '인수봉., 초등 수수께끼'는 언제쯤 풀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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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개척 한국등반 역사는 김정태로부터 시작.
한국 산악 등반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또한, 그당시, 인수봉 개척 루트가 1969. '12월 열린 검악길'.
검악길.
인수봉 바윗길에서 가장 어려운 길 중 하나.,거룡길(6마디 5.12b),
학교길A(3마디, 5.12a), 빌라길(6마디, 5.12a), 청죽길(3마디, 5.12a)
1969년 '12월 열린 검악길'은 인수봉 바윗길에서 ‘지존’이라 할만하다.
그외, 어려운 인수봉 바위길로는
교대길(7마디, 5.12a), 비원길(5.11b~c),
궁형길(4마디, 5.11b), 청맥길(6마디, 5.12),
학교B(5.11d), 검악A(5.11d), 에코길(5마디, 5.11d),
알핀로제스(3마디, 5.11c),가로길(4마디, 5.11c),
늦바람(2마디,
5.11c), 환상열차(5.11d), 알프스(3마디, 5.12a)
검악길
검악(劍岳)은
한 여인의 꿈을
인수봉 '十字路' 위에
검법(劍法)으로 새긴듯.,
'12월 열린 검악길'
아직도 남아있는.,
십자로 위에.,글귀.
검악길 십자로를 횡단 중인 클라이머들.
인수봉에서 가장 남성적인 바위길.,십자로.
피투성이 손과 깨진 손으로 개척했던.,검악길.
1968년 여름, 우이동 버스 종점. 장대같은 비를 피해
평양상회 앞에 서 있던 김정명은 고급 외제차에서 내려
평양상회로 들어서는 등산복 배낭 차림의 여자와 마주친다.
인수봉 검악길 십자로에
'69년 12월 검악'이란 글씨를
새기게 되는.,'백명순'과의 만남.
'건강을 위해 산에 자주 오른다.'는 숙대 4학년 백명순.
3살 위인 김정명을 그녀는 스스럼없이 따랐고 좋아했다.
그리하여, 김정명에게 이끌려 검악 산악회에 입회까지 한다.
1969년. 인수봉에는 많은 바위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길, 동양길, 서면 슬래브, 서면벽, 피톤길, 우정 A,
우정 B, 검악길, 크로니길, 숨은벽도 개척되기 시작한다.
'한국 최초 산악 잡지' <등산>이 창간된 것도 1969년 5월.
1969년은 한국 등반사에 빼놓을 수 없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해에 좋은 일만 있었던게 아니고 사고도 따른다.
.
1969년 2월에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원 10명이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사망하는 대형 참사.
5월 31일에는 백운대 정상 아래 '마등'에서., 백명순 추락사.
1969.5.31. 고 백명순 추모비.
당시, 숙명여대 사학과 4년.
그녀를 보내고 검악산악회에서 비석을 세웠지만
북한산 추모비를 정비할 때 그녀의 추모비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 비석에 새겨져 있던 시 한편은 아직도 전해온다.
산이 좋아
산에 잠든 너 사슴아
순하디 순한 눈으로
고독의 등불을 켜들고
봄에는 꽃술을 따물며
여름엔 녹음에 쉬고
가을엔 마알간 하늘을 배우고
겨울엔 그토록 좋아하던
하이얀 눈밭을 뛰어다니며
오래오래 산에서 살아가렴.
-1969년 6월 친우 일동- .
백명순 추락사는 김정명을 만난 이듬해 일어난 참사.
김정명과 검악 산악회 회원들은 비석을 세워 그녀를 추모.
그리고, 그해 9월에 김정명은 검악길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고 백명순은 생전에 열십자로 그어진 인수봉 남면을 가리키며
"저곳에 바윗길을 만들면 얼마나 멋질까?"하고 자주 읊조린 때문.
하지만, 김정명은 그곳 십자로 인근에 바위길 내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빈자리를 끝내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5월 말에 원준길, 이인희 등이.,검악길 마무리.
백명순 그녀가 고인이 되어 떠난지 꼭 1년 만의 일이다.
김정명이 그해 9월에 '검악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사라진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작업과 다름없던 일.
개척등반은 홍성복(재미)씨와 함께
홍성도(홍익대학교 교수)· 한민호(재미)·
오영호(전 다이너스클럽 대표)씨가 참여.
그러나 십자로를 지나서 횡단 루트를 건너던 도중에
김정명은 작업에서 손을 놓았고 상실감과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듯 1971년도에 그는 완전히 산을 떠났던 것.
1975년 중동으로 나가 1979년 샤모니에서 일년 가까이 거주.
1980년 12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기에 그가 떠난 검악산악회는
사진작가 임석제 씨가 2대 회장을.,3대는 홍성복 씨가 이어받았다.
검악길 개척은 그후
원준길과 이인희 씨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다.
검악회 등반을 도와주다가 합류한 원준길은
당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던 클라이머였다.
그의 주도로 1970년 5월말, 드디어 검악길이 마무리 되었고
6월 1일엔 20여명 산악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상까지 시등.
개척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 이근배(펜싱협회 부회장)
그는 부친의 철공소에서 제작한 피톤을 공급했고 물심양면 지원.
검악산악회의 창립도 1968년 초 한국체육대학의 펜싱 코치를 하던
이근배 씨가 김정명 씨에게 후배들의 체력훈련 요청을 한 것이 그 동기.
인수봉의 수많은 바위길 중에서 하나인 검악길은
이렇게 열리지만, 김정명은 1971년 산을 떠나 이민.
'김정명과 백명순의 비련(悲戀)'이 새겨진., 검악길.
"소설과 영화는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고 탐미한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랑은
그러나 바람이나 파도 같은 것."
.
"보이지 않으며 흔적도 없다.
아무리 열병을 앓아도 가질 수 없는
사랑은 다만 가슴에 남을 뿐이다°
그랬던 김정명 그가 20년도 훌쩍 넘은 어느 날 귀국.
그는 자신의 젊은 날 사랑이 아로 새겨진 검악길을 등반.
<한국 바위열전>은 인수봉과 선인봉 바윗길 개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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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산악단체.,한국산악회.
대한민국 산림청 산하.,'사단법인체'이다.
대산련과 함께 국내 산악계 리더 한국산악회.
.............대산련(대한산악연맹).....................
1960년대초부터 개별 산악클럽들에 의하여 논의
국내 산악활동 단체조직의 필요성이 결실을 보아
1963년 5월 서울시교육위원회에 문화단체로서 등록.
1966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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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전후 일본인들이 조선산악회를 조직하자
1940년 엄홍섭(嚴興燮)을 중심으로 백령회(白嶺會).
등산 동호회를 결성하여 한국 산악운동을 전개하였다.
.
1969년 2월 해외원정 훈련대원 10명이 설악산에서 조난사.
1978년 안나푸르나 4봉(劉東玉), 1982년 마칼루봉(許永浩).
1987년 12월 허영호가 에베레스트(Everest, 8,848m)봉 등정.
1962년 발족한 대한산악연맹과 더불어
한국의 산악활동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조선산악회는 1947년 독도에 최초로 영토 표지석 설치.
그해 6월 17일 경북 최희송 지사는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독도가 일본인 개인 소유의 섬으로 돼 있는 탓에
일본인이 우리 어민의 조업을 금지하고 내쫓고 있다”며
“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해달라” 청원을 보내.,표지석을 설치.
이에 과도정부는 한국산악회 전신인 조선산악회에 도움 요청.
1945년 9월 15일 창립한., 조선산악회 초대회장 송석하(1904~1948).
울산 출신 민속학자 갑부이며 국립민족박물관(1946. 4 개관) 초대 관장.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전신
국립민족박물관(1946. 4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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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공개한.,<연희전문상황보고서>
1930년 산악단을 비롯, 축구, 야구 등 14개 동아리를 창단.
전조선(全朝鮮) 규모 각종 대회를 개최 - 동아일보 1931.7.7
1931년 한라산 등반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산악활동.
또한, 훗날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한 세브란스의전 산악부도
창립연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936년 태백산 금강산을 등반.
지금까지 연세대학교산악회는
1954년도 창립으로 알려져 왔으나
60년사 정리 중 옛 사료들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최초 산악회는
연희전문학교 산악회인 셈이다.
그러나, 아직 공인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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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등산이 행해진 시기는 1920년대.
1926년 '아처 & 임무'가 인수봉 첫등반이 근대등산의 시작.
1930년대부터 금강산, 백두산 등지로 알피니즘 대상지역이 확대.
그러나 1940년대와 195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와 6·25 전쟁.
우리나라 산악운동이 활발하지 못했다.
1960년대 각종 등산단체를 통합한.,대한산악연맹 창설.
1962 대산련 창설 후부터 산악활동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1962년에는 경희대학교의 등산대가 다울라기 Ⅱ봉을 시등
1970년 추렌히말 원정,
1971년 마나슬루 & 로체살 원정.
1977년 18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한 산악 연맹 소속.
셀파 펨파노루부는 9월 15일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공.
이후 해외원정은 꾸준히 늘어나 1980~85 사이
68개 해외원정대가 히말라야 지역을 원정했다.
1983년 윤대표 외 6명이 바인터브락 Ⅱ봉.,세계 초등정.
허영호는 마나슬루를 무산소 단독초등하는 쾌거를 이룩.
1984년 한국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몰려 산악운동의 절정기.
1987~88년에는 허영호가 에베레스트 동계등정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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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암장에서 함께 운동했던 딸 같은 후배들.
어느덧 ,인수 B, 궁형길 등에서 선등 실력을 뽐낸다.
그런 정도 루트들은 이미 어렵지 않다는듯한.,자신감.
인수봉.,궁형길
'아!~~ 정말 대단하다.
아니 벌써..그런 경지까지...'
<인수 B>는 쉽지만, <궁형길>은 쉽지 않은 길.
사실 처음엔 누군가 호미 할머니 비슷한., 오름짓.
긴줄 끝 칼쿠리를 장대로 올려 나무에 걸고 오르기.
호미는 '스카이 훜' 또는 바위 틈 쐐기의 기능.
여후배가 오른 곳은 그런 방식으론 불가능한 길.
인수봉 초등은 아직까지도 베일에 쌓인 수수께끼.
우리나라에서 언제 누가 어디로 처음 올랐을까?
산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번 오르고픈.,인수봉.
설령, 오르지 않는다해도 한번은 관심 갖게 되는 곳.
인수봉은 우리나라 등반사 요람이고, 클라이머의 산실.
현재까지는 인수봉 '고독의 길’이 기록 상 초등 코스.
기록 상 초등이란 예전에 누가 올랐을 수도 있다는 뜻.
요즘은 사진 2장 이상이 첨부되어야 산행후기로서 공인.
'고독의 길' 이름은 70년대 초에 붙여졌을 것이라는 중론.
영자는 1960年代 儒敎的 倫理 道德의 嚴格한 틀을 깬 여인.
家族 扶養 멍에 짊어진 家長의 責任感 굴레에 갇힌 男性들
固定觀念에서 탈피해 破格的인 代理滿足을 안겨 준 新女性
"별들의 故鄕의 女主人公" 경아와 雙璧.
萬人의 戀人으로서 알려진 여인이 영자.
40/50대 추억 속 사랑스러운 女人의 代名詞.
'고독의 길' 하일라이트.,'영자크랙'
닳고 달아 미끄러운 '참기름 바위' 직전에 있는 어려운 구간.
참기름 바위는 사람들의 손때 묻고 발길에 닳아 붙여진 이름.
영자 크랙은 그 바로 아래 女性의 性器와 恰似한 포켓홀드 구간.
믹스 클라이밍 동계훈련장으로 각광 받는 길.
仁壽奉을 오르는 바윗길 族譜에 없는 ‘고독의 길’
그곳을 오르기 가장 쉬워 大衆的으로 잘 알려진 길.
119구조대 활성화 전 孤獨한 조난자 哀歡 가득 담긴 길.
그곳 영자 크랙은 '영자의 전성시대' 여주인공 이름.
소설이 영화로 상영되어 인기를 끈 시점이 60/70년대.
그 무렵에 최인호 감독 '별들의 고향' 영화도.,흥행 성공.
1973년은 국내 산악인들 사이에 개척등반이 성행한 시기.
'영자 크랙'과 '고독의 길' 바위길 이름은 서로 잘 어울린다.
'고독의 길'은 인수봉에서 '믹스 클라이밍'코스로도 인기 높다.
1929년 9월에 영국인 외교관 아처가 기록상 처음 오른 북면.
우리 선조들이 그 이전에 올랐으리라 전해오는 '설교벽 능선'.
겨울에 흰눈에 뒤덮히면 눈으로 허공에 다리를 놓은 듯한 능선.
긴 밧줄과 사다리 하나 둘러메면,
오르기에 어렵지 않을 설교벽 능선.
1976년 5월 우정산악회는 인수봉 초등 50주년 심포지엄 기념등반.
연대 설립자 언더우드 박사 일행 5명은 1927년 ‘고독의 길’초등을 발표.
그에 앞서 1926년에 임무씨 외 2인이 인수봉 후면 C코스로 인수봉을 초등.
1926년 임무 씨의 초등을 기준으로 하면
1976년은 인수봉 초등 50 주년이 되는 셈.
그러나, 1995년 5월에 발견된 아처의 등반기.
영국 알파인 클럽 고문실에서 잠자던 등반기.
김우선 씨가 번역해 그간의 초등설을 뒤집었다.
아처의 등반기엔 임무씨 이름은 없고
페이시 야마나카가 동행한 것으로 기록.
이것은 예전 초등설을 뒤집기에 충분하다.
1929년 9월 아처 초등 북면 루트로
이용대 김운형 김우선씨가 탐사등반.
아처의 등반기에 언급된 동굴과
어려운 슬랩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처는 1929년 9월에 인수봉 첫등반.
동료 '페이시'와 '야마나카' 함께 등반.
아처는 1922년 처음 인수봉을 보았으며
7년이 지난 후에 인수봉을 오르게 되었다.
처음엔 세 갈래 갈퀴를 매단 장대를 들고 올랐으나
운반하기도 힘이 들었고 동작이 불편해 등반에 실패.
두 번째는 갈고랑쇠를 운반하기 좋게 하나로 만들어
반반한 슬랩과 크랙에 걸고 인수봉 정상등반에 성공.
오늘날, 첫피치 위험을 줄이기 위한 등산장비와 유사.
'장대 끝 퀵드로를 첫볼트에 설치하는 안전장비.'
한가지 차이점은 갈고랑쇠 장대를 잡고 오른다는 점.
현대장비와 비유하면 길다란 피켈과 유사한 등산장비.
갈고랑쇠를 사용한 걸 보면, 뛰어나지 못했던 등반력.
공개된 사진 속의 야마나카 복장을 보면 알피니즘 등반.
초기 알프스 등반가처럼 피켈과 니커 보커 바지에 스타킹
아처는 인수봉 정상등반후 몇번 실패한 크랙을 통해 북서릉을 공략.
지금의 인수 C코스인데 이미 누군가 오른 흔적이 있었다는 등반기록.
결국, 인수봉 초등은 아처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인수봉 초등자는 누구일까?'
1935년 백령회 소속의 김정태 엄흥섭·김금봉씨 3인.
우리나라에서 인수봉 첫 등반 시기는 1924년 이전이다.
그것은 백운암에 살던 이해문 노인 목격담에 의한 구전
인수봉 정상에 쌓인 돌탑을 보았다는 이해문 노인의 진술.
그러나 그 돌탑을 쌓은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인수봉 초등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베일 속 수수께끼.
'인수봉은 언제 누가 어느 코스로 초등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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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0월 구한말 신기선 법무대신이 쓴.,유북한산기.
영남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홀로 그곳을 오른 후
깃발을 꽂았다는 순검(현, 경찰)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인수봉 정상 버섯바위 동굴 벽에.,마애불상 암각화.
풍화작용으로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흔적.
산성 안 11 사찰과 2암자 수도자 중 한 승려의 작품인듯.
돌탑과 마애불상 암각화 흔적은
고고학계 고증이 필요한 곳이다.
조선시대 숙종때 염초봉 만경대 병풍암 위에도 축조한.,북한산성.
그 정도 장비와 등반력 수준이라면, 인수봉 등반도 충분히 가능하다.
산성 축조 일등공신 석공 모씨 가문이 500년 대대로 살고있는 산성 인근.
인수봉 정상의 돌탑 흔적은 모씨 후손의 작품인듯..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돌쟁이 가문.
전국 사찰의 거대한 석불, 석탑 대부분 그 후예들 작품.
인수봉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약 2000년전
기록상으로는 1145년에 저술된., 백제본기, 삼국사기.
고구려 동명왕의 두 아들인 비류 온조가 기원전 18년 등정.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올랐다는.,한산 부아악.
신하 10명을 거느리고 부아악에 올랐다는 역사 기록.
비류와 온조의 부아악 초등 역사 기록은 건국신화일뿐.
요즘 관점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게도 여겨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을 보면
고려 예종 원년(1106)에 두 차례 지진.
조선 선조 30년(1597에 커다란 지진으로 붕괴.
그전까지는 지금보다 훨씬 경사가 완만해
지금보다는 오르기가 쉬웠을듯 여겨진다.
고구려 백제 왜까지 삼국을 창건한.,소서노.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설의 주인공., 여제.
혹시, 여제 소서노가 인수봉의 초등자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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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召西奴 : 기원전 66년 ~ 기원전 6년)
비류를 시조로 하는 백제 건국 설화에서 나오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자 고구려 동명성왕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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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고인돌 민족들의 후손.
전세계 고인돌 중 절반이 한반도에 위치.
화순 고인돌 중 하나는 인수봉 정상과 유사.
화순 고인돌 & 인수봉 정상.
인수봉에서의 정상은
오직 한 곳.,고인돌 바위.
인수 클라이머들의 휴식처.
"인수봉은 언제 누가 어디로 처음 올랐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인수봉 초등 수수께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