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삼아 하는 말을 한자로 구실이라고 합니다. 입 구에 열매 실입니다. 열매 실자에는 담는다는 뜻이 있으므로 구실은 입에 담는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입에 담는 물건이라면 먹는 음식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구실은 원래 먹는 음식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입에 담는 것은 먹는 음식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실은 입에 담는 핑계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구실이 핑계의 뜻으로 처음 쓰인 용례는 《서경(書經)》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폭군(暴君)으로 알려진 걸왕(桀王)의 신하였습니다. 그는 걸왕의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걸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습니다. 탕왕은 백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걸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지만, 신하로서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생각에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봐 걱정이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탕왕 이후 수천 년 동안 역성혁명을 일으킨 군주들은 하나같이 탕왕처럼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습니다. 탕왕의 역성혁명은 신하로서 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앞서 장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세간에 알려진 골프금지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아울러 골프활성화 방안을 마련하도록 주문하기까지 했습니다. 침체된 경기를 살리겠다는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이 말을 구실 삼아 할 일을 팽개치고 골프를 치러 가는 공직자가 생길까봐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