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수기 6,22-27 갈라티아 4,4-7 루카 2,16-21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고 그만큼 큰 은혜의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그 은혜의 선물이란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다니, 이 얼마나 벅찬 기쁨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할 일인데 그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니,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새해의 첫날부터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낳으셨으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교의는 네스토리우스 주교가 성모님은 그저 인간 예수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해야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라 하느냐는 주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단죄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불과 나무처럼, 인성과 신성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숯불은 나무와 불이 서로 다른 두 본성이지만 결국 하나입니다.
숯불은 숯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그저 선악과 따 먹으면 벌을 줄 그런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부모의 지위까지 올려주실 사랑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담과 하와의 불신의 죄를 그대로 짓는 것입니다.
밀가루까지 하느님으로 만드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신성은 우리 인성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은 진심이 될 수 없습니다.
천연두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 자국을 가친 채 도시로 이사 온 그레이스는 친구들에게
‘괴물’이란 놀림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상처받아 울고 있는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적에 천연두라는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단다. 그 병은 네 오빠와 동생의 생명을 빼앗아 갔지.
이웃의 많은 아이도 죽었단다.
하지만 하느님이 너만은 살려주셨단다.
네 얼굴에 생긴 상처는 하느님께서 네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표징이란다.”
그레이스는 엄마의 말을 믿었고 누구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였고 잘생긴 남학생과 결혼하여 미국 하원의원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가 어머니를 공경하고 기념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나는 괴물이야!’라고 자기 비하를 하는 것일까요?
어머니의 말을 믿고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고 하느님은 될 수 없다고 믿으며 같은 인간으로서 하느님 어머니의 지위까지 올라가신 성모님을 공경한다면 말이 될까요?
성모님은 지금 인간이 어떤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머니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아수라’란 일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인육까지 먹는 사람이 생길 정도의 기근이 들었을 당시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습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길에 쓰러진 사람의 고기까지 먹습니다.
아기도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으며 자랍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아이 눈에는 모든 사람이 고기로 보입니다.
그래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이때 그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스님과 한 여인입니다.
스님은 제발 인간이 되라며 자기 팔을 잘라줍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기에 아수라는 인육을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구해준 여인이 굶어 죽어가자 말을 죽여 고기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고기가 인육인 줄 알고 죽기까지 먹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수라는 굶어 죽으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내려가기를 원치 않는 여인과 자기가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팔까지 자른 스님에 의해서 이제 타인을 구제하는 스님이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셨습니다.
모기처럼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면 아수라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한 공경이었듯이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인간이기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품은 여인이요, 하느님을 낳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공경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기를 믿으신 분 앞에서 우리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으로 공경한다고 하는 거짓 기도를 하지 맙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민수기 6,22-27 갈라티아 4,4-7 루카 2,16-21
방황하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 늘 함께 동반하시고, 우리 곁을 지켜주시는 성모님!
아기 예수님의 복된 성탄 팔부 축제 기간 중에 갑작스레 어머니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린 대축제 기간이라 직천당하셨을 것이라는 덕담에 큰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워낙 황급히 떠나시는 바람에 미처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해 황망하고 송구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이젠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희미하게나마 당신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살짝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주시더군요.
장례 절차가 다 끝나고 마지막 가시는 길 화장장 가족 대기실에 홀로 앉아있는데...어머니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애야! 그동안 나 때문에 애썼다.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이제 또 다른 어머니께서 네 엄마가 되어주실 것이란다.”
돈보스코께서도 엄마 잃고 슬퍼 울부짖으며 오라토리오에 살러 들어온 가엾은 아이들을 볼 때 마다,
당신의 크고 따뜻한 가슴에 그들을 꼭 끌어안아 주시며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했습니다.
“애야!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저기 저분 보이지?
앞으로 저분,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네 어머니가 되어주실 것이란다.
그러니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만사 제쳐놓고 성모님께 매달리거라.”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제 나이를 만만치 않게 먹은 저도 어머니를 여윈 슬픔이 이토록 큰데, 부모를 일찍 여윈 열두 서너 살 아이들, 열여덟 열 아홉 청소년들의 마음은 얼마나 더 찢어질 것인가 하는 생각을 오늘따라 많이 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사람들 앞에서는 그럭저럭 통제가 되더니, 모든 예식이 끝나고 홀로 남으니
갑작스레 큰 슬픔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더군요.
주체할 수 없는 폭풍 눈물을 닦느라 혼났습니다.
엄마를 일찍 여의고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큰 구멍이 나 있는 분들, 그 큰 구멍으로 불어오는 삭풍에 언제나 마음이 시리고 휑한 분들, 오늘 천주의 모친인 동시에 오늘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현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방황하는 우리네 인생 여정에 늘 함께 동반하시고, 우리 곁을 지켜주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극심한 고통과 상처에 힘겨워할 때, 외로움과 절망감에 허덕일 때,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성모님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힘겹게 살아오신 한해였습니다.
잘 견뎌내시고 극복하셔서 오늘 이렇게 또다시 한해와 작별하고, 또 다른 한해를 맞이하게 된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새로운 한 해를 축복하시고 필요한 은총 베풀어주시며,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힘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새해 첫날 새로운 우리>
2023. 01. 0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세계 평화의 날)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갈라티아 4,4-7 (종살이에서 자유로)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루카 2,16-21 (목자들이 예수님을 뵙다, 할례와 작명)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새해 첫날 새로운 우리>
새로운 나
새로운 너
새로운 우리가
정의와 평화와 자유와
자비와 살림의
하느님께서
몸소 활짝 열어주시는
새해 첫날을 맞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길지언정
빼앗김도 빼앗음도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러
정의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억누르고
누군가는 억눌릴지언정
억눌림도 억누름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러
평화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얽매고
누군가는 얽매일지언정
얽매임도 얽맴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을 이루러
자유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버리고
누군가는 버려질지언정
버려짐도 버림도 없는
자비로운 세상을 이루러
자비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죽이고
누군가는 죽임 당할지언정
죽임 당함도 죽임도 없는
살리는 세상을 이루러
살림의 하느님을 닮아
나날이 새로워지는 나
나날이 새로워지는 너
나날이 새로워지는 우리가
여는
새해 첫날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바로 오늘
하느님의 축복인
새해 첫날에
정의로운 나 너 우리가
평화로운 나 너 우리가
자유로운 나 너 우리가
자비로운 나 너 우리가
살리는 나 너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
온 누리 모든 이에게
곱게 스밀 수 있기를
바래고 바래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첫댓글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