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계자로 인정받은 엘리사(15-18)
하나님의 사역자이지만 사람 자체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명자의 수명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때까지입니다. 하지만 사명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절망적일지도,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15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16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보내지 말라 하나 17무리가 그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그들이 오십 명을 보냈더니 사흘 동안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18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그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15-18)
엘리야가 승천할 때 요단 건너편에 있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와 동일하게 외투로 요단강을 치자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요단강을 가르고 돌아오는 엘리사의 모습을 선지자의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 제자들은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에게 동일하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엘리사 앞에서 엎드리고 경배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이전에 엘리야에게 가졌던 외경심을 엘리사에게 보인 것입니다. 강가에 있던 50명의 제자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증언해줄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 보면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시체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강청을 합니다. 이들도 강 건너편에서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엘리야가 하늘로 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데리고 가신 방법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영이 하늘로 올렸다가 엘리야를 중간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 없기에 의심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선지자의 제자들로 선지자들이며,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보여주신 마지막 기적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살아 있는 상태로 하늘에 올리신 이유는 바로 이런 믿음 없는 세대에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았던 시대가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믿음 없는 요청에 엘리사는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엘리사가 당황스러운 정도로 강청하였습니다. 엘리사는 할 수 없이 허락합니다. 이들은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삼키는 것을 보았지만, 불말과 불병거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들이 보낸 50명이 3일 동안 찾았지만, 엘리야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용사 50명이 3일 동안 찾았다는 것은 그 근처를 철두철미하게 수색했다는 것이고, 역설적으로 이는 엘리야가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허탕치고 여리고로 돌아온 그들에게 엘리사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합니다. 이를 통해 무리는 엘리사가 진정한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진실한 말을 하는 선지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빈 무덤을 보고도 근심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참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증인마니 믿음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증인입니까? 누가 당신의 삶을 보더라도 이 부활을 믿는다고 생각할만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시신을 찾느라고 수고하는 선지자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믿음 없는 인간에 연약한 모습입니다. 그럴 때면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겸손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물을 깨끗하게 한 엘리사(19-22)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대해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되지만, 그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들 위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를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역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19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19-22)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정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여리고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여리고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성읍의 위치는 좋지만, 물이 나빠서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합니다. 땅이 소산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곡식이나 과일 등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이 죽은 것입니다. 죽은 물을 살리는 것은 오직생명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리고가 이렇게 곡식이 자랄 수 없는 저주의 땅이 된 것은 이전에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내렸던 저주를 기억하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이 저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 당시에는 여리고 성읍이 건축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물이 안 좋아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서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새 그릇은 부정한 것을 접하지 않은 정결한 것이며, 소금은 부패와 발효를 막는 기능이 있기에, 죄를 막거나 저주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즉, 이 두 물건은 어떤 과학적이거나 약리적 작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내려져 있던 저주를 제의적으로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상징적 물건들이다. 엘리사는 이 물건들을 들고 물의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의 영이 임한 이후 처음으로 여호와의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고쳐주셨고,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 때 여리고에 내리셨던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능력을 믿고 그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이들에게 여호와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그곳에 내렸던 저주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나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성읍 하나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 이적은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이적은 그 순간에만 효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그 물을 고쳤습니다. 화자는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고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엘리사의 말처럼 고쳐졌다는 것은 엘리사가 참 선지자라는 것을 화자가 인정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들을 살렸던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엘리사가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죽음 땅, 어둠에 땅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전하고 증명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그는 참 선지자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엘리사가 사람들에게 참 선지자로 인정받은 사건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엘리야와 엘리사의 능력을 이어 받은 선지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자만이 선지자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입증할 선지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주에 대한 무서운 결과(23-25)
사람은 누구와 함께 사느냐에 따라서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엘리사 주변에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의 삶을 빛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엘리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반대로 심판하신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25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23-25)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하셨음을 또 실증해 보이는 마지막의 사건이 나옵니다. 언뜻 보면 차라리 없었으면 더 나았을 것처럼 보이는 당황스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벧엘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는 모욕적인 일을 경험합니다.
벧엘에서 일어난 사건은 앞 여리고의 사건과 대조됩니다. 엘리사는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가는데, 그는 엘리야와 함께 왔던 길을 거슬러 가고 있습니다. 벧엘은 산지에 있기 때문에 여리고에서 벧엘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벧엘에 거의 다 왔을 때, 젊은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작은 아이들’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털이 많았던 엘리야와는 대조적으로 털이 없는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신명기에서 머리 미는 것을 금하고 있으므로 엘리사는 원래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엘리사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부장 문화가 엄격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외모 때문에 어른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도덕과 윤리가 얼마나 해이해진 상태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은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한 것은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사에게도 하늘로 올라가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에게 반말하고 모욕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종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매우 가혹하게 대하십니다. 이러한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죄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고, 곧바로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아이들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즉 아이들이 부모와 어른들을 존중하며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부모에게 패역한 자식은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하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어른이 선지자를 놀린 사건은 심각한 도덕적, 영적 해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생명을 누리게 되지만, 하나님을 미시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열왕기하 1장에서 엘리야를 강압적으로 데리러 온 오십부장과 50명의 군사들이 죽은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기 위해 무서운 처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죽었기에 현재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이지만 본문은 엘리사의 이런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여리고 사건과 대조되는데, 엘리사는 여리고에서는 여호와께서 내린 죽음의 저주를 없애는 일을 했지만 벧엘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려 죽음이 오게 하였습니다. 이런 대조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는 자들은 생명을 얻지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겐 죽음이 온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엘리사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엘리사가 당했던 조롱과 핍박이 기다입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즉각적인 심판이 임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다만 치이고 당하고 인내한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생명의 근원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은 함부로 다른 사람을 놀려서는 안 됩니다. 벧엘의 어린 아이들은 엘리사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조롱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놀리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놀리는 것과 같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추시길 바랍니다. 그에게 사과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안에 따라서, 때를 따라서 일꾼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람 자체를 과도하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끝까지 의지하고 기대할 지도자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