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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있어서 법이란 무엇인가?
글 각묵스님
1 교학으로서의 법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으로 정리하였다.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다.
계(界, 요소, dhātu): 12처의 마음(마노)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모두 22가지가 있다. 22가지는 아래 제13강의 자료를 참조할 것.
제(諦, 진리, sacca): 4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집성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멸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도성제)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t(iccasamuppāda): 12연기를 말한다.
2 수행으로서의 법:
주석서들은 37조도품(助道品, 菩提分法, bodhipakkhiya-dhammā)을 들고 있다.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성요소), 8정도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
이러한 불교의 기본법수들을 불교에서는 법(dhamma/dharma)이라 한다.
불교교학에서 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고유성질을 가진 것)를 뜻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전자는 Dhamma로 후자는 dhamma로 구분해서 표기하기도 한다. 위에서 나열한 온처계근제연과 37조도품은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Dhamma)이다. 아비담마에서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을 법(dhamma)이라고 정의한다.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 법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존재일반을 어떤 기준으로 일목요연하게 재구성해서 설명하 였다. 그 기준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한다. 불교학의 토대가 되는 아비달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sabhava)을 가진 것(sabhāvaṁ dhārenti)’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면 지대(地大)는 견고성을, 탐욕(貪)은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성냄(瞋)은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각각 고유성질로 가진다. 그래서 75법이니 100법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의 존재일반은 모두 75가지 혹은 100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4위 82법, 5위 75법, 5위 100법]
이러한 법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무리 지어져 있는데 이 범주를 위(位)라고 부른다.
그래서 5위라는 말은 이러한 제법은 다섯 가지 큰 범주로 분류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마음(心, 心王),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심
리현상들(心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 물질(色), 무위(無爲)의 다섯이다. 한편 가장 오래된 체계인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들(心不相應行)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4위가 된다.
이렇게 하여 설일체유부에서는 마음 1가지, 심리현상들 46가지, 마음과 함께 하지 않는 현상 14가지, 물질 11가지, 무위법 3가지하여 모두 5위75법들을 인정하고, 비슷한 방법으로 유식에서는 5위100법을, 상좌부는 4위82법을 설한다.
그래서 5위100법이니 5위75법이니 하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비록 각 학파마다 일체법(諸法)의 개수를 조금씩 다르게 설정하지만, 존재일반을 이처럼 여러 가지 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통찰하는 것은 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한결 같다.
3 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의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이영애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칭이나 언어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강조하셨다.
[고정관념의 해체와 무상/고/무아의 통찰]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이유이다.
그것은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처럼 제법들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보면, 자아(我)니 인간(人)이니 중생이니 영혼(壽者)이니 우주니 하는 무슨 변하지 않는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을 척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인무아)
둘째는 이렇게 법들로 해체하면, 이러한 법들의 찰나성(無常)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찰나를 봄으로 해서 제법이 괴로움(苦)일 수밖에 없음에 사무치게 되고, 제법은 모두가 독자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연기적 흐름(無我)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법무아).
자아니 인간이니 하는 개념적 존재(施設, 빤냣띠, 산냐)로 뭉뚱그려두고는 그것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철견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아비달마는 존재일반을 철저히 법들로 분해해고 해체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아비달마에서는 법의 찰나성을 통찰한 깨달음을 무상(無相)해탈이라 하고, 괴로움과 무아를 철견한 깨달음을 각각 무원(無願)해탈과 공(空)해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화엄경 등 대승경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해체해서 보기는 초기불교의 생명]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지워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법들로 해체해서 그들의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하여, 염오(厭惡, 넌더리, 역겨움, 구토)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慾]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수많은 초기경전의 일관된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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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라는 관문을 넘지 못하고 불교를 논하면 안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 그는 부처님 제자가 아니요, 불교적 인생관,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신념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던,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던,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던,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하기 때문이다. 직관을 강조하는 반야부의 여러 경들조차 해체 끝에 드러나는 법의 자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놀란 적이 있다.
이런 토대위에서 그들은 무자성과 공의 직관을 다그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법들로 해체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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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글에 대한 생각-------->
아비담마의 전향적인 예라 할수 있습니다.그래서 지금까지 강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5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조건지워진 법들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있다고 하는데
나를 눈코 입코귀.......라
는 존재는 눈코입귀..12처로 해체하고 몸과 정신으로 해체되고......
부처님이 이렇게 나를 해체해서 보는 것이 불교라고 하셨을까요?
12처,18계,오온,12연기는 마음이 어떻게 연기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교리이지 나를 해체하는 해부학이 아니랍니다.
1. 12처 감각장소라 하고 눈코귀입...........라고하는데 이때 감각장소라면 어딜 가르킬까요?
눈은 눈썹 밑이고, 코는 얼굴 가운데, 입은 얼굴에서 아래 이런 것을 가르킵니까?
눈코귀가 얼굴에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장소(처 아타나야)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찰라멸 문제를 설명하고자 하므로 12처는 생략합니다.)
2. 지대(地大)는 견고성을, 탐욕(貪)은 대상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성냄(瞋)은 대상을 밀쳐내는 성질을 각각 고유성질로 가진다. 그래서 75법이니 100법이니 하는 말은 이 세상의 존재일반은 모두 75가지 혹은 100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 각묵스님은 75번, 100법을 이야기 하시는데 1000법도 나올법 한테 외도 요소설과 흡사 하네요.현대 원자설 같지요.
과학의 원자설이 생각납니다. 또 법에 자성이 있다고 하는데 [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하는 근본 실체로
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라고 중론에서
용수는 비판합니다.
끌어당기는 성질, 뜨거운성질, 따뜻한성질 존재의 본성론과 흡사하지요.
불이 뜨겁다고 하는 것은 불 자체가 뜨거운 것입니까?
사람이 뜨겁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불자체에 뜨겁다는 성질이 있을까요?
법의 고유성질이란 말이 가능할까요?
3. 찰라생멸은 아무리 짧은 단위라도 존재이겠지요.
-> 전찰라후찰라가 짧은 순간에 간격없이 이어진다는 등무간연은 중론에서 비판받급니다.아래파란글은 초기불전글입니다.
찰라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기불전글
찰나는 ‘상주론’이 절대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좌부 아비담마에 의하면 찰나는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찰나는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모든 주석서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sub-moment라고 옮기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찰나>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아찰나라는 술어는 주석서의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찰나는 전문술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이것은 고유성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찰나를 아찰나로 쪼갤 수는 있고 아찰나를 다시 아아찰나로 아아찰나는 다시 아아아찰나로 ... 이렇게 쪼갤 수는 있지만 이렇게 아찰나로 쪼개버리면 법이 가지는 고유성질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전문술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비담마 논사들의 얼마나 철저한 태도입니까? 그러므로 불교사의 적통이라고 자부하는 상좌부에서의 찰나는 절대로 상주론이 아닙니다. 찰나도 이미 흐름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 중관학파의 가유나 가법의 입장과 거의 같을 것입니다만 상좌부에서는 이런 찰나의 법을 가유니 실유니 하는 관점에서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찰나는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입니다. 그리고 전찰나의 법이 멸하는 바로 다음찰나의 법이 조건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단멸론도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남북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하여 아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찰나가 멸하면 후찰나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니 단멸론도 상주론도 아닙니다. 이렇게 찰나와 흐름을 멋지게 설명해냅니다. 이런 것을 상주론이니 단멸론이니 하는 양도논법으로 왈가왈부하려는 것은 초기불교부터 전개되는 불교의 기본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오히려 극단적이고 외도들이나 좋아할 방법론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찰나만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단멸론이 되고 지속만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상주론이 됩니다. 찰나와 상속을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단멸과 상주를 극복한 것입니다. --각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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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사상을 통해 찰라설의 잘못을 지적함--------->
---중관사상(中觀思想)이란 무엇인가? ( 7 Page) [湯田豊『인도사상사』에서]--
『중론』에서는 반대자의 견해를 먼저 든 뒤 용수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저술인『廻諍論』에서는 인도 제학파 가운데 실재론자로서 니야야(Ny ya)학파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같은 불교내의 說一切有部(Sarv stiv din)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有部에 대한 비판은 『중론』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용수는 유부의 사상적 특성으로서 「法有」 사상의 근저를 이루는 自性(svabh va)의 개념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
이 자성이란 연기·공의 개념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유부는 일체 현상의 근본인 법이 자성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용수는 이 자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성이 緣과 因에서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성이 연과 인에서 생긴다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 될 것이다.(15-1)"
"그런데 어찌하여 자성이 실로 만들어진 것이 될까.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인 까닭이다.(15-2)"
이처럼 자성이란 因緣에 의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하지 않는 것이라고 용수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입장과 위배되는 것이며 공의 개념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이러한 자성의 개념을 용수는『중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곧 유부에서는 일체 현상의 작용을 가능케하는 근본 실체로서 법의 자성을 인정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모든 사물에 그러한 실체적 성질은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모든 사물이 실체적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는 것으로, 곧 공인 까닭에 緣由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기와 공의 입장에 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며, 아울러 사물이 연기, 공성의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중론』의 근본 의도이었던 것이다--Ⅰ. 중관사상(中觀思想)이란 무엇인가? ( 7 Page) [湯田豊『인도사상사』에서]
2. 중관학파의 사상적 특징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등의 비판
불멸후(佛滅後) 6·7백 년이 지난 용수 당시의 인도불교는 붓다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당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sarvastiv da)는 세상 모든 것들을 오위(五位)75법(法)으로 나누어 이들 각각을 실체성(實體) 내지는 실재성(實在性)을 지닌 것들로서 파악한 다음, 이들이 여러 형태로 상응(相應) 상반(相反)하는 관계에 의해 모든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일면 붓다의 교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붓다의 교설 내용을 절대시하는 가운데 형성된 관념체계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 어떤 사유 판단에 영원불변의 실체적(實體的) 내지 외부에 실재하는 존재가 전제되고 있다면, 이는 벌써 근본불교의 본질에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무상(無常)·무아(無我)·연기(緣起) 중도(中道)'라는 석존교설(釋尊敎說)의 근본 정신에 위배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석존의 근본 뜻은 석존 자신과 설법내용을 포함한 일체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들이며 연기(緣起)하는 것들임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봄이 옳다. 그리고 석존은 이런 연기법등을 통하여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중도(中道)(madhyama pratipada)에 의해서 정각(正覺)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만일 설일체유부와 같이 다원론적 존재가 삼세에 실재한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근본 불교와 어긋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용수는 이를 비판하고 시정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대승경전인 반야경의 '공관'을 다시 심화시켜 밝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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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에 나타난 등무간연 비판
2. 등무간연(等無間緣)의 고찰
결과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는 사라진다는 일이 있을 수 없지 만,
사라지는 사물이 어떻게(다음 순간을 위한) 연이 되겠는가.
그러므 로 차제연(次第緣)은 불합리하다.(MS 1.9)
심작용(心作用)과 심작용이 찰나간에 생멸하면서 이어지는 것
念念相續을 차제연(次第緣)이라고 한다. ---서정형(서울대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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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인연품(觀因緣品) : 연의 고찰(16게)
9. 사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소멸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물이 소멸했다면 연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니 등무간연(等無間緣)은 타당하지 않다.--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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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존재(法)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소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연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차제연은 없다.
1-9) anutpanne u dharme u nirodho nopapadyate/
n nantaramato yukta niruddhe pratyaya ka //
1-9) 如諸佛所說 眞實微妙法 於此無緣法 云何有緣緣
諸佛께서 說하신 眞實하고 微妙한 法과 같이 無緣인 이 법에 어떻게 연연이 있겠느냐?
사물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된다는 것(次第性)은 타당하지 않다. 또 소멸했다면 무슨 緣이 있겠느냐?--(김성철 중론송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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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nupanne?u dharmesu nirodho nopapadyate/ n?nantaram ato yukta? niruddhe pratyaya? ca ka?//
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後)法이 생기지 않았는데 (前法이)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次第緣(等無間緣)은 不當하다. 소멸했는데 무엇이 緣이겠는가? --(이중표 중론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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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글씨는 초기불전에서 내놓은 찰라설에 대한 의견입니다.
이글은 중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써놓은 부ㅠ분입니다. 자성에 대하여서는 너무 길어 옮기지 못했는데
찰라멸 설명에도 나와 대신 했습니다.
1.[중요한 것은 상좌부 아비담마에 의하면 찰나는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
라고 합니다. 찰나는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부분이지요.
그러나 중론에 의하면 [법의 자성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2. 상좌불교에서 전 찰나, 후 찰라나 하여 ' 등무간연'이라고 찰라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중론에서는 등무간연을 비판합니다.(4가지 예 참고)
3. [만일 설일체유부와 같이 다원론적 존재가 삼세에 실재한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근본 불교와 어긋나는 잘못에 빠지게 된다.]
상좌불교의 12연기 무명-행-명색(정신,물질- 자궁,모태)-육입(감각기관)- 촉-수-야-취-생(태어남)-사(늙어죽음)
태생적 삼세양중인과도 중론에서 비판합니다.
명색을 존재로 설명하고 육입을 감각기관으로 볼때 근본불교와 다르다는 설명입니다.
12연기 명색을 정신,물질,자궁,모태, 6입을 감각기관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좋은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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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습니다. 항상 애쓰시는 노랑님께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법의 [고유 자성(성질)]은 없으나.. 법의 (고유) 성질은 있다고 해야하지 않습니까?..
성질이란말은 존재가 있을때 쓰는말입니다.한 순간도 머무르는 존재가 없는데 성질이 가능할까요? 탐욕이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데 실체가 없는탐욕을 끌어 당기는 성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간해석일 뿐이겠지요.
불법이란.. 세간법이라 할 수 있는 유전문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까?..^^
불법은 환멸,유전 모두 관계하지만 본문은 환멸문을 설명하면서 유전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즉, 무아를 설명하면서 실체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상좌부 불교는 여기에서(=세속)에서 저기(=환멸문, 무아)로 건너가는 잘 만들어진 뗏목(=4념처, 위빠사나) 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배를 타고 건너간 상좌가 보이지 않으니.. 실제론이 되어 전해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만일 상좌부에서.. 법은 실재가 아닌 [무생 무아]임을 깨쳐 전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이라 보십니까?.. 그 야말로 부처님께서 전하고자 하던 수행법이 되는 게 아닐까요?..()..
초심의 견해입니다..().. 남방불교의 수행법은 방법은 보편적인데.. [무생 무아] 인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며, 간화선은 목표는 뚜럿한데 방법이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약점이 서로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상대의 장점을 포함하게 되면.. 분석적인 이들은 상좌부 수행법으로.. 직관적인 이들은 간화선 수행법으로.. 불교계는 탄력과 활기를 뛰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