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하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열여덟 살 소년은 처음으로 ‘큰어머니’와 이복형들이 사는 ‘아버지의 집’에 발길을 들였다. 익숙한 얼굴이라고는 아버지의 운전기사와 비서가 전부였다. 유일하게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장소인 아버지의 머리맡 의자를 지켰다. 아버지는 사흘 후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나자 큰형이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이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는 데는 그 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음 달 퇴임하는 박용만(66)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첫 책으로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마음산책)를 냈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재벌가 일원으로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인생의 ‘그늘’을 진솔하게 담았다.
18일 서울 두산타워 33층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누군가의 삶에나 양지와 그늘이 있다. 내 삶에서는 ‘그늘’이 나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를 곯아본 적은 없지만 지금 누리는 안정이 아버지와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항상 있었다. 박 회장은 “공부를 잘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훌륭한 사람’은 멀리 있었지만 ‘공부’는 가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6남1녀 중 다섯째 아들. 아들들이 돌아가며 그룹 총수직을 맡는 전통에 따라 형들에 이어 2012년 두산그룹 회장직을 맡았고 2016년 조카 박정원 회장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으로 활발히 대중과 교류한다. 2013년엔 임원들과 냉면집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지갑을 잊고 가 외상 긋고 나온 이야기를 트위터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회장은 “자칫 말실수라도 하면 기업 이미지가 망가질 수도 있는데 왜 그런 리스크를 지며 소셜 미디어를 하냐?” 묻자 “소통하는 게 즐거워 서다. 그렇다고 해서 ‘관종(병적으로 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다. 재미있는 일화를 남들과 공유해 함께 웃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소탈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지만 2015년 두산그룹이 신입사원에게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면서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그는 “정말 죽음과 같이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게 된 과정을 알았든 몰랐든 회장인 내게 포괄적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책에 썼다.
집무실 화장실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박 회장은 고등학교 때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고, 한때 사진기자를 꿈꾸기도 했다. 요리도 즐겨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독거노인 등에게 음식 만들어 나르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예술적 끼를 타고났는데 기업인이 적성에 맞느냐”고 묻자 “그렇게 잘 맞지는 않는다. 나는 정체된 거 싫어한다. 똑같은 걸 계속하려면 죽겠다. 그런데 사업은 새로운 것만 너무 벌이면 리스크가 생긴다.”고 했다.
7년 넘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맡으면서 “사업하는 사람은 가급적이면 공직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CEO를 오래 하다 보면 생산성과 효율을 먼저 머리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공적인 이해란 그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나야 준공직에 있었지만 내가 7년간 겪은 시행착오를 어떤 공직이 기다려주겠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