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인데 사람이 없어요. 어찌된 일일까요? 5월1일 근로자의 날이라서 쉬었고 연휴라서 다들 도심을 빠져 나간 걸까. 겨우19.0을 찍고 일찍 귀가했어요. 프랑스 파리에 혼자 여행간 30대 한국 남성 김0훈(1993)씨가 2주째 연락이 끊겨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는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설마 예주랑 팀원은 아니겠지요? 4.17일 출국했으니까 후발대 같은데 그 집 패밀리들은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무사귀환을 기원합니다. 몸에 문신이 많다고는 하는데 이제 서른 둘이면 애기가 아닙니까?
한달 동안 예주 투어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가 맨탈이 해빙되면서 감기-목결림-긴축재정 등등이 연합해 나를 잡아먹자고 달려드는 형국입니다 만 이대로 먹힐 수야 없지요. 레지스탕트가 필요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치 독일에 저항하려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서유럽 사회에서 활발했다는 데 나만 모르고 있었네요. 프랑스의 드골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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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영국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고(1944년 11월 ). 프랑스 임시정부 수반 샤를 드골 장군이 처칠 일행을 영접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회고록에서 처칠은 “별을 여러 개씩 단 대여섯 명의 장군들이 별이 하나뿐인 드골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어렵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놀랐다”고 적었대요. 게릴라질 하다가 나중에 프랑스 대통령이 된 드골은 ‘장군’으로 불리길 더 좋아했다고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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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전쟁 기간 ‘자유프랑스’의 이름 아래 저항군(레지스탕스)을 지휘한 드골을 육군 대장 또는 원수로 진급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 준장 드골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Why? 미친 것 아니야? 우리가 아는 것처럼 나치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 1940년 6월 )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4년여 동안 독일군 군홧발에 짓밟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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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은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그런 암흑시대에 진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선을 그었답니다. 전쟁 도중도 아니고 종전 후에 진급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라나 뭐라나. 그는 실제로 사망할 때까지(79세) 프랑스 육군 예비역 준장이었습니다. 그가 왜 프랑스인의 존경을 받는지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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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의 장남 필리프 드골( 1921년 12월)은 해사 재학 중(1940)에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를 탈출해 아버지가 이끌던 자유프랑스에 합류, 해군 장교로서 영불해협과 대서양 등에서 벌어진 숱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전후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전사들에게 수여된 ‘해방훈장’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임시정부 수반인 드골 입장에선 차마 아들에게 훈장을 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드골은 “내 아들인 너를 해방의 동지로 만들 수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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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해군에 계속 남은 필리프는 대장까지 진급합니다. 필리프 드골(아들) 제독이 102세를 일기로 별세했을 때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부고 기사에서 “프랑스 해군에서 뛰어난 경력을 쌓았지만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았다”고 평가했어요. 비록 아버지와 육군과 해군으로 소속은 달랐으나 부전자전 애국자들입니다. 나의 청출어람 에예공이여! 나를 따르라!
2024.5.4.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