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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드리는 당부의 말씀
이 글은 수정이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에 저의 일기를 추가해 싣습니다. 일기는 공개합니다만 댓글 다시는 것은 사절하겠습니다. 이 점 양해하여주십시오,
대전 나들이 (고향나들이)
"고향은 우리가 태어나 자라고 집안(가정)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그 곳을 떠났지만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저는 매일 아침 마다 인터넷으로 고향을 둘러봅니다. 거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이 계신 곳이기에 나의 추억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시골입니다.
나의 고향은 자식들의 고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형제와 자식들이 후일 들어갈 수 있는 지하 납골당 묘를 부모님 묘소 옆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손들이 우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도록 하기 위한 생각에서 였습니다. 후손들이 우리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요즘 도시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출생지는 있어도 고향은 없습니다. 시골 고향을 아름답게 꾸미고 아이들도 자주 올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향의 의미에 대해서도 좋은 글을 써야겠습니다. "2019. 12.17일 추가함)
2019년 6월 6일 갑작스럽게 대전을 내려갔다. 학회지에 올릴 논문심사 3건을 복사해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밤새 이를 읽으려는 계획이었다.
내 집에서는 어려운 가정 사정이 생겨 아내에게 대전을 간다고 이야기 해 놓고 홀연히 집을 나섰다. 비가 올 것 같아 우산을 들고 수원에 가서 새마을 호를 타고 갔다.
전철로 대전역에서 타서 구암역에 내려 형님 댁을 들렸다.
물론 가는 도중 동생과 형님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고 동생 집에 하루 밤을 자고 가도 되겠느냐는 양해를 얻어 놓았다.
일이 없으면 형님 댁에서 자는 것이 나에게는 편했다. 한 달 보름 전에 나는 아내와 함께 전주에 가는 길에 대전에 들려 형님과 동생을 만났다.
동생이 가자는 청석골 오리 집 보다는 형님과 내가 동네 식당을 가자고 해서 근처의 추어탕 집에 갔다. 식사도 하기 전에
동생이 카드를 꺼내기에 오늘은 내가 대전에서 소득이 있으니 내가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내가 갑자기 대전에 온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기에 그랬다.
식사를 하는 도중 형수 님이 자기들이 내야 하는데 항상 얻어 먹기만 한다고 하자 동생이 “형수 님이 예금해 놓은 것을 일부나마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옛날 우리 형제가 형수 님에게 밥을 얻어 먹을 때에 많은 신세를 졌다는 뜻이었다.
이는 아주 멋진 명언이었다. 동생은 요즘 음악 교실에 가서 노래를 배우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식사를 하면서 앞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사람이 동생 친구들이었고, 그 중에는 형님도 아는 분이 있었다.
동생이 그들에게 소주 한 병을 사 주었다. 그분 들 중 한 두 명이 나가면서 우리 테이블에 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 나는 형수 님과 형님께 각각 용돈을 드렸다. 동생 집에 오면서 동생의 또 한 마디 명언을 들었다.
조카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내가 “앉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일어난다”고 했더니
동생 왈 “소가 일어날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그 경우에 딱 떨어지는 명언이었다.
식사 후 나는 동생 집에 와서 잠깐 동안 동생에게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들 문제를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걱정이 없는 사람이 없다' 고 응대했다.
10시 반까지 500 매 가량의 심사 논문을 정독했다. 그리고 내일 부모님 묘소에 가자고 동생이 제의하여 동의를 표했다. 밤중에 아내가 전화를 해서 갑자기 집을 나온 것을 불평했다.
아침에 일어나 동생 집의 컴퓨터에서 올사모 카페를 열어보았다가 댓글 형식으로 올리는 나의 일기를 신고 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고
나는 그 때서야 깜짝 놀랐다. 댓글이 내가 들릴 때마다 추가하는 것으로 쌓였기 때문이었다. 비도 오고 해서 부모님 묘소를 가는 계획을 포기하고 아침 9시에 일어나 구암역에 와서 동생이 차비를 주길래 받으면서 내가 10배를 받은 것으로 기억하겠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을 되짚어 왔다. 지하철 경로석 가운데 빈자리에 65세 정도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앉아도 되느냐"고 하길래 물론이지요 했다.
그 부인은 내리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내렸다. 마음이 도타우신 분이었다.대전에는 인정이 넘치고 예의가 살아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불시에 300 리 길을 다녀왔다. 동생이 휴대폰으로 어머님 사진을 보내면서 “형님 서울로 가셨습니다” 라는 글을 어머님에게 보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이 애들이 왜 안 오나?" 하고 묻지 않으시던 가 했더니 "오래 기다리셨다” 고 하시더라는 답신을 받았다.
동생은 가방끈은 짧지만 그 멋진 명언을 자주 한다, 이 점에서 동생은 나의 스승같다.
대전은 나의 마음의 고향이고 언제던 가고 싶으면 손쉽게 나들이 삼아 갈 수 있고, 사람들의 인정이 넘치는 도시라고 거듭 생각했다. 아직도 도타운 인정과 예절이 살아 있음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할아버지 (1883~1965)
할아버지는 나와 60년 차이인 계미생이어서 항상 나와 동갑이라고 하셨고, 8살에 아버지를 여윈 나를 할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돌봐 주셨다. 그 은공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어머님에 실린 사진이다.)
1883년 출생, 83세로 1965년 서거
동생이 어제 보내준 어머니의 81세 때 사진 아버지 사진(30대에 찍음)
1909년에 출생 2020년 음 11월 29일 92세에 서거. 1911년에 출생 1950년 음 7월 16일 40세에 서거.
내 고향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전경(2000년도) (우리 어머님에서 복사) 느티나무는 500년의 마을 역사를 머금고 있다.
이 마을 초창기에 심은 나무인 듯 하다. 오래된 느티나무는 얼마 전 베어지고 작은 나무가 지금은 마을을
밤낮으로 지키고 있다.
2019. 6월 11일
나의 일기를 본 카페에 '고향나들이' 라고 고치고 "생활이야기" 란에 올렸다. 그리고 일부 댓글을 지웠다. 간간히 중요한 나의 일기를 추가해 올리겠다.
6월 10일 월요일 맑음
부모님! 어제는 제가 대전 갔다 온 이야기를 카페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어머님 생신 때에 찍은 사진을
핸드폰으로 보내왔습니다. 저녁에 기영이가 저의 집에 와서 이를 컴퓨터에 올리고 다시 대전 나들이에 첨부해 올렸습니다.
언제 찍은 사진인 가를 확인하기 위해 케이크에 꽂은 촛불을 세어보니 어머님 82세 생신 때에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미국에 가 있을 때 어머님의 생신 날 동생 집 가게에서 찍은 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눈빛을 보니
누군 가를 기다리시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어머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사진을 보면서 한 수 읊겠습니다.
어머님의 눈빛에 가득한 수심!
무슨 걱정 그리 많은 듯,
단정하게 차려 입으신 옷차림
고운 듯하나 외로움을 띠었네요.
30년 전의 모습을 뵈우면서
부족했던 자식의 후회함이
한줄기 눈물로 흐릅니다.
마음은 400 리 길을 순식간에 달려
매일 아침마다 부모님 묘소를 찾지만
말씀은 들리지 않네요.
아직 제가 말과 마음의 공부가 부족해서 입니다.
꿈에서라도 살짝이 말해주세요.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옆으로 빨리 가고 싶습니다.
(추가) 2019년 6월 19일 막내아들 대영이가 손자, 손녀를 데리고 묘소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잔디가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 어머님 아버님! "증손자 서진이고 6살입니다. 증손녀는 예진이고 4살입니다"라고 인사를 올렸다. 처음 찾아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술잔을 올렸으나 아이들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저의 우둔함과 불민함을 후회하고 참회합니다.
오다가 칠갑산 천장리 출렁다리를 관광하고 그날 대전을 들려 형님과 동생 댁을 들러 왔다.
천장리 출렁다리를 갔을 때 60년 전 중학교 동창 황인세 씨와 찍은 사진이다.
황인세 씨는 현재 정산향교 전교이다.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언제나 만나면 반가운 친구이다.
아래 사진은 2007년도 2월 뉴질랜드 해안 방문
뉴질랜드 박노욱 선생님 가족과 현장에서 만난 가족과 함께 (2007.02)
(아랫쪽) 중학교 친구 황인세 (2018. 6.)
우리는 그 곳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귀국했다. 적도를 넘어서면 계절이 바뀐다. 우리나라 여름은 그곳에서는 겨울이다. 여름에 간 우리는 다시 한 철의 여름을 맞이했다. 당시 우리 내외는 박노욱 선생 댁에 기숙했고, 매주 일요일에는 아침에 바닷가를 네 사람이 함께 산책했다.
박노욱 선생의 호는 일여(一如)이다. 선생은 나의 1년 대학 선배이지만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고 학문의 동반자이다. 60 년 간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있다. 사진은 귀국하기 전 기념 여행으로 해변가를 갔을 때 우리 내외와 일여선생 내외분, 그리고 해변에서 만나 그 후 헤어진 교포 가족 3명이다. 그 이름 모르는 아이들이 지금은 성인이 되어 건강하게 어디서 살겠다.
6월 29일 토요일 흐림
어제도 오늘도 아침 일찍 문안 드리는 것이 혹시 아침 잠을 깨워드리지 않나 염려됩니다. 사효당기를 찾아 편안히 계심을 확인하고 오늘도 고향 나들이를 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6월 30일 일요일 맑음
오늘 기영이에게 성질을 부린 어리석음을 참회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오늘도 금강경 독송을 티브이를 통해서 따라 했습니다. 참회합니다. 나무불, 나무불, 나무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어머님과 자주 함께한 염불을 다시합니다. 성질이 날 때면 염불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겠습니다.
7월 2일 화요일 맑음
어머님! 어제는 인천 적십자병원에 입원한 큰 누님 문병을 다녀왔습니다. 눈매며, 피부색이 어머니를 닮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어머니 꿈을 자주 꾼다고 하던군요. 어머님! 안녕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죠!(3일 새벽 5시)
7..20 토요일 맑음
어머님 오랜 만입니다. 새벽 3시에 현희가 제 딸을 데리러 간다고 음식을 준비하네요. 저녁에 대영이가 서진(6살) 손자를 두고 간답니다. 대영이는 민경이에게 저녁을 사주고 밤 9시 경에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거실에서 두 아이와 넷이 자는데 12시에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내일 일찍 일어나면 고라니를 보여주겠다고 했으나 아이들이 모처럼 만났는데 잠을 자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침 5시부터 고라니가 내려 오는 가를 연구실에서 유심히 살폈으나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10시 쯤 아이들이 아침 식사를 한후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먼저 달마스님 앞에 서서 기도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삼배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잠간 동안 명상을 하게하였습니다. 두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달마스님 앞에 걸어 놓고 그림 이야기를 해보게 했습니다. 12시 쯤 큰 딸 현숙이가 외손자 김준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의 큰 며느리이고 준이의 외숙모인 양연욱이가 케익을 가지고 와서 준이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2시쯤 고라니가 저의 연구실 아래로 내려온 것을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보라고 불렀습니다. 조용, 조용히 와서 창가로 고라니를 보게 했습니다. 키가 작은 서진이와 예진(4살 손녀)이를 안아서 창문 밖으로 고라리를 보게했습니다. 고라니는 저희가 심어 놓은 호박을 따 먹으러 온 것입니다. 호박 잎, 칡 넝쿨에 가리어 겨우 등 만을 살짝 보여주었습니다. 서진이는 동물원(서울대공원)에서 고라니를 이미 보았다고 합니다. 갇힌 고라니와 자유로운 고라니가 다름을 알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고라니가 언제 산으로 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고라니에 대한 글을 써서 본 카페에 올리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7월 24일) 고라니에 대한 자료를 모아 놓았습니다. 요즘 "지당에 비뿌리고" 라는 책을 구입하여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오늘 중 다 읽을 것 같습니다. 어제 큰 아들 기영이는 교사를 대동하고 2주간의 호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밤에 큰며느리와 통화를 하고 큰 손자 용진이에게 용돈을 보내주었습니다. 물론 아내의 생각을 따른 것입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안녕!
7월 28일 일요일 맑음
어머님! 새벽 3시입니다. 장마비가 며칠 내리다가 맑은 날씨가 되었습니다. 좌측과 뒤쪽, 앞쪽으로 열러 놓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아주 상쾌합니다.안녕! 매일 아침 300리 떨어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3초만에 찾아뵙고 돌아옵니다.옛날 사람들이 축지법을 지금 저는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7월 30일 화요일 흐림
어머님. 아버님, 내일 새벽에 5일간 미국령 괌에 대영이네 네 식구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겠습니다. 안녕!
8월5일월요일 맑음
어제 괌에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괌에서 손자손녀들과 수영장에 가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나는 대영이와 30미터의 높은 곳애 올라가 보트를 함께 타는 놀이도 했고, 공중을 건너는 줄타기도 했습니다. 마치 전일 광주상무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저에게는 용기가 남아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침에는 아내와 조용한 해변을 걷기도 했고, 보트타기도 했습니다.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 간직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백색 국가에서 제외시키는 경제 조처가 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는 아베 총리가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내린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의 배상을 일본기업이 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한일청구권 협정 때 해결한 것이라고 반발한 것입니다. 일본의 아베는 이는 1965년 청구권을 합의한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 국가 간의 협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한국에 수출하는 모든 품목을 허가를 받아 허용하겠다는 조처입니다.
어떻게 이런 국가적 난제를 풀어갈 것인가에 대해 걱정을 했습니다. 일본의 우익이 다시 제국주의의 부활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는 일본정치인들의 근원적 속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 소식은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신호탄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도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국력이 있을 때 유효한 것입니다. 평화타령을 하다가 북한 사회주의 국가에 흡수되는 것은 아닐지도 걱정이 됩니다. 북한의 핵포기는 전혀 할 의도가 없음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데 미국대통령 트럼프는 북에 추파를 던지고 있습니다.
오직 국가를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대영이네 식구와 좋은 추억을 남긴 4박5일의 여행을 잘했습니다. 대영이가 수고를 많이 했고 며느리도 착하게 많은 협조를 했습니다. 3세대가 즐기는 해외여행이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낍니다.
8월 11일 토요일 맑음
매일 어머님을 뵙습니다. 엊그제 서울대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듣고 저에게는 유전자 요인이 아주 좋아서 치매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님이 93세를 사시는 동안 정신 건강이 아주 좋았던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9월 27일에 한국사학사학회가 주최하는 조선후기 실학에 대한 기조강연을 할 원고를 준비하느냐고 때로는 12시를 넘기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실은 아주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옆과앞, 뒷창으로 바람이 잘 불어 여름에도 시원하며 때로 눈을 쉬기 위해 창문을 너머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바라다 보면 눈의 피로가 스스로 풀립니다. 그리고 연구실은 자연공원 속에 있으며 너지막해서 아주 좋습니다. 모든 것이 부모님의 은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일일히 보고를 드리지 않아도 어머님은 다 아시지요, 매일 아침 시골 부모님 묘소를 바라다 보고 망배를 드리고 어머님의 사진을 뵙는 것이 제 일과의 시작입니다.
8월 13일 화요일 맑음
부모님께 드리는 글
오늘도 아버지, 어머니가 모셔진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세번 절을 올렸습니다.
첫 절을 하면서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두번째 절에서는 부모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세번째 절을 하는데 말씀이 들렸습니다.
"오느냐고 수고했다. 먼길 조심해서 가거라!"
그 말씀에는 모든 당부의 말씀이 담겨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2주후(27일) 형제들이 함께 부모님을 대전으로 모시겠습니다고 하직 인사를 했다.
은은히 울려오는 올사모의 반주음과 같이 부모님의 마음과 당부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겠습니다.
'창작의 글'-사효당기에 올린 부모님 묘소 사진을 이곳으로 옮기고, 제목을 대전 나들이에서 '고향나들이'로 고쳤습니다.(2019.8.13)
어머님 아버님의 산소를 찾을 때마다 할아버지 산소를 찾아뵙지 못하고 올라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함에 대해 할아버지께 용서를 빌어야겠다. 생전에 가까웠던 할아버지와 어머님이 멀리 떨어져 있다. (6월 22일 하지.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인사를 마음속으로 올렸다.)
사효당 건물에서 한 시방향 상단에 부모님 묘소와 장형 묘소, 그리고 우리 4형제와 그후손이 함께 들어갈 납골당 묘소가 있다.
이 사진은 2019년 4월 5일 한식일에 참석한 종원들입니다. 앞줄 왼쪽부터 정달용, 본인, 구옥,구동, 구범, 둘째줄 구선, 태항,태시, 구영, 구당, 맨윗줄 구길, 형순, 구남, 철영, 구황, 석영 (사효당기는 본카페 '창작한 글' 지나간 227번에 실렸다..
8.15일 목요일 비
오늘은 광복절이고 71년전 대한민국의 정부가 세워진 날입니다. 대단히 뜻 깊은 날입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간단한 몸놀림을 하고 집의 옥상에 가서 하늘을 보면서 지구를 한바퀴 돌아보고 우주의 광활함을 느꼈습니다. 영조실록을 읽다가 다 못 읽고 정조실록을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어제는 이헌창의 실학의 개념과 역사적, 현재적 의미를 읽었습니다. 동서양, 그리고 동아시아 4국, 경제사와 역사학을 통관하는 논문으로 대단히 잘 써진 것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침 6시에 태극기를 게양하려고 나갔더니 비가내려 달지 못했습니다. 10시반에 대통령의 경축사를 들었습니다. 경축사에서 국내문제, 경제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어 조금 허탈했으나 일본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훌륭한 경축사였다고 평가합니다. (16일 추가함 ) 오른쪽 발 등에 통풍기운이 나타나 좀 쉬고 있습니다.)
8월 18일 일요일 맑음
17일은 아침 7시30분에 인천파라다이스 호텔에 갔습니다. 큰딸이 예약을 해서 외손자, 외손녀와 함께 수영을 하도록 계획되어 금년의 마지막 휴양차 갔습니다.
현숙이네 집에 차를 세워두고 집식구와 저는 서울역에 내려 공항철도를 타고 제1인천국제 공항에 내려 자기부상열차로 파라다이스역에서 내렸습니다. 공항철도는 잘 만들었습니다. 아내에게 이런 좋은 시설을 북한이 망치면 안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숙이는 현희와 함께 외손녀 민경이를 데리고 먼저 도착해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저녁 6시까지 씨메르 수영장에서 같이 수영을 즐겼습니다. 나는 준이와 현숙이, 현희가 타는 30미터의 고공 미끌럼을 탔습니다.
처음에는 급한 물결, 다음에는 완만한 미끄럼을 탔는데 이것이 저의 마지막 미끌럼 타기라고 생각합니다.
수영장에서 수구, 수영 등 하루를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6시경에 큰사위가 근무를 마치고 와서 체크인을 하고 투숙했습니다. 밤에 외손녀가 잠이 오지 않아 1시경에 경우 잠에 들었습니다.
민경이가 벌레에 물린 것이 가렵다고 울었습니다.
아참 7시30분에 식사를 하고 나는 사위 차를 타고 서울 고속터미날에 내려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8월 23일
아침 4시에 책상에 앉아서 인터넷에서 요가를 쳐서 사무실에서 5분요가를 따라 했습니다. 그리고 요가매트를 펴 놓고 엊그제 요가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했습니다. 요가지도자의 몸매가 건강함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연구실에서 건강을 챙기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연구실에 기영이가 설치해준 철봉에 매달려 팔운동과 허리펴기 운동도 합니다. 참으로 이런 정보를 인터넷으로 제공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8월 23일 금요일 맑음
저녁 6시 30분에 동향의 후배 복진한씨의 주선으로 복정숙여사와 셋이서 경찰대학교 앞 '3대째 손두부집'에서 만나 제사이야기, 역사의식의 문제 등에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복여사는 자녀들에게 제사 음식을 식사하는 대로 차리며, 자녀들에게 각자 음식을 한가지씩 해오라고 한다고 하며, 참석을 강조하지도 않고 올 수 있는 사람만 참석하게 하며, 시부모 제사를 정성껏 지낸다고 하였다. 실천적 여성이었습니다. 복진한씨는 역사란 사실자체를 설명하기 보다는 당시의 역사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여러가지 시각에서 봄이 좋으며, 우리나라 역사라도 우리나라에서만 보지 말고 외국과 관련지어 봄이 옳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역사에서 민족의 문제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일반게시판에 두 분의 글이 올렸습니다. 우리는 거의 1년만에 만났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일기를 평어체로 쓰겠습니다.
8월 24일 토요일 흐림
오늘 '소학' 원문을 검색하여 6권 전체를 대충 통독했다. 9월 27일 기조발표문을 쓰다가 한번 읽고 싶어서 소학집주를 찾아 읽었다. 박노욱 씨를 4시 경에 오리역에서 만나 수담을 나눴다. 이재운씨가 갓김치를 선물을 보내와 통화했다. 이야기 하던 중 그 아들 결혼식이 12월 14일 서울 팰리스 호텔에서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달력에 적어 놓았다,
9.2일 월요일 흐림
어제 벌초하는 날이었다. 기영이와 함께 장평 분향리 부모님 묘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술잔을 붓고 왔다.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절을 올렸다. 벌초를 끝낸 후 증조할아비지 묘소 등기이전 건을 해결함에 총 240만원이 들었다. 큰집에서 140만원, 둘째 파와 셋째 파에서 50만씩을 내도록 했다. 내가 사전에 6촌 동생 구동이와 통화를 한 것이 문제를 쉽게 풀게 되었다. 3시 30분에 출발하여 7시 30분에 도착했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9월 8일 일요일 흐림
어제 태풍 링링호가 불어와 하루 종일 긴장했다. 창문이 떨어질가봐 걱정을 했다. 밤 8시경에 바람이 겨우 잦아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니 마음이 불안함을 느꼈다. 옛 사람들이 바람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연구실 앞쪽에 있는 대추나무가 휘청거렸다.
오늘 아침에 가보니 대추가 거의 떨어지고 몇개만이 달려 있었다. 집 앞의 하얀 꽃 나무가 모두 꺾어졌다. 뉴스에 논의 벼가 쓸어지고, 사과와 배가 덜어져 나딩고 있어 농부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더구나 안타까운 일은 세 사람의 사망자다. 그들에게 명복을 빈다. 공무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피해가 작았던 점에 대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안정복의 "하학지남"과 그의 일기를 읽었고 오늘은 "임관정요"를 읽어야겠다. 그제는 마포에 가서 솔벗재단 장학생 선발위원회에 갔다가 이온규 이사장 차로 돌아왔다.
2019. 9월 13일 금요일 맑음 한가위
10시에 큰 아들, 며느리, 손자 용진과 집식구, 딸 현희와 함께 법화산 둘레길 등산을 했다. 1시에 대영이 네 식구가 와서 2시에 기영이네 식구와 함께 미금역에 가서 식사를 했다. 저녁에는 현숙이 내외와 외손자 준이가 왔다 갔다. 나는 "성학집요"에 대한 한형조교수의 글을 읽었다. 밤 12시에 옥상에 올라가 보름달 사진을 찍었다. 달이 아주 둥글고 밝았다. 내 공원인 법화산을 모두 비쳤다. 그러나 아파트의 불빛으로 시골에서 보는 달처럼 밝지는 않았다. 이는 상대적인 것이겠지 생각했다.
형제, 두 누님,, 여동생, 숙모님, 그리고 낙지리 진외당숙모와 통화를 했다.
9월 27일 금요일 맑음
아침 8시 반에 정수환박사가 집에 차를 가지고 와서 오리역에 가서 박노욱 선생을 모시고 실학박물관에 10시쯤 도착했다. 실학박물관과 한국사학사학회의 공동주최로 '역사를 보는 실학자들의 새로운 시각'이라는 제목으로 학술행사가 열렸다. 나는 기조발표를 하였다. 제목은 '성리학이념사회인 조선후기의 역사의식과 역사관"이었다. 나는 이글을 쓰기 위해 거의 한달간 대단히 많은 노력을 했다. 영조실록을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성학집요를 읽었고, 소학, 대학, 중용을 다시 훑어보았다. 원고가 처음에는 300여매가 되었으나 써 놓고 보니 나의 논리로 써 나간 것이 아니어서 이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시간이 되어 겨우 원고를 넘겼다. 넘기고 보니 오자, 탈자가 많았다. 정말 힘들었다. 부끄럽다.
10월 9일 수요일 맑음
오늘은 한글날 우리의 말을 마음대로 적을수 있도록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신 날이다. 아침 7시에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때 동족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보면서 나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요즘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가을 내복을 입었다.
연구실에서 공부하려면 혹 감기가 들지 않을가해서 이다. 아침신문을 읽었다. 이어령교수의 사람 '살려' 하는 말이 좋다는 글이 재미 있었다. 굳은 명사보다 동사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사만이 아니라 하늘, 땅, 사람, 등등 명사가 없이는 동사만이 돌아다닐 수는 없다. 농부가 사용하는 농기구, 곡식이름 , 신체 이름 등에서 한자가 아닌 우리 고유의 말이 쓰임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얼굴, 눈, 손발, 코, 눈, 귀, 입, 몸통, 어깨, 다리 등과 호미 쟁기 낫, 칼, 벼, 보리, 콩, 팥,옥수수, 소, 돼지, 닭, 개 등 참으로 쉽고 정겨운 말이 많다. 강보다는 시내, 개울, 바다가 있는데 가람이란 말 대신 강이란 한자어가 있어 가람이란 말은 이제 죽은 말이 되고 있다.
그제는 장서각에 가서 왕실의 탑본자료 전시회에 다녀왔고, 어제는 성호의 논문 50페이지를 읽었다. 정조의 제왕학(김문식지음)이라는 책도 읽었다. 정수환군이 자료를 보내주어 항상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10월 11일 금요일 맑음
오늘은 음력 9월 13일 어머님 생신날이다. 내일은 동생 구철과 큰며느리 양연욱, 그리고 현희 생일이다.아침에 마이크로소프트 조작을 하다가 메일이 삭제되었다.
10월 15일 화요일 맑음
아침 6시에 일어나 집식구와 현희와 함께 대영이집에 갔다. 서진이가 유치원 운동회를 한다고 해서와다라고 해서 갔다.. 우일 유치원에 가서 운동회 구경을 했다. 사부인도 오셨다. 며느리가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했다. 늠름하게 자라는 모습이 흐뭇했다. 어린이는 우리나라 장래의 희망이다. 돌아와서 실학논문 두 편을 읽었다.
16일 아침에 동생과 통화를 하니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광란이 나서 그랬단다. 형제간에도 전화를 자세히 묻지 않으면 그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데 별일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겨우 들은 이야기이다. 올사모카페에 윤승원씨의 논산훈련소 추억의 사진전에서 대상을 받은 소식을 보니 기쁘다. 그의 어머니 사랑이 그지 없다.
오후 4시반에 혼자서 뒷산에 올라가면서 나는 무엇인가를 한 걸음마다 물어보았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다. 물론 해답을 얻으려는 생각이 잘못이겠다고 생각했다. 1년만에 천주교 공원묘지의 최정상에 있는 김은석씨의 묘소를 둘러보았다.김은석씨는 1901년 생으로 1953년에 작고하신 분이다. 부인 의령 여씨 안나 아기씨는 1900년생으로 1982년에 돌아가신 분이다. 우리부모님보다 10년 전에 태어나신분들이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용인시 기흥구청에서 쓸어져 길을 막고 있는 나무를 자른 것을 확인했다.
10월 22일 화요일 맑음
대영이가 밤에 와서 독감 예방주사를 우리식구와 용진이네 식구에게 놓아주고 갔고, 며느리가 처방해준 글라이티린 약을 가지고 왔다. 이를 사기 위해 서울대병원에 갔다가 예약을 하고 허탕을 쳤다. 대영이가 손목시계를 주문해 받았다.
10월 24일 목요일 맑음
오후에 삼천리 기사가 와서 실랑이를 벌였다. 가스 안전검사를 받고 12방을 신고했는데 201호만을 점검하겠다는 것이었다. 말을 하다가 나보고 까닥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4시에 아내와 함께 법화산 등산을 다녀왔다. 아내의 다리가 앞으로 문제일 것 같다. 10년, 20년 후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3시반에 일어났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 박세당에 대한 연구논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
10월 26일 토요일 맑음
전국역사학대회가 어제부터 고려대학교에서 열렸다. 오늘은 한국사학사학회가 열리기에 이에 참석하기 위해 11시 반에 집을 출발하여 고려대역에 내려 운초우신교육관에 1시40분경에 도착했다. 최성철 교수의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입구에서 경인문화사 한사장을 만났다. 시간이 늦어 악수만 하고 갔다. 오항령교수를 만났다. 전주대학의 전임이 되었다고 한다.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발표 후에 나오다가 최광식교수를 만났다. 명함을 주면서 나의 삼국유사의 논문에서 곤륜산을 지리산이라고 한 것의 근거를 물었다. 다음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조성을 교수, 박인호교수, 김남일 박사, 정수환. 듣등을 만났다. 박인호 회장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학회가 굴러가고 있다. 학회 마지막에 내가 간단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우정이란 후문 밖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헤여져 오다가 조성을 교수가 다산학술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축하할 일이다. 동묘에서 헤여져 9시 30분에 집에 돌아왔다. 정수환박사가 쓴 {조선왕실의례와 재원}를 받아 서문을 읽었다. 박인호교수에게 줄 책이 나에게 주었다. 바뀐 것이다.
11월 2일 토요일 흐림
아침 6시에 일어나 조간신문 두 가지를 읽고 한 달 전에 알려진 목간학회 발표회에 가기 위해서 였다. 아침 식사를 재촉하여 먹고 9시에 큰 아들 기영이 차를 타고 정자역에 나가 한성백제박물관에 갔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김기섭관장을 만나고 4시 10 분에 솔벗재단으로 가기로 했다. 전진국군을 만나 함께 갔다. 그전에 백제의 산성에 대한 특별기획전을 들러보았다. 설명이 잘되어 있었다.
한성백제역에서 9호선을 타고 여의도에서 마포에서 내렸다. 차 안에서 전박사와 학문이야기를 했다. 10분전에 도착했고, 여기서 정을경박사를 만났다. 아이와 남편과 함께 왔다.
묵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2년전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세 주최하는 청양지역의병사 연구발표회의 토론 좌장을 내가 맡았다.공주까지 버스로 가서 정을경박사의 차로 청양을 가면서 부모님 묘소를 찾아가는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반갑게 만났다.
전군의 결혼식이 9일에 있다는 것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는데 전일 연구원에서 엄청난 말의 폭행을 당했던 안모군이다. 저도 인사를 하지 않았는데 내가 모든 것을 잊고 악수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8시 30분 모든 일이 끝나고 이사장 차로 9시에 집에 도착했다. 오늘 어머님 아버님 사진을 두 번 보면서 일기를 마칩니다.
11월 3일 할아버지 사진을 올렸다. 할아버지는 온화한 성품이셨고, 검소하셨으며, 두 아들을 먼저 보내고, 양가의 손자 손녀들을 돌봐주셨다.
11월 10일 일요일
8일과 9일은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철원답사를 무사히 다녀왔다.(철원답사기) 9일에는 이성무선생 묘비건립식이 있다는 것도 참석할 수 없었다. 철원은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저녁 5시 경에 집에 돌아와 답사기를 올렸다.
이제 실학논문을 완성함에 신경을 집중해야겠다. 19일까지 끝내야한다. 11일에는 공주에다녀와야하고 16일에는 장평에 다녀와야한다.
11월 14일 목요일 맑음
오늘 수학능력시험을 보는데 갑자기 온도가 영하 1도로 내려갔다. 어제 성호언행록 두 권을 받아 오후부터 밤새 다 읽었다. 성호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릴 수 있을 듯하다.김문식 교수에게 부탁하여 보내온 것이다. 역주를 한 윤재환씨의 꼼꼼한 주석에 감사를 드린다.
11월 16일 토요일 흐림
아침 6시 30부 경에 기영이 차를 타고, 집식구와 나는 장평의 시향에 가는 길을 나섰다. 인근 맥도날드에 가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10시 경에 도착하여 부모님 산소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사효당에 가니 대전 형님, 종원이 많이 왔서. 음식을 제물을 진설하고 있었다. 제방을 제방 틀에 넣어 술잔과 시접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종손을 기준으로 9대조인 통덕랑으로부터 부모님까지 모두 한 번에 지내었다. 종손이 기독교 신앙을 하기에 절을 하지 않아도 되겠느냐고 하기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노인 중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않해도 좋다고 했다. 용자 항열에 속하는 사람이 모두 아헌에 참여하고, 구자 항렬의 사람이 삼헌, 영자 항렬이 첨작을 하도록 합의를 보았다.
제사가 끝나고 종회에서 결산 보고가 있었는데 25만원의 적자라고 한다. 제물이 90만원, 떡 값이 20만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치리 수목장 묘지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종중 기금 문제를 논의하여 조그만 종토를 파는 방안이 나왔고, 다른 방안은 차후 논의하기로 하고 조용히 마쳤다. 나는 낙지리를 거쳐 소사천에 가서 이종매부 집에가서 쌀 한가니 80kg을 싣고 이종누나가 배추와 무를 주었다. 북실로 와서 윤길섭씨에게서 모시 뿌리를 얻고, 천장리 황인세 집에 와서 마을소개를 받았다. 한국의 알프스마을이라고 하여 30여호가 마을 경영을 잘하고 있었다. 축구장, 강당, 숙소 등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천장호수를 둘러 올라오는데 차가 막혀 정안에서 국도로 왔다. 차가 밀려 갈 때보다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8시30분에 집에 도착했다.
11월 30일 토요일 맑음
한 20일간 실학관련 논문을 읽고 어제 9시에 원고를 보냈다. 논문 20여편을 읽고 글을 다시 썼다. 마치 도공이 만든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를 부수고 다시 쓰듯 5-6차례 고쳐 썼다. 이를 끝나게 하는 것은 마음에 드는 글이 아니라 시간의 종료때문이다. 그렇게 급하게 보내고 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니다. 통풍의 조짐이 있다. 오늘은 대영이네와 함께 단양에 가서 내일 돌아오겠다. 월요일부터 쓰던 사학사의 집필로 들어갔다. 매일 아침에 뵙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눈동자로 부터 빛과 사랑을 받고 있다.
12월 5일 목요일 맑음
할아버지, 부모님 제가 1964년 대학교 3학년 때 6.3.한일 굴욕외교회담 반대 데모를 하던 친구(대학동창)들을 만나는 날이다..
이미 55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남은 10년동안 저의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마지막 설계를 해야할 것 같다.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귀한 공덕을 헛되이 흘려서는 안되리라 믿는다. 국가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을 저서로 남김에 진력하겠다. 부모님 조부모님의 은덕을 감사히 생각하며. 시간이 금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겠다. 대학교 3학년 때 한국사 전공으로 바꾼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겠다. 할아버지, 부모님께 효도를 하지 못한것이 후회스럽다. 부모님 !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게십시오.
12월 7일 토요일 맑음
뉴스를 보면서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걱정이 크다. 이 세상에 태어 나는 것이 얼마나 큰 공덕을 쌓아 얻은 것인데 그런 목숨을 자살은 해서 안된다. 대통령,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이 자살했으니 무슨 말을 해야할가? 자살하는 사람이 오죽하면 했을가 그 마음을 충격을 다 세시히 알수는 없지만 자살은 순간적 선택이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이 세상에 살면서 풀도록 자살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잠간만 10분을 더 다시 생각하시기 바란다. 유능한 백재영 검사의 자살 소식이 참으로 안타갑다. 생명을 버림이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 일은 절대로 안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확률은 수천억 분의 1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100미터 경주나 마라톤에서 중간에 포기하는 것과 같다. 물론 종점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포기하겠지만 등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체력을 조절하면 포기보다는 완주의 정신이 더 좋다. 인생의 삶은 결승점이 없다. 이 생명 다하여 노력함이 더 귀중한 삶이 아닌가 한다. 자살의 풍조를 막아야 한다.
12월 13일 금요일 맑음
인쇄에 넘길 논문을 마지막으로 수정해 보냈다. 대단히 힘들게 완성했다. 그리고 사학사학회 기금소식도 정리해 보냈다. 어제 불교방송에서 활성스님의 강의 중 "꾸준히"와 지족이란 체험담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내일은 이재운 교수의 아들 결혼식에 가야겠다. 일찍 잠에 들었다.
2020년 1월 3일 금요일
새해 1년은 나의 저술을 위해서 더 깊이 있게 공부해야겠다. 상서, 춘추, 사기 등 다시 읽어야할 책이 너무나 많다. 아름답고 무거운 책을 써야겠다. 시간을 쪼개 읽고 써야겠다. 이제 봄이 오는 구나 신춘이여!
1월 7일 화요일 흐림
사마천의 사기를 5일간 다시 보았다. 아무래도 넘을 산은 사마천의 사기부터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2월 25일 멈춘 사학사 통사를 계속해야겠다. 사마천은 위대한 역사가이다. 그가 쓴 130권의 사기에 글자수까지 세어 52만 6500자라고 했다. 자기의 저술을 이처럼 소중히 여겼다는 말이다. 각권의 내용을 일일히 자서에서 언급했다. 그는 영원한 역사학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사가로서의 지위는 이후 집해와 정의를 내는 학자들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반고의 한서 사마천전에서 상세히 다루어져 그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1월8일 수요일 비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재능이 부족한 것을 부모님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지 않다. 제가 78세가 되도록 시력이 아직까지 좋고, 청력이 좋은 것 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 어려운 학문인 역사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제가 택한 것이다. 제의 끈기가 없다. 끈기가 없는 것도 저의 잘못이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걷겠다. 달리다가 힘이 들면 쉬엄쉬엄 다시 달리겠다.
부모님이 저에게 주신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살수 있다는 것만으로 항상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좋은 말을 들으면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부모님이 주신 큰 공덕이다. 그러나 하루 하루 시간을 쪼개서 제가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쓰고 싶은 책을 쓰겠다. 썼다가 찢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다시 쓰겠다. 백번을 고쳐써도 이 생명 다 바쳐 책을 씀에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부모님께 고해드린다. 하루 하루 제 일기를 보고 있는 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분을 위해서 이 약속만은 지키겠다. 제가 마직막으로 쓰는 책은 저의 서툰 글이지만 저의 마음을 전하는 책을 쓰겠다. 앞으로 10년의 시간을 더 써서라도 한 권의 책을 쓰겠다. 새벽 12시 30분입니다. 전경목 교수를 만나기로 했다. 연구원에 들려서 책도 빌려오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보고 오겠다.
2020. 1월 10일 금요일 맑음
아침 5시에 일어나 이영훈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백년동안, 2018,243쪽)의 책을 읽었다. 요즘 그 책에 나는 매료되었다. 유창하고 간결한 글 솜씨와 그가 보는 탁 트인 역사관, 고문서 일기자료 등의 사료를 널리 활용한 점, 그리고 자유로운 해석에서 아주 잘된 책이다. 나는 8일 연구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빌렸다.
9시 20분에 집을 출발하여 수원역에 가서 기차로 대전을 갔다. 그런데 나는 대전에 가는 열차를 현숙이가 예매했는데 무궁화호 열차를 내가 종래 타던 새마을 호로 착각을 해서 이 차를 놓쳤다. 플랫폼에 앉아 있던 젊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KTX 기차표로 바꾸어 탔다. 참으로 고마운 정보의 도움을 받았다. 기차는 예정 시간에 대전역에 도착하여 윤승원씨가 전해준 메세지 내용대로 택시를 타고 용두동으로 갔다. 인정원이란 음식점에는 이미 윤승원씨가 와 있었다. 이는 작년에 논산훈련소에서 주최하는 ' 추억의 사진전'에서 윤선생이 대상을 받은 것을 환영하는 축배를 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내가 식사를 제안하였고, 음식점을 정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미 선불을 지불해서 내가 오히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식사 후 단재선생의 동상이 최근에 세워진 서대전 역의 공원에 가서 동상을 참배했다. 그리고 형님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7시에 버스로 성남에 도착했다. 우연히 아침에도 길거리에서 또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아 117번 버스를 타고 직행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출발 직전에 직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분들의 도움을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다. 참으로 우리는 그런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따듯한 친절이 훈훈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임을 실감했다. 이런 세상은 낙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월 13일 월요일 맑음
이해준 교수와 전화를 하면서 대전에서 한기범, 김상기, 성봉현, 윤승원과 1월 31일 오후 5시에 인정원에서 만나기로 전화 약속을 하고 예약까지 했다. 그리고 김호동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을 E북으로 샀고, 윤은숙씨의 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와 정광의 한글의 발명을 주문했다. 12시까지 김호동씨의 글을 읽었다.
1월 20일 월요일 맑음
며칠 전에 연락을 받은 조원래 교수를 교대역에서 만나 땅끝 마을에서 식사를 하면서 임진왜란사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한국에서 이형석의 임진전란사를 뛰어 넘는 학적 수준을 갖춘 책을 쓰자고 했고, 조교수는 동의하였으며, 후진과 함께 하는 책을 쓰되 3-4년 걸려서 좋은 구상을 하자고 했다. 4~5월에 한번 전주 등에서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더 논의하자고 했다. 나는 사마천의 사기 중 공자 세가를 두 번 째로 읽고 있다. 세 번 읽고 이에 대한 글을 쓰기로 했다. 돌아와서 두 번 째 읽고 있다. 유가의 종장이며 태산 같은 공자에 대한 글을 함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완성하라고 격려해주셨다. 즐거운 하루었다. 이 세가를 읽으면서 책을 들어 누어서 읽는 태도를 고쳐야겠다.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글을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을 공자의 말씀을 통해서 이제 실행하게 되었다.
1월 24~25일 설날
아이들이 예약한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에 가서 수영을 하고 지냈다. 감기 기운이 있다. 26 일은 대영이 집 아줌마의 휴가를 주었다고 해서 손자 손녀, 서진과 예진이를 돌보고 오후 4시경에 돌아왔다. 나의 가족이 총 14명이다. 포근한 날씨여서 지내기 편하다. 30일 전주행 기차표 예매를 하여 놓고, 31일 대전 모임의 메세지를 보냈다.
1월 29일 수요일
어렵게 계획한 대전 모임을 취소했다.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 전주에 가기로 한 것도 포기하고 대전 모임도 섭섭하지만 취소했다. 신종코로나 전염병이 유행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가서 만나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전주 여동생이 수 년 전부터 성인고등학교 과정을 열심히 다녀 졸업식에 간다고 했는데 새벽 5시에 가기가 어려워 포기했다. 더구나 대전 모임을 취소한 점은 못 내 아쉽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2월 8일 토요일 맑음
며칠 전부터 입춘 한파가 영하 12도까지 온도계가 내려갈 정도로 2~3일간 닥쳐왔다. 이번 겨울 중에서는 가장 추운 날씨였다. 아마도 현재 우리나라의 기후가 온대 기후에서 아열대 기후로 바꾸어가는 현상인지 모르겠다.
그 동안 나는 내 거실에서 책을 본다고 했지만 성과가 잘 나지 않았다. 10 여일 전부터 읽어온 사기와 한서에서 사마천과 반고가 이해한 유교와 도교 이야기를 통사에 정리하였다. 그리고 최남선의 '한국의 민속'이란 책을 거의 독파했다. 고조선에 대한 정리가 남아 있다. 이제 날이 풀리니 연구실에서 통사 집필에 집중하여야겠다. 어제는 3시 반에 잠에 들었고, 아침 큰아들 기영이가 등산을 가자고 해서 법화산 등산을 두 시간 하면서 부자 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2020. 2.10.
아침 신문에 김용섭 선생님의 저작집 1~9권의 한국농업사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주관하는 저작상으로 산기재단에서 시상하는 대상에 선정되었음을 동아일보에서 확인했다. 이는 통문관의 이겸로씨의 산기재단에서 선정한 것이라고 한다. 12일 오후 4시에 시상식이 있다고 한다. 참으로 적절한 시상식이다. 우리 학계를 위해 참으로 잘된 일이다. 지식사 출간이다. 1000부가 전국 도서관에 배포된다고 한다. 그 동안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15일 전 쯤 출판실장으로부터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원장이 알고 싶다고 하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한다.
2020.2.11화요일 맑음
점심을 먹고 세 식구가 법화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오후에 내가 서류를 정리하다가 1962년 8월 12일 자에 대학교 친구 이홍기에게 우편엽서로 쓴 내 생애 첫 편지를 발견했다. 이는 몇 년 전 그 친구가 나에게 돌려준 것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후 전화를 두 번이나 걸어와 전화를 못 받아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대학교 입학 동기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친구이다. 이런 현상은 이미 두번 째이다. 아마 치매 현상으로 생각하여 한 밤중에 쓰는 편지로 그에게 편지를 썼다. 밤 11시 반이 넘었다. 그리고 집 식구가 허리가 아프다고 내일 병원에 간다고 하고 내 손바닥에 이상한 뼈마디가 짚혀 나도 병원에 가고 오후에는 박노욱씨를 만나 연구원에 가서 김용섭 교수 저작상 시상식에 다녀와야겠다.
2020,2.16일 토요일 흐림
수요일에 점심시간에 박노욱 선생을 만나 학문 이야기를 나누고 오후에 연구원에 들려서 도서관에서 조동일교수의 문학통사 2권과 윤내현 교수의 책을 한권 빌려와 읽고 있다. 조교수의 글에서는 국중대회를 굿으로 풀이하는 것을 알게되었고, 새로운 착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강원 교수의 고고학 파일을 받아 인터넷에서 뜨고 있는홍산문화에 대한 진중한 평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김호동교수의 "몽골제국의 탄생"을 거의 독파했다. 이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중요한 내용은 요약해두었다. 나의 컴퓨터 입력 속도가 조금씩 빨라짐을 확인하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기영이가 와서 지하실 지하수 물탱크를 제거해주었고, 저녁에 대영이가 맛 있는 귤을 사 가지고 왔고, 현숙이가 우리 생일을 3월 1일에 점심을 먹자고 한다. 모든 일이 고마울 뿐이다. 대전에서 역사가의 모임은 19일 만나려 했는데 한 주일 더 늦추어야 할 것 같다.특히 오강원 교수의 깊은 연구물을 메일로 많이 보내주어 고맙다. 이를 성정룡 박사에게 전해주어야겠다.부모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좋은 책을 써주신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나의 통사가 좋아질 것 같은 생각을 가진다.
2월 18일 월요일 눈
금년 들어 눈이 최초로 많이 내렸다. 계절은 이미 봄이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눈을 쓸고 모래를 뿌렸다. 아내도 동참했고, 일 나가는 분들이 도와 주어서 눈은 쉽게 쓸었다. 아마 마지막이고 처음 내린 눈이어서 감회가 없을 수 없지만 눈은 곧장 녹았다. 옥상에 내린 눈은 햇볕이 쬐자 금시 녹아버렸다. 이제 머지않아 봄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각종 영상 매체에 뜰 것이다. 밤 10시에 T.V.를 켜니 "내일은 미스 트롯트"라는 프로의 재방송이 나왔다., 고등부 여학생이 부르는 노래가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중 3 졸업생이 할아버지의 권유로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를 불렀다. 나의 통사의 중심이 음악사 중심으로 써야겠다는 확실한 다짐을 하게 되었다. 전문음악가 김양이 '잊지 마'를 불렀는데 심사위원인 장윤정씨가 눈물을 흘렸다. 사연인 즉 관중과 포숙아와 같은 친구 사이였다. 김양은 올 하트를 받았다. 김양은 10 여 년 전 이 노래로 트롯트 계의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음반을 냈으나 그 후 침체되어 다시 나올 가 말 가를 놓고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장윤정씨와 동갑내기라고 한다. 그리고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재방송 함양군 편을 보았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남해고속도로가 확장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대구와 광주, 광주와 대구 사이의 6개 시군의 대표가 노래를 불렀다. 송해 , 장윤정 같은 사람은 이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날씨가 영하 10도에 이르는 마지막 동장군이 왔다고 한다, 11시 경에 잠에 들었다.
1월 21일 목요일 맑음
봄의 중턱에 찾아온 마지막 한파- 영하 10도의 추위가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내린 3cm 눈이 일부 남았고 햇볕이 쪼이는 곳에는 거의 다 녹았다. 18일 밤에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내 일생의 이야기가 재연되었다. 내일 20 일은 내가 결혼한 날이다. 내가 우리 결혼일을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이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아이들이 우리 두 사람의 공동 생일인 음 2월 12일 (금년 양력 3월 6일)의 모임을 어디서 가질 것인 가를 가지고 설왕설래하고 있기에 생각이 이에 다달었다. 그런데 19일 밤 10시 경에 불교 방송을 켰더니 법정스님 10주기 기념 방송이 나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그 설법을 감격스럽게 경청했다. 그리고 거실에서 자고 있는 아내에게 별도의 T.V.을 켜서 그 방송을 듣게 하였다. 법정 스님의 설법은 10년 전 광주문화원에서 수 백 명이 경청하고 있었다. 청중의 모습을 보니 모두 경청하고 있었다. 법정 스님의 설법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고 전후좌우을 종횡으로 치닫는데 달변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멋진 설법이었다.
다시 경청하는 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공부를 깊게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연유로 우리 자식들에게만 공개된 다음의 카카오톡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
" 1972년 2월 20일 12시에 육군사관학교 화랑호국사에서 우리가 결혼했다. 신부에게 전화라도 축하해 주거라!"
그리고 20일 점심은 우리 집 근처의 음식점에서 하기로 했다. 그리고 20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내가 부탁하는 일을 해 놓고 아침 식사를 하고 단국대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걷기 운동을 나섰다. 운동장에서 발을 맞춰 걸으면서 신랑 신부 행진을 떠 올리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는 왜 하지 않던 일을 하느냐고 기분이 토라졌다. 아이들에게 이를 알렸다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점심도 포기하고 집에서 먹었다. 하루의 일과를 조심 조심 해서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부부의 생활이 서로 이해하고 뜻을 맞추기가 어렵다.
오후에 내가 걱정하는 대학 친구와 통화를 했다. 이홍기 군은 내가 1962년 대학교 1학년 때 방학 중에 안부 편지를 보냈고, 그 우편엽서를 10 여 년 전에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10 여 년 전 아내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는데 치매 현상이 심한 것 같아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더 이상 기억력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인데 본인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걱정이다.
나하고 전화한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며 조금 전에 통화한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이다. 친구의 문제에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가 걱정이다. 우리는 자연 수명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지적 상태가 이에 어울리 지가 않아 큰 걱정이다.
낮에는 조동일 씨의 "한국문학통사" 고대편을 열심히 통독하고 있다. 아주 흥미롭다.
2월 21일 금요일 흐림
12월 말에 고문서학회에서 학술원 회원에 나를 추천했다고 전경목 명예회장이 전해주었다. 나는 자신이 생각할 때 학문적으로 적임자가 아니니 다른 분을 추천하라고 했다. 박병호 교수님이 너무 지나치게 사양하는 그것도 비례라고 하셨다. 학회에 두 사람을 추천하라고 공문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전경목 교수에게 한 분을 더 추천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혼자 추천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논문에는 게재지의 쪽수를 적도록 되어 있는데 이를 전 교수가 해주겠냐고 했더니 작성해주겠다고 해서 그렇다면 이번에 내가 안되더라도 학회를 위해서도 서류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어제 논문의 자료 보완이 되었다고 메일을 전해왔다.
그 동안 서류를 준비했다. 어제 마지막 채우지 못한 쪽수를 박인호교수가 인터넷으로 알려주었다. 이제 나의 중요 연구 업적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800자 안으로 쓰라는 것이다. 대충 써보니 1200자이다. 이를 다듬고 줄여야겠다. 발표는 7월 10일이라고 한다. 제출은 하지만 나는 마음을 비운 상태로 준비하고 있다.
2월 23일 일요일 맑음
오늘 교보문고에서 주문한 김호동 역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중 제1책'부족지', 3책 '칸의 후예들, 4책, 일칸들이 역사를 주문한 것을 배송 받았다. 서문을 읽어보니 학계의 연구 성과 원전 자료에 대한 상세한 해설, 상세한 주석이 잘되어 있다. 우선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89,200원) 아랍의 기원이 서기보다 600년 뒤진 연대를 사용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한 가닥으로 출발하였음을 알았다. 최초의 세계사라는 점에서 "집사"를 읽고 싶었다. 대구의 노중국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학문적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1월 28일 금요일 흐림
25일 아침 10시 반에 대전 동생으로부터 형님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듣고 큰아들 기영이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 기영이가 요즘 방학 중이어서 학교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금 뒤 11시30분쯤 형님이 심장마비로 목욕탕에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영안실에 모셔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전 유성 선병원에 2시 경에 도착하였다. 형님이 동생과 함께 목욕을 간 것이 참으로 그나마 다행이었다.
형님은 당뇨에 저혈압 증상이 있지만 최근 열심히 운동을 하여 그럴 리 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83세의 나이이시다, 가보니 딸과 사위, 아들이 이미 도착했다. 27일 화장 예약을 했다고 하여 3일 장을 치르기로 했다.
다행인 것은 형님의 딸 유순이가. '예다함'이란 상조회에 가입한 것과 우리 형제들이 모두 가족 납골당을 마련해 놓아서 장례 절차가 수월했다. '예다함'이란 상조회에서 즉시 와서 여러가지 절차를 준비해주고 장례 절차가 계획되었다. 그 절차에 따라 염습, 입관, 성복. 상식, 발인의 시간 예정이 확정되었다. 한창 코로나19 염병의 유행으로 부고는 문자로 보냈다. 당내 간 30 여명이 문상객으로 왔을 뿐이다. 나는 이틀간 그곳에서 지냈다.
장지는 고향 선산인 장평편 분향리 부모님 묘소 옆에 마련해 놓은 가족 납골당이다. 7시에 발인하여 8시에 화장이 시작되어 9시 30분경에 화장이 끝냈다. 유골을 담아 11시에 장지에 도착하고 11시 30분에 준비해 둔 납골 단지에 유골을 넣고 사망한 연월일을 쓴 다음 문을 닫고 모래를 채우면 된다. 납골당에는 27일 아침 발인이 끝나고 동생과 장조카가 가서 문을 열기로 하고 화장 터의 일은 내가 연락을 맡기로 했다. 나는 그 때 읽을 '죽은 자의 글, 마지막 고별 인사'이라는 글을 써서 읽었다. 두 세 번 고쳐 썼다. 12시에 점심을 멀고 각자 그곳에서 헤어졌다. 나는 5시에 집에 돌아왔다. 예다함 상조회에서 정성껏 모시고, 음식 서빙까지 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3월 12일 목요일
2주 간 조동일 교수의 "한국문학통사", 고대 편과 중세 후기 편을 정독했다. 그의 독특한 문체, 다각적인 사유 독창적인 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중요한 요점을 일일이 옮겨 메모해두었다. 나의 통사 서술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10 일에 손자 서진과 손녀 예진이를 할멈이 데려와 이틀 밤을 잤다. 다음날 아침 내가 현희 차로 아침 10시에 데려다 주었다. 아이들이 코로나19로 인하여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가지 못함으로 집에 갇힌 것을 약간 풀어주려는 것이었다. 요즘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고 5부제 판매가 실시되고 있으나 아들이 가져다 준 마스크 세 개로 나는 버티고자 한다, 가능하면 모든 외출을 중단하고, 공기가 맑은 집 근처에서는 쓰지 않는다. 전 세계가 국경이 닫힌 잠정적 폐쇄의 시대가 되었다, 한국인의 입국을 중지한 나라가 100개국이 넘으며, 일본과도 입국 조처가 상호 차단되었으며. 이탈리아 이란이 감염자 10,000명이 넘어서고, 유럽 각국이 비상에 걸렸다. 6대 주 중 아프리카만이 전파된 소식이 없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팬데믹이라는 선언을 했다. 다행인 것은 한국은 사망자가 60명 선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신천지 교인들의 전파가 크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며 요즘은 서울 구로구에서 콜센터 요원 들 마저 집단 감염되고 있다. 자영업의 음식점, 관광계, 항공계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가파른 발전과 확 터진 세계화가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닐까. 각국이 담장을 쌓고 있다. 꼴불견은 중국이 코로나에서 벗어났다고 허장성쇠를 벌리고 세계 각국의 전염병 퇴치를 돕겠다고 나서는 현상에 기가 찬다. 이 바이러스 염병은 중국 무한에서 박쥐 고기를 먹으면서 일어나 세계적으로 퍼졌다. 중국은 감염자가 1000만 명에 육박하고 전세계에 이를 전파시키는 진원지이다.
3월 17일 월요일 흐림
2 주간 라시드 앗 딘의 "집사' 2권, 3권 , 4권을 독파했다. 김호동의 상세한 주가 붙여진 번역본이다. 이 책에서는 칭기스 칸의 후손들에 대한 상세한 관계를 서술했고, 몽골족을 투르크 족으로 파악했으며, 몽골족의 '쿠릴타이'라는 대 집회 광경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 책은 몽골족이 무슬림 종교를 신앙하는 자로 서술되어서 기독교적인 역사서술이 강하게 노출되어 있다.
동양의 '원사'가 중국 중심으로 서술된 것과는 달리 서부 세계의 정복, 즉 이란, 러시아. 헝가리 지역을 점령한 사건을 상세히 다루었다. 무스림은 기독교의 개종된 종교이다. 무스림과 불교의 충돌도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으나 이 점은 아주 부족하다. 그리고 부족적인 유래를 상세히 서술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몽골족의 역사를 투르크 족의 역사 중심으로 기술했다.왜 몽골족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는 가에 대한 서술은 전혀 없다.
' 일 한국'과 '차가다이 한국-킾착 한국'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서술한 점에서 동양권의 역사를 주로 다룬 '원사'와 크게 다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몽골족의 유목민적 성격이 잘 그려져 있다. 반항하는 세력은 무참하게 도륙하나 모은 재물은 많은 지배층에게 과감하게 나누어주는 풍습, 그리고 칭기스 칸의 정신을 이어 받자는 정치적 교훈 등이 돋보인다. 몽골사를 이 책대로 이해해도 문제점은 남는다. "원사"와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고 싶다.
3월 26일 목요일 흐림
어제까지 이헌창교수가 보내준 저서 "김육평전"이란 두툼한 책을 4일간 통독했다. 그의 고금과 동서양의 이론을 이용해 김육을 새롭게 보려는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조선 후기사의 사상적, 정치적, 사회사적 현황을 세세히 서술했다. 그의 진지하고 해박한 서술에 많은 것을 배웠다.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되었다. 어제 밤에 외손녀 김민경이가 와서 서진과 예진이 손자 손녀 세 천사가 조용히 거실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로운 생활의 활력을 주고 있다.
4월 9일 수요일 맑음
두 달 전에 양쪽 손바닥에 멍울이 생겼는데 커지는 것 같다. 황정형외과에서 멍울이라고 해서 기다렸으나 줄 지를 않아서 혈관의 문제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과병원에 가려했는데 집식구의 안내로 오리역 '준정형외과'를 갔다. 아주 희귀한 병인데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라 하면서 서울대 병원의 전문의사에게 의뢰서를 써 주어 집식구와 함께 예약을 했다.
오후에 강원일보 박미현기자가 이승휴의 표준 영정을 만드는 일을 하겠다고 나보고 주제 발표를 해달라고 해서 약속을 하고 차장섭교수와 상의를 해서 일정 등을 잡으라고 했다. 요즘 노태돈 교수의 "고구려사연구"를 재독 중에 있다. 그리고 정초의 통지를 보고 있다. 전국이 코로나19 염병으로 시달리고 있고, 총선이 며칠 남지 않아 정치권에서 야단이다.
4월 13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중형의 돌아가신 49제 일이다. 아침에 내려갈까 하다가 조카들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12일 밤에 수원을 거쳐 대전에 내려가 동생을 구암역에서 만나 형님댁에 가서 저녁을 먹으면서 조카들의 의견을 대충 들었다. 이날은 형님 댁에서 자기로 했다. 그러나 웬 일인지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13일 아침 묘소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조카 창백이에게 축문을 써서 읽도록 했다. 그리고 조카딸 유순이에게도 축문을 읽도록 했고. 세 번 째로 내가 준비해간 축문을 읽었다. 점심은 떡으로 먹었다. 2시에 대전에 돌아왔다. 창백이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나는 유순이가 데려다 준다는 것을 사양하고 대전으로 가서 4시 50분에 전철을 타고 오룡역에 내려서 인정원을 찾아갔더니 윤승원씨가 이미 와 있었다. 5시 30분 약속에 이해준 김상기, 성봉현 선생이 참석하여 식사를 하면서 단재에 대한 역사가의 공원을 꾸미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익한 자리였다. 나는 역사가의 공원으로 만드는 것을 제안하였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7시 50분에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대전역에 와서 8시30분 무궁화호를 타고 수원역을 거쳐 10시 30분에 구성역에서 현희와 집식구가 차를 가지고 와서 돌아와 숙면을 했다. 그날 만남의 장면을 윤승원씨가 올사모 카페에 소상히 올렸다.
4월 16일 목요일 맑음
어제 21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결과는 민주당의 압승으로 과반수를 확보했다. 그 원인에는 코로나 염병에 대한 정부 당국의 철저한 대응, 그리고 미래통합당의 구태의연한 행태, 손학규의 당권고수 등으로 전라도에서 민생당의 전멸 등을 들 수 있다. 다행인 것은 강남에서 탈북자인 태구민이 당선되었다는 점은 자유 대한민국의 건재함을 의미한다.
어제 10시 쯤 투표를 하러 갔다. 발열체크, 손소독,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를 마쳤다. 조원래교수가 용산역에 도착하여 오리역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11시50분 오리역에서 만났다. 중형의 사망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탄천을 걷기로 했다. 식당에서 나오니 명자나무 꽃을 발견하고 빨간 꽃이 수없이 피었는데 그 중에 흰 꽃의 가지도 있었다. 나는 힌 색이 더 선명해 보였다. 지나가는 분에게 부탁하여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2020.4.15 조원래 교수와 오리역 명자나무 앞에서
그리고 탄천을 걸어서 서울대 분당병원까지 가서 박병호 교수님이 계신 시니어타워 앞에서 전화를 다시 걸어 우리는 통화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리역에 와서 탐앤탐스 커피점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두 시간 동안 임진왜란사 연구에 대해 환담을 나누었다. 4시 30분에 작별을 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다. 그리고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4월 20일 월요일 흐림 약간 비가 옴
오늘은 내가 분당 서울대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가는 날이다. 양쪽 손바닥 3지와 4지가 있는 중간 부분에 돋아난 군살을 수술을 해야 한다고 오리역의 준정형외과의 진찰의뢰를 10여일 전에 받아 예약을 했다. 아내와 함께 현희가 차를 운전하여 갔다. 내 핸드폰에 20일 10시에 고현식 의사님이 예약이 되었다는 메세지가 전날 왔다. 이에는 코로나 염병으로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들어오기 전에 문진표를 써서 발열 체크를 받고 병원에 들어오는 인가증을 받아야 하다는 내용도 함께 들어 있다. 문진표에는 연락받을 전화번호와 외국의 왕래, 최근의 신체적 근황에 대해 체크하도록 되어 있다.
아내가 전날 혹 혈액검사가 있을지 모르니 아침을 먹지 않고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우리는 9시에 출발을 했다. 20분 후 서울대 분당병원에 도착했다. 10시 20분 쯤 공박사의 진찰을 받았다.
공박사는 세 개의 방에서 조교들이 정리해주는 것을 가지고 안에서 진찰을 했다. 공박사는 언제부터 생겼냐고 묻기에 1월 초에 생겼고 조금 커졌다고 답했다. 내 오른손가락 4지와 5지가 꼽으라진 것을 보고 언제 수술을 받았냐고 물었다, 내 8살 때와 28세 때에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왜 손가락이 굽었느냐고 묻기에 두 살 때 뜨거운 물을 쏟아 생긴 것을 말하니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냐고 물었다. 시골병원과 동부서울시립병원에서 수술을 했다고 답했다.
나는 28세 때 군대에 입대하면 거수경례를 하기 불편해서 조금 폈다고 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갔다고 했다. 직업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학은 어디를 나왔느냐고 하길래 답했다. 어느 대학에서 교수직을 했냐고 물었다.
자기도 대학시절에 과거의 역사는 공부했는데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다음 질문은 술과 담배를 하냐고 하기에 술은 거의 마시지 않고 담배는 피고 있다고 했다, 준정형외과에서도 그런 질문을 하기에 흡연이 영향이 있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했다. 의사의 정직성을 확인했다. 공박사는 손가락을 펴고 싶으냐고 하기에 컴퓨터를 치는 일과 일반 생활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고 했다. 아마 줄어든 힘줄을 늘여야 손가락을 완전히 펼 수 있는 것 같다. 진단은 더 두고 보자고 하고 더 커지면 후일 수술을 하자고 하면서 수술을 해도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왜 이런 것이 생겼느냐고 했더니 내 피에 서양 사람의 유전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양 사람들만이 생기는 병으로 병명은 Dupuytren contrature이라고 했다. 나의 피에 서양 사람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처음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생각해보니 고려시대 할머니 쪽으로 고구려계의 피가 섞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의 3분의 1은 고구려인의 핏줄과 연결되고 고구려인은 돌권 터키족, 몽골족을 통해서 유전자가 섞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심이 되었다. 컴퓨터를 침에 3-4지의 손가락을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나와서 교동마트에 가서 핸드폰으로 받은 재난지원금 각 20만원씩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집 식구가 둘러보더니 가격을 올려 놓았다고 했고, 사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장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럴 때에 착한 가계라는 인정을 받아 지역 주민의 고객을 유치해야 하는데 그런 상술로는 안됨을 느꼈다. 돌아와 조원래교수에게 통화를 해서 병원에 갔다온 이야기를 전했고, 오후에는 5월 5일에 주제발표를 할 이승휴의 인간상에 대한 원고를 반쯤 썼다. 동안거사집은 민족문화 번역원에서 원문을 다운 받았다. 낮 오후 한시에 집 식구와 현희에게 붓다에 대한 불교방송을 보게 했다. 55회 중 52회와 53회이다. 그리고 내가 국경없는 의사회에 월 2만원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2020.4.25일 토요일 맑음
아침 9시에 세 식구가 법화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집뒤로 올라가 30분에 우리가 쉬는 곳에 도착했을 때 의자에 수많은 개미새끼 같은 것이 의자와 탁자에 기어 다님을 보았다. 생각해보니 이는 송충이의 애벌레인듯하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제2의 쉬는 곳 6각 정자가 있고, 운동 시설이 있는 곳에 쉬어 정자 안을 보니 거기에도 송충이 애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어 사진을 찍은 후 이를 소독하지 않으면 송충이가 자라 소나무가 모두 죽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재선충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기흥구민원실에 이 사정을 알렸다. 모든 알림이 녹음되어 1년간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휴일이니 월요일 아침에 산림과 직원에게 전달하여 저에게 전화로 알려 달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시민정신이다.
오늘 12시에 미금역에서 5개월 만에 박병호 교수와 박노욱 선생을 만나 식사를 하기로 하여 일주일 전에 약속을 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미금역에까지 택시를 잡아 타고 갔다.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지만 영산선생이 항상 일찍 나오시기 때문에 내가 먼저 도착해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세 사람이 지하철 역에서 정시각에 만났다. 식사 장소는 영산 선생의 뜻에 따라 돼지갈비집으로 가서 맛있게 먹으면서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병호 교수님의 이야기를 주로 들었다. 박교수님의 재산에 대한 사회 기부가 놀랍다. 한중연에 1억의 기금을 냈고, 5천만원을 내어 영산고문서 팀에 주었고 고문서학회에 매년 500만원을 내어 우수 논문에 대한 시상을 한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 중 고문서 학회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2006년에 사모님이 돌아가실 때에 유언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다고 하셨다. 재혼하지 말 것, 아침을 잘 챙겨 먹을 것, 화선지와 붓을 다 쓸 것 이었다고 한다. 이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영산선생은 제사의 관행을 묘제로 지내기로 하였다고 했다. 원래 말이 많지 않으셔서 우리가 말씀을 하도록 질문을 했다.
천안공원에 자신의 부모님 묘소가 있고, 그 옆에 사모님의 묘소를 만들었고 자신이 그 곳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생일날 묘제로 바꾸었다고 하는 것도 멋진 가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800도의 고온에서 뼈를 녹이면 사리가 나오며 이런 사리의 색깔도 마음대로 한다고 하면서 파주에 그런 화장터가 있다고 하셨다.
이는 좀 더 알아 보아야 할 일이다. 얼마 후 자신이 돌아가시면 화장을 하고 사모님의 시신도 육탈이 되었을 것이니 함께 화장을 해서 납골단지에 묻고 자식들도 함께 묻히는 가족장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5남매를 두었는데 두 아들 중 장남은 먼저 죽었고, 둘째 아들은 딸만 두어서 장남이 낳은 손자 한 아이가 있다고 했다. 큰 며느리는 전북대학교 핵물리학 전공 교수라고 했다. 박노욱선생과 바둑 몇판을 두고 돌아왔다.
4월 26일 일요일 맑음
아침에 아내와 법화산 둘레길을 걸었다. 천천히 걸어 두 시간이 걸렸다. 돌아와 '동안거사 이승휴의 인간상'이란 글의 초고를 완성했다. 5월 5일 발표할 기조 발표문이다. 이제 4월 30일 까지 써야 할 김유신에 대한 글을 준비해야겠다.
4월 29일 수요일 맑음
5월 5일에 발표할 '동안거사 이승휴의 인간상과 성품'이란 수정본을 완성해 조원래교수와 박노욱 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5월 3일 일요일 흐림
5월 13일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발표할 원고를 쓰기 위해 1일 연구원에 가서 "흥무대왕김유신연구" 2011. (경인문화사, 신라사학회 편)라는 책을 빌려다가 모두 읽었다. 원래 이 원고는 4월 말까지 써주도록 되었는데 며칠 늦추어졌다.
5월 8일 금요일 흐림
아침 10시에 나가 박노욱선생을 오리역에서 만나 3시간 동안 선생이 연구하는 순천부 양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에 대한 원고를 제출했다. 5일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형관 220호 실에서 동안거사 표준영정 1차 포럼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9일 밤 1시 반에 일어나 법화경 1권을 독송했다. 현희가 배탈이 나서 흰 죽을 내가 쑤어 먹였다.
5월 14일 목요일 흐림
어제 연구원에 들렸다. 도서관에 가서 대당내전록을 빌려왔다. 그리고 오늘 발표할 김유신 관련 ppt를 정수환 박사를 만나 수정했다. 며칠 전에 진성규교수로부터 동안거사집 번역본을 받고 전체를 읽고 있는 중이다. 번역본의 수정을 위해서 전문을 꼼꼼히 읽는 중이다. 박미현 강원일보 국장과 이승휴 표준영정 2차제작사업의 학술회의가 28일 삼척에서 열리고, 그 좌장을 맡기로 했고, 잔성규선생과 연락을 해서 삼척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늘 한성백제박물관에 가서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에 대해 발표하기로 하기로 되어 있다. 어제 김기섭 관장이 차를 보내겠다고 했는데 오는 편만 부탁했고, 갈 때는 전철로 가겠다고 했다. 1시에 둘레길을 현희와 함께 걸었다. 5시에 출발하여 6시에 한성백제박물관에 도착했다. 잘못된 강의 자료ppt를 수정했다. 30명의 청중에게 7시부터 두 시간 강의를 했다. 강의를 끝내고 윤수희박사의 차로 집에 잘 왔다. 김관장의 "21세기 한국고대사"라는 저서를 받았다.
동안거사집을 하루 종일 읽느냐고 강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강의라고 생각한다. 동안거사집 번역본을 잘 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28일까지 전체를 통독하고 앞으로 더 신경을 써야 하겠다.
부모님! 오늘까지 제가 열심히 공부하게 하여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죽는 날까지 열심히 공부를 하겠습니다.
5월 16일 토요일 비
어제 스승의 날이라고 정순환 박사가 아침 6세 반에 꽃 바구니를 문 앞에 갖다 놓고 갔다. 김경수박사, 등 여러 제자들이 전화 또는 메세지를 보내 주었다. 오늘 아침 외손녀 김민경이를 무악재에 가서 집에 데려왔다. 6시에 일어나 7시에 출발하여 10시에 현희와 함께 돌아왔다. 어제 동안거사집을 모두 읽었다. 김기섭 박사의 "21세기 한국고대사 제1장까지 읽었다. 아주 잘 쓴 책이란 느낌을 가졌다.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다.
5월 20일 수요일 흐림
지난 11일 하나은행 영통지점에서 벽산아파트를 담보로 3,800만원을 빌렸다. 여러가지 규제가 많아서 다된 서류를 포기하고 싶었다. 아내와 같이 가서 한 일이라서 참고 진행했다. 20일 인터넷으로 1천 만 원을 인출함에 원격 조정을 통해서 인증서 등록을 했다. 안내원이 힘들게 1시간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저녁 6시에 김기섭관장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금강산화로구이 집에서 윤수희 박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 점에 와서 21세기 한국고대사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 하고 돌아왔다.
주류성에 나온 책을 다 정독했고, 신간소개로 본 카페에 올렸다. 이제 통사를 씀에 집중해야겠다.
5월 29일 금요일 맑음
어제 삼척에 가서 동안거사 이승휴 표준영정 제작을 위한 2차 포럼의 좌장을 맡았다. 28일 5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집 식구가 오리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연구원의 이민주박사, 중부대학의 윤양노교수, 진성규 교수와 야탑역에서 7시에 만나 윤교수 차로 가기로 약속을 했다. 삼척에서 보내온 자료를 모두 검토했다. 삼척까지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데 시간이 충분하여 천천히 갔다.
이번 주제는 진성규 교수의 '동안거사집에 나타난 이승휴의 불교이해와 대원관', 조용진(한국형질문화연구언 원장)의 '이승휴 선생 용모 제정의 방법 설정에 있어 응용 가능한 사례', 김도현박사의 '이승휴 사상의 현대적 계승 방안'이었고, 전문가는 복식 전문가 4명, 기타 전문가들 8명이 모였다. 아주 유익한 포럼이었다.
우리는 포럼을 마치고 김도현 박사의 차로 천은사 답사를 했다. 박미현 국장, 김태욱 박사,홍성익 박사, 조교 3명 등 8명이 했다. 천은사까지는 나는 잘 아는 길이었지만 천은사 뒷 길로 차로 더 올라가 두타산을 바라보면서 삼화사로 내려 가는 길은 석회체취공사로 더 갈 수 없었다. 동해시로 들어 가는 무릉계곡, 보광사 간장암은 동해시를 거쳐 가야 한다고 했다.
천은사에 내려오니 주지는 출타 중이었고, 연등이 걸려 있었지만 법당문은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초파일 참배를 할 수 없었다. 천은사 앞에 물통방아가 세 채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물레방아와는 다른 것이었다. 동안사도 겉에서 보았다. 조금 내려와 순두부집에서 두부를 맛있게 먹었다. 김도현 박사의 말에 의하면 왕실 제사를 지내면서 조포사가 설치되었고, 그래서 두부가 현장에서 직접 만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와 진성규 교수는 김도현 박사의 차를 타고 숙소에 왔다. sm 모텔인데 두 방을 예약해주었다. 샤워를 간단히 하고 2시간 동안 동안거사 번역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했다. 지난번 5월 5일 연구원에서 진 교수를 만났고, 그 분이 책을 보내주어 통독하면서 문제점을 체크해 두었다.
밤에 잠을 설 치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종합버스 터미널을 찾아갔다. 숙소에서 얼마나 떨어졌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길을 건너오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는 앞장서서 터미널까지 안내해주셨다. 보통의 경우 저 길로 가다가 어느 방향으로 가면 나온다고 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길 안내이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끝까지 일러주시고 가셨다. 나는 관음보살을 만난 기분이었다. 이어서 나는 장미공원을 산책했다. 장미 수백 만 송이가 천변에 활짝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 코로나가 다시 극성을 부리고 있다. 동해시 발표문을 다 읽고 동해시와 삼척시의 갈등이 있는 상황에 대한 파악을 했다. 7시 10분 성남 오는 차를 타고 10시 10분 경에 야탑역에 도착했다. 박미현 국장의 노고가 많았다.
이승휴의 복색은 합천 해인사에서 나온 복장 유물을 참조하여 잿빛으로 함이 좋을 것 같고, 얼굴의 상은 삼척인의 얼굴상을 표본으로 함이 좋겠다는 결론을 얻었다. 영정은 삼척의 삼베로 만들기로 합의한 대로이다. 그러나 복색을 잿빛으로 하면 승려 상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관복으로 한다면 서장관이었을 때 5품직의 관료복으로 하면 좋을 듯하나 마땅한 관복을 찾기가 어렵다. 거사상과 관복을 입은 것은 몇 가지를 요구한다고 하는 안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6월 4일 목요일 흐림
어제는 박병호, 박노욱 선생을 오리역 국민은행에서 만나 '삼포로 가는 길'에서 동태찜을 먹었다. 박병호 교수는 두 개의 보재기를 주었다. 이에는 노자의 도덕경의 '상선약수'라는 글의 원문과 이를 번역한 글을 손수 써서 보자기에 인쇄한 것이다. 6월 12일이 90회 생신이란다. 어제까지 나는 한글 대장경 "대당내전록"을 다 읽었다. 이는 총 10권으로 664년 당나라 도선(596~667)이 편찬한 불경의 중국 역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후한 이래 남북조, 수당 600년간의 불경의 번역본을 소개한 글이다. 이에는 석씨 찬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대당내전록'과 '속대당내전록'을 편찬하였다. 300 여 종의 불경을 대승과 소승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부와 권 수, 역경자 수를 밝히고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하였다. 이 책은 당 고조 이래 도사와 승려의 논쟁을 하였다. 당고조 때에는불교와 도교가 함께 존중되었으나 태종 때에 당나라는 노자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모든 집회에서 도사와 영관을 승려 앞에 안게 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 "대당내전록"은 이런 논쟁을 겪은 후의 불경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해된다.
후반부에는 서역 승인 용수, 마명, 구마리집 등에 대한 전기가 있고, 대당 구법승의 인도에 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도교와 불교의 투쟁을 논리적으로 벌린 석 법림의 전기를 세 권으로 지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이는 이승휴의 "내전록" 저술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이다, 불교가 중생을 미혹을 깨우쳤다는 점에서 천재들이 이에 몰입했다. 그러나 승려들은 오랜 전통을 가진 유교, 도교의 전통과 힘겨운 투쟁을 하였다. 북조 군주들을 깨닫게 하였으나 3법난을 당하였고, 당 고종 때 또 한번 법난을 당하였다. 중국 불교사를 이해함은 우리 역사를 이해함에 대단히 값진 것이라고 믿는다. 범역본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내건 여행을 하였고, 범어를 배웠고, 도교와 논쟁을 위해 유교와 중국 역사 문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야 했음을 법림전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월 18일 목요일 맑음
6월 16일 북한은 개성에 있는 남북연락사무소 4층 건물을 폭파하고 대남관계의 적대화를 선언했다. 이는 김여정이 제1부부장이 되면서 그녀의 명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북한 정권의 단말마가 드러난 것이다. 원래 비핵화는 북한의 뜻이 아니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군사 기지화 하고 비무장지대의 전방 초소를 요새화 하겠다 한다. 북한 정권의 한계점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문대통령의 대북평화정책도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150억 원이 들어간 건물을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그들에게 준 부채를 못 받는 것일 지라도 이는 계산해 두어야 한다. 어떻게 될지 염려가 된다. 그들의 체제 보장을 우리가 해줄 이유가 없다. 국민의 인권을 극도로 억압하는 공산정권의 유지를 우리가 보호해 줄 필요는 없다. 북한에 전단을 못 보내게 하는 처사는 헌법 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이하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는 규정에 위반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한다.
6월 22일 월요일 맑음
19일 금요일 연구원에 도서관에 가서 '대당내전록'을 반납하고 김현규씨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허지산의 '중국도교사'를 빌려 가지고 왔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내가 대당내전록을 읽으면서 구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교보문고 구입이 여의치 않아 접어둔 것이었다. 20일 조원래 선생이 아침에 전화가 와서 12시에 오리역에 가서 만났다. 임진왜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두 시간 했다. 그가 쓴 '임진왜란사 연구와 기타지마'에 대한 글이 실린 "근세한일관계의 실상과 허상"을 받아 가지고 와서 잘 읽었다. 그리고 구법고승전을 이틀만에 모두 읽었다. 중요한 내용은 메모를 해두었는데 컴퓨터가 좀 이상한 듯 하다. 이 책을 카페 '책읽기' 란에 소개해야겠다. 이는 모두 이승휴의 내전록과 연계해 읽은 책이다.
6월 30일 화요일 비
그제 허지산(1893~1941)의 중국도교사를 독파하였다.이에 대한 소개글을 본 카페 '책읽기'란에 독후감으로 올렸다. 이 책에서 전국시대에 식객들의 활동이 대단하였음을 秦니리의 여불위가 3천 명을 식객으로 거느렸고,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역사와 전승, 설화를 쓰게 한 것이 "여씨춘추"(10권)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과 사의 문제 사후의 혼과 백의 문제, 인간과 자연과의 문제. 점성술, 신선사상, 불사약, 봉선제도, 유교 경전의 윤색 등을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저술한 책이다.
허지산은 역사서, 유교전적, 도가의 전적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자신의 논지를 편 책이다. 상권만 저술하고 하권은 그의 사망으로 이루지 못했다. 정수환 박사가 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실장이 되었다고 한다. 안승준박사가 정년퇴임을 했다.
7월 7일 화요일 맑음
요즘 꿈자리가 좋지 않다. 이성무 교수 꿈을 꾸었다. 淸原貞雄이 1928년에 쓴 "일본사학사"를 다시 1주일에 걸쳐 대충 살펴보았다.일본사학사의 흐름을 다시 확인했다. 인터넷에서 일본서기를 검색하였더니 일본이란 이름은 백제인이 붙인 것이라는 견해까지 실려 있었다. 11시 쯤 혼자 뒷산 둘레길에 가면서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수 백 번 타불 대신 내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한 바퀴 돌았다. 내가 누구이고, 내 마음이 어디로 달아났는가? 방황할 것 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후에 고향 윤길섭 친구가 택배로 보내온 모시 잎을 떡으로 만들어온 것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통사에서 중도적인 견지에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병익 교수님으로부터 지난날에 증정받은 "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 마음을 추스리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노래기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7월 8일 수요일 맑음
어제 약속한 동장과 3시에 만났다. 10시 30분까지 책을 읽었다. 불교방송을 듣고 명상이라는 제목으로 하는 스님의 뜻이 깊었다. 선정하기 전에 반야를 배우려는 자 보살이라는 전제를 한 후 그 조건으로 대자비심을 가질 것, 원을 크게 세울 것, 중생의 제도에 뜻을 둘 것 등을 설명하고 좌선 하는 방법까지 차분히 설명해주셨다. 참으로 값진 가르침을 받았다.
7월 13일 월요일 비
한 줄 수다에 올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곳으로 다시 옮깁니다.
지금 새벽 4시입니다. 2시 반 경에 잠이 깨어서 뒤척이다가 텔레비전을 켰다. 불교방송에서 유마경 강의를 들었다. 요지는 모든 선을 행하고 모든 악을 짓지 말라는 말씀이 석가모니께서 처음으로 설법하신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에서 내가 느낀 것은 진정으로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를 진실로 깨닫기 위해서는 말로, 머리로 하는 것은 참다운 것이 아니고, 이 영역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며, 이를 가르쳐 주는 불경이 유마경이라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채널을 돌렸더니 임동창 씨의 '동감의 소통'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조선시대의 임제(호는 백호)선생이 평안도의 관직을 받고 부임 도중 개성에 도착했을 때 황진이의 묘소 앞에서 술잔을 올리면서 읊은 시조를 소개했다. 백골이 된 황진이에게 읆은 시를 시조 창으로 부르는데 참으로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이 조정에 이를 보고하여 그는 평양에 도착하자 마자 파직되었다고 한다. 임동창 씨는 풍류를 말하면서 자연스러운 감성, 자연과 어울리는 것이 우리의 시조라고 하였다. 그가 든 비유 중에 물은 불을 끄는 속성을 가졌지만 산불을 한 바가지의 물로는 끌 수 없고, 불은 모든 것을 태우지만 물에 의해 제압 된다는 것이다. 시조는 흐르는 물과 같이 불러야 한다면서 포석정의 유상(흐르는 물에 띠운 술잔)을 소개했다. 이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 강의를 듣고 나는 연구실에 와서 컴퓨터를 켜서 올사모에 들어와 "생활이야기"에서 '고향 나들이'를 열고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사진 앞에서 세 번의 기원을 하고 절을 세 번 했다. 그리고 부모님 묘소와 내가 앞으로 들어 갈 묘소 사진을 보고,내가 태어난 낙지리 사진을 보았다.
오늘 그동안 내가 며칠 간 고민해왔던 글의 썼다. 같은 날 죽은 두 사람,박원순 서울 시장과 백선엽 대장의 죽음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억울함이 있더라도 두 분은 모든 것을 잊으시고 편안히 잠드시오" 라는 조사를 드린다. 이에 대한 글은 역사평론에 올리겠다. 한 줄 수다에서 말이 길어져 올려지지 않음으로 다시 창작의 글로 옮겼다가 이를 삭제하고 일기에 첨부했다..
7월 19일 일요일 비
7월 16일 목요일 12시에 전진국 박사를 오리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놀다가 왔다. "일본서기"를 빌려다 읽는 중이다. 나는 김기섭 박사의 21세기의 한국고대사라는 책과 고병익의 동아시아 전통의 변용이라는 두 책을 주었다. 18일에는 한국사학사보를 메일로 받아 거의 다 읽었고, 18일 토요일 외손녀, 김민경, 손자 손녀 서진. 예진이 와서 자고 갔다. 보일러를 경동 콘덴셜보일러로 교체하고자 한다. 기영이가 두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았다.
7월 29일 수요일 비
그 동안 "역주본 일본서기" 3 책을 10일 간 통독 했다. 전진국 박사 내외를 불러 점심을 사주고 격려했다. 그의 부인 김해인 씨는 부안김씨라니 더욱 친밀감이 생기고 골상이 훤한 것이 아주 좋은 인상이었다. 홈플러스에 가서 식사를 하고 "일본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헤어져 7월을 아듀하는 뜻으로 놀다가 왔다.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통사를 써야겠다. 그동안 창작의 글로 '산모퉁이와 굽이'라는 글도 카페에 올렸다. 지교헌 교수와 윤승원 씨가 평을 해주었다.
8월 8일 토요일 비
오늘은 할아버지의 기일이다(음력 6월 18일), 비록 제사를 시제로 넘겼으나 할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감출 수 없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요즘 전국이 엄청난 장마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비록 오늘 시골의 할아버지 묘소에 찾아가지는 못하나 온종일 할아버님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며 보내야겠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 정필도 씨가 취장암으로 고생을 한다니 문병을 가야겠다. 엊저녁에 부처님께 쾌유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어제 밤에 불교방송에서 정목 스님의 '나무 아래에 앉아서'라는 방송을 감명깊게 보았다. 오늘도 감사하고 유익하게 보내야겠다. 올사모 카페에 그 동안 20일 넘게 준비해온 글 " '일본서기'에 대한 사학사적 평가"라는 글을 역사평론에 올렸다.
8월 17일 월요일 맑음
요즘 지루한 장마가 오늘 끝났다. 정필도 씨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용기를 주고 있다. 약사경을 통독했다. (밤 3시가 지났다.)20일 전부터 노래기가 극성을 부려 6시 30분에 일어나면 이들과 전쟁을 벌리고 있다. 장마로 많은 수재민이 생겼다. 엄청난 폭우로 곳곳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엊그제 8.15 광복절은 이상하게 의미 없이 보낸다는 것을 실감하겠다. 외손녀, 김민경, 손자 서진, 예진 남매가 와서 한 밤을 자고 있다. 코로나 염병이 279명으로 확증 되고 있다. 사랑의 교회에서 엄청난 확산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월 24일 월요일 맑음
코로나 확산에 전국이 비상에 걸렸다. 사랑의 제일 교회가 마구 퍼트리고 있다. 하루 확진자가 390 명 대에 이르고 있다. 장마의 피해 소식이 뉴스를 뒤덮더니 사회통제 2단계 발령이 내렸다. 어제부터 법정스님의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이라는 법어책을 통독 했다. 죽음의 준비, 마음을 열어라. 현재를 충실하게 하는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든 단원에 발표 일자를 적어 놓아 그의 개인적 역사기록물으로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
8월 31`일 월요일 흐림
지난 주에 법정스님의 책을 읽고 지난 화요일 연구원에 나가 "법구경" 세 책과 "무소유"라는 책을 빌렸다. "무소유"는 바로 흥미 있게 읽었다. "법구경"은 거해 스님이 파리어경전 번역본인 2책과 한명숙씨의 한역본 법구경을 통독하면서 고대의 한국불교 서술에 힘을 받게 되었다. 일 주일 간 거의 10시간 이상 읽었다. 참으로 책을 읽는 기쁨을 만끽했다." 법구경"을 다 읽은 후 이 책을 누구에게 읽으라고 권할 가 생각했다. 박노욱 선생에게 추천하기로 했다.
9월 10일 목요일 맑음
9월 3일에 고익진 교수가 번역 편집한 "한글 아함경"(담마아카데미, 재개정판, 1981초판 12019년 재개정판)을 교보에서 주문했다. 이 책을 받아 열심히 읽었다. 어제 밤에 903 페이지를 다 읽었다. 초기 불교의 정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부처님의 하시는 말씀을 좀 배우고자 한다. 모든 말을 내 편에서 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려해서 하면 대단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삼국 시대 초기 불교 전래의 의미를 조금 이나 마 심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 기쁨을 감출 수 없다.
9월 15일 화요일 맑음
그제 13 일은 아버지 기일이다. 장조카에게 10만원을 보냈다. 이번 제사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코로나19 전염병 때문이다. 내 가족 카카오톡을 통해 자식들에게 제사 날 임을 알렸으나 누구 하나 반응이 없다. 제사는 어제 밤에 지냈다. 동생하고 전화로 두 형수가 참석하지 못했음을 확인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매일 같이 보면서 문안을 드리니 제사에 참석할 의미가 줄어들었다. 집 식구와 딸 현희와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7시에 둘레길을 걸었다. 오늘도 그 시간에 걷기로 했다.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절반 쯤 읽었다.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동생에게 했더니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 전에는 차를 타고 올 터인데 운전을 하지 못할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오늘도 부모님이 낳아 주신 공덕과 길러주신 은혜를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기백 교수의 "신라사상사연구"를 다시 읽고 있다. 광장의 원왕생가가 멋지어서 친구인 박노욱 선생과 조원래 선생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9월 23일 수요일, 맑음
아침 6시에 일어나 동아일보를 대충 읽고 빵 한 조각을 아침으로 먹었다. 오늘 춘천에서 이승휴 영정을 만드는 3차 학술포럼이 열린다.내가 좌장을 맡게 되었다. 8시에 현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셋이 가기로 했다. 주유를 하고 가다가 휴대폰을 집에 놓고 와서 다시 돌아와 가지고 갔다. 회의전 30분 전에 도착했다. 춘천 강원도도민신문 건물에서 발열 체크, 출입자 명단을 작성하고 대회의실에 들어갔다. 지난 토요일 발표문을 받아 보고 다 읽고 갔다. 11시에 조용진 원장의 '동안거사 이승휴의 용모제정연구', 최정 교수의 '이승휴 복식 복원'의 발표문을 듣고 30분간, 토론을 했다. 12시 30분에 도시락을 먹고 1시에 회의가 속개 되었다. 김인호 교수의 '이승휴의 '촌거자계문'과 삼척 생활', 이상호 박사의 '이승휴와 그의 유산을 활용한 역사콘텐츠 개발 및 활용방안'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진지하게 가졌다. 이날 이상호 박사의 제안에 따라 '제왕운기'의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운동을 앞으로 전개하고, 이승휴의 영정을 만든 다음 이를 동상으로 만들어 거리의 교차로에 세울 것 등이 제안 되었다. 이승휴의 용모에서 그의 풍신, 풍채를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고 하여, 진성규 교수는 '이문위국'이라고 하자고 했고, 나는 '부나함'을 제안했다. 부는 부지런히 살자는 뜻이고, 나는 나눔의 생활인 나누기로 나의 소유물, 마음까지 이웃 사람, 많은 사람에게 나누자는 보시의 마음. 함은 함께 라는 뜻으로 이는 시공간으로 보아 공간은 우리 가족, 시민, 도민, 전 국민, 전 인류까지 확대되고 시간적으로는 우리의 단군조선의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다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자는 정신이다. 회의는 3시 30분에 마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판교로 오지 못하고 광주로 빠져 오는 길로 들어서서 8시에 집에 도착했다. 내가 오늘 토론장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한 듯 하다.
2020.10.1 목요일 추석
10일 전 쯤 403호 이정철 씨로부터 안동림 역주 "벽암록"을 기증 받았다. 이분을 나는 도사라고 칭찬하는 분이다. 이분은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27세에 동국대학교 건축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했고, 그 후 공부를 엄청나게 하고 싶다고 하기에 초면 인사에서 내가 경탄한 분이다. 그 후 모든 행동이 말과 다름이 없으며, 항상 둘레길이나 법화산 등산을 할 때에는 길게 깍은 단장을 짚고 다닌다. 한 달 전 그분을 통해서 법정스님의 수필집 두 책을 읽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도 연구원에서 빌려다 읽었다. 그리고 조그만 선물을 드리면 반드시 예를 차렸다. 그분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독서를 하는데 6시에 잠에 들어 새벽 한 두 시에 일어 나는 것 같다. 지금은 현대연구소에서 일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어떤 제품을 최종 감독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둘레길에서 만나 같이 걷기도 하고 만날 때마다 변함이 없다.
그래서 "벽암록"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쪽지를 붙였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 가까이 계셔 행복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입니다.2020 09 27 妙 드림" 이라고 정성스럽게 서명한 새 책을 받았다. 아마도 이 책을 두 권 주문해서 한 책을 나에게 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
벽암록을 읽다가 휴휴거사가 후서를 썼다는 정보를 얻고 혹 이승휴 아닐까 해서 인터넷으로 "벽암록"에 대한 5편의 논문을 읽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사람이었음을 확인했다.
법정스님의 "화엄경번역본"을 연구원에 가서 빌려왔다. 그중 입법계품을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 선재동자가 '무염족왕'을 만나는 편을 읽었다. 이제까지는 화려하고 장엄한 불교 세계를 말한 것이라면 이 편은 현실 세계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한국의 현실 세계를 뜻한다. 그런데 천신이 이분의 말을 명심하라는 계시를 두 세 번 내려 준다. 나는 "화엄경"을 읽는 황홀한 재미에 빠져 있다. 오늘 추석이다. 조부님, 부모님께 차례에 못 가지만 정성껏 마음을 전합니다.
2020.10.12.월요일
12시에 오리역에서 박노욱 선생과 조원래 선생을 만났다. 아구찜 복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커피 집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박 선생이 가져온 자료를 함께 검토했다. 이는 주로 '起耕爲主'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원래 교수의 임진왜란사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3년 간 문제사 중심의 임진왜란사를 쓰겠다고 하기에 그 후에 개론서를 쓰라고 하였다. 나는 사학사학회 이야기를 하면서 조교수도 앞으로 매달 자동이체하는 동료로 하기로 하였고, 임진왜란사연구회를 해체하고 그 기금을 사학사학회로 넣자고 함에 흔쾌히 동의하여주셨다. 나는 돌아와 하태규 교수와 통화를 하고 김경수 교수에게 이를 통보했다. 그러면 앞으로 10여 년의 학회 운영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밤에 김지견 교수가 번역한 "화엄경"을 읽었다. 청양문화원에 써 줄 원고를 대폭 수정해야겠다고 구상했다.
10월 18일 일요일 맑음
16일 김경수 교수로부터 임진왜란사연구회 기금 3,430 여 만원을 사학사학회 기금통장으로 보내왔다. 임진왜란사연구회를 한국사학사학회에 통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박노욱 선생 내외와 우리 내외가 함께 설악산에 가기로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금 준비를 하고 인덕원에 가서 박선생 내외 분을 태우고 그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이촌동에 가서 그 차를 타고 서울 양양고속도로를 7시에 출발하여 양양에 도착하여 낙산사를 가기로 했다. 낙산사 홍련암을 먼저 보자고 해서 이를 찾느냐고 한 바탕 실강이가 벌어졌다. 그곳에서 홍련암을 핸드폰으로 검색하니 서울 홍련암을 일러주어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중간에 확인하고 다시 속초로 내려갸 홍련암을 찾아 갔다. 하마트면 구경을 하지 못하고 돌아올 번 했다.
낙산사, 홍련암, 해수관음상을 보고 내려와 해변가에서 회를 먹고 숙소로 가기 전에 국립공원설악산 입구를 들렸다. 내 핸드폰이 작동이 안되어 이를 수리한다고 2시간 이상 소비했다. 5시 50분 전이었다. 내일 7시부터 케이블을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돌아와 숙소에 머물렀다.
18일 아침 일찍 케이블 카를 타고 외설악의 하단에 올라갔다. 박 선생이 힘들게 올라가 주었다. 바위 위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생명의 강인함을 다시 느꼈다. 그리고 내려와 신흥사유물전시관을 보고 신흥사를 거쳐 흔들바위 계조암까지 올라갔다. 박 선생 여동생은 포기하고 넷이서 올라갔다. 길이 신흥사에서 2.3km지만 올라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박 선생이 스틱을 짚고 절룩거리면서 올라가는 의지가 강인함에 새삼 놀랬다. 우리는 하산하여 준비한 빵을 먹고 돌아오다가 인제 백담사 앞에서 황태구이를 먹고 서울에 5시간 걸려 도착했고, 우리는 무사히 이틀 간의 여행을 마쳤다.
2020.11. 8. 한 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동안 "화엄경연구"라는 책을 통독했고, '벽암록'도 통독했다. 조원래 교수와도 저 지난 주 수요일에 오리역에서 만나 연구원 기묘명현 전시회에 모시고 갔고, 지난주 금요일에는 노용필 선생을 오리역에서 만나 식사를 한 후 한 시간 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그의 두 권의 저서, "한국고대인문학발달사"제1책(2017)과 "이기백한국사학기초연구"(2016) 두 책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 깊이에 경의를 표한다. 어제는 솔벗재단 연구비 지급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왔다. 이사장이 향후 연구자 선발에 대한 업무를 연구원에 부탁하겠다는 뜻을 직접 들었다.
2020.11.14. 토요일 맑음
지난 11일(수요일)에는 이헌창 교수가 장서각 기묘명현 기념전 관람을 하러 온다기에 연구원 식당에서 만났다. 먼저 온 이 교수가 식권을 사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연구원 안의 동편 호수가를 지나 산을 걸으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했다. 주로 내가 쓰려고 하는 '사학사로 보는 한국통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이었다. 이 교수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산행의 길이 나지 않아 조금 헤매다가 겨우 기어 나왔다. 2시에 장서각에 오니 정수환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이성미교수와 최진옥 교수가 관람하고 있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우리는 이를 둘러본 후 정수환 실장 방에 올라가 차를 마시고 나와서 헤어졌다. 이 교수가 자기는 더 산책을 하고 가겠다고 하기에 헤어졌다.
14일 토요일에는 고문서학회에 참석했다. 코로나로 비대면 회의였다. 특히 미국의 박성종 교수가 시종 참여했는데 수염을 하얗게 길렀고, 뒷면에 서가가 있어 비록 몸은 미국에 가 있지만 그의 정신 세계는 한국학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발표는 양혜은 박사의 해인사 대장경판 인쇄를 한 1910년대의 일본인이 남긴 조사 보고서 문서를 분석 정리한 것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박의영 박사는 윤선거의 문집에 실린 간찰이 어떻게 편집되었는 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발표 했다. 재미 있게 들었다. 외손녀 김민경이 10시 경에 왔고, 서진과 예진이도 밤에 와서 잤다. 나와 아내는 아침 9시에 법화산 둘레길을 걸었다. 가랑잎이 가득 쌓여 늦 가을, 첫 겨울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고, 숲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11월 20일 금요일 비
일 주일 전에 '청양의 꿈' 원고를 수정해 문화원에 보냈다. 보리밭이 그리워 이를 화분에 키워보고 싶다. 집 식구에 부탁하여 서울 경동 시장에 가서 보리 씨를 구해왔다. 1500원을 주고 사왔다고 하는데 남은 보리는 엿기름을 기른다고 싹을 냈다. 화분에 심은 지 4일 만에 싹이 솟아 나왔다. 보리싹은 전투에 나가는 자처럼 힘차게 가지런히 솟아 올랐다. 엿기름을 낸다고 한 것도 뿌리가 나와서 이를 옥상에 말렸다. 싹을 주여야 당분이 담기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베란다의 보리싹이 쑥쑥 자람을 보는 재미가 솔솔할 것 같다. 그리고 어제는 집 밖의 터에도 작은 세 고랑에 보리를 심었다.어떻게 자라는지 관찰하기도 할 겸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늦 가을과 초 봄에 싱싱하게 자라는 보리싹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이다. 밖에 심은 것은 조금 시간이 늦지 않았다 싶다.
11월 25일 수요일 맑음
어제 3시 30분에 법화산 둘레 길 제2정자에서 우리 오피스텔 403호에 살고 있는 이정철 법명 묘일거사를 만나 법화산 정상에까지 올라갔다 왔다. 그는 건축사이면서 인문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분으로 나에게 벽암집을 사 주었고, 10일 전에 8책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우리는 여러번 등산도 같이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분이더. 그는 그 중 법정의 "버리고 떠나기"와 '텅빈 충만"이란 책을 읽었다. 그리고 월던 소로우의 책, '시민불복종'도 주어서 대충 읽었다. 책을 전해주면서 쪽지에 자기가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니 돌려 달라고 하였다. 나는 이를 돌려주면서 책을 읽은 책 거리를 하겠다고 하산하면서 옥룡불백집에서 순두부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 분은 공부를 대단히 중시하는 분으로서 나는 그를 묘일거사라고 부른다.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식사를 자기가 사겠다는 것을 내가 샀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한국사학사학회에 월 1만원을 평생 내겠다고 순순히 답했다. 그러나 돌아와 생각하니 술 마시며 한 이야기이니 후일 다시 이야기 하면 받아 줄 생각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사연은 다음과 같다. 자기 친구가 한 잔에 100만 원하는 포도주를 얻어 마셨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사연인 즉 포도주를 세 사람이 마시는데 100만원 짜리 흑진주를 넣어 주었다는 것이다. 한 친구는 흑진주를 꺼내 50 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하길래 친구분에게 돈을 유용하게 써야 한다고 했고 우리 학회를 도와줄 수 있도록 말해보라고 둘러서 이야기 했더니 다른 사람에게 그런 청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1월 30일 음 10월 15일 맑음
할아버지 제문
오늘 음력 10월 15일에 할아버지 제사를 올리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봄에 한식차례를 코로나 전염병으로 가을 시제로 올리기로 했습니다만 가을 시제도 지낼 수 없도록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손자인 제가 오늘 차를 몰고 가서 묘소에서 술을 올리면서 제사를 올릴 가 생각은 하였지만 그 것도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할아버지 제사만이 아니라 윗대 조상님들에게도 못 지냈으니 할아버지께서는 섭섭하게 생각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제가 매일 아침마다 할아버지 사진을 보면서 문안 들이듯이 오늘도 할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저 혼자 제문을 올립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 전염병으로 엄청나게 야단법석입니다. 비록 술과 음식을 차리지는 못하지만 저의 마음 만은 할아버지께서 저를 키워주신 은공을 잊지 않고 감사를 드리오니 제사 대신 이 축문을 올립니다. 받아주십시오.
할아버지 내년에는 제사를 지내면서 축문을 올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손자 구복 올림
12월 9일 수요일 맑음
어제는 밤을 새워가며 강원도 삼척시와 강원일보에서 만드는 이승휴 영정 홍보를 위한 리풀렛을 보고 전체를 고치고 추가했다. 이승휴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결론을 추가했다. 그리고 불교방송 tv를 보고 미국 여자가 발표하는 것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함에 이를 수용함이 인욕바라밀이라는 이야기에 감동하여 큰 아들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식거래에서 손을 떼고 학문에 몰두하기로 하였다. 요즘 김용섭 교수의 회고록을 재독하면서 여러 학자에게 읽어볼 것을 권하고 이기백과 김용섭의 역사학 비판을 학계에 발표해보고 싶다. 옥영정 교수에게 제왕운기의 서지학적 연구를 쓰도록 권하였다. 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이 분은 이정칠, 법명은 妙日거사이다. 책과 공부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어서 가까운 친구로 사귀었다. 나와 둘레길을 같이하고 법화산 정상에 세 번 함께 올랐다. 둘레길에서 만남과 책을 주고 받음에 익숙한 나의 동반자이다. 여러 차례 식사를 같이했다. 남해출신이다.
2020.12.19일 토요일 맑음
기온이 급강하하여 영하 10도인데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가량이라 한다. 한낮 온도가 2도라니 이제 추위가 심한 한겨울이다. 208호 보일러가 돌지를 않아서 전기 난로, 전기장판을 가져다 주었으나 밤새도록 영상 13도에서 하루 밤을 자고 일터로 나간 노동자의 삶이 몹시나 애처로웠다. 다음 아침 보일러 기사를 불렀더니 아래의 배관이 얼어서 물이 공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을 끓여 붓고 세탁기의 온수를 부었다. 집 식구와 현희가 물을 끓여 세 시간 만에 녹이고, 문풍지까지 발라주었다. 보일러 배관이 언 것은 사는 사람이 3~4일 집을 비우면서 조처를 잘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그들에게 미리 이를 알려주는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이를 해결하느냐고 힘들었다.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2020.12. 26일 토요일 맑음
묘일 거사가 만들어준 나무 단장에 초칠을 해서 이를 짚고 집 식구와 법화산 둘레길을 걸었다. 첫 쉼터에서 나는 11개의 밤 알과 1개의 수리가 단 꿈을 꾸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코걸이와 턱걸이를 반복하면서 다녀왔다. 어제에 이어 모처럼 산행이었다.
2021.1.2. 토요일
숙모님의 건강이 날로 쇠약해진다는 소식을 대전 동생과 둘째 형수로부터 듣고 기영이 차로 찾아 뵈었다. 작은 어머니는 내 이름을 대도, 전 아명을 대도 못 알아보셨다. 종수씨가 서울 시숙이라고 하니까 겨우 고개를 끄덕이셨다. 영양보호사가 와서 도와 주고 있었다. 나는 작은 어머니 손 발을 주물러드리면서 준비해간 불경을 읽어드리고 염불을 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음을 확인하고 운구하는 일로 캐디락이 들어 갈 수 없는 길은 당숙 트럭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해서 꽃 상여를 알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12시 30분에 집을 나와서 되돌아왔다. 밤에는 불교방송을 보면서 가기 전에도 갔다 와서도 금강경 독송을 따라 했다.
2021년 1월 4일 월요일 맑음 (음력 11월 21일)
오후 2시에 현희와 함께 뒷산 둘레길 운동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숙모님이 3시에 사망하셨다는 전화를 대전 동생으로부터 들었다. 집 식구는 준 이네 집에 가 있었음으로 연락을 했다. 바로 달려가고 싶어 대영이 차를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내일 가도록 하고 부고장을 쳐서 종친회 정석영 회장과 구황이에게 알려 달라고 보냈다.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내일 아침 9시30분에 현숙이 차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상주에게 둘레석 석물 값 200만원을 위친계금에서 송금했다.
2021년 1월 5일 화요일 맑음
현숙이가 차를 가지고 와서 집식구와 나는 공주장례식장으로 갔다. 11시 20분에 도착했다. 둘째 누님과 생질 민경일 군과 통화를 했다. 집식구와 현숙이는 준 이를 돌봐주어야 하기에 점식 식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어서 조문객이 몇 명 왔다. 형수 두분, 사촌 누이 동생 명순이, 큰형수, 심순이, 경순이가 왔다. 입관과 염은 3시에 했다. 거의 두 시간에 걸쳐 장엄하고 경건하게 했다. 상조회에서 염을 해주었다. 저녁 상식을 올리고 상복 차림의 격식을 갖추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는 대전 동생 집으로 갔다. 코로나 19로 마스크를 써야 하고 사적 모임은 5인 이상 집합이 금지되었으나 장례식장은 예외였다. 그러나 거기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의미가 없어 자고 내일 오기로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뒤척였다. 축문을 준비했다.
2021년 1월 6일 맑음 저녁에 눈이 내림
동생과 함께 아침을 먹고 우리는 산으로 직접 가기로 했다. 집안 문제를 이것 저것 상의를 했다. 아침에 고모의 딸 한석례에게 부고를 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하고 동생 전화로 알렸다. 상주를 돕는 일이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8시에 집을 출발하였는데 우리는 영구차보다 늦게 도착을 했다. 산의 일은 사촌이 석물 공장에게 일임하여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으나 집안에서 아무도 없으면 되겠는가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장으로 갔다. 차들이에 많이 와서 재실에 주차했다.. 날씨가 추운 것을 걱정했는데 해가 뜨니 온화한 날씨였다. 구옥이(통덕랑공차 종친회 회장)이가 현장에 나와 있었고 재실문을 열어 전기보온도 했다. 광은 황토흙으로 아주 좋았다. 하관 직전에 내가 준비해간 축문을 읽었다. 삼우제를 지내고 탈상하겠다는 이야기와 제삿날은 작은 아버지 기일을 음력으로 하기에 음력으로 하겠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성분함을 못 보고 돌아옴을 미안하게 생각하였지만 그리고 점심을 사효당에서 먹고 구성이 차로 서울로 올라왔다. 오후 3시였다. 사효당에 숙모님이 일 년 전에 오셨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오는 길에 부모님 산소에 올라가 인사를 드리고 갓점 할아버지 묘소에도 성묘를 하고 올라왔다. 3월 19일은 달용이 당숙 납골당을 여는 날이라고 한다.
2021. 1월 13일 수요일 맑음
어제 오후에 눈이 5cm정도 내려 집 앞의 눈을 힘겹게 치웠다. 그리고 한 두 시간이 지나니 또 눈이 내려 다시 치웠다. 308호 허윤성씨가 담배를 피우러 내려왔다가 거들어 주어 감사하다.
오늘은 집 식구와 함께 10시 10분에 나가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 초본을 떼고 소명부동산에 가서 벽산아파트 재계약서를 썼다. 그리고 정자동 국민은행에 가서 마이너스통장 재신청을 했다. 그리고 제생병원의 비뇨기과 진료과로 갔다. 오줌을 많이 보아야 한다기에 물을 네 병을 마셨다. 그런데 나는 일생 일대의 최고의 실수를 했다. 소변을 보려는 순간 설사가 나와서 그 곳 화장실에서 엄청난 설사를 바닥에 쏟았다. 미안한 감을 지울 수 없다. 이를 어떻게 속죄해야 할 것인가?
2021. 1.20일 수요일 맑음
18일 밤 8시 쯤 대전 동생으로부터 대전 둘째 형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19일 1시 경에 기영이 차로 집 식구와 함께 대전에 내려갔다. 전주 김서방, 생질 민경대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자고 20일 장례를 치르고 구성이 차로 서울로 올라왔다. 납골당 모래를 파내기가 어렵다고 해서 스치로프로 채웠다. 납골단지를 새로이 만들어 넣고 다른 납골단지는 모두 꺼내 묻었다. 3시에 집에 도착했다.
2021.2.6.토요일
아침에 기영이가 아침 식사를 나가서 하자고 전화가 와서 사양했지만 집에 찾아와 7시 10분 경에 대치동 김영모 빵집 옆 식당에 가서 나는 잉글리쉬부렛퍼스트를 시켜 먹고 네 사람이 한강공원에 가서 1km정도 걷다가 돌아왔다. 요즘 능률이 나지 않는다. 밤에 "중국사학사"와 "68일간의 일기" 두 책을 교보에 주문했다. 백승종씨가 쓴 "조선의 아버지들"이란 책도 주문해서 다 읽었다. 요즘 충열왕대의 논문 10 여 편을 읽었다. 이승휴의 시대적 배경을 쓰기 위해서이다.
2021. 2. 17일 수요일 맑음
지난주에는 영하 11도까지 내려가다가 주말에 풀렸는데 이 번 주도 다시 한파가 밀려온다고 한다. 어제 저녁 쯤 눈이 내려 집 앞의 눈을 쓸었다. 어제는 나는 산행을 하지 않았다. 그제 갔다 와서 쉬고 싶었다. 오늘 오후에 둘레길 산행을 나섰다. 아내가 조심하라고 했다. 눈이 양지 바른 집 뒤의 묘소에는 얼음이 남았다. 영하 8도의 바람이 불어 햇볕을 비추어도 얼음을 녹이지 못한 듯 하다. 조금 걸어가니 길위에 눈이 녹기도 하고 남은 것도 있었다. 그 아래 낙엽이 쌓여 있어 마친 헤진 옷을 깐 길을 가는듯했다. 내가 처음 쉰 곳은 둘레길의 종점이란 표지가 있는 탁자와 의자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양지가 바르고 찬 바람을 막아서인지 눈이 모두 녹아 있어 작년 가을에 심은 밤이 머지 않아 싹을 티울 것을 생각했다.
다시 나는 길을 걸었다. 그늘이 진 길 위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나는 내 발자욱을 남겼다. 혼자이기에 제2의 정자에서 돌아오지 않고 계속 걸어서 99굽이를 돌아 집으로 왔다. 둘레길의 표지판을 다시 보니 한글로 써졌지만 온통 한자의 말이었다. 우리말이 그만큼 문화적 언어로 정착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돌아와서는 우리말 만을 사용하여 '봄 눈 내린 길을 홀로 걷다'라는 산행기를 올사모 카페의 창작의 글로 남겼다. 눈이 얼음,눈, 물로 변화하는 것을 주로 썼다.
지교헌 교수가 댓글을 올려주었다.
18일.목요일 맑음 다시 글을 조금 수정했다. 순수한 우리 말 만을 쓰니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고, 그 자체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어서 몇 구절을 수정했다.
2021. 2. 20. 토요일 맑음
외손녀 김민경이 왔고, 이에 손자 서진, 예진이도 오고 대영이 내외의 세배를 받았다.코로나로 인해 온 가족이 함께 만나지 못하고 시차를 두어 만나기 때문이다. 기영이. 용진이도 왔다. 갔다. 내가 주문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김호동 역주)의 책을 받아 20여 쪽을 재미 있게 읽었다.
2021.02.21 일요일 맑음
엊저녁도 그제 저녁처럼 손녀 예진이가 밤 10시 경에 내 침대에 와서 잤다.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여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는데 곧장 2~3분 안에 잠들었다. 이야기는 어느 남매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지어서 하였다.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만난 사람들, 나무와 짐승과의 만남에서 주고 받은 이야기를 해주는 데 잠이 들어 중단했다. 오늘 아침 8시 경에 잠을 깬 예진이와의 대화는 천년의 대화이다. 첫 질문 할아버지 고개가 높아요, 산이 높아요?
답: 고개보다 높은 산도 있고, 낮은 산도 있단다. 산보다 높은 고개도 있고, 낮은 고개도 있단다. 산이 고개요, 고개가 산이란다. 마치 선문답같다.
둘째 질문, 할아버지 가족은 누구 누구에요?
답: 할아버지, 할머니, 기영, 대영, 그리고 큰 엄마, 김세원, 정서진, 정예진, 현숙, 현희, 정용진, 김민경, 김준 등등 그리고 김서진,김예진 하니
예진: 그럼 황서진, 황예진도 있네요. 그럼 더 있지 강서진, 강예진(외조모가 강씨임)
그럼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네요.
할아버지: 그럼 한 사람이 여럿이 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일 수도 있단다. 하나와 하나가 둘이고 둘이 하나란다.
예진: 할아버지 책 읽어주세요,
할아버지: "별에서 왔니, 달에서 왔니" 라는 책을 보여주었더니 하늘에서 온 아이는 천사, 달에서 온 아이는 달동이, 별에서 온 아이는 별동이라는 것을 읽고 말해주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 갓 태어난 지환이 사진을 보면서 너도 이런 때가 있었단다.
저는 없는데요. 너희 집에 네 사진도 있을 것이다.
예진: 할아버지! 어제 읽은 "우리어머님" 책을 가져다 주세요.
그럼 내가 한 권을 너어게 주마
한 권을 가져다 첫 장에 "사랑하는 예진에게" 할아버지, 2021,.21. 사인
할아버지가 쓰신 책이 몇 권이에요.
글세, 저는 알아요, 뒤적이더니 첫 소개란에서 열두권이네요.
예진이 음성을 녹은 해 놓고 싶어서 민경이에게 부탁해 녹음을 해 놓았다. 여섯 살 때의 목소리를 후일 들려주려고
9시 아침 식사
식탁에 나, 예진, 서진, 민경, 현희가 식사를 함 그 중 대화이야기
할아버지 저 앞 게사판에 써 놓은 것이 무엇이에요?
오피스텔 관련 기록이란다.
에진: 나는 기록해두는 것이 없는데요.
할아버지: 너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니 앞으로 기록해둘 때가 있을 거야. 일기장이 바로 너의 기록이란다.
할아버지 몇 살이세여요.
일흔 여덜
할아버지가 몇 살까지 예진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가?
할아버지 110세 때까지
야 그런 너무 길구나
그럼 99세
그때 네 나이는 얼마일 가?
한참을 생각한다. 자기가 먹어보지 않은 나이이기에
네 나이 27살이겠지.
즐거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연구실에 와서 기록한다.(2021.20.21. 아침 9시 50분)
2021.2.25일 목요일 맑음
오늘은 중형 소상이다. 아침 5시에 일어니 어제 예약해 놓은 버스를 타기 위해서 야탑역으로 가기위해 7시 반에 집 식구가 오리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8시 30분 차를 타고 10시 30분 유성에 내려 동생차로 전주 매제, 장조카 형순이하고 장평의 묘소에 갔다. 고속도로를 타니 40분 걸렸다. 묘소에 제물을 차려 놓고 12시에 제사를 올렸다. 창백이가 축문을 읽은 다음 내가 지은 축문을 낭독하였다. 제물은 유순이가 어제 내려와 장만하였다고 한다. 장평식당에 와서 떡국을 먹고 유순이 차로 상경하였다. 4시 50분에 도착했다.(제문은 창작의 글에 올렸다)
2021.2.27일 토요일 맑음
마평동에 가서 가축분으로 만든 퇴비 15포를 실어왔다. 오후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1주일만에 독파하고 '책읽기'란에 소개를 했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이다. 이제 이승휴의 역사학에 대한 집필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2021. 3.14.일요일
어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통독했다. 10 여일 걸렸다. 책 읽기에 이 책을 소개했다. 어제는 기영이네 식구가 와서 옥상에서 숯불갈비를 구어 먹었다. 12일이 기영이 생일이고 다음 24일이 우리 부부의 생일이기에 코로나로 다른 아이들은 부르지 못했다. 용진이와 며늘아이에게 "동방견문록"을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막걸리 한잔을 했다. 피곤하여 잠을 푹 잤다. 오전에는 기영이를 포함해서 넷이서 둘레길을 다녀와서 점심은 기영이가 소개한 일식집에 가서 셋이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내일부터 이승휴의 역사학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책 읽기에 소개한 글이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지음 김호동외 역, 사계절, 1998.
우리가 지금까지 역사하면 중국사 중심의 동양사, 또는 그리스 로마, 유럽, 미국 중심의 서양사로만 이해하였던 데에서 만주로부터 유럽, 러시아까지 초원지대를 누비던 여러 종족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서이다.
이에서 우리는 비단길이 아닌 초원의 길을 달리던 유목민족의 역사는 새로운 세계사를 알 수 있는 책으로 엄청난 흥미와 감동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문화와 종교, 지리, 예술을 중시한 점에서 꼭 한번 읽어보아야 할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의 충돌이 이란에서 지금까지 연속되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에 의해 최초로 세계 제국을 이룩한 원나라의 근원이 역사적으로 고대 훈족, 선비족, 돌궐족, 거란족이 몽골족이라는 것을 알았고, 유목민족과 농경민족과의 상호 절충 현상이 아주 흥미롭다. 중국화한 쿠빌라이 대원과 술탄화한 우레구 칸 제국(이란, 이락 사우디 아라비아)의 경우와 러시아화하지 않고, 몽골족의 특징을 500년간 지킨 킵착 칸국 등을 알게 되었다.
몽골족들의 내부전쟁과 분쟁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전쟁에서 전 주민을 대량 학살하여 이란의 경우 인구의 80%가 살해되었다는 기사에서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등한시된 중앙아시아 역사를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유목민족은 유럽과 중국의 농경문화를 연계하고 통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역참제라는 말타고 달리는 교통, 통신 체계만이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 이미 아시아와 유럽은 서로 교통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역사 이해에 우리 것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세계사적인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해둔다, 아주 유익한 내용을 알려주는 책이다. 꼭 읽기를 권한다.
2021.3.20.토요일 비
비가 온 후 오후 뒷산에 가서 작은 아기 소나무 7그루를 캐다가 집 앞에 심어 놓았다. 그리고 가지치기를 하고 지지대를 세웠다. 앞으로 매년 자라는 모습을 향후 10년 간 지켜보겠다. 그리고 이승휴와 그의 역사학이라는 책의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2021.04.01 목요일
이제 추위도 풀렸다. 이승휴 집필에 전념하여야겠다. 어제 신용철 교수의 이탁오라는 책을 주문해서 읽고 있다.
2021.4.6, 화요일 맑음
어제 "이탁오"을 독파했다. 그는 1527~1602년 76세로 자결하기 까지 열심히 책을 읽고 썼으며, 자유롭게 평등하게 생각했고, 시세나 역사적 흐름의 잘못에 대해 온 몸으로 저항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유가, 성리학의 도통. 문 중심의 유교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인 학자였다. 그는 유 불 선 기를 통합하려한 위대한 세기의 사상가였다. 공자를 비판하고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오륜 중 부부의 윤리를 제일 소중하게 다루었다. 모든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였다.
2021.04.18일 일요일 맑음
기영이와 함께 법화산둘레길 포장공사 반대서명 운동을 벌리기로 했다. 지난 목요일 오후 3시쯤 둘레길을랐는데 흙길을 파서 자갈을 깔았음을 알고 이를 항의하는 전화를 기흥구 민원실을 통해 산림과에 했다. 둘레길 10곳 이상을 짤라서 콩크리트로 포장할 것 같다. 서명지를 만들어 가지고 (집에서 제 2) 정자에 올라가서 두 시간만에 50명의 서명을 받았다. 우상표 용인신문대표에게도 전화를 걸어 호소했고, 사진을 보냈다.
2021.4. 22일 목요일 맑음
20일마북동사무소에서 산림과장과 직원, 이편한세상의 통장, 주민 2분, 나와 아들이 참석했다. 동장이 주재하는 회의를 가졌고, 공사를 중단하기로 했다.,15개 구역 중 2개 구역을 공사하는 것을 중단시켰다.
21일 산림과장이 전화를 해서 그렇게 중단하기로 했다는 통보를 등산 도중 받았다. 황토를 뿌려 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 요구는 즉석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동안 용인신문 이보라 기자가 와서 취재를 하였고 우상표 대표가 적극 도와주셨다.
2021.5.8. 토요일 흐림
현숙이가 7 일에 내일 어버이날이기도 하니 점심을 먹자고 해서 11시 30분 우리 세 식구가 가서 현숙이 집에서 차를 옮겨 타고 서판교로 길을 가다가 우설화라는 한식 집에 가서 불갈비를 먹었다. 현숙이는 내일 모레가 제 생일인데 엄마생일이라고 해서 엄마가 미역국상을 받게 했다. 지난 3월 우리 생일에 나만 미역국 잔치 상을 받은 것이 못내 걸렸던 같다. 준이는 야채를 전혀 먹지 않기에 나는 목에 힘을 주어 먹어야 한다고 했다. 돌아옴에 외손자가 할머니가 서현역에 간다고 했다고 그 곳에 모셔다 드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 할머니의 말 실수를 알면서도 비아냥거린 것이다.
8일 아침에 나는 현숙이 휴대폰에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어제 내가 준이에게 좀 더 부드럽고 아량있는 할아버지가 못된 것을 진정 참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준이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변죽을 울린 것이다.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재주보다는 덕이 더 소중하다는 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돌아와서도 좀처럼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하루를 자고 나니 내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2021.5.19. 수요일 부처님 오신날
어제 밤 9시경에 집식구와 함께 동네에 새로 생긴 법관사에 들러 연등하였다. 오직 스님 두 분이 계셨다. 젊은 스님이 다려주는 콩 차를 마시면서 아이들 명단과 주소록을 만들었다. 원래 우리는 초파일에 법륜사에 갔는데 이 곳 까지는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우리가 운전할 수 없으니 가기가 어렵다. 나는 10만원을 내놓았더니 집 식구가 말리는 눈치를 하자 주지 스님이 괜찮으느냐고 양해를 구했다. 우리는 내일 아침 예불이 몇 시에 하는 가를 물었더니 5시라고 해서 나는 그 때 오겠다고 하고 우리는 걸어서 돌아왔다.
5,19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신문을 읽고 목욕을 한 후 4시 50분에 걸어서 법관사에 갔다. 5시였다. 스님이 사방찬 기도를 한다고 하여 따랐다. 삼신각에 올라갔다. 내가 향을 세 개 붙여 꽂고 내려와 대웅전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천수경, 관세음보문품을 따라서 염송했다. 1시간이 걸렸다. 스님에게 우리나라 불교사 관련 책을 집필하는 중이라서 자주 오지는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이승휴의 역사학이란 책에서 그의 생애 중 일연선사와의 인연이라는 대목을 집필했다. 이는 누구도 언급한 적이 없는 내용이다. 동안거사집의 번역본이 잘못되어 일연의 이름이 명견이라는 것을 모르고 견운 스님으로 오역되었기 때문이다.
2021.5.30.일요일 맑음
한 2주간 일연의 찬시에 대한 공부를 했다. 백신숙씨의 "일연찬시연구"(1986. 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이 논문은 고운기의 "삼국유사의 일연찬시에 대한 연구"(연세대 1987. 연세대 석사학위논문)에서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일연의 시에 대한 것을 써야겠다.
어제 한국사학사학회 발표가 있었다. zoom이 노트북이 열리지 않아 옆에 살고 있는 며느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임상무 교수의 나의 역사연구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의 중립화론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한국사학사학회 기금에 동참을 구해 쾌락을 받았다.
오늘 아침에는 5시에 동네의 법관사에 갔으나 절문이 닫혀 있었다. 아래층에 살고 있는 분과 함께 갔다가 법화산 둘레길을 2시간 걷고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산책을 했다.
2021.6.11.일요일
그동안 20여일간 향가에 대한 공부를 했다. 최철의 향가의 문학적 해석(연세대출판부,1990)년 책이 모든 것을 가장 상세하게 다루었다. 북한학자의 해석을포함해 많은 소개를 친절하게 하였다. 나는 이에서 사뇌가, 3구6명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새로운 생각을 가졌다. 이 책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양주동의 해석을 위주로 해석했다. 제망매가에 대한 나의 수정해석이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묘즘 사촌동생 명순이의 문제가 복잡하여 신경을 썼다. 어제는 한국사상사학회에서 법화경 발표를 4시간 들었다.
2021.6.24일 목요일 맑음
거의 20일에 걸쳐 틈읽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다정 김규현 역주, 글로벌콘텐츠, 20013)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빌려와 다 읽었다. (803쪽) 이 책은 실크로드 고전여행기 시리즈의 1책이다. 이는 현장이 17년간 신장, 티베트를 거쳐 타마르칸트의 사막을 지나 아푸카니스탄을 거쳐 북인도, 중부인도, 남인도까지 갔다가 돌아온 엄청난 역정의 구법순례기이다. 그가 들린 많은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석가모니의 유적을 답사한 여행기이다. 이에는 12개국에 대한 기록을 12권으로 번역했다. 이 책에 다룬 각국의 내용은 각국의 동서,남북 몇리는 크기, 도성의 크기, 그 곳의 지형, 기후, 농산물, 습속 인종, 풍속, 사원과 탑의 유적 유물, 석가모니의 설법에 대한 아야기,아쇼카왕의 이야기 등을 비교적 상하 다루고 다음 어느 쪽으로 얼마를 가면 다음에 나올 국가가 있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읽은 전체의 소감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의 관계이다, 후자는 이 책과 체제가 비슷하나 그상업 화폐 이야기가 더 상세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6월 27일 일요일 흐림
잍ㄹ만에 조경철박사가 보내준 "나 만의 한국사를 독파했다. 처음에는 신선한 맛이 많았으나 뒤로면서 중복이 많았다.
2021.7.9일금요일
오늘 부안김씨대동보 서문을 완성하여 보냈다. 며칠간 하던집필이 중단되었다. 문정공 김구 묘지명의 첫 줄을 김동주씨로부터 명쾌하게 전고를 알아냈다.
2021. 7.21 수요일 맑음
청양에 가기로 1주일 전에 예정되었다. 부모님 묘소 분할 신청을 하기로 종손과 예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희가 공주행 보스를 예약하고 구범이차로 공주에서 청양에 갔다. 일을 마치고 고향 선산을 참배하였다. 고향 낙지리를 지나오면서 잠깐 내려 동네 사람에게 인사를하지 못함이 죄송스러웠다. 분향리에 가서 숙부 묘소, 부모님 묘소를 찾아뵙고, 갓점 당숙 집에 가서 모시고 할아버지 묘소에 갔다. 준비한 술을 한 잔 씩 올렸다. 그리고 공주에서 5시 30분에 수원행 버스를 타고 오산에 내려 전철로 집에 오니 9시였다. 와서 이것 저것 뒤 처리를 했다.
2021.7.28일 수요일 맑음
엊그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마움을 생각하면서 법화산 둘레길 산행에서 5000번 이상 염불을 했다. 오늘은 음력 6월 19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다. 제사는 몇 년 전에 시제로 돌렸다. 지난 주 수요일(21일) 청양에서 종손 원용씨와 부모님 묘소 분할측량을 신청하기 위해서 청양에서 만나기로 했고, 그 때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에 가서 술을 한잔 올렸다.
오늘 동네의 법관사에 가서 천윤성 스님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백중 기도를 신청했다. 부모님은 이미 불교와 인연을 맺게 해드렸으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불교와의 인연을 맺어드리지 못했다. 합동제사 이다. 법사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받아와 읽었다.
8월 22일에 백중 기도가 끝나는 날이다. 할머니 이름이 일병이라는 것을 깜박 잊었다. 그리고 신령윤씨도 추가해 넣어야겠다. 선망부모님에게 최소한의 일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우리 가족이 불교와 인연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다.
2021.8. 4.
윤승원 선생이 알려준 할머니의 말씀을 여러 부 인쇄해서 손자 손녀에게 전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서진이와 예진이에게는 내가
편지를 써 우편으로 부쳤다. 글씨가 힘이 없어 두 번이나 새로 써서 답장을 보내라고 하면서 할아버지의 당부도 몇 가지 적었다.
누님의 9순 축하 시
‘둘레길’
나의 둘째 누님의 9순 생일이 음력 6월 24일(8월 2일 월요일)이다. 한 달 전 쯤 생질로부터 이번 9순 잔치를 어느 모 호텔에서 예약해두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코로나가 갑자기 확산되자 이를 취소했다. 누님과 나는 자주 통화를 한다. 생일 날 아침에 전화를 걸어 축하해드렸다. 누님은 이웃에 살고 있는 막내아들 경국이 내외가 강화도에 사는 셋째 생질의 펜션에 와서 잘 먹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언제쯤 오실 것인가를 여쭈었더니 수요일에 집에 오신다고 하여 나는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 전에 대전 동생이 누님통장번호를 아느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했다. 내가 동생의 정성을 전하기 위해 가기로 했다.
금요일 (6일) 아침 3시 30분경에 배달된 조간신문을 읽고 매일 하듯이 연구실에 건너가서 올사모 카페에 “생활이야기” 란의 ‘고향나들이’를 들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보고 인사를 하고 6시 경에 아래층에 내려가 담배꽁초를 말끔히 주어서 청소하고 집 앞 뜰에 수부룩히 자란 풀을 낫으로 베려는데 까마귀 몇 마리가 앞의 전신줄에 와서 까악 까악 울어댔다. 나는 그 순간 불길한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 까마귀는 어디에 집을 어떻게 짓고 살 것인가가 궁금했다. 한 시간 동안 풀을 베고 올라와 아침을 먹고 현희가 둘레길 산행을 가지고 해서 7시 40·분경에 집을 나섰다.
네 컨디션이 좋지 않아 출발부터 힘이 들었다. 그러나 억지로 갔다 왔다.
10시 경에 만나기로 한 사람으로부터 오후 6시로 약속을 미루었다. 당초 11시 경에 누님 집을 가기 위해 출발하려고 하였는데 10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2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미금역에 갔는데 누님이 전철역에 나와 계신다며 어디쯤 오느냐고 전화가 왔다. 신분당선을 타고 양재역까지 가서 3호선을 갈아타는데 누님이 이미 나와 계신다는 생각에 계단을 뛰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고속터미널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는데 계단이 많았다. 급행을 타고 염창역에 내려 개찰구를 나가는데 10미터 앞에서 알아보고 손을 흔드셨고, 나도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했다. 점심식사 집을 찾아 가는데 우리는 손을 꼭 잡고 500미터쯤 걸어 둘째 생질이 즐겨 찾는다는 염창고기집에 들려 음식을 시켰다.
누님은 집에서 싸가지고 오신 복숭아, 쑥떡, 토마도를 내 놓으셨다. 식후에 맛있게 먹었다. 식사하면서 누님이 이야기를 했고, 나는 판소리의 북치는 (시나위군)처럼 장단을 맞추었다. 식사 값을 낸다고 실강이가 벌어질 번했다. 누님은 새돈으로 찾은 5천원짜리가 든 봉투를 주면서 장손자 가져다 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누님의 하나 뿐인 손자의 용돈을 따로 드렸다.
그 냥 돌아올 수가 없어서 누님 댁을 가는데 옥수수 두 팩을 사서 나누어 넣었다. 누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백년 전 1925년에 44세로 돌아가신 할머니, 6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백중기도에 올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누님과 저는 한 가지에서 나왔으나 가는 길이 다르니 우리가 죽은 후에는 만날 수 없겠지요 하고 물었더니 죽은 후에도 왜 못 만나겠느냐면서 살아서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했다. 누님 집은 목2동 주민센터를 지나 황금부동산 건물 2층이었고 3년 전에 한 번 와 본 기억이 있다. 누님이 자기 방에 가서 한 쉼자고 가라고 하기에 방에 들어가 누어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에어컨을 켜 놓으셔 준비해 놓으셨다.
누님은 시집 가기 전에 명주베 짜는 것을 배우려고 어머님이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베틀에 올라가 바디질을 해 보았다가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고 어머니헌테 엄청 혼났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고,셋째 생질 경수가 누님의 일생에 대해 책을 쓰겠다고 하는 새로운 소식도 들었다. 누님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시간 듣고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작별을 했다. 한 참오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집에 들어가시지 않아 손을 흔들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올렸다. 그런대 누님 사랑한다고 하는 이야기며, 9순을 축하한다는 허드레 인사를 하지 않고 건강하게 사셔서 제가 9순 때까지 사셔 축하해달라고 하고 내년 내가 책을 쓰면 누님에게 바치러 오겠다고 했다. 집에 와서 밤 7시 경에 왼쪽 눈에 거미가 내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 미금역 리지안안과에 들려 친찰을 받았더니 과로로 동구의 미세관 혈관이 출현되어서 그렇단다. 무조건 쉬란다.
누님의 9 순을 축하함
한 달 전 계획한 9순 잔치
코로나 확산으로 무산
통화와 달리 만나고 파
두 시간 전에 나와 기다리신 누님
어린 시절에 못해본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나이는 9 순이지만 얼굴의 미소는 초심을 띄었다.
11년 후 제 9순 때 축하해 달라고 축하 말씀,
돌아오는 길 아쉬움 못 이겨
멀리 와서 손 흔들며 작별 했네
사랑 한다거나 포옹은 안 했어도
지난 100 년 간의 가족에 대한 대화 속에
골목 골목에 숨겨둔 이야기 나누었다.
아아! 한 가지에서 핀 잎들이
먼 훗날에도 만날 수 있을까?
2021. 8월 7일
2021. 8.17.화요일 맑음
8월 18일 동해문화원에서 개최하는 문화학당 강의로 예정해서 그에 관한 준비를 했다. 더구나 왼쪽 눈동자가 과로로 모세관이
터져 일 주일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었더니 눈은 조금 나은 것 같다. 그 동안 이승휴집필이 중단하고 발표문을 썼다. 줌으로 발표할 준비와 가서 직접 발표할 두 가지 계획을 했다. 오늘 코로나 확산으로 9월 9일로 연기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2021.8.28 토요일 흐림
엊그제 현희가 중앙국립박물관 관람을 예약했다, 어제 온 외손녀 김민경과 함께 9시 30분에 출발하여 10시 30분 쯤 도착했다.
우리는 잠간 휴게실에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 선사시대 기획실과 그리고 중앙아시아실, 이집트실을 관람했다. 나는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강서대묘와 408년 덕흥리 고분(鎭)묘에 대한 상세한 영상과 경천사10층탑에 대한 설명이 마음을 끌었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많은 군마상이 특이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 그림도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민경이가 보고 싶어 하는 이집트 관에 들러보았다. 우리는 관람을 마치고 대뎡이 집에 가기로 하여 잠실나루역에서 간단한 식사를 가고 대영이 집에 갔다. 내가 20일전에 부친 손자 손녀에게 쓴 편지를 못 받아보았다니 보통 우편으로 부친 것이 그렇게 되었다. 4시경에 서진, 예진이를 태우고 집에 도착했다. 밤에 거실에서 자는데 잠이 들지 않아 내가 나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에는 숨을 3초간 들여마시고 3초간 멈추었다가. 7초동안 길게 내쉬게 하니 두 아이가 잠이들었다. 예진이는 내 옆에 와서 동화책을 한 권 읽어주니 잠에 들었다. 12시가 넘었다. 요즘 내가 눈이 피로하다고 하여 쉬고 는 중이기에 아이들에게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대전 동생이 아버지 기일에 묘소에 가서 술을 올리고 오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8월 22일 백중일을 맞아 할마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망실윤씨에게 합동제사를 이웃에 생긴 법관사에 가서 지냈고, 전주 여동생은 아버지 내외, 중형 내외, 그리고 윤씨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청양은 아버지 묘소와 숙부의 묘소의 분할칙량을 했다. 5개월 넘게 내가 신경을 써서 종손 원용씨가 와서 신청을 했고, 그 후 서류 절차는 유근섭법륭사무소에 의뢰하라고 했다.
2021.9.4. 토요일 맑음
어제 3일 10시에 연구원에서 박노욱 선생을 만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금강경 역주본 4책을 빌린 다음 오라역에 왔다. 박노욱 선생이 정철재 여사의 "거 마음이구먼"란 책을 읽고 금강경 역주본을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나는 그 책을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원 도서관에서 어느 책이 좋은 가를 보기 위해서 4책을 빌려 두 책을 주었다. 오리역에 가까이 왔을 때 영산 박병호 교수님을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11시 경이었다. 혹 선생님이 기억하시는지 아침에 전화를 드리지 않았다고 하기에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아직 떠나지 않으셔서 차를 돌려서 선생님 집 앞으로 가서 선생님을 모시고 골안사 앞에 있는 군산집이란 아구찜 전문집에 사거 아구찜(중)과 삼합 (중)을 시켜 배불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학사 발전 기금의 문제를 말씀드렸더니 내가 천만원을 낼가? 하시길래 곧바로 좋다고 하기보다 월 1만원씩 내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걸 하겠느냐고 하셨다. 식사를 한 후 선생님이 커피를 마시자고 오리역에 나왔다. 홈프러스 주차장에 차를 대고 1층에 올라가 커피를 마셨다.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선생님이 사학사 기금으로 내주신다면 감사하겠다고 했더니 정말 내라고 하는 농을 던지시더니 사학사학회에서 자신의 법제사 연구를 “우리 시대의 역사가” 라는 책에 내주어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기에 선생님이 책의 제호도 써 주셨다고 했다. 이는 기억하지 못하고 계셨다. 전화 메세지로 기금 통장 번호를 보내라고 하셨다.
집에 와서 통장번호를 보냈다. 그랬더니 10월 14일 찾는 통장이 있으니 그때 보내겠다고 하셔서 감사함을 다시 표했다.
집 식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도 해야 할 터인데 하나은행 적금으로 매달 10만원씩 넣는 통장을 찾으면 1~2년 후 내자고 하였다. 박병호 교수의 기부가 집식구의 마음을 움직였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연달아 생겼다.
4일 아침에 큰 아들 기영이하고 둘레 길을 갔다 오면서 이야기를 했더니 저도 4남매 이름으로 400만원을 내도록 말해보겠다고 하여 참으로 기분이 뿌듯함을 느꼈다. 원래 집식구와 기영이는 사학사 기금을 증권회사에 맡기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김경수 회장과 함께 한다고 해서 동부증권에 3천만원의 주식을 샀고 거기서 나오는 현금 배당금은 학회 통장으로 두 번이나 보내주었다. 이는 기금의 이자를 보내는 격이다. 월 1만원씩 자동이체하는 통장에 내 동생과 매부,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까지 협조를 받고 있고, 김경수 회장의 친구 4 사람이 동조하고 있음을 이야기 한 것이 보이지 않는 인연의 싹이 된 것 같다. 이 소식은 10월 15일 경 입금되면 알리려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2021.09.10.
두 세 달 전부터 준비된 동해시의 문화원에서 개최하는 문화학당의 강의를 대면 강의로 하기 위해 지난 월요일 최종 결정했다.
8일까지 발표문 원고를 보냈고, 9일 아침 야탑역에서 7시에 출발하는 동해 가는 고속버스 예매를 현희가 해주었다. 9일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뒤척이다가 6시 경에 집 식구가 야탑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동해 시에 9시 50분에 도착했다. 오종식 문화원장이 나와서 기다려주었고 둘이서 차를 타고 무릉계곡, 삼화사 답사를 하였다.입구쪽에 전일 삼화사 자리가 있고, 조금 올라가서 중대동이라고 이승휴가 서술한 반석이 있었다. 나는 용계와 구동의 확인, 몇 가지 지형에 대한 구체적 확인을 하기 위해서 답사를 계획했다. 현장에는 향토사가 4명이 와 있었다. 그리고 윤종대 씨의 설명을 들었다. 현재의 삼화사에 가서 적광전이라는 건물에 철불이 봉안되어 나는 참배를 하고 3층 석탑을 보면서 고 정영호 교수의 논문을 떠 올렸다. 삼화사 뒷편에 이승휴의 유허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아래에 있는 중대동이라는 반석에 올라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낙서가 쓰어져 있었다. 그리고 문수봉과 삼공봉이라는 산도 가까이서 보았다. 우리의 답사로 나는 주차장에 수백대의 승용차가 즐비하게 주차된 것을 보고 관광지로 변신한 파괴된 또는 찢어진 치마를 입은 여인상을 연상했다. 그리고 케이불 카를 설치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었고, 삼화사에서 뒷 편에 한창 공사를 진행중인 포크레인이 열심히 땅을 파고 있는데 상수도 공사를 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내려와 예약해 놓은 오후 7시 발 청량리 오는 ktx표를 구입하고 점심 식사를 했다. 문화원에 1시에 도착했다. 홍협이라는 경제전공가와 셋이 끝까지 동행을 했다.
2시에 강의실에 40여 명이 꽉 찼다. 강의 제목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였다. 지역사, 향토사를 뛰어 넘는 강의를 해야겠기에 강의안에 없는 역사와 문화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10여 분간 했다. 독서할 명저로 "동방견문록"과 "대당서역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사" 라는 책을 소개했다. 그리고 원고에 따라 이승휴가 직접 쓴 보광정기, 간장사기, 간장암중창기의 사료 비판이라는 내용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역사 창조를 위한 제언을 10여 분간 말한 다음 20분 동안 질문을 받았다. 주 질문은 향토사가들의 제왕운기를 쓴 곳이 무릉계곡이지 않겠는가에 대한 자기들 주장이 주였다. 나는 앞으로 현장 조사를 더 해야 답할 수 있다고 했다.
강의는 2 시간 진행되었고, 끝난 후 수료식이 있었다. 4시 경 원장과 홍협씨 셋이서 촛대바위를 관광했다. 석양에 멀리 보이는 두타산 사진을 찍었다.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누며 동해 바다를 응시했고, 삼척시의 일미당이란 음식점에서 생선구이를 먹고 나는 기차를 타고 밤 11시에 집에 도착했다. 하루가 길었다. 밤에 오는 ktx이어서 바깥 구경을 못했다. 언제 다시 타야겠다. 오늘 강의에서 동해시민의 가슴 속에 심어 놓은 밤 알이 제대로 얼마만큼 싹틀지 모르겠다. 올사모를 소개하고 인연을 맺자고 했다. 용계라는 내의 확인, 구동이라는 지명의 확인이 이승휴 유적지를 확인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2021.8.21일 화요일 흐림 가끔 비
추석날이다. 이전에 대전 동생이 묵과 밤, 땅콩, 들깨잎, 고구마 등을 차편으로 보내주어 야탑역에 가서 받아다 아들 딸에게 나누어주었고 고맙게 먹었다. 참으로 고맙다.
며칠 전 추석날 대영이가 여행을 가자는 것을 내가 거절해서 집에서 지내기했는데 코로나 방역수칙에 의거 모든 가족이 만나기가 그래서 7식구만 만나려 했다. 현숙이네가 참여한다고 해서 허락했고, 기영이네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집식구가 너희들은 10여년간 함께 지냈는데 지제 따로 추석을 지내보라고 했다.
집식구는 송편과 부침은 안했지만 아디들 먹이려고 음식준비를 하루종일 서서 꼬박했고, 신경통 약을 먹으면서까지 했다. 산에 가는 것도 불편하다고 해서 요즘 4~5일 함께 가지 못했다. 추석날 아침 3시반에 일어나 현희와 집식구가 식사 준비를 했다.
나의 지론은 우리가 먹는대로 하되 아이들이 음식을 한 가자씩 가지고 와서 간소하게 먹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갈비찜 LA갈비, 나물 부침 등 한 상이 가득했다.
9시에 대영이네 4식구, 현숙이네 3식구가 와서 식사를 하고 갔다. 기영이네는 처가에 먼저 갔다가 저녁에 와서 먹고 갔다. 준이가 어제 전화로 저의 엄마가 넘어져 병원에 갔다는 거짓말을 했다가 나헌테 야단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사실을 말하고 좋은 말만을 하기도 바뿐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현숙이는 제가 혼냈는데 왜 할아버지가 그렇게 야단이냐고 하는 말이 섭섭했다.
서인석외사촌 형님 댁에 전화를 걸고 있는데 아이들이 왔다고 해서 전화를 급히 줄였다. 그리고 기영이하고는 전날 등산을 하다가 삼척에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2021.9.25 토요일 맑음
새벽 2시20분에 일어나 오늘 있을 한국사학사학회의 발표문을 인쇄하고 읽었다. 주제는 임진왜란 사료의 종합적 검토인데 줌으로 하는 회의의 종합토론좌장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아침 8시금주 처음으로 둘레길 산책을 나섰다. 가다가 철쭉꽃 동산에서 나는 먼저 돌아왔다. 발표논문을 읽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사람에게 학회 참여를 권고했다.
어제는 강남역에 가서 박병호교수와 박노욱 선생을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곧바로 돌아와 논문을 읽었다.
종합토론 사회를 보았는데 임진왜란사연구회를 조직하여 이를 사학사학회에 통합하였고, 그래서 내가 좌장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6시에 학회를 종료했다. 조원래 선생이 임진왜란사연구회의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이는 다음학회지에 기록으로 남겨야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정 박사님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도리, 생활철학, 유머, 마음 고생에 대한 고백까지 꾸밈 없이 털어 놓는 '대전 나들이 記'는 한편의 휴먼 드라마입니다.
충과 효 정신은 21C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또한 국가와 가정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시다면 충과 효에 대한 게시판을 추가해도 좋을듯 합니다
이제 충이란 의미와 효는 분리해서 생각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충이란 국가를 위한 충이 아니라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국가보다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제1로 생각했거든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