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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난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 주말에 또 온다고요? 거참! 이번 장마는 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상처도 꽤 큽니다. 남은 비에 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빨리 끝나고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에는 40도가 넘는 더위를 치르고 있답니다. 세상에! 우리 체온보다 높은 기온이라니, 견딜 수 있나요? 세상 곳곳이 난리입니다. 아무튼 우리도 발밑의 불을 꺼야 합니다. 피해를 본 주민들이 어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서 복구가 되도록 함께 힘써야 하는데, 가장 외진 곳까지 빨리 손이 닿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잘잘못은 천천히 따지고 어서 일으켜 세워주기를 바랍니다.
한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자살했답니다. 나이 겨우 23살 여성입니다. 이제 꽃 피워야 할 나이 아닌가요? 이른 나이에 선생님으로 취업도 되었으니 당시에는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그런데 겨우 2년 근무하다 세상을 떠나다니 이해가 안 됩니다. 더구나 그 어린 초보 교사에게 학교폭력 담당을 맡겨요? 이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설마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어린 초등학교 6학년생이 선생님을 마구 패대지를 않나,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을 보고 삽니다. 정말 ‘라떼’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건입니다. 이건 그 어린 학생의 잘못이 아니라 그 부모의 의식문제입니다. 그 부모에 그 자식, 앞날이 훤합니다. 점수에 매달리는 교육,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현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카르텔 운운할 때가 아니지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될 것입니다. 설사 이 작은 땅에 핵이 터진다 해도 살 때까지는 살아야 합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여기다 핵을 터뜨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함께 죽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조금 빨리 가고 늦게 가고 그 차이일 뿐입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오늘을 잘 살면 됩니다. 오늘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건강합시다. ㅎㅎ
2023년 7월 22일 김종우 목사 드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 : 3 - 4)
<미션 임파서블 - 데드 레코닝 PART ONE>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기대하는 분야도 있지만 반대로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분야도 있습니다. 로봇은 이제 구시대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기계인간을 지나 인공지능(AI)이 세상을 지배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이미 그것을 통하여 논설도 논문도 작성하고 예술 작품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과연 창작 작품으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야 의견도 분분합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면서 그 무서운 기계인간을 통하여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총격을 가해도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당할 수 있습니까? 그런 기계를 적대국이 무기로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사람이 만들어놓고 사람이 그 지배를 받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3차 대전보다 더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기계의 지배를 받는다면 일단 동정심이라는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없다는 말입니다. 명령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입력되어 있는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란 말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따질 겨를도 여유도 그런 가치관도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 인간이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우리 스스로 만들려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집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발명을 해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용될 수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좋은 예입니다.
잘 무장된 잠수함이 바다 밑을 경계하며 순찰 순항 중입니다. 적함이 레이더에 잡힙니다. 그런데 적함에서 어뢰를 장착합니다. 급히 대처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적으로부터 발사된 어뢰가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대원들에게 경계를 명하고 긴장하여 폭발을 대비합니다. 분명 잠수함에 명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즉각 대응하여 적함에 어뢰를 발사합니다. 적함으로 어뢰가 돌진합니다. 분명 명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적함이 레이더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측에서 발사한 어뢰가 돌아서는 우리 쪽으로 옵니다. 그리고 터집니다. 승무원 모두가 얼음 밑의 바다 속에 수장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쉽게 말하면 단순 기계조작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적함은 실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냥 아군 잠수함 내에 있는 컴퓨터 기능을 누군가 조작하였을 뿐입니다. 혼자서 요란 떨다가 자기 폭탄으로 자멸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 등장하는 인공지능(AI)은 자아인식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컴퓨터 기능을 해킹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까지 그대로 발성하여 통화하는 사람들을 조정합니다. 모든 인터넷 환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자기 멋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핵무기까지 다룹니다. 그러니 최고의 살상무기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엔티티’라 이름한 이 괴물(?)의 쓰임새가 무엇이고 그것을 다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추적해갑니다. 정체를 알게 된 각국이 탈취하려 쟁탈전을 벌입니다. 게다가 나라들과 별개로 그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과 사람이 껴듭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IMF 소속요원인 ‘에단 헌트’가 스스로 투입됩니다. 엔티티를 움직일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짝을 이룬 두 개의 열쇠를 찾고 쫓아가는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엔티티가 무엇을 움직이는 도구인지부터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실을 아는 자를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쫓고 쫓기고 첩보전과 더불어 실전이 곳곳에서 전개됩니다.
처음 첩보영화로 소개된 영화가 바로 ‘007 위기일발’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것이 2편이라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먼저 들어와 그야말로 대단한 흥행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한 동안 첩보영화들이 줄을 잇게 됩니다. 그리고 TV 시리즈로 ‘제오전선’(미션 임파서블)이 방영되었습니다. 60년대 인기 TV 시리즈 중 하나였지요. 한참 후에 영화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배우 ‘톰 크루즈’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느덧 30년 세월 속에서 7편까지 왔습니다. 특징은 혼자서 활동하는 첩보원이 아니라 팀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007에서는 때마다 독특한 기구가 등장하여 흥미를 자극해줍니다. ‘미션 임파서블’에서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팀원들의 협력이 돋보이지요.
그 30년 세월 속에 주인공도 30대에서 이제는 60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공할 장면들을 대역 없이 본인이 스스로 감당합니다. 감탄과 존경심이 절로 나옵니다. 특히 이번에는 그 높은 절벽을 오토바이로 달리며 그냥 내던져집니다. 드넓은 풍경이 그대로 펼쳐집니다. 야, 이거 아이맥스로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만큼 자기 직업과 역할에 진심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자세도 돌이켜보게 됩니다. 아무튼 에단의 과거사까지 등장하여 아픈 역사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3시간 가까운 긴 시간인데 정신없이 지나갑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 데드 레코닝 PART ONE’을 보았습니다.
쉽게 가시려고요?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차이가 사실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람과 비슷한 동물이 있다고 해도 한 가지만은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와 기도입니다. 사람 외의 어떤 동물도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영적인 존재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어떠하든 일단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무신론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럴지라도 그들 또한 무엇인가 의지하는 것은 있게 마련입니다. 정 없다면 자기 자신이라도 믿습니다. 속된 말로 자기 주먹이라도 믿고 사는 것이지요. 사람은 무엇인가 절대적인 존재를 찾게 되어 있고 그리고 무엇인가 숭배하고 또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을 알고 신을 찾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굳이 부인하고 멋대로 살려는 자가 있을 뿐이지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육의 세계를 만들기 전에 이미 영의 세계를 만드셨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영들 소위 우리가 천사라고 하는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수가 많으니 역시 조직이 잘 되어 있겠지요. 우왕좌왕 무질서한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 육의 세계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자연의 법칙을 주셔서 질서를 잡고 균형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물며 차원이 높은 영의 세계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성경은 영계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간 소개는 하고 있지요. 그리고 영들을 거느리는 천사장의 이름도 몇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잘 아는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등 말입니다.(단 8 : 16, 9 : 21, 10 : 13, 21, 12 : 1, 눅 1 : 19, 26)
그 영의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완벽하게 지음 받은 천사 하나가 당을 지어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길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당신 세계에서 쫓아냈습니다. 그 대장을 마귀 또는 사단이라 하고 그 졸개들을 귀신들이라 말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세계를 만들었지요. 그러고는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합니다. 영계에서는 쫓겨났으니 하나님의 지으신 육의 세상을 휘어잡은 것입니다. 자기 것인 양 마음대로 갖고 노는 것이지요. 가엾게도 인생들이 모두 이 마귀에게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은 이 육계에서 인생들을 마귀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육계에서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에게 함께 하셔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것이지요.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마귀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리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령이 된 것입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 에덴을 창설하시고 거기서 아담과 함께 거하신 것입니다. 창 3 :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잘 아는 대로 아담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은 미뤄졌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구원의 의지를 확고히 하셨지요. 그리고 그 역사를 펼쳐 나가십니다. 창 3 :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목자를 세우시고 그와 함께 하셔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순탄하지 않지요. 때로는 사명 받은 목자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또 때로는 목자를 따라야 할 백성이 그 목자를 대적하기도 합니다. 목자와 백성이 함께 마귀에게 미혹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꾸 미뤄집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줄 메시야를 약속하십니다. 히 1 : 1 -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약속대로 메시야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요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문제는 그 메시야를 기쁘고 감사하게 영접해야 할 하나님 백성이 메시야를 거부한 것입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바꾸십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제한하였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를 거부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싫다고 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 다시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이제는 육의 혈통 중심이 아닙니다. 약속되었던 메시야 그 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요 1 :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육적인 백성에서 영적인 백성으로 전환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가고 다른 한 세대가 온 것이지요. 전 1 :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잠시 구약의 역사를 상고해보았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메시야를 기다리고 살던 하나님 백성이 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였을까 하는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다시 오신다는 그 분을 기다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 역시 그 분을 거부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하나님 백성이 왜 오신 메시야를 거부했는지 그 까닭을 잘 살펴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같은 잘못을 그대로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 동안 지켜온 신앙생활 전체가 무효가 될 것입니다. 무효 정도가 아니라 천국 입성이 불가능하게 되겠지요. 평생 교회 다니며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해도 헛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러자고 신앙생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결과를 맞아야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영원히 이를 갈아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기록하여 그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요?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영생의 길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다는 말입니다. 아담 범죄 후 하나님은 아담을 떠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떠나셨으니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약속을 어겼고 하나님을 등졌기에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지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과 함께 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그 백성이 사망의 종노릇 하는 것을 하나님은 구원하시려 약속하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택한 백성이 여전히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그 백성을 심판하고 다시 세우십니다. 불순종과 멸망과 구원의 역사가 반복되지요. 사실 그것이 구약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영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떠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다시 오실 수 있는지 성경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이어줍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육계에서 그것을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신 5 : 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마찬가지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 값을 치러주기 위해 메시야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다시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그 길을 알려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답이 어디 있습니까? 그야 성경에 있지요. 그런데 성경은 제쳐두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냥 믿으면 되는 것입니까? 무엇을 믿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오죽하면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자기 좀 알아달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번제는 매일 조석으로 드리는 기본 제사입니다. 오늘로 말한다면 예배지요. 그런데 예배드리기 앞서 먼저 나 좀 알아다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굴만 알면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뜻을 알아야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알아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말씀을 들어봐야 알겠지요.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예수님에게 오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 3 :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이 말씀이고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백성들은 마땅히 예수님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생명 곧 영생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요 5 :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바라던 영생을 얻지 못하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요 3 :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이 누구에게 오셨다고요? 예수님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요 12 : 44 - 45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에게 가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이 약속됩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영생을 주시려는데 그 때 당장 주지 않고 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곧 떠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니 함께 하시던 하나님도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주려고 해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오신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알려주신 것이 바로 신약입니다. 아무튼 답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즉 길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우리가 수학 문제를 풀다 보면 참 희한한 것을 알게 됩니다. 풀고 나면 답은 굉장히 간단한데 그 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은 참으로 길다는 것이지요. 답만 보면 아주 간단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지요.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며 한참을 돌고 돌아야 합니다. 겨우 숫자 하나 얻으려 얼마나 긴 시간을 애써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간단해도 그 답이 틀리면 그동안 길게 푼 과정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답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세상 시험에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객관식 시험문제라면 그렇습니다. 채점자가 문제를 푼 과정은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냥 답만 확인할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나타난 결과만 보지 않습니다. 삼상 16 :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답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 내용을 관찰하십니다.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이라는 답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사실 초보 시절의 답일 뿐이지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구원과 영생, 천국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답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문제는 그 과정이 엉망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아니 무시하고 답을 얻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행 13 : 40 - 41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사실 그랬습니다. 메시야가 오셨지만 따르는 자는 겨우 12 제자뿐이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야가 백성들도 믿기 어려운 행색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러니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니 받아주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정죄하지요. 다시 오실 때는 어떨까요? 일단 알아보기나 할까요? 말씀을 모르고서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지도도 볼 줄 모르면서 보물을 찾겠다는 심보지요. 말이 됩니까? 그래서 놀라고 망하라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뜻과 의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복이 아니라 저주를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정리해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바로 구원과 영생, 천국입니다. 그 길은 바로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달리 표현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첫 언약인 구약에서의 약속도 예수이고 둘째 언약 곧 새 언약인 신약에서도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의 영을 입고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끝 곧 다시 오실 때는 육신을 입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오십니다. 처음 육신을 입고 오셨으니 그 몸을 가지고 친히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영으로 오시니 이 땅에서 육을 입으셔야 합니다. 누군가 예수님이 택하여 당신의 영으로 함께 하여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재림에 대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영이 보입니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님도 천사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예수 재림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시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싶습니다. 어쩌면 설마 내 사는 동안 오시려고? 하는 심보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죽어서나 천국 가면 되지, 하는 생각입니다. 차라리 그렇기라도 한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우리 살아 있는 동안 오시면 어쩌지요? 다시 육신을 입고 오실까요? 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재림 때는 영으로 오십니다. 그 예수님의 영의 모습이 계 1장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14 - 16절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입에서 날선 검이 나온다니 이해됩니까? 중국의 무협소설이라도 보는 기분 아닙니까?
다시 말합니다. 재림 예수님은 영으로 오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함께 하여 즉 그영으로 임하셔서 일할 육신의 사람을 택하십니다. 당신의 사자를 택하여 그에게 영으로 임하셔서 함께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영이 임하신 육신의 사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육신의 사자를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자로 믿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림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하나님)를 보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4 :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재림 때는 예수님의 사자를 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이 그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됩니까? 문제는 초림 때나 재림 때나 같은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겉모습 가지고 판단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초림 예수님도 하나님 백성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했습니다. 외모를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재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요 14 :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냥 겉으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듯이 재림 때는 예수님의 사자에게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셔서 그 입을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외모만 보지 말고 그 말을 들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성경에 부합하는지, 성경대로 전하고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것으로 판단하고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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