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은 3주 전에 “왜 나는 BBK명함을 깠나?”로 본란에 실린 졸고의 속편이다. 이 글은 - 그 글에 별난 것을 보태지 않았으나 그 글에 몇 개의 註釋을 달고 내가 명명백백한 ”保守우파의 反逆“을 감행한 동기와 이유를 부연해 - 역사의 기록에 티끌만큼이라도 참고가 되게 하고자 한다.
2. 나는 그 글 제4항에서 “나의 ‘正體’를 가지고 『왜 나는 BBK명함을 깠나?』의 이유가 한마디로 ‘나의 國家安保觀’과 民主主義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 글의 제목에 대한 즉답은 한마디로 BBK검찰의 對국민 “강간(强姦)” - 2007년 대통령 ‘不正選擧 예비음모’ 가담 - 규탄과 “익사(溺死)위험에 처한 한국의 어린民主主義”에 대한 경종이다.
3. 나는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鄭東泳(DY)을 ‘지지’하는 대가로 2007년 12월 13일과 17일 두 차례 KBS TV에 나타났다.
그 첫 번째는 BBK검찰의 그 ‘수사’作文에 따라 12월 12일 현재 李明博의 지지율 45.4.%(조선일보-한국갤럽)가 - DY의 17.5%와 李會昌의 13.6%를 압도해 - 固着되던 대선 엿새 전이었다.
그 두 번째는 - “저는 요즘 제가…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BBK로 이익금까지 냈다”고 - MB가 7년 전에 공언한 그의 BBK동영상이 12월 16일 전국에 TV로 공개된 그 다음날인 대선 이틀 전에 내가 - “한국의 검찰이 일본을 따라가기만 하더라도 [타나카 전 수상을 체포한 일본 검찰처럼] 李明博 후보를 당장 체포했을 만하다”고 - 말했을 때이다.
4. 나는 3주 전의 그 글 제20항에서 “李明博을 희대의 권력형 반역자 金大中의 ‘養孫’으로 규정했다”고 말했고 그 글 제23항에서 “내가 BBK명함을 까게 된 단 한 개의 가장 중요한 직접적 이유는 그[MB]의 ‘햇볕계승’이 초래할 한국의 ‘안보危害’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나는 또한 그 글 제24항에서 “나는 盧무현의 ‘異腹동생’ 鄭東泳의 친북 노선을 우려한 것은 물론이고 MB의 당선에 의한 ‘햇볕’시대의 연장을 상상하며 깊은 苦悶에 빠졌다”고 술회했다.
5. 그러니깐 나는 2007년 11월 초부터 한국의 ‘안보危害’에 관한 한 DY와 MB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아니하고 같다는 심증을 굳혀갔다.
그때부터 약 2년 5개월 후에 - MB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남에 따라 - 그 때의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것으로 입중되었다.
1950-1953년의 ‘韓半島전쟁’ 휴전 이후 지난 57년 동안 남한 영토에서 생긴 한국의 안보危亂 중에서 MB가 방관했던 天安艦의 격침과 延坪島 피격보다도 더 괄목할만하게 危重한 것은 없었다.
6. 내가 2007년 11월 22일 BBK명함을 까기 前날에 한나라당의 국회의원[현 국회의장] 朴희태는 평화방송[PBC]과의 인터뷰에서 “명함은 어디 가서 찍어달라고 그러면 누구 명함이라도 다 찍어준다. 거기에 무슨 본인을 확인하고 실질관계가 맞는가를 조사해서 명함을 찍어주나? 안 그렇나?”고 말했다.
나의 1961년 고등고시 제13회 동기로 지난 50여 년 동안 내가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檢事 출신 朴희태가 그렇게 말한 것 자체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MB와 BBK명함과의 관계를 부인하기 위한 그의 의도와 어투에 꽤 자극을 받았다.
7. 또한 내가 문제의 BBK명함을 까기 前 날 한나라당의 대변인 羅경원은 LKe뱅크 시절 MB의 비서였던 李진영의 미국 법정증언을 빌어 “[BBK]명함을 만든 사실은 있지만 李 후보가 사용한 적은 없다…金경준 씨가 자기 필요로 만든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 직전까지 BBK명함이 “위조된 것이거나 사용하지 않고 폐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가 살짝 물러난 羅경원은 BBK와 MB와의 관계를 巧言令色으로 부인했다.
나는 판사 출신인 羅경원 그녀가 그렇게 속아 - 내가 MB로부터 직접 받은 그 문제의 명함을 MB가 “사용한 적은 없다”고 - 권력의 下女로 거짓말하는 것을 매우 을씨년스럽게 여겼다.
8. 내가 문제의 명함을 깐 바로 그날 ‘패닉狀態’에 빠진 한나라당의 대변인 朴형준은 기자 간담회에서 “李명박 후보가 그 명함을 썼는지 안 썼는지 잘 모른다…李장춘 대사가 경선 때 朴근혜 사람 아니었나…필체 감정을 통해 이 후보 게 아닌 게 확실해 지면 …정치적 陰謀(음모)이다”고 휘둘러댔다.
朴형준은 3주 전의 졸고 제21항에 언급된 - 나와 MB 간의 2007년 10월 13일 마지막 양자 밀담(tete-a-tete) - “그날 대화에 오른 화제(특히 입에 오른 爲人들의 됨됨이)에 대한 나의 失望”에 포함된 사람이다.
朴형준의 말은 BBK거짓말이 현저하게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朴근혜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여태껏 그녀가 나를 그녀의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9. 내가 BBK명함을 깐 11월 22일 오후부터 숨 가쁘게 돌아간 근 열흘은 2007대선의 分娩이 가까워지며 ‘陣痛’이 시작된 ‘경계해야할’ 기간이었다.
내가 BBK명함을 깐 직후 그 경위가 ‘조갑제닷컴’에 가장 먼저 뜬 것을 따라 11월 23일 S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앤조이>에 집중 보도되었고 11월 27일 MBC TV의 PD수첩에 생생히 실렸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재벌이 소유한 막강한 매체인 소위 ‘朝中東’은 못 들은 체했다.
10. 내가 BBK명함을 깐 그 다음날인 11월 23일 전 대통령 金大中은 ‘2007 창작인 포럼’ 주최 강연회에서 - “현재 保守세력이 큰 지지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힘을 합쳐 나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保守세력이 집권하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해 심지어 戰爭의 길로 끌고 갈 수 있다”고 - ‘보수우파’를 위협하는데 노골적이었다.
그의 ‘전쟁’협박은 무언가 진행 중인 南北 간의 ‘合作’을 비친 것 같기도 했고 “우리의 힘을 합쳐 나가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그의 자신은 무언가 진행 중인 그와 그의 ‘養子’ 盧무현 간의 ‘陰謀’를 암시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金大中의 11월 23일 妄言이 그 전날 朴형준이 나에게 내뱉은 “정치적 陰謀(음모)”를 무의식적으로 표출했을 수 있다는 六感을 가졌다. 온갖 풍랑을 헤치고 한국정치의 頂上에 올라 “현대판 逆謀”를 감행한 반역자가 “예측 불가능한” 그의 ‘養子’ 盧무현과 함께 ‘햇볕家’의 뒤탈을 겁낸 나머지 2007대선에 決定打를 내기 위해 궁리했을 가능성이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11. 나는 - 4.19학생革命에 굴복하여 물러난 건국 대통령 李承晩과 5.16군사革命으로 권력을 쟁취한 朴正熙의 암살을 수습하던 중에 생긴 新군부의 12.12擧事로 등장한 全斗煥이 朴정희의 사실상 후계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 後嗣(후사) 책봉에 결코 방심하지 않는 한국의 帝王的 대통령이 그 막강한 권력의 프리미엄을 포기할 리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당시 나의 귀에 들린 소리는 - 11월 18일 현재 ‘한국갤럽’ 조사에 의하면 MB의 지지율이 36.8%로 상승하고 출마한지 불과 열흘 남짓했던 李회창의 지지율이 17.1%로 오르는 반면 여당 후보 DY의 지지율이 13.2%에 머문 판도 하에서 - ‘김대중父子’가 포섭하거나 흥정을 노린 대상은 오직 MB뿐이라는 것이었다.
‘김대중父子’는 - 여하한 경우에도 1997년에 金大中과 그리고 2002년에 盧무현과 각기 대선의 승부를 다툰 깐깐한 反共율사 李회창의 집권을 묵과할 수 없었기에 - “우리의 힘을 합쳐” 건설업자 출신으로 담합에 능한 李明博을 김대중의 ‘養孫’/노무현의 ‘조카’로 입양한다는 시나리오에 당연히 공감할 만했다.
盧무현의 ‘異腹동생’ 鄭東泳은 승자가 될 가망이 없었던 데에다 ‘햇볕’친족의 일원인 그를 포섭/흥정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12. 내가 깐 BBK명함은 MB의 거짓말을 밝힌 호롱불이거나 그것을 반박한 “小銃” 정도에 불과했다. 그 BBK명함과 함께 MB와 BBK간의 관계에 관한 단서가 11월의 마지막을 향해 잡힐 듯 말 듯 하더니 그 자취를 감추었다.
KBS가 11월 27일 밤 그리고 MBC와 ‘서울신문’이 11월 28일 아침 ‘검찰은 『(BBK의 韓語본) 이면계약서』에 찍힌 도장과 MB의 최측근 金伯駿이 금감원에 제출한 서류에 찍힌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한나라당의 클린정치위원장 洪준표가 ‘이면계약서’에 찍힌 도장을 ‘가짜 도장’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상치된 동 언론보도는 MB캠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대변인 朴형준은 11월 28일 “일주일만 있으면 金경준 기소이고 그때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검찰과 KBS/MBC를 싸잡아 맹비난하며 ‘MB의 무혐의’에 무언가 자신하는 듯 했다.
또한 11월의 마지막 週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가진 전 검찰고위 간부들의 오찬에서 전 검찰총장 鄭xx은 “도곡동 땅[BBK범죄혐의의 핵심 중 하나]의 실소유주가 李xx이다“고 말했다는 정보가 삽시간에 서울의 政街에 전파되어 BBK의 핵심 수수께끼가 풀릴 것 같았다.
또한 11월 28일 저녁 6시 30분 [전 대통령 金泳三의 심복으로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역임한] 李會昌 캠프의 수장 姜삼재는 BBK검찰의 수사로 MB의 범죄혐의가 규명되면서 대선 판도가 뒤집힐 것 같다고 나에게 말했다.
13. 金大中의 11월 23일 妄言이 있은 지 나흘 이후부터 南北은 무언가의 접촉을 과시하며 대선 정국에 ‘北風’을 넣기 위해 열을 올렸다.
11월 27일부터 2박 3일간 남북은 평양에서 - ‘남북 국방장관 회담’의 장막을 쳐놓고 - 만나더니 그 마지막 날인 11월 29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北의 ‘對南총책’(통일전선부장) 金養建이 남한을 방문하는 공개적 시위를 벌였다. 그 두 달 전인 9월 26일 전후에 몰래 남한 땅을 밟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남한의 스파이頭目 金만복의 극진한 수행을 받아 통일부장관 李재정과 회담했으며 11월 30일에는 청와대에서 盧무현을 만났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와서 무슨 얘기를 남한 측과 나누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었다. 다만, 그가 20일 후의 남한 대선에 관해 北의 金정일이 盧무현에게 보낸 메세지를 전달한 것은 틀림없고 MB나 그 측근도 만났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北의 對南총책 金양건의 두 번째 방문 이후부터는 MB를 심하게 욕하며 MB의 생명을 위협하던 北의 惡黨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한반도의 정치氣流이었다.
14. 드디어 2007년 12월 5일(수요일) 오전 11시부터 BBK검찰은 한 사람도 아닌 한국의 대다수 국민을 백주에 태연하게 ‘强姦’했다. 韓나라의 역사책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 운명적인 날의 아침 하늘은 맑았다.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현 釜山고검장] 金홍일은 ‘이명박 모두 무혐의’를 BBK검찰의 ‘搜査(수사)’ 결과라고 발표했다.
소가 웃고 개가 웃을 BBK검찰의 그 ‘搜査’는 - 유권자의 눈을 덮고 귀를 막으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거짓의 방패(the shield for falsehood)로 - 수사 아닌 ‘정치의 하청’을 받은 소설 속의 한 작문(a chapter in a novel)이었다. 그것은 근 52년 전에 악명 높던 ‘자유당’ 치하의 檢察도 감히 그렇게 대놓고 못했을 - 국가권력의 橫暴와 오만의 소치로 - 그 몰염치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BBK검찰은 MB의 주가조작 공모/BBK 소유/(주)다스 소유/이면계약서 진위 등 소위 4대 의혹을 ‘증거 없음’/‘사실무근’/‘허위’로 단정하며 모조리 뻔뻔스럽게 은폐했다. 그 강심장은 한국형 權力의 횡포와 오만의 표본이다.
15. BBK검찰은 - BBK도깨비 金경준과 MB간의 對質訊問을 하지 않았고 MB에 대한 直接調査를 생략한 ‘수사’로 - 범죄搜査學의 초보 중 초보를 무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죄수사 아닌 범죄‘政治’에 골몰했던 BBK검찰은 그 ‘物主’를 불러 따질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16. BBK검찰은 MB가 - 2000년 2월부터 2001년 4월까지 BBK주인공 金경준과 동업한 기간 중 - 무엇을 어떻게 투자했는지를 조사해 밝히지 않았고 BBK의혹의 핵심인 도곡洞 땅과 그 매각대금의 흐름 등을 피해 갔다.
BBK검찰은 특히 (주)‘심텍’[회장 전영호/사장 전세호]의 2000년 10월 20일 BBK 투자 50억 원 중 회수 못한 33억 때문에 그 회사가 2001년 11월부터 MB를 상대로 제기한 민/형사 소송에 말이 없었다.
17. BBK검찰은 MB가 7년 전의 言論인터뷰로 - 2000년 10월 14일자 중앙일보/10월15일자 동아일보/11월 11일자 MBC TV/11월 12일자 일요신문/2001년 월간중앙3월호 등 - 스스로 ‘BBK를 만들었다’고 자랑한 MB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BBK검찰은 MB가 2007년 6월 7일 “BBK와 나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전혀 관계가 없다”고 ‘거짓말한 것’을 거짓말이 아닌 ‘참말’로 인정함으로써 ‘거짓말의 共犯’이 되었다. 국가검찰이 그 죄값을 피할 수 없는 엄연한 대목이다.
또한 BBK검찰은 MB가 2007년 11월 5일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BBK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대통령직을 걸고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에 대한 ‘保證人’으로서의 罪責感을 전혀 意識하지 못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생각하는 동물로 意識을 가진 존재인데…
18. BBK검찰은 내가 2007년 11월 22일 깐 BBK명함에 대하여 “BBK가 김경준 씨 소유로 판명된 상황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선 더 수사할 필요가 없어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깐 나를 수사의 참고인으로 부르지 않은 BBK검찰은 - 나라의 장래에 중차대한 결과를 초래할 犯罪嫌疑者의 ‘거짓말’을 수사할 필요가 없었다고 공언할 정도로 - 다짜고짜로 職務유기를 감행하며 그 ‘原都給主’ MB를 덮어놓고 감쌌다.
19. 나는 BBK검찰의 ‘수사’ 결과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李회창은 그날 기자회견에서 “국민 의혹을 전혀 풀지 못한 조사결과 발표라고 생각한다…과연 그동안 제기됐던 여러 가지 후보[MB]의 거짓말이나 도덕성에 관한 문제들이 덮어질 수 있을까”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가 재판관 출신답게 BBK‘수사’에 대한 不信을 점잖게 미지근하게 표시한 그 순간부터 그가 강력한 鬪志의 정치투사가 못 되고 끝날 그의 한계를 드러낸 것에 대단히 실망하며 서글픔을 금할 수 없었다.
20. 그러나 鄭동영은 대단히 달랐다. 그는 그날 저녁의 集會와 라디오 선거放送 연설에서 - BBK검찰이 “국민의 常識을 탄핵했다…검찰은 수사가 아니라 정치를 했다…검찰은 李明博 후보보다 국민이 더 무섭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고 -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가 그날 “…朴종철 열사의 고문致死사건 때 검찰이 ‘탁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고 했지만 [검찰의] 거짓말이었다”고 근 21년 전에 저지른 檢察의 포악한 망언을 상기하며 - 특히 “이번 대선은 거짓과 正直의 싸움이 될 것이다”고 - 엄중하게 경고한 것이 나의 귀를 쟁쟁하게 울렸다.
나는 그가 그 다음날 12월 6일 TV와 긴급 기자회견에서 - “거대한 陰謀가 작동되고 있다…검찰의 수사는 전면 無效다”고 - BBK검찰을 상대로 투쟁할 결의를 표시한 것에 무한히 감동되었다.
21. 나는 12월 5일 오후부터 다음과 같이 BBK검찰의 규탄에 들어갔다:
- “朴근혜씨도 부정의 共犯이 될 건가?”의 제하(부제: “BBK 관련 검찰 발표는 不正후보자 당선을 위한 不正選擧 예비음모다”)로 쓴 글에서 남북 간의 정치결탁을 경고하며 우국 정치인들이 正義의 편에서 不義를 물리칠 것을 호소했다(12월 5일 ‘조갑제닷컴’ 등);
- “[12월 5일] 어제는 검찰이 自殺골을 터뜨린 날”이라고 개탄했다(12월 6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인터뷰);
- “한국 검찰은 이명박 후보의 走狗인가?”로 검찰을 猛攻했다(12월 7일 PBC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인터뷰).
22.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 것”과 같았던 BBK검찰의 ‘수사’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12월 6일자 文化日報는 “‘BBK수사 믿음 안가’ 56.9%”를 보도했다. 동 보도는 12월 5일 ‘수사’ 결과 발표 직후인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조사된 반응으로 그 내용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유일하게 ‘믿음이 간다’(49.7%)는 응답이 ‘안 간다’(46.2%)보다 높았다. 연령/학력별로는 30대가 74.7% 대학재학 이상이 62.8% 학생의 74.4%’가 BBK‘수사’에 각각 不信을 나타냈다.
포털사이트 ‘야후코리아’/‘동서리서치’의 공동조사로는 “‘BBK, 아직 남은 의혹이 있는 것 같다’ 64.5%”의 반응을 보였다.
오늘날 권력의 칼로 못 막는 인터넷 풍자 방송 ‘나꼼수’를 듣는 방청자의 그 압도적 다수는 4년 전의 그 황당무계한 BBK수사를 不信한 사람들이다.
23. 나는 글이나 말로 BBK검찰을 규탄 한 것만이 아니고 12월 19일의 決戰을 향해 남은 2週 동안 한국의 ‘保守우파’가 利害관계를 초월해 단결하도록 내 나름대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BBK검찰의 ‘수사 발표 전날 12월 4일 저녁에 李회창의 최측근에게 “보수우파의 대동단결을 위해 朴근혜를 설득하도록 권고하면서 그것에 실패하면 결국 - 朴근혜의 정치생명도 끝나 - 대한민국의 正統애국세력이 ‘共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그보다 9일 전인 11월 26일 朴근혜에게 편지로 - “진실로 가는 것만이 正道이고…위기에 처한 나라를 쿠데타가 아닌 민주적 방법으로 구하기 위한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릴 때이다”고 강조하며 - ‘보수우파’의 제휴를 호소했다. 그러나 내가 그 뒤에 간접적으로 들은 그녀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24. 나는 BBK검찰이 - 그 입맛대로 써서 12월 5일 발표한 그 ‘수사’小說로 MB의 대선 가도에 놓인 치명적 장애를 제거하며 - MB의 지지율을 固着시킨 닷새 동안 한국의 현실적 限界를 뼈저리게 切感했다.
MB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BBK수사 발표 직후인 12월 6일 현재(’한국갤럽‘) 43.9%로 - 12월 1일 현재의 39.2%에서 4.7% 상승해 - 12월 12일 현재 45.4%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李회창은 12월 3일 현재의 19.0%(중앙일보) 이상을 넘지 못하고 12월 12일 현재 13.6%(상기 한국갤럽)로 내려갔다.
鄭동영은 12월 3일 현재의 15.0%(중앙일보)에서 12월 12일 현재 17.5%(한국갤럽)까지 오르는데 그쳤다.
25. 나는 BBK검찰의 ‘수사’ 발표 때 그 입술에 묻었던 그 징그러운 타액(唾液)을 생생히 연상하며 - 1948년의 건국과 동시에 문맹률 근 80%에다 초근목피로 허덕이던 한국이 法治의 뿌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도입한 그 1인1표 민주주의(one-man, one-vote democracy)가 가야할 먼 길이 머리에 떠올라 - 특히 아래 세 가지에 관한 깊은 想念에 잠겼다:
- 朴正熙의 개발독재로 절대빈곤에서 벼락 같이 해방된 한국의 다수 民草가 - 4.19혁명의 영혼을 비웃으며 - 살찐 돼지(fat pigs)처럼 正義와 不義를 분간 못하고 황금만능을 신봉하며 경제대통령의 헛구호에 속아 넘어 가는 그 卑怯과 우매(folly);
- 한국의 職業정치가 ‘全部 아니면 全無(all or nothing)’밖에 모르는 固執不通 때문에 - 내가 몸소 체험한 國會制정부(parliamentary system of government-소위 내각제政府)국가인 독일/영국/싱가포르/오스트리아/일본 등의 정치 현장 특히 독일/오스트리아式과 영국式 연립정부(a coalition government)처럼 권력의 몫을 줄일 각오로 - 거국적 反부정선거 연대를 형성할 지혜와 용기를 못 내는 그 무능(incompetence);
- 한국의 소위 ‘朝中東’ 등 언론재벌이 부리는 ‘所有[자본]’의 횡포에 눌려 재벌이 원하는 대로 한결같이 BBK‘수사’에 歡聲(환성)을 올리며 일제히 권력의 走狗로 ‘편집의 自由’를 포기하는 職業언론의 추태와 그로 인해 사라지는 자유언론(a free press)의 悲運.
나는 또한 민주주의의 선행조건인 法治가 그 아득한 옛날 1215년 영국에서 王과 貴族 간의 싸움으로 결판 낸 마그나카르타(Magna Charta)로 시작한 것과 民主主義가 교양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groups of educated and propertied people)의 혁명적 지혜와 勇氣로 발전되어 온 역사를 무뜩 되새겼다.
나는 佛敎의 계율과 儒敎의 인륜 등 도덕률을 중시했던 祖上의 유산과 전통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한국의 벼락부자들(nouveau riche)과 권력狂들은 물론 발음기호에 불과한 한글의 전용으로 ‘역사’를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향락과 肉感的 쾌락 위주로 문명세계와 등지는 한국의 신세대가 ‘民主化를 완성했다’고 착각하며 허상의 祭物이 되고 있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26. 나는 비장한 決斷을 내리기 전날인 12월 9일 李회창과의 마지막 통화(12시 13분-15분 24초 동안)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웬만한 것은 비타민에 불과하다…극약 처방으로 나가야 국면을 전환할 수 있다…鄭동영이 오늘 중으로 오후 4시 광화문 집회에서 도곡동 ‘뇌관’을 터뜨린다고 하니 그 직후부터 그를 따라가야 한다…鄭이 못하면 오늘 저녁까지 ‘昌’이 해야 한다.”
27. 나는 한국의 ‘權主’로 평소 다변한 盧무현이 나흘 동안 BBK‘수사’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함구하고 있는 것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2월 9일 밤 청와대로부터 MB의 BBK거짓말을 볼모로 잡은 거대한 정치음모의 惡物이 - ’盧明博‘의 이름을 목에 걸고 - 수면 위에 떠올랐다.
인터넷 ‘한겨레’는 鄭동영이 12월 9일 BBK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견해를 물은 데 대하여 - “청와대는 검찰 수사에 관여할 의사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청와대 내부에선 鄭동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 12월 9일 오후 8시 7분(22시 35분 수정) 청와대의 첫 반응을 보도했다.
동 ‘한겨레’ 보도는 - “李明博 후보 쪽에서 지난 10월 말 ‘선거에서 중립만 지키면 퇴임 이후를 보장할 테니 만나자’고 文재인 비서실장과의 만남을 요구했다”고 - 2007대선에 決定打를 내기 위한 陰謀로 기획된 이른바 <‘노무현 정부-이명박 후보 빅딜설’>을 핵심으로 담았다.
동 보도로 인터넷 세상에서는 ‘盧무현과 손잡은 李명박을 뽑아봐야 정권교체는 멀 것 같다’는 소리가 커졌다. 한 인터넷 언론은 이미 나흘 전 BBK수사 발표 직후에 - “盧무현의 측근 K대 출신 S씨와 李명박의 측근 J의원이 12월 2일 긴급회동을 갖고 BBK에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 ‘盧明博’을 유령처럼 띄웠다가 삭제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것을 따라 여기저기로 지칠 줄 모르고 배회하며 BBK수사’와 ‘햇볕家’의 흉계를 드러낸 것이 ‘盧明博’이다.
12월 10일 신문지 ‘한겨레’에 뜬 ‘盧明博’을 인터넷 언론이 ‘특보’로 전파하자 청와대는 그것을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으나 ‘盧明博’에 초점을 맞춘 BBK수사에 대한 국민적 의혹은 일파만파로 전국의 방방곡곡에 퍼졌다.
28. 나는 12월 10일 현재(중앙일보 조사) 鄭동영의 지지율 16.8%와 李회창의 지지율 16.3%가 - 하늘이 MB를 데려가지 않는 한 - MB의 지지율 43.6%를 따라잡을 가망이 없다고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를 택해야 했다.
나는 - 3주 전의 졸고에서 짧게나마 고백했던 나의 ‘正體’에다 ‘記錄하는 기계’로 그 명맥을 유지하는 직업外交官의 직업根性이 無我의 내 老年에 발동해 - 가만히 좌시할 수 없었다.
나는 BBK의 眞相이 영원히 땅속에 묻히게 될 가능성에 유의하며 ‘역사의 記錄’을 위해 - 공개적으로 BBK검찰의 對국민 ‘강간(强姦)’을 더 강도 높게 규탄하고 “익사(溺死)위험”에 처한 한국의 어린民主主義에 대한 경종을 더 크게 울릴 방법을 찾아 - 일말의 기여를 하기로 작심했다.
나는 역사적 국가인 한국(Korea as a historical nation)이 그 역사를 다루는 두 가지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하나는 한국이 - 歷史의 기록을 제대로 남기면 禍를 입는 전통 하에서 민감한 것을 소각하거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능력/체제를 못 갖춘 데에다 발음기호에 불과한 한글의 전용에 따라 역사를 잊어버리며 - 文化的 自殺길에 올라 있다는 事實이다.
그 다른 하나는 - 역사란 ‘바로 세우거나 거꾸로 뒤집을 수 없는’ 것 즉 과거에 생긴 사실(facts of the past as happened)일진대 - 한국에서 歷史를 ‘바로 잡는다’고 부리는 난리가 그 역사를 지워버리는 현상을 가리킨다.
29. 나는 金大中이 11월 23일 ‘戰爭’을 협박한 망언과 그 후 ‘北風’을 타고 BBK검찰이 “이명박 모두 무혐의”로 엄호하는 가운데 떠오른 惡物의 진원과 정체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그런 결론에 따라 12월 10일 저녁 - “李明博 후보의 청와대 입성이 성큼 다가왔다”고 예고하며 - ‘나의 비장한 판단과 각오’가 담긴 글(제목: “남북결탁 한 방에 날아갈 건가?”)을 ‘조갑제닷컴’에 올렸다. 그 글에서 인용· 발췌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한국의 정치檢察이 不正候補를 위한 12.19 不正選擧 예비음모에 가담했다;
- 한국의 2007년 대선은 결국 金정일이 날린 한 방[MB의 신변 위협과 그 철회]에 끝날 모양이다…한국의 어린民主主義가 불쌍하다. 화근의 으뜸은 북한의 核무기 보유이다;
- 거짓말을 해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나라…거짓말 경쟁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 소위 保守세력의 集團自殺이 눈앞에 선하다…金정일의 지령과 盧무현의 ‘깽판’에 굴복하여 그 쪽으로 투항한 한국 사이비保守의 최악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 소위 親北좌파가 改悛하고 회개하면 그 쪽에서 대권을 잡는 편이 차라리 낫다…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한 투쟁의 목표라도 잃지 않을 것이기에.
30. 나는 2007년 12월 11일 鄭東泳의 서대문구 홍은3동 소재 아파트로 가서 약 13년 반 만에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나는 12월 7일 오전 11시 38분 鄭동영 측에서 전화로 그를 위한 TV 찬조연설을 부탁해 왔으나 거절하면서 “모든 세력이 BBK수사의 무효와 反MB를 위해 단결하는 공동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12월 11일 오전 8시 6분 鄭동영 측에서 다시 부탁한 찬조 연설을 수락하고 그날 오전 (9시 45분-10시 5분) 20분 간 그의 자택에서 대화를 가졌다.
그날의 그 만남은 한국에 정치적 ‘極비상사태’가 없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했다. 나는 그가 (‘햇볕家’의 이단으로 ‘養父’/‘養兄’의 눈 밖에 나 있지만) ‘햇볕’의 使徒로 자처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그는 내가 ‘보수꼴통’으로 反‘햇볕’의 완강한 선봉에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그에게는 - BBK검찰의 犯法과 跛行을 방패로 - 한국의 법치와 그 어린民主主義를 무시하고 떠오른 ‘盧明博’이란 악물에 맞서 싸워야 할 급박한 순간에 서로의 공동투지를 다짐하기 위해 그날 그 만남이 필요했다.
그날의 둘은 내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거의 20분을 보냈다:
- 12월 6일 천명한 대로 BBK검찰의 ‘수사’ 無效를 위해 거국적 투쟁연대를 결성 한다;
- 反부패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비상사태’를 선포 한다;
- BBK검찰을 彈劾재판에 회부하는 동시에 BBK特檢을 강행 한다;
- 2007대선을 헌법 제68조/공직선거법 제34조에 따라 2008월 1월 14일로 연기 한다;
- 특검과 대선의 연기 없이 선출된 ‘대통령 이명박’을 인정하지 아니 한다;
- 아직 나이가 있기 때문에 <지난 10년간의 시행착오 특히 對北노선을 수정하며 방향을 전환해 새 출발하면>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차기에 성공할 수 있다;
- 앞으로의 투쟁목표는 反부정부패와 한국의 참(眞)민주화이어야 한다.
31. 나는 鄭동영의 요청에 따라 그와의 면담 후 바로 - 국회 본관 1층에서 전 국무총리 李해찬이 주재하는 국민대통합민주신당 BBK비상대책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 여의도에 갔다. 나는 거기에서 BBK수사의 무효를 위한 거국적 투쟁의 필요성을 ‘강의’하는데 30분(10:45-1115)을 보냈다.
나는 특히 BBK검찰의 수사 아닌 ‘수사’정치의 근원은 한국의 似而非민주주의(phoney democracy)와 지난 10년의 失政이라고 지적하면서 檢察權力의 ‘민주화’를 차기 정부(대통령과 국회)의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32. 나는 이틀 밤을 꼬박 새워 - 南北결탁과 BBK수사의 불법 및 대통령후보의 거짓말이 초래할 국가적 害毒에 초점을 맞춰 - 직접 쓴 연설문을 갖고 12월 13일 정오 전후 근 세 시간 걸린 나의 KBS TV 방송연설 錄畵(녹화)를 끝냈다.
그런데 그날 저녁 6시 44분부터 약 15분 동안 KBS TV로 전국에 방송된 나의 연설에는 내가 띄운 2007대선의 악물 ‘盧明博’ 부분이 ‘검열’에 걸려 귀신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33. 그러나 중앙일보의 조인스닷컴을 포함한 인터넷言論은 미리 배포된 나의 연설문을 입수해 - KBS TV 방영 전에 - ‘盧明博’ 부분의 요지를 보도했다. ‘검열’로 삭제된 ‘盧明博’에 관한 문제의 全文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북한은 한동안 李明博 후보를 욕하더니 지금은 조용합니다.
퇴임 후의 뒤탈을 무서워하는 盧武鉉 대통령은 李明博 후보와 모종의 黙契(묵계)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大選에 참견해 온 金大中 전 대통령은 지금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깐 BBK검찰의 ‘수사’ 발표로 ‘盧明博’이란 말이 항간에 돌고 있습니다.
즉 BBK검찰 발표는 盧武鉉과 李明博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검찰이 정치권력의 走狗가 되어 국민을 强姦했다고 말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2007년 12월 13일 나의 KBS TV 연설로 인해 <“신념보다 진실 택한 보수우파의 反逆”>이란 레이블이 나에게 붙는 것에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 일부 언론이 나를 지칭해 “檢, 국민 강간했다”/“李明博 당선되면 ‘거짓말 경쟁’ 치열해질 것” 등으로 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은 것을 보며 - 결국 ‘언젠가’ 진실이 규명되어 事必歸正이 될 것을 확신했다.
34. 그런데 그 ‘언젠가’가 너무나 뜻밖에 빨리 왔다. 나에게 ‘反逆’의 딱지가 붙은 지 불과 40시간 만인 12월 16일 BBK원자폭탄이 일요일 아침의 靜寂을 깨고 천지를 진동하며 터졌다.
2000년 10월 17일 광운대 강연에서 李明博 스스로가 - “저는 요즘 제가…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로 - BBK의 창업을 자랑한 그의 肉聲이 2007년 12월 16일의 원자폭탄에 맞아 까발려졌다.
그날 CD(동영상)로 再生된 ‘그것’보다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한 ‘거짓말’은 한반도의 역사상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처럼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면 그런 폭로는 불가능했다.
35. 나는 12월 16일 BBK原爆이 터진 직후에 쓴 졸고(제목: ”이명박 후보는 有故다”)를 ‘조갑제닷컴’에 올렸다. 나의 12월 13일 KBS TV 연설 중 ‘검열’로 삭제된 ‘盧明博’을 거의 그대로 재생시킨 그 글에 포함된 要點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거나 미결이다.
그러나 그 與否가 거의 不遠간에 결말 날 것이고 오랫동안 遲遲不進할 것도 없지는 않다. 그 글에서 인용· 발췌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李明博 후보가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절대로 政權交替가 아니다;
- 李明博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그 결과를 認定받지 못할 것이다;
- ‘盧明博’은 盧무현과 李明博의 작품이다;
- 朴槿惠는 거짓과 부패에 맞서는 투쟁[眞實]이 이념이나 사상을 위한 투쟁[信念]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끝장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 한국에서 거짓말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不正을 방관하는 共犯이 되지 말아야 한다.
36. BBK원자폭탄은 가히 대통령 盧武鉉을 안절부절 당황하게 만드는 威力을 발휘했다. 높은 하늘에 있지 않고 땅 위의 한 요새로 時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한국의 權府 청와대가 ‘原爆’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BBK수사에 침묵을 지켜 온 盧무현은 12월 16일 오후 3~4시께 법무장관 鄭성진으로부터 그날 오전에 터진 ’原爆’의 충격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그에게 - “검찰이 열심히 수사했지만 국민적 의혹 해소와 검찰의 신뢰 회복을 위해 再수사를 위한 지휘권 발동을 검토하라”고 - 지시했다.
청와대의 거짓말로 BBK거짓말이 또 하나 더 불어났다. 청와대 대변인은 ‘盧明博’의 실체가 처음으로 수면 위에 떠올랐던 불과 일주일 전에 - “청와대는 검찰 수사에 관여할 의사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고 - 단언했기 때문이다.
법무장관의 소위 ‘수사지휘권’을 둘러싼 분규로 검찰총장이 물러난 2년 전의 동국대학교 姜정구 에피소드를 잊었을 리 없는 盧무현의 ‘再수사 검토 지시’는 능히 ‘盧明博’의 운명에 대한 盧무현의 깊은 근심을 표출했을 만하다. 청와대 관계자는 - “이 상황에서도 입장 표명 없이 그대로 넘어가면 ‘盧明博’이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 盧무현의 우려를 표시했다.
법무장관의 소위 ‘수사지휘권’은 민주화가 안 된 帝王的 공화국에 잔존하는 王朝시대의 유물이다. 先進민주국가에는 그런 것이 없다. 범죄搜査權이 법무장관>검찰총장>검사>경찰의 ’位階구조’ 하에서 결국 帝王的 대통령의 권한에 귀속되는 나라는 참(眞)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멀쩡하게 BBK‘수사’에 喜喜樂樂하다가 큰 낭패를 당할 것 같은 순간에 갑자기 그 자신의 ‘지휘권’을 발동하려던 한국의 ‘權主’ 盧무현은 - 탄핵소추/천도위헌/양극화解消/동북아‘균형자’ 등의 갖가지 파란과 불찰을 자아내다가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려던 ‘盧明博’이 들통 날 순간이었다.
37. 한나라당 대변인 羅경원은 BBK原爆의 落塵(낙진)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하늘을 뒤덮고 있던 그 무시무시한 渦中(와중)에 12월 17일 악지의 극치 같은 추태를 부렸다. 그녀는 - ”CD[동영상]에는 ‘BBK를 설립했다’고만 언급돼 있지 ‘내가’ 설립하였다고 돼 있지 않다…이것[BBK]을 ‘내[MB]가 설립했다’라고 광고하는 것은 명백히 허위의 사실”이라고 가당찮게 떼를 썼다.
李明博의 광운대 강연 중 BBK에 언급한 말의 서두에 - “저는 요즘 제가”로 - 분명한 主語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主語가 없었던 것처럼 꾸민 새빨간 거짓말로 - ‘주어 羅경원’의 별명을 얻을 만큼 - 냉소의 대상이 된 판사 출신 羅경원은 가엽기 그지없었다.
나의 12월 13일 KBS TV 연설에 대하여 한나라당이 -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사법당국 고발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 위협한 보도가 나온 지 나흘 만에 다시 “허위의 사실”을 傳家의 寶刀로 쓴 대변인 羅경원은 2011년 10월 26일 서울시장 補選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셔야했다.
38. 국회는 12월 17일 오후 3시 재적 의원 298명 중 160명이 투표해 전원 찬성으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李明博의 株價 조작 등 犯罪혐의의 진상 규명을 위한 特別檢事의 임명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李明博특검법 또는 BBK특검법으로 불리는 그것의 핵심 수사 대상은 다음과 같다:
- MB가 金경준과 함께 BBK를 통해 ‘옵셔널벤처스‘ 주가를 조작하고 공금을 횡령했는지의 여부;
- 도곡동 땅 매각대금과 (주)다스 지분 등 930억 원대 재산을 누락 신고해 선거법 등을 위반했다는 의혹;
- 상암동 DMC 특혜분양 의혹;
- 자녀 위장 취업에 따른 세금포탈 의혹;
- 검찰이 金경준을 회유/협박했다는 의혹.
39. 나는 鄭동영 캠프의 요청에 따라 12월 17일 저녁 두 번째로 KBS TV에 나타나 BBK검찰의 對국민 强姦을 다시 규탄하면서 正直한 指導者를 선출해야만 나라가 온전할 수 있다고 力說했다.
그 연설의 경우에도 - 12월 13일의 내 KBS TV연설과 마찬가지로 - 내가 盧무현과 李명박 간의 묵계를 의미하는 ‘盧明博’에 언급하며 金大中의 11월 23일 ‘戰爭’협박대로라면 “이명박의 당선은 戰爭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부분이 실제 방송에서 삭제되었다.
KBS TV가 12월 13일과 17일 두 번에 걸쳐 실제로 방송한 나의 연설에서 인용· 발췌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한국검찰이 일본을 따라가기만 했어도 李明博 후보를 체포했다;
- BBK검찰은 국민을 强姦했고 부정선거 예비음모에 연루되어 있다;
- 李明博에게 구제불능의 有故가 생겼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죽은 사람이다;
- 기독교 신자인 李明博에게 마지막 양심이 있다면 그는 하느님께 고해하고 물러나야한다;
- 李明博의 탈세/위장/위조/부정선거와 거짓말 등의 짝퉁 시리즈는 지울 수 없는 역사가 되었고 세계 외교가의 희롱거리가 되어 있다;
- 李明博이 대통령 되면 거국적 보이콧(boycott)가 불가피할 것이다;
- ‘이명박特檢’에서 무죄가 되더라도 온전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다;
- 언론재벌과 국가권력이 노골적으로 결탁하고 있다;
- 앞으로 거짓말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정치가의 가장 큰 죄악은 거짓말이다...선진세계에서 정치가는 단 한 번의 거짓말로도 평생 재기할 수 없다;
- ‘經濟대통령‘은 거짓말이다;
- 거짓말의 습관이 든 자가 대통령 되면 安保도 안 되고 경제도 안 된다;
-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에 눈을 가리고 평화를 구가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 한국은 그 대들보에 불이 나 있거나 익사 위험에 처한 경우이므로 ‘햇볕정책’을 포함한 대외관계를 거들떠볼 여지가 없는 비상사태 하에서 모든 것을 제쳐놓고 어린民主主義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한 긴급구난 조치를 강구해야한다;
- 거짓과 腐敗에 맞서는 鬪爭은 사상과 理念을 위한 투쟁보다 중요하다…신념보다 중요한 眞實은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진실 그 자체다;
- 國家최고지도자의 최고덕목은 正直이다.
40. 나는 한국의 대선 史上 - 최저투표율 62.9%로 - 최고 근 530만 票差로 압승한 李明博의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犯罪혐의로 특검에 회부되어 있다는 사실과 特檢에서 설사 無罪가 되더라도 ‘盧明博’이란 악물을 뽑은 詐欺劇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점 특표자 鄭동영과 그 다음인 李회창이 대선 직후 그 결과를 각각 “겸허히” 또는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경솔하게 수락한 것에 실망했다. 그 둘은 - 비록 나라의 독립이나 전쟁이나 혁명에 가담한 적이 없더라도 - 死生觀이 분명하고 正義感이 투철한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더라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前者는 BBK‘수사’의 無效를 위한 鬪志를 포기했고 後者는 한국 최고재판소의 재판관을 역임한 그의 前歷을 배신하며 詐欺에 굴복했다.
41. 나는 2007大選 바로 그 다음 날인 12월 20일 오전 평화방송(PBC)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 “당연히 이명박 씨에게 有故가 생겼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취임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고 - 2007대선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PBC와 일부 인터넷言論이 보도한 동 인터뷰에서 인용· 발췌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 李明博의 거짓말은 전 세계에 폭로되었다;
- 국가검찰이 不正選擧를 방조했다;
- 2007대선은 한국의 어린민주주의가 ‘햇볕정책’의 독성에 취하고 盧무현의 失政에 흥분한 나머지 意識을 상실한 결과이다;
- 선거라는 게 반드시 민주주의가 아니다…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할 때나 스탈린 시대나 김일성/김정일 하에서는 거의 99%~100%의 찬성이 나온다;
- 민주주의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制度가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司法의 獨立이다;
- 특검에 회부돼 정치적으로 죽은 이명박은 대통령에 취임할 자격 없다.
42. 나는 2007大選 이틀 후인 12월 21일 조갑제닷컴에 올린 글(제목: 11,492,389명의 유권자 vs. 한 명의 특별검사)에서 盧무현이 ‘이명박特檢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 글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盧무현의 BBK특검법 拒否는 ‘盧明博’이란 오명을 씻을 수 없는 근거가 된다;
- 2007大選은 BBK검찰이 방조한 不正한 방법으로 不正한 후보를 뽑은 不正選擧였다;
- 李明博 후보가 근 1,149萬 표로 당선된 것과 特檢에 회부된 것은 별개문제다:
- 盧무현의 약속에 따라 특검이 李明博의 犯罪혐의를 확정하면 한국에서 거짓말을 추방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어 盧무현은 그의 失政을 덮고 남아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英雄이 될 수 있다.
43. 나는 李明博의 득표가 2002년의 李회창에 비해 - 약 300만 명의 유권자 증가에도 불구하고 - 겨우 4만 9천표를 더 얻는데 불과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표면상의 압도가 - 2007대선 이후의 정국에 무조건 호재로 작용할 수 없기에 - 不正選擧로 잡은 권력을 당연히 正當化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 단적인 이유는 - BBK원자폭탄의 위력이 끈질기게 발휘할 불가항력적 後果와 더불어 - ’盧明博’으로 일궈낸 ‘정권교체 아닌 政權延長’을 둘러싼 ‘햇볕’과 ‘反햇볕’ 간의 잠재적 권력분규가 필연적으로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44. 아니나 다를까 2008년 초 ‘盧明博’의 실체로 보인 해괴망측한 反逆의 行脚이 수면 위에 나타났다.
남한의 스파이 우두머리 金만복은 2007 대선 하루 전인 12월 18일 평양에서 北의 對南총책 金양건을 만나 남한의 大選 결과 예측과 對北정책 전망을 미리 主敵에게 보고하는 예의를 갖추었다. 2008년 1월 10일자 중앙일보는 金만복이 - “내일(12월 19일) 선거에서 한나라당 李明博 후보 당선이 확실시 된다…(李明博 정부가) 남한 내 보수층을 잘 설득할 수 있어 현 정부보다 더 과감한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고 - 金양건에게 말한 것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盧明博’의 정체가 선명히 드러났다. 盧무현의 사전 承認 없이 그런 뻔뻔스러운 間諜行爲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햇볕’과 反‘햇볕‘ 간의 잠재적 암투가 버젓하게 감행되었다. 大選이 다가오면 으레 그 존재이유를 과시해 온 한국의 파렴치한 情報機關은 - 한국의 독단적 수사기관인 檢察의 ‘수사’政治에 못 이기지 않을 세라 - 그 밥그릇을 노리며 그 위상을 과시한 정보政治로 그 본분을 포기했다.
나는 2008년 1월 11일 오전 평화방송(PBC)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 ‘북한이 가장 두려워해야할 남한의 정보기관이 지난 10년 사이에 솔선해서 북한에 갖다 바치는 꼴을 보여줬고 ‘평양-盧무현-李명박’의 삼각 묵계가 노골적으로 폭로됐다’고 - 남북 간의 2007 大選 전날 접촉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45. 盧무현은 李明博특검의 수사 발표 사흘 전 그리고 그의 퇴임 일주일을 남겨 둔 2008년 2월 18일 청와대에서 大統領 당선자 李明博을 만났다. 그런 상황 하에서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예사롭지 않은 의혹을 자아냈다. 그 만남은 - 2월 17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서울의 옛 유곽 삼청각에서 BBK특검팀과 BBK범죄혐의자 李明博 간의 만남이 있었던 그다음 날로 - 가당찮은 ‘만찬調査‘에 대한 의혹을 부풀릴 수밖에 없었다. 李명박의 BBK범죄혐의에다 盧무현이 三星그룹으로부터 당선 祝賀金을 받았다는 의혹이 ‘三星특검’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그 둘은 그날 그 만남에서 ‘盧明博’에 의지하여 각자에 쏠린 의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相助의 필요성을 다짐해야 했던 것 같다.
46. 나는 내가 2007년 11월 22일 깠던 BBK명함 때문에 2008년 2월 13일과 14일 두 차례 나의 舊友/1997大選후보/변호사 朴찬종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BBK특검보 文XX의 조사를 받았다. 그는 두 번째 조사에서 - 내가 2001년 5월 30일 오후 직접 李明博으로부터 그의 BBK명함을 받은 “날짜가 이명박이 BBK사업을 그만 둔 뒤”이었기에 그 명함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 나를 몰아붙이려 했다.
나는 약간의 고성으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항했다: “당신은 내 수첩기록에 근거한 내 말을 의심하는가? 한나라당의 羅경원과 朴형준이 내가 명함을 집어 갔다느니 위조했다느니 한 말을 믿는가? 나는 평생 위장전입/위장취업/탈세 등의 기록이 없는 사람인데 반하여 이명박 씨는 작년에 대선으로 가면서 그의 불미한 신상이 공개된 사람이다. 일방적으로 한 쪽의 말을 의심하고 무조건 다른 쪽의 말을 믿으면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없다.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으려 하는가?”
그는 나에게 “대사님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상기 문답 記錄을 어김없이 남긴 이유는 BBK특검의 부당한 言論플레이 때문이었다. 머니투데이(http://news.moneytoday.co.kr)가 2008년 2월 21일 14시 32분 - “‘BBK명함’ 주소지가 허점이었다’는 제목으로…李 전 대사 진술에 의문이 든다는 게 특검팀의 판단이다…李 당선인의 진술처럼 사용되지 않았던 명함인 것으로 최종 판단했다”고 - 나를 겨냥해 中傷謀略의 냄새가 짙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내가 BBK특검에서 2008년 2월 13일 받은 조사에 관하여 ‘한겨레’는 - “(내가) 숭례문 화재사건을 애도하며[하나] ‘세상에 눈에 안 보이는 가치도 발견하고 보호하고 신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正直이다. 내가 시민으로서 거짓말하는 것이 싫어서 李明博 씨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 꼬집었음을 보도했다.
47. BBK특별검사 鄭호영은 2월 21일 李明博에 대한 범죄혐의를 모두 풀어주었다. BBK검찰과 마찬가지로 BBK를 만들었다는 ‘犯人의 자백(동영상․ 언론인터뷰․ 명함 등)’을 무시한 채 犯人을 철면피하게 감싸줬고 수사의 기본 중 기본인 범죄혐의자 내지 주요 관련자 간의 對質訊問(대질신문)을 생략했다.
검찰의 본분은 罪에 대한 罰의 부과이다.
그러나 BBK검찰과 BBK특검은 한국의 어린民主主義를 깔보고 罪에 대한 罰의 모면에 능통한 不法과 파행을 감행하며 권력의 走狗로 자처했다.
先進민주주의는 반드시 그런 불법과 파행에 대한 죄값을 묻는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늘 어린 것으로 남아 있지 않을진댄 언젠가는 BBK검찰과 BBK특검을 문책하는 날이 꼭 온다. 반드시 BBK 不正의 주범과 共犯을 직접 罰하지 않더라도 그 再發 방지를 위한 방책을 강구하는 때가 오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權力者의 면책특권은 무한한 것이 아니니깐…
48. 나는 BBK특검이 BBK검찰과 한 통속이 되어 수사 아닌 그 ‘수사’作文을 발표하기 하루 前인 2월 20일 저녁에 - “특검팀에게 과연 양심과 양식이 쥐꼬리만큼이라도 있는 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 BBK특검을 비판하기 위한 꽤 긴 글(제목: “李長春 대사의 특검 수사 비판”)을 조갑제닷컴에 올렸다.
나는 그 글에서 한국의 소위 民主化가 짝퉁이기에 BBK검찰과 BBK특검이 권력의 횡포와 오만을 무엄하게 부리며 정치권력의 走狗가 되었다고 규탄한 동시에 한국의 어린民主主義가 거짓말을 추방하며 가야할 머나먼 가시밭길을 경고했다.
나는 또한 BBK특검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 당일 2월 21일 저녁(20:21-20:30) 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 BBK특검의 ‘수사’ 발표는 BBK드라마의 幕을 하나 더 추가했다;
- 삼청각 ‘만찬調査’는 그 자체가 BBK특검의 성적표다;
- BBK특검은 - “BBK를 만들었다”는 이명박의 肉聲 자백을 듣고도 그 자백이 ‘과장광고였다’는 식의 옷을 억지로 입혀 - 명명백백한 거짓말을 했다;
- “BBK를 만들었다”는 이명박의 肉聲 自白/언론인터뷰/명함이 그의 거짓말의 ‘직접증거가 안 된다’고 말하는 BBK특검은 <눈 감기고 아옹>했다;
- 2007년 12월 16일[17일로 오발했음]의 동영상은 영원한 眞實로 남을 것이다.
49. 나는 지난 4년 동안 ‘2007 大選은 ‘盧明博’이란 악물을 뽑는 詐欺劇이었다‘는 것을 간간이 되새겨 왔다. 나는 1년 남짓 남은 2012대선을 바라보는 2011년 12월 현재 한국의 그 형태와 모습(configuration and gestalt)이 4년 전에 비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大選 엿새 전에 鄭東泳 ‘지지’로 ‘보수’를 ‘背反’해야 했나?
나는 <‘햇볕’의 시조 金대중의 ‘養子’인 盧무현이 희대의 아버지反逆을 물려받아 감행한 “깽판”失政을 기화로 상승하는 李明博(MB)의 지지율에 압도된 ‘김대중父子‘가 BBK거짓말을 볼모로 MB를 ‘養孫’/‘조카‘로 입양해 MB의 당선을 보장해 주는 대신 MB는 ‘햇볕家’의 安危를 보장해 주는 ‘代償(quid pro quo)’딜에 따라 - MB가 한국의 ‘保守’로 위장해 무더기票를 따내는 주연을 맡는 일방 盧武鉉은 北의 金正日이 ‘햇볕’의 계승을 약속한 MB를 受容토록 무마하며 ‘국가폭력’의 화신인 한국檢察로 하여금 MB의 ‘무혐의“를 선언토록 주선하는 연출을 맡아 공연되는 惡物드라마 ’盧明博‘을 규탄하며 歷史의 기록에 남기기 위하여> 鄭東泳 ’지지‘ 대가로 KBS TV에 나타났다. 나는 그렇게 한국의 ’保守우파를 ’背反‘해야 했다. 나는 앞으로도 거짓에 대항하고 眞實의 편이 되기 위해 그런 ’배반‘을 계속해야한다.
50. BBK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며 그 핵심은 거짓말이다.
BBK는 거짓에 물든 장사꾼의 허망한 不法과 弄奸(농간)이 국가권력의 횡포와 오만을 증폭시킨 희대의 에피소드가 되면서 그 擴散에 확산을 거듭하는 統制불능의 괴물로 변했다.
BBK에 붙거나 붙을 소송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 姓인 『BBK투자자문주식회사 會長/代表理事 李明博』에 다채로운 이름(given name)이 다양하게 붙어 온 세상을 훨훨 날아다닌다: BBK Capital Partners Ltd.; LK eBank Ltd.; eBank Securities Co.; BBK늪; BBK詐欺/BBK의혹/BBK不正; BBK명함; BBK검찰; BBK동영상; BBK소총; BBK원자폭탄; BBK특검; BBK晩餐조사; BBK송금; BBK불똥; BBK도깨비; BBK휴화산; BBK權府; BBK戰士; BBK드라마; BBK에리카金(눈 찢어진 아이); BBK_Sniper 등…
萬惡의 근원은 거짓말이다. 거짓을 방치· 방관하면 萬安한 세상을 기대할 수 없고 불행해진다.
백일하에 국민을 ‘강간’한 BBK檢察과 더불어 삼청각 ‘만찬調査’로 국민을 능욕한 BBK특검이 지핀 불똥은 - 지난 4년 동안 특히 保守言論의 對국민사기극 연출과 自由言論의 실종 속에서 美國쇠고기/천안함/연평도/에너지外交 등의 거짓말에 붙더니 - 전남 광주發 세계역사상 최대/최악의 권력형 금융詐欺를 유발하며 FTA허풍과 괴담의 불씨가 되었다. 권력의 ‘消防車’로 진화할 수 없는 그 괴력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不可視光線’처럼 기묘하게 한국을 어지럽히고 있다.
51. BBK불똥은 地下로부터 ‘600萬 民草’의 허기를 ‘경이적으로(phenomenally)’ 채우는 ‘糧食’에 붙어 권력이 결코 박멸할 수 없는 풍자와 냉소로 국민적 不信을 나르는 ’나꼼수‘에 점화되었다.
‘나꼼수’가 BBK로부터 공급받는 ‘火力’은 대단하다. 그 잠재적 主力은 권력형 不正腐敗를 감행한 악질로 ‘나꼼수’의 안테나에 걸려 있는 지하의 적잖은 妖物들이다. 마피아를 쫄게 하는 10兆 원대의 금융사기에 연루되어 재판에 걸린 검사 출신의 BBK戰士 殷진수와 재벌언론 출신으로 李明博의 고급 비서를 지낸 金두우와 申재민 등의 범행은 이미 노출되었다. 그러므로 ‘나꼼수’가 노리고 있는 표적은 李明博의 권속들로 법망을 피해 있는 다른 惡種들이다.
‘나꼼수’는 - 국민의 血稅로 목숨을 유지하는 검찰 등의 국가公僕이 罪와 罰을 몰염치하게 비호하며 면제해 주는 까닭에 - BBK시대의 治外法權的 ‘영웅’이 되었다. 혈세 아닌 ‘寄附’로 혁혁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나꼼수‘는 위대하다.
그러나 ‘나꼼수’는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나꼼수’는 맘대로 ‘從北악당’에 붙을 수 있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아무도 BBK가 분만한 ‘나꼼수’의 罪와 罰을 다스릴 수 없다는 점에서 ‘나꼼수’는 위험하다.
52. ‘햇볕’反逆과 BBK거짓말의 핏줄을 타고난 ‘盧明博’은 누구인가?
‘그’는 퇴임 후 고작 15개월 더 살다 自殺한 ‘盧’의 사망보험 아니었나? - ‘盧’는 그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저승으로 갔기에 그에 대한 搜査종결과 그의 兄에 대한 사면의 ‘보험금’을 타 낼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번 그 큰돈에 億萬金과 권력과 명예를 더 보태 자손만대의 榮華를 누리려던 ‘明博’의 맹랑한 과욕 아니었나? - ‘明博’은 ‘햇볕家’의 자손답게 그의 아저씨 유언을 경시하고 아저씨께 國民葬의 성대한 예우를 베풀었고 희대의 반역자 그의 할아버지께 國葬을 치러 순국열사/장병이 묻힌 국립묘지에 매장했으며 ‘김대중父子’가 남긴 유업을 거의 전부 소중히 여겨 섬기는 가운데 그의 후계가 그의 ‘햇볕家’에서 나오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안 되지만 자주 반복된다. 유난히 덥던 지난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2012 대선을 향한 惡性 거짓말과 醜態가 난무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귀추가 예사롭지 않을 전망이다.
53. 어느 세상에나 거짓말은 없지 않고 그 퇴치가 쉽지 않다. 그러나 先進世界는 그렇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사꾼은 거짓말로 罰을 받고 또 받으며 돈을 버는 것이 例事이나 선진세계의 公職者는 한마디의 거짓말로 공직의 끝장을 보거나 앞길이 막힌다.
나는 만고의 眞理 - 정치에서는 한동안 반박되지 않는 거짓말이 眞實처럼 통하고 진실 같이 들리는 거짓말이 가짜로 보이는 眞實을 이기나 그런 거짓말은 미구에 들통 나 패가망신을 부른다‘고 가르치는 - 眞理를 신봉한다.
거짓말의 역사적 뿌리가 깊은 한국이 그 ‘거짓말 中毒’을 치유하지 못하면 그 선진세계 진입이 불가능할 것은 명백하다.
그렇게 자신하는 ‘者’는 누구인가? - 그 ‘者’는 스스로에게 가혹한 인간(a man of my own hatchet man)으로 한국적 ‘右’도 아니고 ‘左’도 아니며 ‘保守’도 아니고 ‘進步’도 아닌 ‘者’이며 ‘右’를 ‘배반’했고 ‘左’에 붙을 수 없기에 아무데도 설 땅이 없는 ‘者’이다.
그런 그 ‘者’는 국록을 오래 먹은 ‘罪‘로 국가 아닌 그 스스로에게 공개적으로 ‘背反’을 감행한 爲人 아닌가? - 그 ‘者’는 ‘역사를 쓰는 것은 역사를 만드는 것(writing history is making history)이고 “文은 武[‘와 金’]보다 더 위대한 것(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and the gold])”이라고 자신한다.
그 ‘者’는 거짓에 대항하고 眞實의 편이 되기 위한 ‘背反’을 계속하며 한국의 역사와 장래를 위해 계속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매브릭(maverick) 서울市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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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1940년 경남 마산市에서 출생 · 4.19‘革命공로자’ ·1961년 高等考試행정과[外交] 합격 ·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대학원 외교학과 수료 · 空軍중위 예편 · 獨逸/월남/英國/제네바/뉴욕에서 근무 · 外務部 재외국민과장/條約課長/국제기구조약국장/외교정책기획실장 · 대통령 政務[외교안보]비서관 · 駐유엔대표부 차석대표 · 駐싱가포르/오스트리아/IAEA/필리핀大使 · 외무부大使 · 2000년 외교통상부 사직 · 경희대학교/명지대학교 초빙교수[독일Bonn大學 대학원 修學 · Harvard대학 CFIA 펠로우 · 게이오(慶應義塾)대학 방문교수]· 자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