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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57
2월5일[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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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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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48FgHHJ9k4
[서울대교구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주교좌명동대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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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공생활 정절기의 모습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활기찼는지에 대해 마르코 복음사가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발길 닿는 곳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최종전 혹은 프리미어 리그 빅매치 관중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에 기쁘고 했겠지만, 식사 시간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분주한 스케줄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과부하가 걸렸을 것입니다.
이러다 제대로 된 복음선포도 하기 전에 과로사하겠다는 생각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군중 몰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겐네사렛 땅으로 넘어갔습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드디어 편안히 식사도 하고 취침도 하겠지? 이게 얼마만의 휴가냐? 하고 희희낙락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사도들의 희망 사항은 육지에 닿자마자 물 건너 가버렸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 예수님임을 확인한 사람들은 뜻밖의 선물에 환호성을 질러댔습니다.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분, 그토록 만나 뵙고 싶었던 예수님이셨는데, 그래서 언젠가 기회 되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지, 그분의 은총을 입어야지,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황홀한 나머지 환호성과 탄성을 외쳤습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을 찾아주셨다며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특히 환자들, 그중에서도 중환자들이 많이 몰려 왔는데...사람들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들것에 싣고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은 들것에 누운 환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른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목청껏 외치시는 야전병원이 순식간에 건설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가장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초대되고 대우받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해 사목자들과 봉사자들이 과로사할 정도입니까?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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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KF2LxpjK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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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 머무는 방법: 뜻을 따를 것인가, 도움을 청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낫고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진리와 은총을 받음입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르침보다는 은총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붙어있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은총을 청함도 그분께 붙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음이가능할까요? 사탄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다 보면 그 사람의 뜻도 따르게 됩니다.
윌 스미스가 지니 역을 맡은 2019년 실사 영화 ‘알라딘’은 일부 현대적인 업데이트를 가미한
오리지널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유사한 줄거리 선을 따릅니다.
알라딘: 이 영화는 아라비아의 도시 아그라바에 살고 있는 친절하지만 한 푼도 없는 길거리
알라딘을 소개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종종 도둑질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악하지는 않습니다.
술탄의 딸인 자스민 공주는 궁전 밖의 삶을 경험하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알라딘을 만나기 위해 몰래 도시로 나갑니다.
술탄의 권력에 굶주린 대재상 자파르는 불가사의의 동굴에 숨겨진 마법의 램프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거친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며, 그것은 알라딘으로 밝혀졌습니다.
알라딘은 자파르에게 속아 동굴에 들어가 램프를 찾습니다. 자파르는 램프만 빼앗고 알라딘을 동굴로 밀어 넣었지만, 알라딘은 램프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나옵니다.
알라딘은 왕자만이 자스민과 혼인할 수 있음을 알고는 지니에게 자신이 왕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파는 알라딘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고 램프를 훔쳐 술탄이자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사용합니다.
알라딘은 자스민, 애완 호랑이 라자, 지니의 도움을 받아 자파르와 맞서게 됩니다. 그는 자파르의 교만함을 자극하여 전능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전능한 자는 지니입니다. 지니는 그를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새로운 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자파르는 램프에 갇힙니다.
알라딘은 자신이 왕족으로 영구적으로 변신하는 대신 지니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마지막 소원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지니를 위해 그러한 소원을 빈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니는 램프의 저주에서 풀려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술탄은 자스민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자스민은 알라딘을 선택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이의 뜻을 묻지 않으면 사탄일 수밖에 없고 그 교만함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이의 뜻을 물어봅니다.
알라딘이 그런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주님과 머물기 위해 많은 것을 청합니다. 언제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이때의 소명이 진리이고 지팡이가 은총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통해 주님께 끊임없이 청하며 그 받는 은혜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욕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머문다는 말은 그 누군가의 은총과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가르침과 음식을 먹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를 거부합니다. 독립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부모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주님께 붙어있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매 순간 어떤 은총이 필요한지를 청하는 게 낫습니다. 그 청함을 통해 주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은총을 받은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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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루틴(Routin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좋은 샷을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는 항상 같은 루틴을 따랐기 때문이다. 나의 루틴은 변하지 않는 나의 것이다. 최상의 샷을 준비된 상태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루틴은 일종의 습관이지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제게도 저만의 루틴이 있습니다. 4시에 일어나면, 물을 끓이고, 샤워를 합니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아침기도를 시작합니다. 간단하게 식사하고, 산보를 갑니다. 산보 중에는 성경말씀을 듣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이런 루틴이 제게 안정감을 주고, 하루를 감사하면서 시작하도록 해 줍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출장을 갔을 때도 이런 루틴을 지키려고 합니다. 일정표도 4곳에 기록을 합니다. 사무실에 보드 판이 있습니다. 거기에 적어 놓습니다. 책상 위에 일정표 달력에 적어 놓습니다. 숙소의 책상 위에 일정표 달력에 적어 놓습니다. 스마트폰 일정표에 적어 놓습니다. 이렇게 4곳에 적어 놓으면 일정 때문에 실수하거나 어려운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루틴은 아니지만 인공지능이 저의 루틴을 알고 제가 즐겨보는 것을 검색해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달 전쯤에 명사들의 짧은 글을 검색해서 읽었습니다. 그 뒤로는 제가 검색하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알아서 제가 좋아할 만한 명사들의 짧은 글을 검색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인상적인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힘든 시기는 강한 사람을 만든다. 강한 사람은 좋은 시대를 만든다. 좋은 시대는 약한 사람을 만든다. 약한 사람은 힘든 시기를 만든다. 잔잔한 바다는 훌륭한 항해사를 만들 수 없다. 3가지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타인들의 생각에 머물려는 감옥, 과거에 머물려는 감옥, 변화를 피하려는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문은 집에 비하면 아주 작다. 자물쇠는 문에 비하면 아주 작다. 열쇠는 이중에서 가장 작다. 그러나 열쇠가 있어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려 깊은 방법이 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감사는 모든 덕의 근본은 아니다. 그러나 감사는 모든 덕의 부모와 같다.” 지금 내가 있는 시대가 힘든 시대라면 역량을 키우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시대가 좋은 시대라면 교만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루틴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계시면 조용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계시면 비유와 표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으로 아픈 사람은 치유해주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루틴을 배우고 따라야 합니다. 기도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습니다.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간 날 때 가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면역력을 키우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선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난한 이에게, 지금 굶주린 이에게, 지금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창고를 채우기보다는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창고에 쌓은 것은 바로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비유와 표징은 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은 듣는 것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좋습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썼다면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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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오늘의 복음에서와같이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으면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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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동정 순교자인 성녀 아가타를 기념합니다. 성녀는 시칠리아섬 출신으로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삶에 매료되었고, 열다섯 살 때 카타니아의 주교 앞에서 공적으로 동정 서원을 하였습니다.
성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에 체포되어 지방 총독 퀸티아누스 앞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총독은 아가타의 아름다운 용모에 사로잡혀 성녀를 소유하려고 하였습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성녀가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총독은 성녀를 향락에 젖게 하려고 아프로디시아라는 창녀에게 보냈습니다. 그 방법으로도 하느님에 대한 성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무자비하게 고문합니다. 사지를 잡아 늘이고, 쇠로 만든 갈퀴로 몸을 찢고, 불에 지지며 마지막에는 큰 집게로 성녀의 가슴을 뜯어냈습니다. 그래서 성화에서 성녀는 두 가슴이 놓인 접시와 집게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감옥으로 보내진 성녀에게 아이 모습을 한 천사와 함께 베드로가 나타나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총독은 성녀의 상처가 다 나은 것을 보고 분노하며 그를 뜨거운 석탄불 위에서 태워 죽였다고 전합니다.
아가타가 재판 때에 축성된 동정녀임을 드러내려고 종들이 입던 흰옷을 입고 나타나자 총독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자유롭고 고귀하다면 어찌하여 종처럼 행동합니까?” 이에 성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최고의 귀족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세속적으로 고귀하고 높은 지위가 보장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고 고귀한 삶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돌아보고, 성녀와 같이 영원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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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병고에 대한 묵상>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 자비는 ‘무조건, 무제한’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조건도 없이,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먼저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믿음도 없이 예수님께 은총을 청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권능과 자비는 믿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옷자락만) 믿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셨지만, 예수님은 안 믿고 예수님의 옷만 믿은 사람은, 몸의 치유로 만족하면서 그냥 떠났습니다. 그러면 그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나버립니다.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2)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믿음은, ‘결과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도 바로 그 믿음입니다.> ‘결과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은, 일의 결과를 보고 나서 믿는 믿음이라는 뜻이고, ‘희망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은, 일의 결과를 아직 모르지만, 희망하니까 희망만으로 믿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의 결과를 보고 나서 믿는 것은 누구나 금방 할 수 있는 일이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아직 결과를 보기 전이라도, 결과가 달라도, 지금 나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은 하나입니다.(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하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희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로마 8,24)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입니다.
3) 사람들이 두루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데려오는 모습과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병자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은, 그들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에도 병자들과 병자들의 가족들의 간절함은 똑같습니다. 우리는 그 간절함에서 비롯된 청원기도를 기복신앙이라고 함부로 비웃지 말아야 합니다.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그런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4-16)
4) 이천 년 전보다 인간의 의학과 의술이 대단히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에는 병의 치료에 대해서 종교와 신앙이 또는 주님이 더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학과 의술의 발전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의사들과 약사들은 주님의 협력자들입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에도 훌륭한 신앙인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면서 병원 치료를 안 받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병원 치료를 잘 받고 있다면서 기도를 안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가 믿는 주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진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또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어났어도, 인간을 살리거나 죽이는 권한은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진리도 변함이 없습니다.
5)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경우가 분명히 많지만, 믿음을 가지고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치료도 열심히 받는데도, 끝내 치유되지 않고 그냥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왜 누구는 치유의 은총을 받고, 누구는 그 은총을 못 받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치료해야 합니다. 어떻든 우리는 병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되고,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병에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건강하다면, 그것 또한 은총이니까 감사드려야 합니다.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고 있다면, 겸손하게 주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고, 기도하면서 치료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병은 주님의 뜻이 아니고, 건강 회복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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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 인간은 '생로병사' 하게 운명지워져 있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죽는 것까지는 다 받아들이고 수긍하겠는데, 왜 꼭 병이 들어야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갈수록 의술이 좋아져 평균수명이 많이 길어졌지만 병원마다 왠 환자들이 그리 많은지요. 뭐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이 생기고 부속을 새로 갈아끼워 넣어야 하듯이 오랜 세월 잘 사용했으니 고장날 만도 하지요. 이런 노화를 겪으면서 여기저기 고장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병원신세를 지는 아이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린 사람들, 우울증과 조현증, 치매와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 삶이 파괴되고 있는 사람들 ……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나서 "보시니 좋더라."(창세기 1, 10.12.18)고 하신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시는 걸까요?
아무튼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환자들이 모두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코 6,56) 아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보다 "사람들"(마르코 6,54)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부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눕혀", "데려다 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복음의 다른 치유 기적 사화들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대 치유해주시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좀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이 직접 팔을 뻗어 "옷자락 술"(마르코 6,56)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독서는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의 창조 설화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기 1,2) 세상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빛, 하늘, 땅과 바다와 푸른 싹, 빛물체들'이 나흘 동안 차례로 생겨나지요.
시편 저자는 세상 만물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이 모든 창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귀하십니까! ……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시편 2,4)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압니다. 이 '하느님의 손'이나 '손가락'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신 위엄과 권능의 업적임을 드러낼 때 성경 저자들이 즐겨 썼던 표현이지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손들이 등장합니다. 자기 일처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챙겨 데리고 온 손들, 그리고 치유의 일념으로 가득 차 장터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향해 힘껏 내뻗은 병자들의 손들.
누구에게 손을 대려고 팔을 뻗는 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해보는 행동이 아닐 겁니다. 의도와 방향성과 목표를 지닌 신념의 표출이지요.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코 6,56)
첫번째 창조가 하느님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자리에서는 병자들을 도와주는 이들의 손과 믿음에 차 내뻗은 병자들 스스로의 손을 통해 재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잠언 8,22-31 참조) 새 창조의 현장에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저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을 통해 오늘도 세상의 혼돈과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 여러분은 병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까? 주위에 그런 분이 계시지요? 이 고통스런 병이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사업에 기여하기 위한 봉헌이라면 무의미하지는 않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가치있는 고통이겠지요.
오늘 생로병사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병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봉헌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 아파하시며 그 고통을 축복하고 계심을 굳게 믿으시길 청합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기적수로 원죄의 업보로 얻게 된 이 병까지도 깨끗하게 치유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시어 모든 병자들을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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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들의 행동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온 지방을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군중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필사적으로 자기가 아는 병자들이 낫기를 간절히 청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마을에 새로운 가게가 생겨 호기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 계산대에는 하느님께서 계셨습니다. 놀란 부인이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팔고 계시는지요?” 하느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살 수 있답니다.” 부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잠시 뒤에 말을 쏟아 냅니다. “행복을 사고 싶습니다. 사랑과 평화도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자유도 주셔요.” 그러더니 또 덧붙입니다.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제 이웃을 위해서도 사고 싶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오해를 한 것 같군요. 여기서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씨앗만 팔고 있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바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라는 만큼의 필사적인 간절함과 그에 따른 적극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있습니까? 그분을 만나려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자 뛰어다니고 있습니까? 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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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꿈이기도 했던 성전을 완공하고서 그곳에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계약 궤를 모셔 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 시절에 계약 궤는 유다 바알라에 있다가 예루살렘의 다윗성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를 너무도 기뻐한 다윗이 주님 앞에서 마치 아이처럼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사무엘기 하권 6장 참조).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솔로몬도 정성을 다하여 마련한 성전에 드디어 계약 궤를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감격스러워합니다.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제물로 봉헌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주님께 드리는 장엄한 기도를 통해서(열왕기 상권 8장 22절-53절 참조) 솔로몬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두 임금에게서 주님을 가장 좋은 곳에 모시고자 하는 열망과 기쁨을 배웁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 주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코린토 1서 3장 16절-17절).
우리는 영성체를 통하여 다윗과 솔로몬도 누려 보지 못한 특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며 살고 있을까요?
평소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모시며 생활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가장 좋은 곳에 모시려면 늘 우리 마음을 가꾸고 보살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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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55)
모든 성경의 시작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구약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로부터, 창세기의 시작은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표출되는 말씀과 영으로 빛과 어둠, 하늘과 땅과 바다, 풀과 나무,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십니다. 창조하신 다음 하느님께서는 매번 반복해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감탄하십니다. 그런데 창조의 최절정은 바로 하느님 당신 모습 닮은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고, 이로써 창조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살기 좋은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신 것과 같습니다. 한 마디로 창조는 하느님 사랑의 계시이며 사랑의 넘침입니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으로 창조한 수많은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니 그런 사람을 보고 많은 이들이 측은한 마음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할 뿐이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사람을 낫게 해 준 소문만으로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신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6,55)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병든 사람들을 찾아 두루 뛰어다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이곳저곳을 두루 뛰어다니게 하였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두루 뛰어다녔던 까닭은 먼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고, 움직일 수도 없고 혼자 거동할 수도 없는 이웃의 몸져누워 있는 병자들을 서둘러 예수님께 데려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어떤 이득을 위해서 혹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서 분주하게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 이웃을 먼저 생각해 주고 그들을 어떡하든 도와주려는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고,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세상이 된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좀 더 사람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아픔이나 어려움을 함께해 줄 이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질병으로 짓눌리는 사람에게는 큰 축복이었을까요! 치유가 일어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 그 하나만으로 살아갈 힘이 생기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당대의 현실 상황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여건보다 정치-경제-종교 등 모든 면에서 더 참담하고 각박한 상황이었는데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그들에게 그렇게 타인을 우선 배려하고 도와주려는 분위기가 강했을까 싶네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치유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심정은 많은 이들이 질병으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셨겠습니까? 그런 안타까운 마음 가운데서도 아픈 이웃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동정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내심으로 ‘참 보기 좋네’라고 생각하시면서, 아빠 하느님은 이들의 착한 마음을 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활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병자성사를 줄 때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상기시켜 주는 성서 말씀이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은 원로들을 부르고, 원로들은 그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5,14~15참조) 예수님을 알아본 그들의 믿음과 아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순응하신 예수님께서 아픈 이들을 안수하자 마침내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6,56) 구원받은 인간은 바로 예수님 구원 활동의 표지이며, 구원은 인간의 본래 모습의 회복이며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랑이 없는 창조를 생각할 수 없듯이 사랑이 없는 치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구원이고 구원은 생명의 온전함입니다.
잘 아는 것처럼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불의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사랑의 재발견이라고 봅니다. 이 사랑의 도화선이 되고 기폭제가 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들 자신의 문제에 급급하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과 불평 그리고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진정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길을, 진리를 몸으로 보여 주시며, 단지 살아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그 생명이 생명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자기라는 이기심을 틀에서 벗어나 타인을 사랑할 때 존재한다는 사실의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손수 보여 주셨고, 이제 그 사랑의 기운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핀 것이라고 봅니다. 사랑만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 사랑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파급되어 가는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다큐멘타리 동영상처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모든 말과 몸짓과 옷을 통해서 퍼져나가는 사랑의 에너지는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고 마음을 치유하면서 모든 이가 구원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불이며, 이 사랑의 불은 모든 이의 이기심을 불살라 버리고 순수한 이타심을 타오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사실 경험적으로 자신이 가장 심적으로 힘들 때 자신 안에 갇혀 있기보다 역설적으로 자신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치료나 치유가 아닌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고 치유 받는 은혜를 숱하게 경험했고 목격했다고 봅니다. 복음의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이웃처럼 우리 역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 힘겨워하는 이웃들을 돌보고 섬기면서 그들을 예수님께 두루 뛰어다니면서 데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은 ‘참으로 좋다. 참으로 고맙고 고맙다!’하고 말씀하시리라 믿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이루신 일을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그 일을 한다면 더욱더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합시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태4,23참조/복음환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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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남자가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던 중, 주위 풍경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자동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차 바퀴가 헛돌 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장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는 들판에 있는 나이 많은 노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이 늙은 노새가 과연 그 무거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노새는 한 마리인데 왜 다른 이름을 불렀습니까?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러 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웃으며 말했지요.
“아니요.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
혼자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곤 합니다. 함께 한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힘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지금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병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혼자서 오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병이 죄의 결과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복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함께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에 구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함께하고 있을까요?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까?
누구는 자기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함께하지 않는 곳에서 과연 진정한 믿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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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참으로 알아본 사람들>
마르코 6,53-56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사람을 참으로 알아본 사람들>
사람을 살릴 수 있기에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참으로
알아본
사람들이
저 살고자
그 사람에게
앞다퉈가기보다
사람을 살릴
사람에게
데려오려고
홀로 살 수 없는
살려야 할
사람들에게
제가 살릴 수 없는
살리고픈
사람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애틋한 사랑과
벅찬 희망으로
가쁜 숨 몰아쉬며
한달음에
달리고 달려간다
사람을 살릴 수 있기에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참으로
알아본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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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총을 담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특별히 육신의 치유를 받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병을 고쳐 주시는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지 않기를 바라신 것 같습니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면서 분명 육신의 치유자 그 이상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때로는 침묵하십니다.
그럼에도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물론 손을 대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례를 보면, 나병환자를 치유하시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하셨으며 백인대장의 하인을 치유할 때도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8,13) 하였고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습니다.
눈먼 두 사람을 치유할 때도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30) 말씀과 함께 눈이 열렸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을 치유할 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15,28) 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하혈하는 여자에게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8,4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리코에 사는 눈먼 이에게도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8,42).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치유의 기적은 믿음의 갈망과 행동이 있는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은총은 언제 어디서나 풍부해도 믿음의 그릇이 준비된 곳에서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투신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열정이 솟아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치유의 능력을 지닌 베드로가 불구자를 고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자선을 청하는 환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3,6-8)
바오로가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치료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사도14,8-10)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능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기적은 사도들에게도 또 우리 삶 안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음이 기적이요,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면 이미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풍요롭고 그 은총을 담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실 지금 매 순간이 은총의 때입니다. ‘일기일회’입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심에 감사드리며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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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영혼의 본향(本鄕)이신 예수님>
-집에서 집을 그리워함-
(homesick at home)
어제 저는 주일 미사중 연중 5주간의 본기도중 ‘주님의 가족’이란 말마디에 은혜 받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들’이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했으니 우리는 모두 주님의 한 가족에 속합니다. 바로 이 은혜로운 미사전례를 통해, 수도공동생활을 통해 늘 체험하고 깨닫는 진리입니다. 성인은 교회 어머니는 두 유방을 지녔는데 하나는 구약성경이고 하나는 신약성경으로 영혼은 끊임없이 여기서 말씀의 젖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한다 했습니다.
육신의 형제들보다 때로 가까이 느껴지기도 하는 주님의 형제들입니다. 저는 자주 제 어머니는 셋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성모 마리아 어머니, 그리고 교회이신 어머니입니다. 고향이 고향일수 있음은 어머니가 계실 때입니다. 그래서 휴가때가 되면 육신의 어머니를 찾아 고향에 가듯 많은 이들이 고향의 어머니를 찾듯이 어머니이신 교회나 수도원을 찾습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평생 어머니이신 교회 안에 살고 있는 동시에 우리는 본향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교회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산책때 동요인 ‘어머니 은혜’를 참 많이 부릅니다. 저에게는 성가처럼 은혜로운 동요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교회”이자 동시에 영원히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뜻합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니 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 것 같애.”
솔직히 말씀드려 매 끼니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사제생활 35년 동안 강론 걱정 안할 날은 하루도 없었고, 꿨던 꿈중 대부분도 강론쓰는 꿈이었습니다. 저에게 날마다의 강론 걱정은 역설적으로 살게 하는 힘이었으며, 날마다의 강론쓰기는 하루하루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체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어쨌든 강론 말씀을 통해 주님은 저를 끊임없이 영적으로 낳으시고 기르셨으며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평생 어머니이자 스승이신 교회안에서 살고 있음은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지요! 여전히 평생 살아있는 동안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끊임없이 낳으시고 기르시는, 또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니 교회입니다. 또 하나 제가 참 좋아하는, 늘 읽어도 늘 새롭고 좋은 얼마전에 인용했던 류시화 시인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법정 스님이 극찬했던 시입니다.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누구나의 영혼이 공감하는 시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그리워하는,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역설의 중심에 계신 그대는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자 연인이신,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늘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혼 깊이 모심으로, 영적 목마름과 배고픔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참으로 고맙고 놀라운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솔로몬은 성전에 주님의 계약궤를 모시고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차자 감격에 벅차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그러나 이는 솔로몬의 착각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나중에 헤롯대왕이 세운 거대한 건축물로 대체되었고 오늘날 통곡의 벽의 파편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리엔 이슬람 사원이 있습니다. 마침내 참 영원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제자들의 교회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미사가 봉헌되는 공동체 자리가 진짜 영원한 성전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서 성인들의 예수님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사랑이 그리도 깊고 놀라운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선하다, 좋다”라는 뜻이 성녀 아가다는 루치아, 아녜스, 체칠리아와 함께 로마제국의 네 동정 순교자들 중 한 분입니다. 데케우스 황제(249-251) 때 그를 차지하려던 지방 관리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며 동정을 지켰던 성녀입니다.
얼마나 사랑을 받은 성녀인지 유모, 간호사, 종주조자, 시칠리아의 직조공, 카타니아 산악 안내인, 유리제조공, 불과 날씨, 처녀, 양치는 여자, 수유하는 여인들의 수호성녀입니다. 오늘 성녀 아가타 기념일 저녁성무일도 성모의 노래 후렴을 보면 얼마나 예수님을 일편단심 사랑했는지 흡사 성녀의 유언처럼 생각됩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여, 당신은 내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겨내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여, 내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병자의 무리들은 거대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모두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리운” 영혼의 본향과 같은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영혼의 본향이신 주님을 만나 치유 받으려 참석한 우리들의 모습같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말씀과 더불어 성체를 모심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 “치유받다-구원받다”라는 말마디가 은혜롭습니다. 그리스어 “에소존토(esozonto)”는 신체적 치유 그 이상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그것은 전적인 구원의 체험, 단지 "복지(wellness)" 차원이 아니라, 온전함의 전적 체험이자 다른 말로 “귀향(歸鄕;coming home)”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바로 커밍홈(Coming Home)의 시간입니다. 커밍홈(Coming Home), 집에 돌아와 꿈에 그리던 영혼의 고향 예수님을, 어머니 교회를 만났을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라는 것이며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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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얼마나 매달리는가?>
지금은 제가 불랙 리스트에 올라 중국에 갈 수 없고 그래서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하지만 전에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종종 만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아는 지하교회 신부님을 만나러 갔는데 그분이 미사 중에 공안에 끌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베드로 사도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신자들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저도 그곳 신자들과 신부님이 풀려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한밤중에 마침내 신부님이 풀려나는 뜨거운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은 아직도 이렇게 옛날 우리 박해시대 때처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들과 함께 미사 드리거나 그들에게 강론하면 통역을 두고 하는데도 그들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제가 그들에게 뭘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도 귀한 것을 많이 받고 돌아옵니다.
그날도 그들과 밤새도록 기도하고 신앙 대화를 나눈 뒤 떠나기 전에 강복을 주는데 신자들이 모두 흙바닥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서 놀랐고 모두 저의 바짓자락을 붙잡아서 더더욱 놀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신자 중에 이렇게 강복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제가 그리 소중하지도 않고 사제를 그리 존중하지도 않잖습니까? 그리고 강복도 그야말로 흔해 빠진 강복이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중국의 지하교회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저 부모로부터 이어온 지식과 전통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렇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강복 때 사제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행위도 그런 그들의 전통과 열성의 표현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이 전통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한 고을을 찾아가시고, 그러면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도 한곳에 편히 머물지 않으시고 계속 이 고을 저 고을로 병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주님께 병자들도 몰려듭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산과 내를 건너서 오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은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열성입니다.
아니, 열성 이전에 절실함입니다. ‘주님, 당신이 없으면 저는 안 됩니다.’라는 절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열성과 절실함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열성과 절실함이 우리에게 없어도 우리를 치유해주실 분이지만 우린 이 열성과 절실함이 있어야만 주님의 치유에 충실하고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인 의사에게 갈 때도 이런 충실함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 아니면 의사가 없냐는 태도로 가면 의사의 처방과 치료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붙잡는 행위는 이 열성과 절실함의 표시이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병자들과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당신 없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며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매달립니까?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
너무도 이상하게도 그리고 너무도 죄송하게도 2주 연속 주일 강론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제목만 올리고 내용은 올릴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라고, 혹 다음 주에도 그런 일이 발생하고, 제 강론을 메일로 받기를 원하시면 문자로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이메일로 강론을 올리겠습니다. 제 전화번호는 010-2340-550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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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b)
<절박함의 기적!>
오늘 복음(마르6,53-56)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시자, 사람들은 많은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과연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 묵상글을 통해서도 나누었지만, 병이 나를 찾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병은 '마음의 병인 스트레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병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과 정신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을 때, 곧 내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 닿아있을 때, 그래야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고, 그래야 육체의 병을 유발시키는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간직하고 계신 성녀 아가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가타'(Agatha)는 그리스어로 '선(善)'이라는 뜻입니다. 아가타는 하느님의 마음인 착한 마음으로 무장되어,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운 육체를 탐내는 사악한 이가 저지른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이겨내면서 동정을 지킬 수 있었고, 또 장엄하게 순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미사책 46쪽'을 보면, 가톨릭 대학교 성신교정에 계시는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의 묵상'이 있는데,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닿아 있고, 나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가장 아픈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구원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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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eg3SZ23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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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인생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묻게됩니다.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가져갈 것은
사랑했던 사랑의
마음뿐입니다.
결코 사랑의 마음을
놓치지 않았던
성녀 아가타
축일입니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잡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사랑의 관계뿐입니다.
사랑은
뒷걸음 치지
않습니다.
묵묵히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나갈 뿐입니다.
어지럽고 소란한
욕망의 칼날도
성녀 아가타의
사랑 앞에선 꼬리를
감추었습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또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어떠한 사람인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온몸과 온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한
한 여인의 삶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열게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험난했던 그 길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인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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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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