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예정론의 최고난제 토기장이의 비유를 해석할 수 있게 되다!
로마서 11:30-32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순종뿐 아니라 불순종도 사용하십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원하십니다. 바울은 지금 그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경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 대속을 위해 유대인의 완악함을 이용하셨듯이, 그리고 바로의 완악함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능력 그 영광의 풍성함을 보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사용하셔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고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이용하셔서 유대인들이 시기 나게 하고 구원하십니다. 로마서 9장-11장은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의 신비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다룬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9장-11장에 줄곧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세 장에서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이 사람들의 순종뿐 아니라 불순종까지도 활용하셔서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는지를 계속 언급하였습니다.
로마서 9:17-18, 22-23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로마서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로마서 11:11-1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로마서 11:25-27, 30-32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우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제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합시다! 로마서 9-11장의 주제는 무조건 선택하고 유기하는 절대주권이 아닙니다. 방금 소개한 사람의 불순종까지도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지는 선택과 구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로마서 9-11장을 마무리하는 송영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33-3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주권 얘기가 아니다. 지혜와 지식 얘기다.)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이것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대한 언급이다.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이 신비라는 뜻이 아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역시 주권 얘기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얘기다. 선택이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송영의 마지막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 그리고 은혜로 되는 예정을 바르게 이해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그것이 예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에베소서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참고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이는 선택에 작용한 은혜가 절대주권에 의한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가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준다.)
에베소서 1:11-12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묻겠습니다. 칼빈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 때문에 찬송이 우러나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까? 아니지요! 동의가 안되고, 부대끼고,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정을 예지예정으로 이해해야 찬송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예정론이 아니라 예지예정론이 바울이 말한 예정이고 진리입니다.
한편, 앞에서 인용한 에베소서 1장 3-6절에 대한 추가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과연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예지예정에 나타나 있는 그런 은혜인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택하는 그 은혜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가 맞습니다. 그 증거로 이 구절을 자세히 주목해서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으로 무조건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나오지요. 선택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선택이 가능해졌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이 보여주듯이 십자가 때문에 의롭다 하심과 성령의 약속 이 두 가지를 믿고 의지하는 자를 선택하고 구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표현이 바뀌어서 다시 나오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왜 선택이나 구원이 은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어주신 의롭다 하심과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하나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것을 '은혜'라고 말한 것이지, 칼빈이 주장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이 무조건 구원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선택한 걸 '은혜'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
또 나오지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
보십시오. 칼빈이 주장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이 이 부분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우리는 멸망받아 합당했다.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무조건 선택해주셔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찬송한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고, 아무 희망도 없었고, 정죄 아래 있었다. 부패한 자들이었다. 정죄되었을 뿐 아니라 죄의 종들이었다. 죄에서 자유케 될 수 없었고, 죄의 종으로 살다가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던져져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찬송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를 사하고 의롭다 하실뿐 아니라 죽음으로 값을 지불하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선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힘, 노력, 의지로는 죄를 이길 수 없는데, 에스겔이 예언한 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이 예정에 나타나 있는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은혜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예정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구원받은 신자들처럼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10)라고 찬양하는 것이 예정의 목적이고 그 성취입니다.
이제 이 구절의 의미가 제대로 보이십니까? 이것이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정입니다. 칼빈이 만들어낸 그런 황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이 계시받고 성경에 기록한 예정입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혼란을 주고 반감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예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런 반감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예정을 오해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정은 구원계획이고, 복음의 한 부분입니다. 복된 소식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뭔가 찜찜하고 동의할 수 없고 당혹스러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예정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독재자들이나 가지고 있는 무식한 절대주권 얘기가 아닙니다. 예정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지혜가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집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고,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송영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를 통해 아무리 교계에서 칼빈의 예정론이 대세라 할지라도 그것은 비진리이고 사람의 계명이고 미혹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깨닫고 분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