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씰,을 살 수 있나요?
어렸을 땐 크리스마스만 되면 성탄카드에 크리스마스 씰을 붙였다. 크리스마스 씰에 결핵협회라고 되어 있지만 결핵환자를 위한 것이라거나 환자들의 슬프고 아픈 이미지가 아니라 성탄절과 연관된 기억 때문인지 늘 성냥팔이 소녀가 생각났다. 추위 속에 떨고 있을 성냥팔이 소녀에게 내가 성탄절 카드에 크리스마스 씰을 꼭 붙여야만 따뜻함이 전달될 것만 같은 어떤 기원같은 징표.
19세기에는 ‘백색 페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무서운 감염병, 우리나라에도 1970~80년대에도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다지만 이제는 사라진 병인 줄 알았다. 결핵은 가난한 나라의 병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니 경제성장과 더불어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한국엔 결핵은 없다고. 그런데 언제던가, 몇 년 전부터 결핵환자가 증가하고 있다더니 최근 보도(8.14일자)에 따르면 국내 결핵 환자가 ‘OECD 2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가난한 나라인가. 하긴, 계속 하락하는 경제성장률, 끊이지 않는 외환위기, 금융위기, 끝없이 파탄 중인 민생, 다시 창궐하는 코로나. 나라가 성장하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일이 걸렸는데 가난해지는 건 이토록 쉬웠나.
닥터 노먼 베쑨은 가난한 나라의 병이 아니라, 부자들의 결핵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결핵이 있다고 했다. 부자들은 회복되지만 가난뱅이들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그래서 환자들의 병명을 ‘폐결핵’이라고 써야 할지, ‘경제적 빈곤’이라고 써야 할지 고민했다고 했다. 1890~1939년도 사람인 베쑨이 당시에 가지고 있던 이 빈곤에 대한 고민이 여전한 고민이라는 것과 앞으로도 이 고민은 계속될 거라는 걸 생각하니, 갑갑하다.
질병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것과 연관시킨 베쑨은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딱 못을 박았다. 그 자신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하기도 했고.
사회의 각 부문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사적 건강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건강문제가 다 공적인 것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에 걸린다면, 그것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국민보건이라는 문제는 정부의 주요한 책임이자 의무로서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회보장의 개념을 확실히 인식하는 발언이다. 우리나라 4대 보험 중에서 돈많은 사람들도 꼬박꼬박 납부하는 것은 국민건강보험이다. 국민연금은 내지 않아도 건강보험은 꼬박꼬박 낸다. 경제력이 있으면서도 자식 앞으로 보험 수급자로 신청해서 직장의료보험의 혜택을 보도록 신청했던 국회의원도 있었다. 이처럼 권력이 있든 경제력이 월등하든 상관없이 국민건강보험 좋은 줄은 알아서 꼬박꼬박 혜택을 보려고 하면서 왜 국민건강보험을 자꾸 민영화하려고 하는지, 의대 증원으로 인한 의료대란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이렇게 지켜만 보아야 하나. 주위엔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이 쏙쏙 등장하고 있어 실제로 코로나의 재확산을 실감하는 중이다. 그토록 경이롭게 해결해나갔던 심각한 감염병 문제를 이토록 경이롭게 재소환하면서도 이 상황에서 해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놀랍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대응했던 시스템을 어떻게 붕괴시켰으면 이렇게 대응할 수 없음으로 일관할 수 있을까.
결핵환자를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씰 판매 사업처럼 코로나 환자를 위한 ‘씰’이라도 판매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길 바라지만, 2024년 현재 이 ‘가난한 나라’는 환자들이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치료해줄 의사가, 치료받을 병원이, 치료할 약이 없다.
베쑨은 의료윤리를 부르짖으면서 의사와 국민 사이의 기본적 도덕성과 정의감을 얘기했다. 이러한 도덕성과 정의감, 이러한 생각이나 사고는 것은 제도가 바꾸어 줄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난 생각했다. 또한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고 그로부터 공감대를 얻어내서 제도를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선을 따질 수 없이 같이 가야하는 것이라고. 인식이 변해야 함에도 변하지 않는다면 제도적인 틀로서 인식을 바꿀 수 있게끔 할 수 있다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책이나 제도의 목적이나 가치는 중요한 거고, 또한 그 정책과 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늘 신중하고 적확하게 이루어져야 할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나는 몇 년 전부터 이런 모든 것들이 붕괴되는 현실에 있다.
크리스마스 씰은 그러니까, 희망과 기대 바람이었다. 성탄절 산타를 기다리듯이 세상 아픈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산타가 찾아와 주리라는 그런 희망. 그건 단순히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만 얘기할 수 없다. 성탄절에 눈이 내리기를 소원하는 것처럼 그냥 이 세상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고 실천하는 그런 것. 나눔과 배려의 크리스마스 씰! 물론 사람들의 한줌 선의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잘 갖추어진 틀에서 세상이 살아 움직여나가는 하는 것이 기본이다. 제도가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갖추어진 상황에서 ‘사람’의 선의가 더욱 더 아름답게 흩날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24년은 오래도록 잘 쌓아놓은 체계를 일시에, 점진적으로 붕괴하더니 마침내 크리스마스 씰을 살 사람들의 마음조차도 소멸시켜 버리는 듯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나 있고 또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무력하며 무기력하게 보인다. 물론 집단적 광기에 싸인 사람들도 보인다만, 그래서 또한 이 폭염이 우울을 퍼트리는 듯 ‘가난한 나라’를 떠돈다. 나라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가치도 나눔도 배려도 상식도 파괴해 버리는 강력한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데, 이를 퇴치할 씰을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