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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8 00:00:00 |
남영전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그의 수백수에 달하는 서정시 그중에서도 토템시는 진정으로 전국에 진출하고 세계에 진출한 텍스트로 평가할수 있는바 이미 중국소수민족문학계에서뿐만아니라 한족시문학계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다. 1971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남영전은 이미 《그리움》, 《푸른 꿈》, 《산혼》, 《백학》, 《해와 달》, 《신단수》, 《뻐꾸기》, 《천·지·인》, 《남영전시선집》, 《남영전단시집》, 《남영전세기시선》, 《원융》, 《이 꽃이 없는 봄날에》 등 13부의 조선문 혹은 한문으로 된 시집을 출판하였는데 이것들중 3부는 한국에서 한(漢), 영, 조 3종 문자로 출판하였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조선족시단에서뿐만아니라 중국시단에서도 독자적인 한 류파를 이루어 숱한 호평을 받고있다.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회장이며 저명한 시인이며 시평가인 효설(曉雪, 바이족)은 1995년 즉 남영전의 토템시 24수가 발표되였을 때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시인은 민족토템숭배물을 제재로 삼고 원대한 흉금과 광활한 시야 그리고 웅대한 기백으로 인류의 원초적인 생명과 운명의 근원 그리고 민족의 혼에 대한 깊이있는 발굴을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시창작을 보다 웅혼하고 신기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새로운 고도로 끌어올렸으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미적향수와 사상계시를 주고 커다란 정신적인 고무를 주었다.(1) 저명한 시평가 곽지우(郭志友, 한족)교수도 남영전의 토템시 24수가 발표되였을 때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였다. ―시가사에서 신화를 시로 쓴 시인이 적지 않으며 그중에서 명작이 수두룩하게 창출되였다. 룽싸, 괴테, 마라메이, 예지 등도 일찍 신화를 시로 써서 명작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토템숭배물을 시로 쓰고 그것을 계렬화한 시인은 시가사에서 첫 번째 시인이라고 할수 있겠다. 또 꼭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조선족시인으로서 남영전은 직접 한어로 쓰는데 자기의 모어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시인의 언어재질을 충분히 과시하고있다는 점이다. 그의 한어에 대한 심오한 수양과 세련된 조예 그리고 고풍연한 풍격은 사람들로 하여금 찬양을 금할수 없게 한다.(2) 저명한 시인이며 시평가 양자침(楊子忱, 만족)은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하여 다음과 감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시는 꼭 많이 써야 되는것이 아니다. 좋은 시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남영전은 단 24수의 토템시로 세상을 흔들어놓았다. 국내외의 평론가들은 《한민족시인이 자기 민족의 토템숭배물을 시화하고 또 그것을 정채롭게 계렬화하는것은 세계시문학발전사에서 전에 없었던 장거이다.》라고 말하고있다.(3) 양자침은 또 다른 한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토템시를 쓰기 전에)남영전은 조선족시인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본민족에게만 속하는것이 아니며 전체 중화민족에게 속하며 전 인류에 속하는 시인이다. 남영전의 이 등반은 그의 근신하고 착실한 창작태도와 련계된다. 이 몇 년래 남영전은 엄숙하고도 참다운 시인, 민족과 시대와 인류에 대하여 높은 책임감을 갖고있는 시인으로서 시단에 그렇게도 많이 생기는 묘망하고도 경망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어왔으며 마침내 자기에게만 속하는 길을 찾아내였다. 그의 매 한줄의 시는 모두 간난신고 끝에 나오고 그가 내디디는 발자욱마다 모두 생명을 연소시키는 노력을 경주하여야 하였다.(4) 저명한 시인이며 시평가 률원소적(栗原小荻, 바이족)은 남영전의 토템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각양각색의 허환색채가 충만되여있는 중국의 당대시단에서 남영전은 변신하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시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인물이 아니다. 질박하고 구체적이고 손으로 만질수 있고 눈으로 볼수 있는 시를 쓰는 남영전은 진정한 의미에서 계관시인이다. (비록 중국에는 계관시인이 없고 서방에만 있지만) 남영전이 이 계관을 만드는 과정은 완전히 시문학에 대한 인진하고 성실한 탐구의 가장이였으며 이 계관은 또 순수한 시인의 만강의 시정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계관은 사회가 그에게 준것이 아니며 박사, 교수, 주필, 행정직무 등 사회신분의 표지에 그치지 않으며 또 사람들이 한번 보기만 하면 눈이 빨개지는 그러한 직함이 아니다. 총적으로 남영전은 시의 이름을 빌어 강호에서 분주한 류랑예인이 아니며 시인의 문패를 걸고 국록을 타먹는 식객이 아니다.(5) 저명한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 연구가 해남대학 리홍연(李鴻然, 회족)교수는 남영전의 토템시 《곰》과 《신단수》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곰》과 《신단수》는 비록 조선민족의 토템을 제재로 삼았지만 또 시에 창조된 이미지와 의경, 비유와 상징은 조선민족의 성격, 생존발전력사와 련계되고 아울러 동북아세아 혹은 지구의 북반구의 지역특색이 있지만 이 시편에서 남영전은 시학중에서 인학을 발굴하고 광활하고도 거대한 시공중에서 보편적인 인류정신을 탐색하기에 힘을 썼다. 시인의 사유는 천갈래 만갈래 펼쳐지고 시인의 눈길은 만리를 꿰뚫고 작품은 기세가 호방하고 웅위롭고 신비하고 장려하고 아름다워서 그 사상적 의의와 예술적 가치는 한 지역과 한 민족의 범위를 훨씬 초월하였다.(6) 중국의 저명한 시평가 북경대학의 사면(謝冕, 회족)교수는 남영전의 토템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남영전의 토템시의 연구와 창작은 본민족의 력사에 대한 추구와 사색으로부터 시작되였지만 그의 동력원 내지 마지막 귀결은 모두 풍부하고 원대한 시야에 바탕을 두고있다. 그는 본민족의 탄생, 성장과정 및 장기간 발전중에서 형성된 생활상황, 풍속습관, 문화전통 그리고 한족 등 형제민족과의 관계에 대한 아주 심입된 고찰과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토템문화의 리념으로부터 출발하여 민족사, 인류문화사 심지어는 예술사 등 연구범위를 보다 광범한 층차에서까지 확대하였다. 남영전은 《민족은 문화개념이지 혈통개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남영전의 토템시 창작은 기본적으로 영원에 대하여 질문하는 류형에 속하지만 연구과정에서 그는 시종 당전 인류와 민족이 처한 생존환경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깊은 우환의식에 잠겨 말한다. 《자기가 창조한 문명에 의하여 현대인의 문명이 해체되는 현상은 날로 엄중해가고 인류는 갈수록 자아를 상실하고 본성을 상실하며 자연과 대립되고있으며 사람과 랭담해지고 있으며 부단히 인류의 생존위기를 만들어가고있다.》(7) 이상 인용문을 통하여 우리는 남영전의 토템시가 확실히 중국소수민족시단과 한족시단에서 상당히 튼 공명대를 형성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근 20년래 전국의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 남영전의 시에 대한 평론과 론문은 근 백편 발표되였으며 여러 대학들에서 연구회가 열리였으며 전문적으로 남영전의 토템시를 연구한 저작도 출판되였다. 이와 대조되는것은 조선족 시단이나 평론계에서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있다는것이다. 회고해보면 1995년 6월 25일, 남영전의 토템시가 24수 발표된 시점에서 당시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에서 《남영전토템시연구회》를 소집하였는데 박화의 《뿌리찾는 시혼의 알찬 결실》과 최삼룡의 《민족의 얼과 운명에 대한 심층사고》가 발표되였다. 그후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러간후 임범송교수의 《민족원초신앙에 대한 문학적접근과 승화》라는 평론이 발표되였다. 이밖에 더 있다면 조선족 시인들과 평론가들, 문인들과 비문인들의 활발한 골목평론이 있을뿐이다. 중국시단에서는 활발한 평론과 연구가 진행되고있지만 민족내부의 시단에서는 잠잠한 문학현상은 한두마디 말로 풀수 있게 간단한것이 아니다. 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남영전 토템시의 제재의 특수성에 있다고 본다. 이점을 고려하여 이제 나는 이 론고에서 남영전시문학의 30년을 정체적으로 파악한 기초상에서 착중하여 한가지 문화로서 토템과 남영전의 시에서 토템 그리고 량자의 관계에 대하여 해석해보려 한다. 사실 이 문제들은 남영전 토템시를 흔상하는데 피할수 없이 해답하여야 하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남영전의 토템시 읽기 ABC》라고 달았다. A. 남영전의 토템시에 접근하기 위하여 먼저 남영전시인의 시창작에 대한 정체적인 파악이 수요된다. 남영전은 1971년에 처녀작을 발표하였고 1988년에 처녀시집 《푸른 꿈》(료녕민족출판사)을 출판하였다. 시집 《푸른 꿈》은 두가지 점이 돋보이는데 그 한가지는 이 시집에 수록된 《할머니》, 《휘우듬한 그림자》, 《아버지》 등 시편들은 사상 및 예술상에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점이고 다른 한가지는 이 시집에 토템시 4수가 수록되였다는 덤이다. 《할머니》 등 시편들은 철저하게 경전시학에 기초하여 창작되였지만 창조 주체의 투철한 시정신이 돋보이며 민족의 생명저력과 혁명정신에 대한 추구가 돋보이며 시형상을 창조함에 있어서 전형화의 수법과 랑만적인 정서가 돋보인다. 《할머니》, 《휘우듬한 그림자》, 《아버지》 등 시편에서 창조된 할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은 비극적색채가 다분하지만 전편 시에서 흐르는 정서는 랑만적인바 시적화자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혁명정신은 일찍 공화국의 찬란한 아침노을을 물들였다고 자랑스럽게 웨치였으며 지금도 시적화자의 세포마다에 도도히 살아숨쉬고있다고 기껍게 노래하고있다. 토템시를 창작하기전에 《할머니》 등 작품은 평가를 받았으며 남영전에게 일정한 영예도 가져다주었지만 시인은 이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 시편들은 내용과 형식, 제재와 구조상에서 참으로 독창적인 작품으로 되지 못하였다는것을 똑똑히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재생의 꿈과 탈피의 모지름속에서의 몇 년간의 로고 끝에 남영전이 찾아낸 돌파구가 토템시였으니 1988년에 출판된 시집 《푸른 꿈》에도 토템시 《달》, 《곰》, 《사슴》, 《백화》 등 4수가 수록될수 있었던것이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이렇게 처녀시집 《푸른 꿈》에 4수로부터 확충되여 시집 《백학》에 14수, 다시 더 확충되여 《남영전시선집》에 21수 1994년에 이르러 모두 24수로 되었다. 그후 다시 근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2003년 시집 《원융(圓融)》에 이르러 42수로 된다. 그 제재의 차이로부터 고찰하거나 그 방법과 기교로부터 분석해보면 남영전의 이 42수의 토템시는 그 전시기의 시들과 전혀 틀리는것 같지만 그 시적정신이나 내적인 기질에서는 끈끈한 련계가 있다는것을 쉽게 알아낼수 있다. 1994년 토템시 24수를 완성한후 한차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영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토템숭배는 가장 민족적입니다. 나는 종적인 력사련결과 횡적인 세계문화의 창조로 민족혼을 발굴하고 다시 주조하여 넓고도 깊은 민족사시를 창출하려 합니다. 이것이 나의 시창작에서의 최고추구입니다.(8) 알수 있는바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최고의 추구는 바로 민족혼을 발굴하고 고양하는것인데 이것은 《할머니》나 《아버지》에서 추구와 일치한것이다. 례를 들면 시 《곰》은 세인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성공적인 토템시인데 여기서 시인이 노린것은 바로 조선민족의 토템숭배물로서의 곰의 용맹성과 숭고미를 노래하는것이며 나아가서 거기에 기탁하여 유구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고양된 조선민족의 민족정신이다. 여기서 우리는 《곰》과 《할머니》, 《아버지》의 공통점을 찾아내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 우리는 다른 토템시에서도 쉽게 이러한 공통점을 발견할수 있다. 남영전시인이 토템시 42수중 마지막 한수 《비둘기》를 완성한것은 2003년 1월이였다. 바로 이 2003년 봄이 바로 SARS라는 마귀가 중국의 대지를 충격하여 숱한 사람들의 생명을 쓰러뜨린 봄이다. 이 특수한 년대, 특수한 시각 많은 문예일군들도 의무일군들과 함께 전투에 뛰여들었는바 붓을 들고 백의전사들을 노래하고 이 한차례의 SARS와의 투쟁이 우리들에게 주는 계시와 교훈을 사색하였다. 이 비상시기 특수한 봄, 꽃이 없는 봄에 시인 남영전은 시집 《이 꽃이 없는 봄날에(在这个没有花的春天)》를 창풀하였다.(9) 이 시집에서는 남영전의 시정신이 투철하게 표현되였는바 시인은 포만된 격정으로 SARS와 싸우는 특별한 전추를 가송하였으며 모범인물들에 대비하면서 자기의 심령을 해부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고도 이름다운 백의천사를 노래하였으며 이 한차례의 특수한 전투중에서 같지 않은 사람들의 심태를 그려내기도 하였다. 시인의 책임감과 뜨거운 피가 끓는 가슴을 열어보인 이 시집은 시인 남영전이 도달한 인성의 고도를 보여주었으며 시인 남영전에게 고유한 눈부신 인격미를 보여주었으며 역시 시의 새로운 고봉에 오른 시인 남영전의 자랑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토템시에 마침표를 치고 반년만에 새로운 시집을 창출해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영전의 토템시와 시집 《이 꽃이 없는 봄날에》 이 량자사이에는 서로 전후의 인과관계가 있는바 전후가 서로 이어지고 보충하고 후자가 전자를 계승하는 관계가 있다. 남영전의 토템시가 인류의 원초와 본성을 쓰고 인류의 본성에로의 회귀를 고양했다면 SARS와의 전투를 쓴 남영전의 시는 바로 사람들에게 손에 손을 잡고 힘써 검은 구름을 물리치고 더러운 공기와 흐린 물을 가시고 어제의 평화와 안식을 찾고 인류의 본성과 생명을 지키자고 호소하지 않았는가! 이로부터 보면 토템시는 서언으로 되고 기초로 되면 SARS와의 전투를 가송한 시는 토템시의 재현으로 되며 승화로 되는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량자에 관통되는 한줄기 붉은선을 찾아볼수 있는데 그것은 즉 인성에 대한 고양, 민족정신에 대한 추구이며 그의 수백수의 시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도도히 굽이치며 흐르는것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2006년 3월 북경에서 열린 《남영전시창작연구회》에서 사면교수는 남영전의 이 시집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면교수는 세상에는 대채로 영원한것을 위하여 노래하는 시인과 실제적인 사회와 민생에 대한 관찰, 연구, 반영에 치중하는 시인 두가지 부류의 시인이 있는데 남영전은 바로 세상에 많지 않는 량자를 겸하여 강구하는 시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집 《이 꽃이 없는 봄날》은 시인의 고귀한 품질을 설명해주고있다. 중국의 대지를 위협한 그 꽃이 없는 봄날에 시인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더 떨리였으며 마침내 이 무서운 재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시집을 창출해냈다. 적지 않은 시인들이 자기애무에 빠져서 헤매일 때 남영전의 이 거동은 실로 보귀한 거동이였다고 평가하게 된다. 세인들은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만 이 전례없는 생과 사의 감동에 나는 좋은 시를 쓰지 못해 부끄럽다 만약 남영전의 이 시집이 없었더라면 만약 우리의 친애하는 조선족형제가 붓을 들어 SARS와의 생사박투를 전개한 영웅들의 전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시문학은 얼마나 큰 유감을 남겼겠는가! 남영전이 있었기에 중국의 시인들은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남영전은 우리에게 박애의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거대한 백색의 기념비 초연이 없는 전장에 솟은 비 그 기념비는 성실한 애심을 세웠노라 두려움 모르는 용감성으로 세웠노라 생명의 연소로 세웠노라 친인들의 성원으로 세웠노라 그 기념비는 평범한 사람들이 창조한 기적이여라(10) B. 남영전 토템시 읽기에서 관건은 토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다.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는 그 제재가 특수한바 인민대중의 현실생활이 아니고 현대인의 희로애락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토템숭배물이다. 때문에 남영전 토템시 읽기는 토템과 토템숭배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한다. 토템이란 원시시대에 산생된 한가지 아주 기이하고도 툭수한 문화현상으로서 토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것은 1791년부터 200여년의 력사가 있다. 이 200여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혹다 혹소하게 토템에 대하여 연구하고 자기의 견해를 내놓았지만 여러 석학들이 장악한 재료가 같지 않고 연구시각이 틀리기에 얻어내는 결론 또한 아주 제나름대로이여서 지금까지 대다수사람들이 믿을만한 토템리론이 없는 상황이다. 중국 혹은 우리 민족의 학술계에서 알고있는 토템지식은 아주 적으며 토템에 관한 개념도 아주 혼란하다. 《토템(totem)이란 단어는 북아메리카 인디안 알꼰치부락 오지부와방언으로서 기타 민족에게도 토템에 해당되는 단어가 많은데 례를 들면 오스트랄리아의 어떤 부락에서는 《커방》, 어떤 부락에서는 《언캐따이》, 어떤 부락에서는 《무르투》, 어떤 부락에서는 《크날리》라고 부르며 토레스해협 마푸야크섬 주민들은 《오구드》라고 부르며 중국의 어원크족은 《칼부르》라고 부르며 커무인들은 《다》라고 부른다. 인디안인들의 《토템》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유럽의 학술문헌에 나타났기 때문에 학술계는 아주 자연스럽게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다른 단어를 밀어버리고 《토템》으로 대체하였다. 제일 처음 인디안언어 토템을 학술계에 소개한 사람은 영국사람 J·랑그 (John Long)이다. 그는 원래 동인디안회사의 통역이며 상인이였는데 북아메리카에서 수년 생활하는중에서 보고 들은것을 《인디안려행기》로 펴냈는데 이 책은 1791년 런던에서 출판하였다. 랑그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인디안인들의 토템숭배와 토템풍속을 소개하였다. 중국에서 《totem》을 중국어로 제일 먼저 번역한 사람은 엄복(嚴復)이다. 그는 1903년에 영국인 와크스의 《사회통전》을 번역하면서 처음으로 《totem》을 《圖腾》이라고 번역하였다. 《토템》에 대한 정의는 또한 번다하다. 모르간은 《한 씨족의 표지 혹은 상징》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며 J·랑그는 《개인보호신》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며 프래즈는 토템을 친속이며 조상이라고 보았으며 프랑스학자 두르칸은 토템을 씨족의 상징과 표지이며 또 씨족의 신이라고 하였으며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드는 《대체적으로 토템은 종족의 조상이며 동시에 종족의 수호자》라고 정의를 내렸느며 미국의 력사학자 A·가이던 위씰은 소위 토템이란 원시인들이 어떤 동물이나 새 혹은 어떤 물건을 저들의 조상이라고 믿거나 혹은 저들이 이러한 사물과 모종의 련계가 있다고 인정하는것이라고 하였으며 구쏘련의 저명한 학자 C·A·토카레브는 모 군체가 모종의 물상과 신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는데 이 물상이 바로 토템이라고 정의를 내리고있으며 역시 구쏘련의 학자 하이툰은 토템이란 씨족의 조상이라고 결혼하였으며 중국의 저명한 민족학자 양곤은 토템이란 어떤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로서 부락내의 여러 군체는 이러한 토템을 자기의 조상으로 생각한다고 하였으며 친쟈우는 토템이란 사람들이 집단의 조상이라고 믿거나 혹은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는 동식물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이상의 가지가지 정의는 바로 학술계에서 일치하게 공인하는 토템에 대한 정의가 없다는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수많은 정의중에서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수 있는데 그것은 즉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개괄할수 있다. 첫째, 토템은 씨족 혹은 부족사회의 산물이다. 둘째, 토템숭배물은 어떤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 기타 자연물이다. 셋째, 토템은 원시인들의 원시사유를 반영하고있는데 원시인들은 각 씨족은 모종 동식물 혹은 모종 무생물과 친속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들을 저들의 조상, 형제 혹은 보호신으로 생각하면서 숭배하였다. 여기서 보다 깊이 생각해야 할것은 원시인들은 저들을 자연등급중에서 둘도 없는 특권적지위에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며 소유의 생명형식에는 모두 친척관계가 있다는 사유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고대사회의 인간들의 사유와 행위에는 모순이 충만되여있다는 점이다. 례를 들면 어떤 씨족은 영원히 토템숭배물로 되어있는 동식물을 먹지 않는다. 례를 들면 장족이 물고기를 먹지 않고 만족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식으로. 그러나 어떤 씨족들은 일정한 시기에는 저들의 토템숭배물 혹은 그 숭배물의 어떤 기관을 먹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이 토템금기를 지키지만 성대한 명절의식에서는 토템숭배물로 성찬음식을 만든다. 여기에는 신과 인간과 토템숭배물 이 3자의 관계에 대한 원시인들의 아주 단순하면서도 지혜로운 리해와 처사방법이 안받침되여있는데 이렇게 하므로써 토템숭배물의 생명력이 씨족성원들의 체내에 주입되고 그 생명활력을 전승받는다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신의 령기가 토템숭배물을 통하여 씨족성원들의 심신에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토템은 한 씨족의 내부단결, 성원지간의 상호약속 등 일종의 신비한 력량으로 작용할뿐만아리나 다른 씨족과의 분별의 표지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더 강조하고싶은것은 토템은 씨족사회의 문화이지 결코 민족사회의 문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은 근대의 개념으로서 수많은 씨족이 오랜 력사중에서 부단한 화합과 분리의 과정을 겪으면서 형성되였다. 그러므로 한 민족에게는 수많은 토템과 토템흔적을 찾을수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민족에게는 곰 등 몇 개 토템숭배물밖에 없다는것은 오도된 지식이다. 사실상에서 최근의 연구에 근거하면 중국의 이족내부에는 범, 조롱박, 물소, 양 등 토템숭배물이 무려 근 50종이 있으며 바이족에게는 범, 닭, 물고기 등 근 20종이 있으며 리수족은 현대에 와서 대부분 기독교를 숭배하지만 범, 곰, 양 등 토템숭배물 50여종이 있다.(11) 이에 대비하여 조선민족에게는 《곰》 등 한, 두 개 토템숭배물밖에 없다는 론단은 조선민족의 토템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결과라고밖에 말할수 없다. 이에 대하여 남영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족시인으로서 나는 지난날 토템문화에 대하여 많이 몰랐는바 그저 조선민족의 토템숭배물은 곰 하나인줄 알았다. 그러나 몇 년래 조선민족의 신화 등 유관자료를 연구하고 탐색하는중에서 조선민족의 형성은 많은 같지 않은 토템씨족과 토템가족으로부터 기나긴 력사과정중에서 융합되여 이루어졌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력사적으로 보면 조선민족의 토템숭배물은 하나뿐이 아니라 여러개인것이다.(12) 이제는 우리가 남영전이 18년의 연구를 통하여 조선민족의 토템숭배물 42종을 발굴하고 그것을 시화한것은 결코 억지가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C. 남영전은 시정신이 투철한 현대인이며 남영전의 토템시는 결코 토템숭배물에 대한 송가가 아니다. 남영전의 토템시 42수를 전부 수록한 시집 《원융(圓融)》이 료넝민족출판사에 의하여 2003년 8월 출판되였는데 이 시집에는 달, 곰, 신단수, 두루미, 흙, 물, 사슴, 범, 백마, 사자, 황소, 양, 백조, 매, 뻐꾹새, 수탉, 까마귀, 까치, 거부기, 고래, 개구리, 산, 불, 해, 별, 구름, 바람, 우레, 비, 바다, 산호, 돌, 개, 돼지, 두꺼비, 흰토끼, 제비, 나비, 대, 룡, 봉황, 비둘기 등 42종의 토템숭배물을 선택하여 시적대상물로 삼았다. 이 시들에 대한 평론과 연구는 이미 발표된 근 100편의 문장과 몇권의 저작에서 초보적으로 진척되였다. 나는 지금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한 앞으로의 더욱 활발하고 심도있는 연구를 기대하고 특히 중국조선족들속에서 남영전의 토템시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하면서 지금 여기서 남영전은 시정신이 투철한 현대시인이고 남영전의 토템시는 결코 토템숭배물에 대한 송가가 아니라는 점을 힘주어 내세우는바이다. 토템숭배물에 기탁하여 민족정신, 인류본성의 회귀를 고양하고 생명의 저력과 활력을 호소했든, 민족의 곡절많은 력사를 더듬어보고 아직도 민족성원들의 세포마다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을 가송했든, 인류와 자연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화합을 고양하고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의 원융을 호소했든,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고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저애하는 모든 비리와 부패, 야만과 악세력에 대하여 타매했든 아무튼 남영전은 현대인이고 남영전은 시정신이 투철한 현대시인이다. 그는 인류가 쌓아놓은 문명의 최정상에 올라섰으며 그의 흉금은 파도 세차고 바람이 센 지구촌을 담고있으며 그의 혜안은 고금을 꿰뚫고있으며 그의 시재는 13억 인구, 56개 민족 수천명의 시인이 동분서주, 좌충우돌하면서 글발을 날리는 대국의 큰 지성인들의 평가를 받았으며 중국당대소수민족의 3대시인으로 불리우는 영광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했다.(13) 이 아니 우리 조선족의 자랑인가! 마지막으로 남영전시인의 말 한마디를 다시 음미해보는것은 우리가 남영전의 토템시를 읽고 남영전의 인격을 리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가 민족과 문화, 문학과 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것이다. ―내가 쓰고있는 토템시는 비단 조선민족에게 속할뿐만아니라 중화민족에게도 속하며 더 나아가 세계 기타 민족에게도 속한다. 토템은 하나의 기치이고 일종의 정신이고 거대한 응집력이고 형제와 같이 뜨거운 정이며 전 일류가 함께 안고있는 아름다운 리상이다. 나는 나의 매수의 토템시가 작디작은 호르래기가 되어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를 웨치며 하늘과 땅과 인간의 화해를 웨치며 세계의 융합을 웨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1.曉雪:《探人類之源, 寫民族之魂》,《民族文學硏究》1995年 3期. 2.郭志友:《人性本眞的呼喚, 民族靈魂的重鑄》, 《中國改革開放的理論与實踐》 2000年 9月. 3.楊子忱:《以24首詩打天下》, 《長春日報》 1995年 4月15日. 4.楊子忱:《歷史的雕朔, 诗魂的崛起》,《文坛风景线》1998年 3期. 5.栗原小荻:《南永前不是一种神话》, 《天池》2000年3~4期. 6.李洪然:《中国当代少数民族文学史论》云南教育出版社, 2004年11月268页. 7.谢冕:《南永前的诗歌追求》, 2006年3月28. 8.贾瑛:《追求民族之根的人》, 《长春日报》1994年9月28日. 9.《在这个没有花的春天》, 시집, 한문, 시대문예출판사 2003년 8월 10.7과 같은 문장에서 11.何星亮:《中國圖文化》,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2년 11월 46페지. 12. 南永前:《呼喚世界圓融》, 시집 《원융》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8월. 2페지. 13.鮑風:《當代小數民族三詩人論》, 서북민족학원학보 2000년 제1기. 14. 12와 같은 문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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