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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5년 무술(1898) 11월 12일(신유, 양력 12월 24일) 맑음
35-11-12[12]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을 보살필 것을 청하는 유학 조치룡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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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 조치룡(趙致龍)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은 바닷가 외딴 구석에 살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부터 열성조(列聖朝)께서 교화로 길러 주신 큰 은혜를 입어 그 은혜가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들이 비록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이곳에 흘러들어와 살고는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에 입적(入籍)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본국에서 이곳에 관원을 파견해 주기만을 삼가 기다렸으니, 이는 타고난 본성이면서 분의(分義)와 도리(道理)에 있어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먼 길을 와서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갈 줄 모르는 것입니다.
금년 5월에 이 일을 가지고 모여 우러러 성상께 아뢰면서 우리 성상께서 천지(天地)를 본받는 큰 교화를 특별히 행하시고 적자(赤子)를 돌보는 간절한 정성을 잘 생각하실 것이라고 삼가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은혜로운 비지를 내리셨는데, 해와 달보다도 밝고 산과 바다보다도 깊고 후중하셨는바, 조칙을 내려 의정부로 하여금 특별히 품처(稟處)하도록 하셨습니다. 신들이 시골구석의 미천한 몸으로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 채 이런 매우 각별한 윤허를 감히 받들게 되었으니, 신들의 행운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상한 어미를 만난 것과 매우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의정부에서 성상의 훌륭하신 분부를 받들어 머지않아 타당한 조처를 취함으로써 기필코 중지된 채 시행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에 경저(京邸)에 물러나 있으면서 공손히 처분을 기다렸는데, 삼가 들으니, 그간 의정부에서 이 일을 가지고 모여 논의한 뒤 외부(外部)에 이부(移付)한 지 지금 이미 5개월이 지났으나 아직껏 시행할 방도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천 리 밖에 사는 빈한한 신분으로 수 개월 동안 체류하는 것도 오히려 하지 못할 일인데, 더군다나 해를 넘겨 가며 오랫동안 체류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근심스럽고 답답한 마음 견딜 길이 없어 이에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다시 성상께 아뢰어 번거롭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매우 황송하고 두렵습니다만,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이고, 관원을 파견하여 자국의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떳떳한 법입니다. 지금 이미 명이 내려졌는데도 이처럼 지체하고 있으니, 신들이 비록 잠자코 있고자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정부에서 지체한 채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비(經費)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입니까? 아니면 러시아[露國]의 사정을 꺼려서 그런 것입니까? 경비 문제라면 부임할 때의 노자(路資)에 불과할 뿐으로, 기타 여러 가지 새로 책정될 경비는 관원이 부임한 뒤에 자연 적당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를 꺼리는 문제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없으니, 교린(交鄰)하는 의리로 볼 때 우리나라의 백성을 우리가 거느리는 것인데 저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곳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있는데, 그들이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바로 본국에서 관원을 파견하는 일이니,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국가의 대정(大政)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각국(各國)의 백성들은 수효로 따지면 우리나라의 반절에도 못 미치지만, 그들은 모두 관원을 파견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당한 대한(大韓)의 수많은 백성들을 내팽개친 채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아무런 조처도 없이 올해를 넘긴다면 러시아에 입적할 사람이 반을 넘을 것이니, 그런 뒤에야 관원을 파견한다면 어찌 교화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관원을 선정하는 문제는 오직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는 일이므로 비록 신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마침 해당 지역에 공사(公使)를 파견하자는 논의가 있기에 송구함을 무릅쓰고 감히 말미에 보잘것없는 말을 덧붙입니다.
지난 갑오 연간에 서울에 사는 진사 윤성선(尹聖善)이 유람하러 그곳에 들어갔다가 풍속이 우매한 것을 보고는 여섯 가지 사무를 널리 펴서 백성의 풍속을 바로잡았는데, 첫째, 각방(各坊)에 서숙(書塾)을 설립하여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위하는 도를 알게 하고, 둘째, 50가구를 한 부락으로 만들고 각각 두원(頭員)을 두어 백성들끼리 서로 보호하도록 하는 한편, 의지할 곳 없는 네 부류의 곤궁한 백성들을 부락에서 보호하되 생전에 잘 모시고 사후에는 정중히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하며, 셋째, 러시아에 입적한 자들을 효유(曉喩)하여 각각 고국을 그리워하는 의리를 지키도록 하고, 넷째, 다섯 가구를 1통(統)으로 하여 술주정과 잡기(雜技), 사람을 상해하고 도둑질하는 것 등을 엄격히 금하며, 다섯째, 각 항구마다 공원(公員)을 두어 상민(商民)과 농민(農民)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법규를 감독하도록 하고, 여섯째,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본국의 옛 제도를 따름으로써 문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에 해당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위해 성복(成服)하고 매우 칭송하여 마침내 그곳에 노래가 불려졌는데, ‘옛날에 윤 문숙공(尹文肅公 윤관(尹瓘))이 이곳에 왔는데, 아직까지도 은혜로운 유풍(遺風)이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윤공(尹公)이 또 온다면, 연추(連秋)로부터 사막에 이르는 1만여 리의 땅이 다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초창기인 지금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진무하려면 그 지역을 잘 어루만져 복종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 지역의 백성들이 매우 신임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지금 이런 적임자와 비슷한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 누가 이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의정부에 특별히 명하여 윤성선을 불러들여 그가 쓸 만한 사람인지 시험하고 그곳의 형편을 물은 다음 특별히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등용함으로써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이미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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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집 제10권 / 서(序)
《낭전자작사실》 서문〔琅田子爵事實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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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白堂) 현군(玄君)이 조 낭전중응 자작(趙琅田重應子爵)의 《전후사실(前後事實)》을 편찬하고 내게 서문을 구하였다. 나는 평소 낭전의 존옹(尊翁) 석관공(石觀公) 및 그의 숙부 위거(韋琚) 충정공(忠定公)과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에 낭전을 제법 잘 알고 있어, “낭전의 일생은 세 가지 큰 절목이 있으니, 하나는 웅장한 뜻, 하나는 기이한 공훈, 하나는 청렴결백이다. 나머지는 논할 틈이 없다.”라고 단정한 적이 있다. 낭전은 혁혁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어서 집안의 가르침을 받았고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시류에 따라 평탄히 나아갔다면 충분히 과거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약관(弱冠)의 나이부터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동시대의 지사(志士)인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 구당(榘堂) 유길준(兪吉濬), 일재(一齋) 어윤중(魚允中) 공들과 백성을 개화하고 나라를 일으킬 방법을 강구하였다. 고우는 동쪽 일본으로 건너가고, 구당은 서쪽 구주(九州)를 유람하고, 일재는 명을 받아 본국의 서북 2로를 경영하고 다스렸다. 그러나 낭전은 재산을 기울여 자본에 힘을 써서 관북(關北)을 통해 러시아 영토 및 만주ㆍ몽골의 여러 지역에 깊숙이 들어갔다. 그곳의 정략과 풍속을 살필 때 고우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피신했다는 얘기를 듣고 탄식하며 계획한 일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 처리를 위해 급히 돌아왔으나 시국은 이미 크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탄식하여 말했다.
“동양의 근심은 서북쪽에 달려 있다. 그리고 발전시키려는 원대한 계책 역시 여기에 달려 있다.”
마침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고 《구시략(救時略)》을 붙여 책 한 권을 만들고 이것으로 궁궐에 건의해 경고하였다. 당시 정권은 외척에게 있는 데다 소인배가 가득 차 있어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이들은 모두 그의 명철한 견해와 지극한 논리에 감복하였다. 이것이 그의 뜻이 웅장하다고 한 까닭이다.
마침 소인 한 명이 임금의 명을 맡아 은밀하게 어느 나라에 보호를 요청하여 닥칠 재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낭전은 크게 놀라, 이는 국가 흥망의 위기이니 합당한 지위에 있지 않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숙부를 힘껏 도와 위험을 피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음모를 드러내고 또 세상에 분명하게 설명하여, 그 일은 마침내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 때문에 도리어 미움을 받아 숙부는 관서(關西)로 유배 가고 조카는 호남(湖南)으로 유배를 갔다. 칠 년이 지나 낭전이 비로소 사면 받아 돌아왔으나, 나라의 명운이 여기에 힘입어 보전한 것이 수십 년이다. 이것이 그의 공훈의 기이하다고 한 까닭이다.
갑오년이 되자 도원(道園) 김홍집(金弘集)과 나, 일재, 구당 공이 내각에 들어가서 일체의 나쁜 정치를 개혁하였다. 낭전은 이때 교섭국장(交涉局長)의 임무를 띠고 종전 외교 가운데 잘못된 것을 고쳐서 외국과의 우호를 도탑게 했다. 아울러 내각의 요직에 참여하여 힘써서 권세 있는 간신을 물리쳤고 국사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도원은 화를 당했고 낭전 역시 나라를 떠났다. 앞서 도원에게 중요한 공사가 있어서 정부 요원으로서 수천 금을 들여 낭전에게 일을 처리하도록 부탁했다. 얼마 안 있어 난이 일어나 낭전이 일본으로 피하려 할 때 사저에서 탁지부 사계국장(司計局長) 유정수(柳正秀)를 은밀히 불러 그 돈을 돌려주며 말했다.
“도원이 이미 돌아가셨고 나도 동쪽으로 도망가니, 이 돈은 쓸 데가 없습니다. 이 일은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만 한 일이 없는데도 헛되이 쓰는 것이 저는 부끄럽습니다. 비록 이역에서 헐벗고 굶주릴 지라도 국고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겠습니다.”
유정수가 나중에 매번 다른 사람에게 감탄하며 말하곤 했다.
“이미 한꺼번에 나눠 받은 재화이니 써도 거리낄 것이 없는데 더욱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 환난을 당한 때이겠는가? 이익을 보고도 의를 잊지 않는 것을 나는 낭전 한 사람에게서 보았다.”
이것이 평소 청렴결백한 그의 평소 지조이다.
나그네로 떠돌던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곤궁에 근심하고 의기소침해 있었으나 낭전은 홀로 법제, 정치, 농업 등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훗날 뜻을 펴고 도를 행할 준비를 하였다. 나중에 귀국하자 공의(公議)에 따라 추천되어 법부 대신이 되었고 나중에는 농상 대신(農商大臣)으로 이직되었다. 몇 년간 직무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그의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결국은 쓰이지 못했다. 젊을 때부터 개연히 백성과 국가를 자기의 소임으로 여겼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는 더욱 분발하여 평탄한지 험한지, 큰지 작은지 가리지 않고 힘이 미치는 한 모두 떠맡고 곧장 전진하였다. 경술년(1910, 융희4)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롭게 있었으나 여전히 우리 백성에 대한 마음을 잊을 수 없어, 민생에 이익이 되는 일을 요직에 있는 사람에게 많이 진술하였다. 그리고 또 계발의 방도와 개진(開進)할 일로 인민을 지도하고 사우(士友)를 깨우치는데, 정성스럽고 정성스러워 끝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전후로 성심을 쏟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으나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이것은 낭전이 실제로 한 일이지만 예전에 내가 말한 ‘나머지는 논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군이 편찬한 것에 잘 갖추어져 있어 나는 군더더기를 쓰지 않고 그 큰 것만을 드러내 이로써 서문을 구한 것에 응한다.
[주-D008] 관북(關北)을 …… 들어갔다 :
1883년 10월 조중응이 서북변계(西北邊界)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러시아, 만주, 외몽고 등지를 답사한 일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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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속집 제1권 / 시(詩) 보유(補遺)를 붙이다.
동아연초회사 사장 히로에 다쿠지로에게 드리다〔贈東亞煙草會社長廣江澤次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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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향초 맛이 좋고 단데 / 朝鮮香菸味珍甘
토질에 맞고 품종 좋으며 값도 싸구나 / 土宜種良價亦廉
근래 외국 상선으로 권련을 수입하니 / 邇來外舶輸卷烟
세상사람 새것을 좋아해 거금을 쓰는구나 / 世人好新耗鉅金
히로에는 상업계의 인사로서 / 廣江自是商界彥
크게 수완 발휘해 다투어 분발하네 / 大試手腕爭鬪奮
연초회사가 동양에서 떨치니 / 烟草會社擅東洋
백번 꺾여도 일편단심 굽히지 않으리 / 百折不回心一片
히로에(廣江)가 편찬한 책자의 제목이 ‘적심일편(赤心一片)’이다.
물자 넉넉하고 제작은 정밀하니 잘도 팔려나가 / 物豊製精易賣消
북으론 만주 몽고 서쪽으로 계주 요동에 이르네 / 北至滿蒙西薊遼
외국의 이름난 상품을 몰아냈으니 / 外國名產被驅逐
번쩍이는 금패로 상을 주어 기리네 / 金牌焜燿授賞褒
아비는 부지런히 자르고 아들은 붉게 칠하듯 / 若考勤㓸子肯雘
십년 노고하여 커다란 성과를 보았구나 / 十載勞苦見偉績
원래 뜻이 있으면 일을 끝내 이루나니 / 有志由來事竟成
비바람 치는 저녁 감탄하며 시를 짓노라 / 感歎題詩風雨夕
[주-D001] 동아연초회사(東亞煙草會社) :
담배 제조업체인 히로에 상회(廣江商會)가 1916년에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동아연초회사로 합병되었다.
[주-D002] 히로에 다쿠지로(廣江澤次郞) :
1885~? 어릴 때 가토(加藤)가의 양자가 된 후 다시 히로에(廣江)가로 재입양되었는데, 히로에 가문은 대대로 담배업을 했다. 그는 도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재학 중 양부(養父)의 간청으로 1906년 9월 조선으로 와서 양아버지가 경영하는 히로에 연초상회에서 담배제조업을 관리했다. 1908년 부친이 병으로 쓰러졌고, 사업이 위기에 처했으나 1914년에 강적이었던 영미연초(英美煙草) 트러스트를 몰아내고 그 공로로 데라우치(寺內) 총독으로부터 명예금패를 받았다. 1916년 4월 동아연초주식회사와 합병, 이후 주로 만주, 조선, 중국을 활동무대로 삼아 동분서주했다. 저서로 《적심일편(赤心一片)》 《미국식(米國式) 정의인도(正義人道)와 중화민국》 《한국시대의 러시아활약사(韓國時代の露西亞活躍史)》가 있다.
[주-D003] 조선 …… 쓰는구나 :
이 무렵 서양 담배가 많이 수입되어 팔렸으므로 국산 담배 애용을 권장하는 광고를 냈다. 1913년 11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히로에 상회(廣江商會) 광고는 국산 담배의 애용을 강조하여 “경제가(經濟家)는 피워 보시오, 민업(民業) 연초를. 우국가(憂國家)는 피워 보시오, 광강(廣江) 연초를”이라는 국산품 호소형 광고를 냈다.
[주-D004] 뜻이 …… 이루나니 :
《후한서(後漢書)》 권19 〈경엄열전(耿弇列傳)〉에 보인다. 후한(後漢) 때 대장군 경엄이 축아(祝阿)를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자, 광무제(光武帝)가 경엄에게 말하기를 “장군이 앞서 남양에서 이 대책을 세우자, 허술하여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가 항상 여겼었는데, 뜻이 있는 사람은 일을 끝내 성취하는구나.〔將軍前在南陽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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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5년 무술(1898) 11월 20일(기사, 양력 1월 1일) 맑음
35-11-20[06] 시무로서 군병을 선발하여 양성하는 것 등의 여섯 가지 조목과 인재를 등용하는 강령에 대해 진달하는 전 도사 전병훈의 상소
신이 삼가 생각건대, 현재 시급하고 절실한 사무로는 하나의 강령과 여섯 가지 조목이 있다고 여기는데, 군병(軍兵)을 선발하여 양성하는 것, 기계(器械)를 개발하고 제조하는 것, 재용(財用)을 확충하는 것, 인재(人材)를 양성하는 것,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놓는 것, 외국과의 관계를 잘 도모하는 것, 그리고 사람 등용하기를 매우 공정하게 하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총괄하여 성과를 이룩하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을 등용하는 한 가지 문제에 달려 있으니, 그래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이 여섯 가지 조목의 강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군병을 선발하여 양성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이(李珥)는 태평한 시대를 만나서도 도성에 정병(精兵) 10만 명을 양성하고자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현실에 어둡다고 비웃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고서야 비로소 그의 선견지명을 인정하면서 성인(聖人)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선조(宣祖) 같으신 밝은 임금을 만났는데도 마침내 높이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은가.’라고 하셨습니다. 아, 지금 혹시라도 다시 이런 계책을 진술하는 자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반드시 현실에 어둡다고 여기지는 않겠지만 재정이 부족하다고 한탄할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역대의 병제(兵制)를 상고해 보건대, 병(兵)과 농(農)이 분리되면서 더는 좋은 제도가 없었으니, 오직 전조(前朝)에서 실시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제도가 성당(盛唐) 부병제(府兵制)의 뜻을 가장 잘 이어받았습니다. 대개 군사들이 전토(田土)를 기반으로 양성되지 않으면 사는 사람들은 모두 토착민이 아니고 군사들은 모두 부랑민일 것이니, 이런 군병들을 써서 위급한 사태를 구제하게 한다면 어찌 윗사람을 친애하고 상관(上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날의 병제를 논하는 사람들만 병농일치의 제도를 최선으로 여겼을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세계 각국이 비록 상업(商業)에 종사하는 사람을 군병으로 충원한다고 하지만, 수비하는 군병의 경우는 모두 전토를 기반으로 양성해 내고 있으니, 러시아와 프러시아[普魯]의 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동양에 처해 있는 것은 터키[土耳其]가 서양의 요충지에 처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터키는 정병 4, 5십만 명으로 강력한 러시아를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잘 막아 내다가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승리를 거두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양성하고 있는 군병은 고작 수만 명에 지나지 않으니, 장차 이런 군대를 믿고서 침입을 막아 내는 데 사용하려고 한다면 누군들 그 허술함을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과거의 귀감이 멀지 않음에 있어서겠습니까.
지금 취할 수 있는 대책으로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최선이니, 날래고 씩씩한 장정(壯丁)을 각별히 선발하여 친위군(親衛軍)을 설립하되 5만 명을 기준으로 하고, 엽호(獵戶)를 조직하여 각 고을에 수비병을 만들되 또한 5만 명을 기준으로 하고, 연로(沿路) 각 지역에 널리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한정(閒丁)을 모집하되 10만 명을 기준으로 한 다음 장차 중국과 서양의 법을 참고해서 새로운 규정을 제정하고, 배도(裴度)와 장준(張浚) 같은 장군감이 될 만한 인재를 선발 임용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맡기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5년이 안 되어 나라의 위엄을 떨치게 될 것이니, 어찌 한 지역에서만 스스로 강자가 될 뿐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송(宋) 나라의 신하 이강(李綱)은 회복의 대책을 임금에게 아뢰면서 반드시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월(越) 나라 왕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수치를 당하면서 맹세한 다짐으로 더욱 분발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범려(范蠡)라는 정성스런 보좌관을 임명하여 더욱 견고해졌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중흥의 뜻을 품은 것이 매우 절실했기 때문에 등우(鄧禹)의 논의를 듣고서 더욱 확고해졌으니, 이들은 모두 뜻이 앞서 정해져서 공이 뒤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경우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인재를 구하는 정성이 게을렀을 것이니, 비록 범려와 등우 같은 영웅호걸의 인재가 있었다 한들 어찌 쓸 수 있었겠습니까. 군수(軍需)를 마련하여 경영하는 방법과 같은 문제는 재정을 처리하면서 그 계획을 먼저 극진히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기계를 개발하고 제조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예로부터 통일된 국가를 형성했던 세상에서는 배와 수레, 농기구와 직기(織機) 등등의 모든 기계가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래서 나라의 흥망성쇠의 관건이 기계에 있지 않고 전략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성한가 쇠한가, 국력이 강한가 약한가 하는 형세가 어떤 경우에는 기용(器用)이 예리하고 정교한가, 둔하고 거친가 하는 데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도 하였으니, 더군다나 세상 판국이 변한 오늘날에 와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선유(先儒) 유형원(柳馨遠)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농기구는 요동(遼東)보다 못하니, 그래서 수확이 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마땅히 협소한 보습과 쟁기를 개량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박진(朴晉)이 이장손(李長孫)에게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개발하도록 하여 진주(晉州)에 주둔해 있던 적의 진영을 대파하였는데, 왜적들은 신기(神器)라고 하면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백성을 이롭게 하고 적을 제압하는 방도로 기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외국들이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한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도구가 정교하기 때문이니, 이는 강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군무(軍務)는 비록 저들의 기계를 모방하여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전쟁을 할 때에는 전쟁 당사국에 병기를 싣고 출항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매해서 사용하는 것은 후일 충돌을 막을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지 않습니까. 일본은 작은 섬나라로 떨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차관(借款)으로 철도를 개설하고 여러 기계를 제조한 지 30년 만에 바다 밖에 당당하게 우뚝 서서 천하를 노리고 있습니다. 러시아 황제 피터[彼得;Peter] 대제(大帝)는 직접 고난을 겪으면서 기계 제조하는 법을 터득하여 그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폐하와 신료들이 모두 다 환히 알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입니다만, 아직껏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바라건대, 공부(工部)로 하여금 제조국(製造局)을 별도로 설립해서 서울과 지방의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 외국의 법을 모방하여 병장기와 농기구, 직기들을 다방면으로 제조하여 주현(州縣)에 두루 나누어 주고, 주현으로 하여금 또한 역량에 따라 제조 보관하여 군대와 농업의 용도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소서. 농기구와 직기는 먼저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지역에서 시험해 본 다음 차례로 주현에 미치도록 하며, 수뢰(水雷), 배, 수레 따위에 이르기까지 용도를 대비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하소서. 그런 뒤에야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대해 조금도 근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물건을 제조하는 일이 흥성하느냐 폐지되느냐 하는 문제는 권장하고 저지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으니, 장차 외국의 법처럼 하여 장려하고 상을 준다면, 일제히 흥기되어 이장손처럼 외국을 능가하는 창의적인 지혜와 독특한 견해를 지닌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재용을 확충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예전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는 빨아 놓은 옷을 입고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와 쌀을 줄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사치하면 항상 부족할까 근심하고, 절약하면 풍족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에,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방법은 전적으로 절약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보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정된 재물로써 끝없는 수요를 공급하게 되어 백성은 곤궁하고 재정은 고갈될 것입니다. 무릇 백성과 나라가 함께 넉넉한 것을 ‘부국(富國)’이라고 하니, 만약 백성은 가난한데 나라는 넉넉하다면, 《대학(大學)》에 이른바 ‘부고(府庫)의 재물이 모두 임금의 재물이 된다.’는 경우가 아닐 것입니다.
대저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境界)를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양전제(量田制)를 고치라는 명이 이미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과 나라를 위해 다행입니다. 신이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살펴보니, 장차 양전(量田)을 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기일보다 먼저 각 고을에 규정을 나누어 주어 고을 사람이 미리 익숙하게 익히도록 하고, 시기가 되어 거행하되 관리들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법이 아직도 시행할 만하다는 것은 모른 채 관원을 파견하여 일일이 측량한다면, 장차 비용은 막대하게 들고 공사 진척은 지지부진하여 결국에는 효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이니, 오직 일을 책임진 자가 매우 자세히 살피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호구(戶口)를 고르게 조사하는 일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대저 조(租), 용(庸), 조(調)의 세 가지 법은 가장 근고(近古)의 제도인데, 지난번 경장(更張)할 때에 여러 신하들이 역(役)을 제정한 본뜻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단지 호구당 3냥(兩)씩을 배정하였으니, 빈부에 따른 차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나라를 전체적으로 계산해 볼 때에 누락된 자가 반드시 절반을 넘을 것이니, 지금 반드시 각 고을에 각별히 신칙하여 누락된 호구를 조사해 보고하게 한 다음 그 근만(勤慢)을 살펴서 엄정하게 상벌을 시행한다면, 수령들이 어떻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양전과 호구 조사는 재정을 다스리는 방도로 가장 좋은 것이며, 또한 거듭 수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통상 장정(通商章程)을 10년에 한 번씩 고치는 것은 바로 각국이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관례입니다. 출납(出納)과 경중(輕重)을 조정하는 사이에서 각각 자국에 편리한 계책을 세워야 하니,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미곡(米穀) 등의 물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빠져나가는 길을 막고, 외국의 물품 가운데 민간의 일용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세금을 가볍게 부과하여 들어오는 길을 넓혀야 합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우리는 적자를 보는 것이 없고 저들은 흑자를 보는 일이 없게 됩니다. 현재 각항(各港)에서 수출하는 것은 단지 미곡, 토산물 등인데 세금의 부과가 지극히 가벼우니, 어찌 남에게 태아검(太阿劍)의 칼자루를 쥐어 주어 칼끝이 거꾸로 우리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미 대동법(大同法)은 혁파했는데 통상 장정은 고치지 않고 있으니, 미곡의 수출이 장차 반드시 국고를 바닥나게 하더라도 방비할 계책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시급히 강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광물(鑛物)을 캐내는 것은 금(金)을 캐는 것만을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광산의 업무, 지폐(紙幣), 은행(銀行)의 물표(物票) 등 제반 사무는 모두 외교 사무에 밝은 사람에게 맡겨야 하니, 그런 뒤에야 참고하여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리(公理)가 널리 행해지고 신의(信義)가 전제되지 않으면 진실로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쓸데없는 관직을 없애고 현(縣)과 읍(邑)을 줄이거나 병합하는 문제는 반드시 논의해 볼 만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권장하고 뽕나무를 심은 것은 열성조께서 곡진하게 힘쓰던 일인데 지금은 점점 소홀히 하고 있으니, 또한 별도로 규정을 만들어 마치 송 나라가 수령을 고과(考課)하되 한 가구당 한 그루의 뽕나무 심는 것을 출척(黜陟)의 기준으로 삼은 것처럼 상벌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한다면, 누가 장차 쓸데없는 방도라고 여기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일본은 잠사(蠶絲)로 한 해에 올리는 수입이 전세(田稅)를 능가한다고 하니,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방법에 있어 또한 훌륭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재원(財源) 중에서 삼정(蔘政)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오히려 더디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가 살펴보니,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완벽하지 못해서인 듯합니다. 대저 인삼은 5, 6년이 되어서도 썩는 것이 있는데, 지금 세금 징수는 3, 4년근(根)부터 시작하여 밭에 있는 동안 계속 납부를 독촉하고 있는 형편이니, 장차 병들어 썩는 것마저 세금을 낸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전해 오는 말에 이르기를, ‘연못의 물을 빼내고 고기를 잡으면 고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듬해에는 고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몇 년의 기한을 주어 인삼을 캐서 팔 때에 비로소 그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한다면 인삼을 심으려고 하는 자가 끊이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는 일도 오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염분(鹽盆), 어전(魚箭), 노전(蘆田)의 경우는 세금의 종류가 한 가지가 아닌데, 왕실만 염두에 두고 사심 없이 일 처리를 했던 관중(管仲)과 유안(劉晏) 같은 무리가 있어 그 업무를 관장한다면, 어찌 재용이 넉넉하지 않을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수입을 총괄적으로 헤아려 경상 비용을 마련한 다음 다른 쓸데없는 소비를 없애고 군병을 양성하는 비용과 기계를 제조하는 비용에 쓴다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별도로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을 설립하여 모두 곡식을 비축하도록 한다면, 아무리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도적(盜賊)의 피해가 있더라도 그다지 염려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재정을 잘 처리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 모든 일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종조에서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과거(科擧) 이외에 별도로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여 선발하는 법을 만들어 산림(山林)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후한 예로 초빙하고 불러서 타이르셨으니, 역사서에 그 기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명륜당(明倫堂)에서 학교 교육을 시찰하여 장려하고 인도하였으며, 앞장서서 군현(郡縣)에까지 미루어 시행하셨습니다. 봉록으로 길러 주며 교화시키는 방도에 있어 여력을 아끼지 않으시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사람에게 말미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한 다음 한림원(翰林院)과 예문관(藝文館)에서 기예를 시험하였습니다. 무릇 도야하고 훈도할 수 있는 여건이 두루 갖추어진 것이 이와 같았으니, 그래서 주(周)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로 세상이 태평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은 것으로 본조만큼 성대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장차 인재를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양성해야 하니, 만약 인재를 미리 양성하지 않다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발탁하려고 한다면, 이는 활과 화살을 당겨 하늘을 뒤덮을 만큼 큰 새를 잡고 달팽이와 지렁이를 미끼로 배를 삼킬 만큼 큰 물고기를 유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송 나라 인종(仁宗)은 가우(嘉祐) 연간에 양성한 인재를 정강(靖康) 연간에 등용할 때에 충원했으며, 우리 명종조(明宗朝)와 선조조(宣祖朝)에서도 인재를 양성하여 임진왜란에 잘 대처했다고 하니, 진실로 인재는 미리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 그런데 지금 학교는 다만 허명(虛名)만 남아 교육하고 양성하는 법이 없고, 과거는 이미 자체적인 폐단으로 혁파되어 공거(貢擧)하는 법이 없으니, 장차 이런 식으로 몇 년이 흐른다면 글자를 아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사람이 글자를 알지 못하면 어리석고 무식해질 것이니, 장차 어떻게 인재를 취하며, 어떻게 태평성세를 이룩한단 말입니까. 진실로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저술(著術) 및 학교 제도를 근거로 삼아 서울과 지방에 규정을 반포함으로써 권장하는 방도를 세우고 현량과(賢良科)로 이름하여 해마다 경서(經書)에 밝고 품행(品行)에 뛰어난 사람 약간 명을 추천하도록 하며, 또한 격치학(格致學)과 무학(武學)을 각읍(各邑)에 설치하여 외국의 경우처럼 그중 우수한 자를 선발해서 해마다 약간 명을 추천하도록 한 다음 서울에 모두 모아 놓고 먼저 반장(泮長)과 학부(學部)가 시무책(時務策)과 각 기예에 정통한 사람을 시취(試取)하여 조정에 올리면, 의정부와 각부에서는 그 사람을 등용하되 재주가 규정에 맞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거주(擧主)에게까지 죄가 미치도록 하여 규정을 엄격히 만들어 시행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간 시행한다면 어찌 고무하고 진작하는 효과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삼대(三代)가 지극히 융성하고 문교(文敎)가 널리 행해졌던 것은 배우지 않은 백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외국이 부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근본은 또한 학교에서 나온 것인데, 교육하는 내용은 비록 성인의 도에 위배되지만 인재를 양성한 효과로 보면 거의 배우지 않은 백성이 없을 정도이니, 아, 또한 너무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이 국가를 부강하게 한 계책을 살펴보건대, 또한 먼저 시골에 서당(書堂)을 설치하여 사람의 지식을 개명(開明)시키는 일을 가장 우선시하였으니, 가장 빠른 중요한 방법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500년 동안 함양(涵養)하여 문명(文明)한 국가로서, 학문과 기술 및 실용(實用)으로 인도하고 새로운 견문과 새로운 지식을 더한다면, 장차 반드시 인재가 많아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위징(魏徵)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을 탄식하겠습니까.
그런데 인재를 진작시키는 일은 윗사람이 좋아하는 바에 의해 좌우됩니다. 한 나라 무제(武帝)는 먼 나라를 칠 계략을 좋아하여 무공(武功)을 세운 신하가 많았고, 송 나라 고종(高宗)은 숭문(崇文)의 정치를 펼쳐 경술(經術)에 뛰어난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려(高麗)에서 숭상하고 본조에서 함양한 것도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장려하면 성대해지고 배척하면 쇠퇴하는 이치를 어찌 지금 돌이켜 생각하고 거울로 삼아 먼 앞날을 위한 계획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상도(常道)가 바르면 백성이 흥기하고, 백성이 흥기하면 사악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사설(邪說)을 배척하는 것으로는 정학(正學)을 밝히고 민심(民心)을 선량하게 하는 것이 실로 최선의 방법입니다. 지금 이교(異敎)가 난무하여 하늘에 닿을 기세인데, 삼강오륜을 무너뜨리고 세도(世道)를 해치는 일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하였으니, 그 세력이 점차적으로 성해지면 재앙을 장차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정도(正道)를 밝히고 방향을 알도록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서로 잘못에 빠져 임금을 버리고 부모를 뒷전으로 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외국에서 숭상하는 이교는 그 이름이 한 가지가 아닌데, 이른바 격치학(格致學), 무학(武學), 정치학(政治學) 같은 것은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특이합니다. 이러한 것을 또한 분별하여 서울과 지방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취사(取捨)하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방법으로 깨우쳐 주는 일이 시의(時宜)에 맞게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일 듯합니다.
이른바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놓는 것으로 말하자면, 옛날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당 나라 태종(太宗)이 겉으로는 간언을 잘 따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안으로는 좋은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으니, 나는 절대로 이런 점은 취하지 않는다. 순(舜) 임금이 사방의 문을 활짝 열고 사방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나라 고조(高祖)가 매우 신속하게 간언을 따랐던 것은, 천하의 지혜 있는 자들을 나오게 하여 자신을 위해 쓰려고 했던 것이니, 이는 본받을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사람이 간언을 받아들이면 훌륭해진다고 하였으니, 어찌 천고의 한결같은 법칙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는 또한 고려의 우왕(禑王)처럼 하지 말라는 간언을 받아들이셨으니, 아, 우리나라가 만억년의 큰 복을 누리게 된 정치의 토대가 여기에 기반한 것입니다. 조종조께서 대간(臺諫)을 우대하여 사기를 북돋운 것이 일찍이 이처럼 후하였으니, ‘철면어사(鐵面御史)’나 ‘골경대간(鶻骾臺諫)’이라는 칭호는 송 나라에서만 그런 아름다운 칭호를 독점하였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백인걸(白仁傑)과 김성일(金誠一)의 무리처럼 매우 곧다고 일컬어지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대저 조정에 직간(直諫)하는 풍조가 있으면 권세 있는 간신이 자취를 감추어 혼란의 조짐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 때문에 급암(汲黯)이 조정에 있자 회남왕(淮南王)이 침략 계획을 중지했고, 양관(楊琯)이 재상이 되자 곽자의(郭子儀)가 음악(音樂)을 줄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간을 설치하는 것은 전적으로 임금의 득실(得失)을 위해서일 뿐만이 아니니, 위로는 대신(大臣)에서부터 아래로는 백관(百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정(邪正)을 규찰하여 임금의 이목(耳目)을 돕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당 나라와 송 나라 때에 임금이 직접 대간을 선발했던 것은 진실로 이런 이유에서였는데, 권력 있는 신하가 정권을 잡으면 일찍이 먼저 대간의 직임을 없애어 임금의 이목을 빼앗았으니, 이임보(李林甫)와 장채(章蔡)의 무리들이 이런 경우입니다.
옛날에는 신하가 간언을 극진히 하였는데 후세에는 재앙을 두려워한 나머지 신하들이 더러 할 말이 있어도 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한 나라 때부터 그 관직을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대관이 직임을 제대로 거행하면 다스려지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어지러웠으니, 어찌 그 한계가 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본조에서 언관(言官)을 폐지한 것은 행여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태평성세처럼 신하들이 간언하는 일을 극진히 하는 것을 회복할까 해서입니까? 그렇지만 간언할 일이 있으면 북을 두드리고 세워 놓은 나무에 임금의 과실을 써서 붙이며, 소경이 교훈적인 말을 올리고 공인(工人)들이 경계할 말을 아뢰며, 선비들이 의견을 올리고 백성들이 논의하는 등등의 규례는 아직 옛날대로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그 직임만 폐지하였으니, 장차 폐하께 이목이 되어 줄 신하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발호하여 전횡하는 조짐이라도 있게 되면 누가 다시 그 책임을 전담하겠습니까.
《서경》에 이르기를, ‘어지럽지 않을 때에 나라를 안정시키고 위태롭지 않을 때에 정치를 제정한다.’고 하였으며, 《주역》에 이르기를, ‘건하곤상(乾下坤上)이 태괘(泰卦)이고 곤하건상(坤下乾上)이 비괘(否卦)이다.’라고 하였으니, 윗사람의 뜻이 아래에 통하지 않고 아랫사람의 마음이 위에 전달되지 않으면 상하가 꽉 막혀서 치세를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지금의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게 대간과 풍헌(風憲)의 직임을 맡기시되, 그중 강직한 신하 몇 사람을 선발하여 어사(御史)와 급사(給事)의 책임을 맡김으로써 백관들의 사정(邪正)을 규찰하여 탄핵하고 논박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고금의 제도를 모두 참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외국의 하의원(下議院)의 규례를 원용하여, 칙명으로 각 고을의 준수한 인재 한두 명을 선발하여 매년 1월 서울에 모두 모아 놓고서 백성과 나라의 이해득실을 논의하고 진달하여 부지런히 협력하도록 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많은 계책들이 다 모여들고 정치의 방도가 훨씬 진전될 것입니다.
이른바 외국과 관계된 일을 잘하도록 도모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신은 오늘날 치도(治道)를 논하는 자들이 모두 ‘동도서기(東道西器)’라든가 ‘내수외교(內修外交)’라고 하는 말을 들었으니, 시의(時宜)에 통달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한가로운 겨를이 없으면 사전에 예방하는 일은 거론할 상황이 못 되는 것이니, 어떻게 정치와 교화를 잘 시행하고 모든 사무를 제대로 잘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사람의 마음은 믿는 바가 있어야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환난을 겪은 뒤로 세상 어느 곳을 찾아봐도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하가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외국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면서 국가를 위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니, 이에 백성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법은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법과 훌륭한 제도라도 어느 겨를에 설치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효과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공법편람(公法便覽)》을 상고해 보니, 다른 나라의 독립(獨立)을 분명히 인정하기도 하고 혹은 묵묵히 인정하기도 한 예가 있었는데, 벨기에[比利時]와 스위스[瑞士] 등의 나라에서는 이미 이를 시행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본조에서 그 규례를 원용하여 우호를 유지하고 있는 여러 나라에 공문을 발송하여 2, 3년 동안 다른 나라에게 분명한 인정을 받게 된다면, 외환(外患)이 이르지 않아 민심이 안정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큰일을 할 수 있으니, 정치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기르며, 나라를 풍족하게 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보유하며, 삼엄하게 경계하여 국경을 견고하게 한다면, 다시 어찌 저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무릇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상대로 하여금 나를 대비하도록 하면 권한이 나에게 있지만, 나로 하여금 상대를 대비하도록 하면 권한이 상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사세로 볼 때 항상 상대를 대비하는 데에 방법이 없는 것만을 근심하니, 누군들 권한이 상대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신하들은 안일을 꾀하고 세월만 보내면서 어려운 국가의 형세를 호전시킬 방도는 생각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관망만 하고 있으니, 신이 매우 통곡하고 탄식하는 바입니다.
외국과 교섭하는 규례에 근거할 때 오직 조계지(租界地)를 제외하고는 백성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법이 없는데, 더군다나 경성(京城)의 궁궐 가까이에 누가 감히 본국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뿌리박고 사는 경우가 있단 말입니까. 지금 외국 사람들이 도성 가까이에 바싹 접근하여 사는 데에 거의 제한이 없으니, 장차 그런 풍조가 만연해지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막지 않는다면, 신은 까치집을 비둘기가 차지해 버리는 것과 같은 탄식이 백 년도 못 되어 발생하고 멧돼지가 날뛰는 것과 같은 재앙이 항상 궁궐 안에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어찌 매우 분하고 근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지금 갑자기 몰아낼 수는 없는 형편이니, 각국의 통상하는 규례에 의거하여 그들을 우리 국적(國籍)에 올려 우리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한편 우리 백성들이 사사로이 집을 파는 것을 엄금하여 조금 통제를 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듯합니다. 그리하여 자강(自强)의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날을 기다려서 변통하여 처리할 방도를 시행하는 것이 편의에 부합할 듯합니다.
그리고 외국과 교섭하는 데에 있어서는 사명(使命)의 관원을 더욱 신중히 선발함으로써 서로 우호를 다지고 일의 기미를 살피며, 신용을 중시하고 힘써 선린(善隣)의 관계를 세워 이웃 나라와의 정의(情誼)를 돈독히 해야 합니다. 장차 종묘사직을 무너뜨리게 될지 우리의 국체(國體)를 높이게 될지가 바로 그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신중하게 선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천성적으로 훌륭하시고 지혜로우시니, 아,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시어 선조의 업적보다 더욱 빛나게 되고 자주와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시게 된다면,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흠앙하고 경축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 청(淸) 나라 또한 정도에 지나쳤던 점을 반성하고 새로운 조약을 맺기를 어찌 바라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비록 지금이라도 청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약을 개정함으로써 우방(友邦)의 대의(大義)를 세우고 천하 만세에 분명히 알리는 일이 나라를 위한 떳떳한 법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신은 들으니, 청 나라의 요동(遼東) 변지(邊地)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海蔘衛] 등지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우리 백성들 중에 저들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사는 자들이 무려 4, 5십만 가구나 되는데, 호소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저들의 멸시를 받고 있다고 하니, 또한 매우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장차 조약을 정한 다음 이들 지역에 영사(領事)를 새로 두어 우리 선왕의 백성들을 보호한다면, 다른 나라 보기에도 거의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또한 부역과 공물을 바치는 데에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소장을 의정부에 내리시어 하나하나 시행을 논의하도록 명하소서. 위의 여섯 가지 조항을 하나하나 채택하여 시행하고 고쳐 가면서 일을 완수하신다면, 실로 백성과 나라를 위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이른바 매우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 여섯 가지 조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된다는 것은, 대개 적임자를 임용하면 강령이 시행되는 데에 따라 조목들도 순조롭게 행해지며, 부적격자를 임용하면 일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으로, 가령 장수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를 구하여 기무(機務)를 맡기지 않는다면 끝내 군대를 양성하여 위엄을 떨칠 날이 없을 것이니, 무기를 제조하는 일, 재정을 다스리는 일, 인재를 양성하는 일, 그리고 언로나 외교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치도(治道)가 나아지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게 아니라 훌륭한 인재를 얻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어진 인재가 이르지 않는 것을 근심할 게 아니라 구하여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않은 것을 근심하고, 구하여 찾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게 아니라 예우가 돈독하지 않은 것을 근심하고, 예우가 돈독하지 않은 것을 근심할 게 아니라 전적으로 맡기기를 오래도록 하지 않은 것을 근심해야 합니다. 진실로 이 점을 반성하여 정성을 미루어 널리 인재를 구하고, 예의를 다하여 대우하며, 오래도록 맡겨 전적으로 책임 지운다면, 아무리 인재가 드문 때라고는 하지만 어찌 한 세상을 함께 구제할 정치를 펼칠 자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 우리나라는 한쪽 모퉁이에 치우쳐 위치해 있고 태평을 누린 지 오래이며, 게다가 붕당(朋黨)이 서로 대립하여 권위를 가지고 세도를 부리는 나쁜 습성이 굳어져서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는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매우 좁아서 비록 한기(韓琦)나 범중엄(范仲淹)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등용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매우 서글프게 여겨서 한 말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삼진(三辰)이 빛나지 않으면 선비를 발탁하여 재상을 삼고, 융적(戎狄)이 복종하지 않으면 병졸을 선발하여 장수를 삼는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판국이 많이 변하여 천하가 각축을 벌이는 때에는 잘못된 규례를 제거하고 매우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여 우선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을 고쳐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5백 년의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고 4000년의 대례(大禮)를 보호할 수 있으니, 그 관계된 것이 돌아보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순 임금의 임금 됨됨이를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장엄하고 단정하게 하며 임금으로서 맡은 일을 바르게 하였으니, 무위(無爲)로 다스린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순 임금이 어찌 마음을 쓰는 바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사흉(四凶)을 제거하고 16명의 재상을 등용하되 3년마다 치적을 고과(考課)하고 세 번 고과한 뒤에 출척(黜陟)하여, 하늘을 대신하여 공정하게 직임을 세우고 자신의 직분을 각각 다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순 임금은 우(禹) 임금과 고요(皐陶)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으셨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훌륭한 인재를 구하는 데에 수고롭고 인재를 얻어서는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당 나라 중엽에 하북(河北)의 번진(藩鎭) 세력이 왕명을 어기고 발호하여 이미 천하의 절반을 잃게 되었는데, 이덕유(李德裕)가 재상이 되어 무종(武宗)에게 고하기를, ‘재상이 적임자가 아니면 폐하께서는 죄벌(罪罰)을 단행하시며, 천하의 정령(政令)은 중서성(中書省)에 일임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니, 무종이 그 말을 따라서 중흥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이강(李綱)도 이덕유의 말을 따라 매우 간절하게 임금에게 고하면서 송 나라 왕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기를 바랐습니다. 대개 위에서 중요한 일을 통솔하고 아래에서 세부적인 일을 맡는 것은 바로 천지의 불변하는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래서 육지(陸贄)는 《서경》 주관(周官)에 입각하여 상소하기를, ‘천자는 삼공(三公)을 통솔하고, 삼공은 육경(六卿)을 통솔하며, 육경은 직임을 나누어 관장하니, 조정에서 관직을 임명하는 일에 있어서 임금은 단지 보상(輔相)만을 가려서 임명하고, 보상은 장관(長官)을 가려서 임명하며, 장관은 이속(吏屬)을 가려서 임명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부필(富弼)은 임금에게 간언하기를, ‘천자는 일정한 직사(職事)가 없고 오직 대신의 사정(邪正)을 분별하여 출척하는 것이 바로 맡은 직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논하건대, 임금은 다만 어진 재상을 가려서 임명하고 장관을 보증하여 추천만 할 뿐이며, 정령이 의정부와 육부(六部)에 귀결되도록 총괄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여러 가지 사무가 제대로 처리되어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를 행하는 요체입니다.
옛날에 우리 인종 대왕(仁宗大王)께서 말씀하시기를, ‘현인(賢人)과 군자(君子)가 비록 출처(出處)를 어렵게 여기지만, 또한 임금이 구하는 바가 얼마나 정성스러운가에 달려 있다. 구하여 얻었는데 만약 과연 훌륭한 인재라면 발탁하여 재상에 앉히는 것을 어찌 어렵게 여길 게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혹 옛 규례에 얽매인다면 이는 훌륭한 인재를 구하는 길이 넓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왕의 이 말은 매우 뜻이 깊습니다. 이는 진실로 훌륭한 인재를 구하여 재상에 임명하는 법이 될 수 있는 말인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일찍이 이 말을 가슴에 새긴 채 자나 깨나 그런 인재를 간절하게 생각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조종께서 재상을 가려 임명한 뜻을 우러러 본받고 순 임금이 사흉을 물리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한 뜻을 미루어 본받아서, 훌륭한 재상을 선발하고 임용하여 그들에게 인재를 출척하는 책임을 맡기고, 장관을 보증하고 추천하여 정령이 의정부에 귀결되도록 총괄하시되, 만약 장관이 적임자가 아닐 경우에는 마치 무종(武宗)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것처럼 죄벌을 단행하시고, 장관이 적임자일 경우에는 사소한 일은 유사에게 맡겨 안팎을 나누어 다스리소서. 그리고 대임(代任)을 추천하고 보증하여 임용하는 법과 몇 년의 기한을 정해 놓고 구임(久任)하도록 하는 법을 엄격히 세우고, 열성조의 규례를 따라 2품 이상과 각도의 도신(道臣)에게 각각 한두 사람씩을 추천하도록 하여 재주를 시험한 다음 조용(調用)하되, 만약 그 사람이 적임자가 아닐 경우에는 보증하여 임용한 자에게도 같은 죄를 단행하기를 마치 한 나라가 호광(胡廣)을 처벌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던 것처럼 하시고, 만약 재주가 출중할 경우에는 상격(常格)에 구애받지 말고 등급을 뛰어넘어 발탁하여 임용하소서. 또한 외관(外官)을 주의(注擬)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명(明) 나라의 규례를 따라, 전장(銓長)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하지 말고 매달 정사를 열 때에 의정부와 육부가 모여 의논하여 의망한 사람을 만장일치로 다 좋다고 한 뒤에 전부(銓部)로 하여금 주의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청탁하는 폐단이 있어 훌륭한 인재의 벼슬길을 방해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전적으로 수령이 훌륭한지 훌륭하지 않은지에 달려 있는데, 수령을 신중하게 가리는 방법으로 진실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아, 위로 대신에서부터 서울과 지방의 각 직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임을 추천하고 보증하여 임명하는 방법으로 실시하며, 하의원의 규례대로 온 나라의 인재를 다 불러들여 시대를 위해 쓰임이 되도록 한다면, 천하에 그 면모를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여 중흥할 날이 머지않아 도래할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합니다만, 주자는 임금에게 간언하기를, ‘폐하께서 겉으로는 홀로 결단하시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좌우가 은밀히 그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서 정령이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라고 하였고,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도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의 직책을 행하면 정신은 날로 소모되고 모든 일은 복잡하고 어지러워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대신이 보증하여 추천하는 방법을 거치지 않고 임금이 직접 조서를 내려 임명한다면,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는 바르지 못한 마음이 생겨 간사한 신하들이 일제히 나와 정신을 피로하게 하고 업적을 무너뜨리게 되어 막을 수 없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령이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여러 곳에서 마구 나온다면, 일을 통제하여 다스리는 곳이 없어 국가의 체모는 존중되지 않고 여론은 들끓게 되어서 제어할 수 없는 형세가 있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안정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폐단이 누적된 나라로서 서양의 풍습은 날로 만연하고 인심은 방자하여 옛날과 매우 다른데, 성상의 마음에 큰 결단을 내리고 많이 각성하시어 편향되고 가려진 의혹을 없애고 정치의 요체를 용기 있게 시행하시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상이 실추되는 일은 한층 고질이 되고 날로 심해지며 정령과 조처는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여, 중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끝내 국가의 위태로운 상황을 안정된 국면으로 돌려놓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신하 중에 폐하를 위해 할 말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재앙을 두려워하고 위엄을 겁내어 구차하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삼천리 강토와 500년 동안 어진 정치로 백성을 길러 온 나라로서, 나라의 형세가 이처럼 위급하기 그지없는데도 솔선하여 끝까지 간언함으로써 폐하의 마음을 돌리고 무너지려는 종묘사직을 구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니, 진실로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보지 못한 일입니다. 신은 삼가 너무도 통탄스러워 감히 형벌을 피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폐하를 위해서 남김없이 말을 아뢰어 이렇게 외람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망녕됨을 용서하시고 어리석은 충정을 살펴 주소서.
전해 오는 말에, ‘맹호(猛虎)가 산에 있으면 명아주와 콩도 뜯을 수 없고, 준걸(俊傑)이 조정에 있으면 적국이 군사를 철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단간목(段干木)이 위(魏) 나라에 등용되자 제후가 전쟁을 중지했고, 사마광(司馬光)이 송 나라에 재상이 되자 금(金)과 요(遼)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최영(崔瑩)이 정권을 잡자 왜구(倭寇)가 달아났고, 본조에서는 임경업(林慶業)이 변방을 수비하자 북쪽 오랑캐가 군사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어진 사람은 만리 밖에서도 적을 막아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 어느 누가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이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 있지 않고 무기와 군사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외국의 역사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영국은 예로부터 임금치고 그다지 출중한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하여 사람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재능을 다하였으니, 이 때문에 강국을 이루어 천하를 횡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러시아는 마치 진(秦) 나라가 객경(客卿)을 잘 등용했던 것처럼 사방 여러 나라의 훌륭한 인재들을 모조리 불러들였으니, 하물며 본국의 인재에 있어서겠습니까. 이로써 외국이 부강해진 방도를 궁구해 보건대, 공정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믿음으로 정치를 시행한 데에 불과하니, 이것이 숭상할 만한 가까운 귀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병통으로는 작은 일을 살피느라 큰일을 빠뜨리며 가까운 데에 어두워 큰일을 잊는 일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漢) 나라 문제(文帝)는 제(齊) 나라 선왕(宣王)이 맹자를 등용하지 않은 것을 탄식했지만 도리어 동중서(董仲舒)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수(隋) 나라 문제(文帝)는 한 나라 문제가 동중서를 등용하지 않은 것을 탄식했지만 도리어 왕통(王通)을 등용하지 못했으며, 송 나라 신종(神宗)은 정백자(程伯子)를 만나면서도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였으니, 심하다 하겠습니다. 후세의 임금은 인재를 알아보는 데에 밝지 못하면서 가려진 것을 깨닫기 어려웠으니, 푸줏간에서 고기를 팔고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 속에서 인재를 구하여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힌 것에 비할 때 또한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만약 신의 말을 쓰지 않는다면 후세의 탄식을 남기게 될 것이니, 앞의 여러 임금과 같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 선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선조(宣祖)께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아무리 무도(無道)해도 어찌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직 지혜가 밝지 못하기 때문에 난세를 치세로 여기고 간신을 충신으로 여겼으며, 오직 마음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을 보면 그가 도리를 지키는 것을 꺼리고 말재주가 있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계로 삼을 일들이 계속 이어졌건만 끝내 깨달은 자가 없었던 이유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장차 인재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사람을 잘 알아보아야 하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이 《백선미근(百選美芹)》이라는 책 속에 다 실려 있으니, 부연해서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강직하고 정직하며 끝까지 간언하며 벼슬에 신중히 나아가면서 쉽게 물러나는 사람은 군자(君子)이고, 겉으로는 유순한 척 하면서 상대의 비위나 맞추고 동료끼리 시기하며 자리를 잃을까 근심하며 재물을 모으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사람은 반드시 소인(小人)입니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의 소인은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소인은 알아보기가 쉬운 것은, 정상이 드러나 본심을 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아랫사람들이 충성스러운지 아첨하는지 어진지 어질지 않은지 살피시되,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은 물리치시어 조금도 연연해하지 마시고, 충성스럽고 훌륭한 사람은 벼슬에 나오도록 하여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소서. 그리고 일단 임명한 뒤에는 의심하지 말고 참소와 이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면, 장차 어진 인재들이 잇따라 나와서 공적이 모두 빛날 것이니, 세도(世道)를 일신하고 천명(天命)을 맞이하여 계속 이어 가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변통해야 할 사무가 대략 비록 이와 같지만 성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치를 하는 것은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으니, 인재를 취하되 임금 자신의 덕부터 수양하고, 자신의 덕을 수양하되 도(道)로써 하고, 도를 닦되 인(仁)으로써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주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연원(淵源)을 찾은 다음 치도(治道)를 모색하고 본말(本末)을 꿰뚫은 다음 대중(大中)을 세운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우원하다 여기지 마시고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시어 경사(經史)를 익히고 연구하심으로써 대중(大中)과 지정(至正)의 근본을 수립하여, 본체가 제 역할을 하자 작용이 행해지기를 마치 샘의 근원이 맑아 물줄기가 깨끗하고 몸이 곧아 그림자가 단정한 것처럼 하소서. 그런 뒤에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 이르기까지, 안에서 밖에 이르기까지 일체 시행하고 조처하시는 데에 있어 모두 지극히 공정한 도를 행하고 온갖 사사로운 통로를 단절하시어 강덕(剛德)이 유행하고 좌우(左右)가 바르게 되도록 하소서. 이어 선악을 분별하여 상벌의 형전을 엄격하게 하고 법령을 신중히 함으로써 천하에 커다란 신뢰를 펴시며, 큰 결단을 내리시어 해와 달 같은 밝은 빛을 발하고 우레와 천둥 같은 위엄을 떨치심으로써 아첨하는 신하를 물리쳐서 사대부의 염치(廉恥)를 장려하시고 무너진 기강을 정돈하여 조야(朝野)의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이것이 바로 동중서가 말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만백성을 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역》에서도 ‘그 근본을 바르게 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폐하께서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하는데도 화란이 끊이지 않고 적국이 두려워하지 않으며 민심이 복종하지 않고 여론이 잠잠해지지 않아서 정치의 도를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는 예로부터 없었습니다.
넓은 견문에 도를 지닌 곧고 신실한 사람을 선발하여 동궁 전하를 보익(輔翊)하게 함으로써 태자의 학문이 날로 진전되고 어질다는 소문이 잘 드러나서 천하의 근본을 견고하게 한다면, 실로 종묘사직과 백성의 복일 것입니다. 어리석고 비천한 소신이 충성과 울분에 북받쳐서 말을 절제할 줄 모른 채 외람되이 성상을 거스르는 발언을 많이 하였으므로 땅에 엎드린 채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옛날 일을 인용하여 오늘날을 논한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읽어 보겠다.”
하였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