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 4월 왜군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부산 동래를 거쳐 서울로 북상해 오자 신립은 도순변사가 되어 충주지역을 지키게 되었다. 당시 충주는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전략상 요충지이기도 했다.
신립은 유성룡이 모집한 군관 80여명과 함께 훈련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농민들 중에서 군대를 모집해 가며 4월26일 충주에 도착하여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진을 쳤다. 그가 끌어 모은 군사는 겨우 8천여명 이었고 그것도 화살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한편, 4월25일 상주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일장군은 적의 급습을 받아 문경으로 후퇴하고는 조령을 지키기 위해 이동 중 신립이 충주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조령의 변길과 함께 충주로 내달았다. 신립은 이들을 선봉으로 삼고 단월역에 진을 치고 작전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조령에서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자 하였으나..
종사관 김여물은,
"적의 세력이 우리의 몇 배나 되니 정면으로 싸우면 전세상 불리할 것 같습니다. 이들의 예봉을 꺾으려면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고 만일 적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으면 차라리 물러가 한성으로 들어가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제안을 하였다. 또한 충주목사 이종장도,
"적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가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옳지 못하고 험한 곳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니 조령의 험한 곳을 의지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로 적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적을 기습하여 승리하는 방책으로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막료들 역시 이 작전에 찬성을 하였으나 신립은 고집을 부리며 반대하였다.
지난 날 오랑캐를 물리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며 지형의 이로움을 가볍게 여겼다...
이유인즉, 적은 이미 문경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서둘러 조령을 지키는 것보다 넓은 들에 적의 보병을 끌어 들여 이를 우리의 기병으로 요격하면 먼 행군에 지친 적을 가히 무찌를 수 있을 것이며 아군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다가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하니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라 하고
지난날 오랑캐를 물리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며 지형의 이로움을 가볍게 여겼던 것이었다.
또한, 적이 조령에 다다랐으니 서둘러 옮기는 것보다는 오합지졸인 우리 군대를 통솔하기에는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신립은 단월역에서 상주의 패장 이일을 만나보고 처음에는 목을 베어서 본보기로 삼고자 하였으나 지난 날 그의 공이 아까워서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다시 세우는 기회를 주기로 하고 그의 작전구상을 물어 보았다.
이일은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적은 경오, 을묘 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 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니 신립이 크게 노하며 책망하여 말하기를
"그대 또 다시 우리 군사까지 망쳐놓으려는 것인가"
하고 이일과 변기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아 공을 세울 것을 부탁하였다.
신립은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남한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충주분지가 펼쳐진 탄금대에 학날개 모양의 배수진을 쳤다.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배수진을 치기로
이 때 적군은 26일 아침에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했다.
문경에서 항복하지 않은 현감 신길원을 죽이고 하룻밤을 묵은 후 27일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어 28일 아침 수안보를 지나 정오경에는 충주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아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적의 상황을 알아 보고 있었다. 그 날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계획하고
한신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기로 하였다.
다음날인 28일 아침 일찍이 신립은 군사 8천여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였다. 신립은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우리군사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에 신립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아쓰우라의 3천 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천 병력, 중앙대장 고니시의 7천 병력이 합하여 1만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다.
예비대는 아리바, 오오무라, 고지마 등이 거느리는 3천7백여명의 적병은 충주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대로 달천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으로 포위 공격하여 왔다.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이 점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에 제방을 쌓고 관개시설을 하여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 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또한 전날 밤에 비가 와서 기마병이 활동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험로를 쉽게 넘어 닥친 왜군은 깃발을 휘날리며 창검을 번뜩이고 개떼처럼 몰려 왔다. 우리군대는 수적으로도 열세일 뿐만 아니라 오랜 평화속에서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오합지졸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왜군은 오랜 전란을 통해서 훈련되고 단련되었을 뿐아니라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까지 갖추고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으니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다.
신립은 제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1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창과 칼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무찔렀다. 적은 보병이라 말에 밟혀 죽고 창에 찔려 죽는 자가 허다하고 함성과 비명이 메아리치고 아군과 적군은 하나가 되어 뒤엉켜 싸웠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제2차로 1천명을 적진에 돌격시켜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으나 좌우에서 몰려오는 적세가 강대해졌다.
신립은 제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
.......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다. 신립의 앞을 막는 자는 없었으나 개떼 같이 달려드는 적병을 어쩔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은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짓고 하는 말이
"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며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 돌격대의 진두에 나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승리를 할 수는 없었다.
신립과 김여물은 좌충우돌 왜병을 수십명 거꾸러뜨리고는 두 사람이 함께 북쪽을 향해 절을 한 뒤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온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안고 나선 용장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탄금대에 천추의 한을 뿌린 것이다.
나머지 병사들은 충주 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다가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무기와 시체만이 달천벌을 메우고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고 주인 잃은 전마의 슬픈 울음만이 벌판을 덮고 있었다.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지다...
적은 전선을 수습하고 충주성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도착한 2번대의 가등청정과 합세하여 같은 달 30일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순변사 이일은 도순변사인 신립의 뒤에 멀리 따라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간 다음 적병 수명을 만나서 활을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패전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한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 신립의 나이 47세, 훗날 조정에서는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忠將)이라 하였다. 1981년 10월에 탄금대에다가 시민들의 뜻을 모아 그의 순절비를 열두대 옆에 세웠다.
[ 신립장군묘 ]
■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95호
■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신대리
신립장군은 조선명종 1년(1546)에 생원 화국(華國)의 아들로 출생하여 선조조의 무장으로서 임진왜란(1592)때 충주에서 순국하였다.
선조 원년(1567)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도청부도사 경력을 지내고 진주판관이 되었다. 선조 16년(1583)문성부사가 되어 북변에 침입해 온 니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와 그 전공으로 함경도 북병사에 승진하고 얼마뒤에 니탕개를 투멸하였다.
그 후 선조 20년(1587)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니 경상우 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기도 하였다. 선조 23년(1590) 평안도병마절도사, 동왕 24년(1591) 한성부판윤, 동왕 25년(1592) 임진왜란 삼도 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진 하여 충주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했으나 참패하여 김여물과 함께 물에 투신 순국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장군의 묘역은 약 70여평의 면적에 비 1기, 문인석 2기, 망추석 2기, 동자석 2기, 사석 1기, 장명등 1기가 배열되어 있다. 비문은 송시열 이 찬하고, 신익상(申翼相)이 글씨를 썼는데 숙종 14년(1688)에 건립되었다.
비문의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에 도순변사 신공립(申公砬)이 김여물과 함께 왕명을 받고 왜적을 방어하다가 충주 달천에서 전사했었는데 이 당시에는 임금이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공을 천성(千城)과 같이 믿고 있었던터라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임금은 곧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공이 북쪽 오랑캐 니탕개를 쳐서 그들의 소굴을 쓸어 없앴으므로 그 용명이 천하에 떨쳤었으나 이에 이르러 왜적이 침구해 와서 장차 중국을 충돌하려고 하니 그 병력은 대략 60만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 나라는 태평을 누린지가 오래 되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이 안일과 희락만을 일삼았는데 오직 문렬공 조중봉(趙重峯) 헌(憲) 이 왜적이 반드시 침입할 것을 알고 그들을 방어할 계책을 임금에게 올렸지만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지목할 뿐이었다. 형세가 급박해지자 당시의 정승이 공을 파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조아(爪牙)(날카로운 발톱과 예리한 어금니)와 같이 믿음직해서 나를 호위해 줄 사람인데 어찌 보낼 수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굳이 청하기를 마지 않으므로 공을 불러서 물으니 공은 출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이때 제도에서 징발한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휘하 장졸과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모아 병정으로 삼았으며 삼의사(三醫司)의 관원까지도 여기에 참가하였었고 무고에서 병기를 내고 또 조신들은 각각 전마를 내도록 명했었다. 김공 여물은 마침 어떠한 일로 옥에 갇혀 있었는데 공이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떠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출발하려고 할때 임금이 인견하고 친히 상방검(尙方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경상도순변사 이일(李鎰)이하의 모든 장병들을 이 칼로써 지휘하여 임무를 다하라 」하였고 또 중도에서 병졸을 모으게 했었는데 충주에 이르니 군중은 수천인에 불과하고 이일은 상주에서부터 패주해 왔었다. 공이 처음에는 이일을 목베어 조리돌리려 하다가 그를 애석히 여겨 중지하고 이어 왜적들을 막아낼 계략을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되 「병력의 차이가 너무도 크므로 여기서 대적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후퇴해서 서울을 지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공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감히 다시 아군을 교란시키려고 하느냐, 다만 앞으로나마 공을 세워 충성을 맹세하라 」하고 드디어 그를 선봉으로 삼았다.
이 때 김공 여물이 먼저 조령(鳥嶺)에 의거하기를 청하니 공은 왜적들이 이미 조령 밑까지 육박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금 떠났다가 조령까지 당도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치게 되면 사태는 위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군은 모두 훈련되지 못한 병정인 데다 또한 평소에 친근히 따르던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지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그들의 도움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마침내 달천을 배후에 두고 진을 쳤었다.
생각컨데 공은 평지에서 기병을 급히 몰아 그들을 짓밟음으로써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뚫으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왜적 들은 벌써 조령을 넘어 와서 산과 들에 가득 차니 검광은 햇빛을 가리고 포성은 땅을 뒤흔들었다. 공이 제군을 지휘하여 진격하면서 두번 이나 친히 적군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저들은 먼저 아군의 우측을 포위하고 동쪽, 서쪽에서 협공하니 그 형세는 마치 태산이 내리 누르는 듯하였다. 이에 공은 다시 탄금대로 되돌아 와서 김공 여물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남아답게 죽을 뿐이요 대의에 있어 구차하게 살 수는 없소 」하자 김공은 말하기를 「내또한 공을 따르리라 」하였다. 드디어 김공에게 상계를 초하여 부하를 시켜 이를 서둘러 임금에게 올리게 한 다음 함께 적진에 육박하여 10여명을 쳐서 죽이고 끝내 김공 여물과 더불어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공은 평산인이며 자는 입지요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이다. 장절공의 고려태조를 위한 순의는 한고조(漢高朝)때의 기신(紀信) 과 같았었고 그래서 지금토록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