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오 13,24-30)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 모세는 주님에게서 받은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준 뒤 이를 잘 따르겠다는 백성의 약속을 듣고 계약의 예식을 거행한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자유의 백성이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밀밭에 비유하신다. 이 밭에는 가라지도 섞여 있다. 열매를 맺기 전에 가라지를 거두면 밀까지 뽑힐 수 있다. 그래서 밀밭의 주인은 인내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추수 때까지 이 세상의 죄악을 그대로 두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의 밀밭에 그의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뿌려 버립니다. 밀이 한창 자라기 전에는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인지 몰라서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않고 기다립니다. 수확 때에 밀과 가라지가 확실히 구별되면 그때 뽑아 버릴 생각입니다. 사제품을 받고 꼭 10년이 되던 날, 지난 사제 생활을 가만히 성찰해 보았더니 ‘밀’도 있었고 ‘가라지’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께서는 ‘밀’의 선물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반면, 순수했던 열정이 다소 식어 가고, 좋지 않은 습관들이 쌓여 가며, 기도를 소홀히 하는 면에서는 ‘가라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찰 뒤에 성체 조배를 하는데, 하느님께서 제 가슴속 깊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모두 나에게 맡겨라. 농부는 네가 아니라 나다. 너는 내가 이끄는 대로 자라기만 하여라. 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나는 그대로 두겠다. 그렇다고 네 밭이 밀밭에서 가라지밭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만 맡기면 된다. 내가 농부이다.’ 사제의 길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사제의 길뿐 아니라 부부의 길에도, 젊은이들의 길에도, 아니 모든 삶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농부이신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저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에 따르십시오. 밀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양분이 그분께 있고, 가라지의 성장을 가로막을 제초제 또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
-박후임 목사-
김매기 약을 일체하지 않는 우리 논과 밭은 해마다 풀과의 전쟁을 치른다. 심어놓은 작물보다도 더 잘 자라는 풀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와서 풀씨를 뿌리는 거야?’ 하며 투덜거렸는데, 오늘 말씀에서 원수가 와서 뿌렸다고 하니 눈이 번쩍 뜨인다. ‘누가’ 뿌렸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 와서 뿌렸다는 것이 내 가슴에 다가온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더라면 원수가 뿌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다.’는 것은 눈을 감고 있고, 귀도 닫고 있고, 가슴도 닫혀 있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다. 곧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생각도 멈춰 있는 상태. 결국 잠들어 있는 내가 가라지를 뿌리도록 한 셈이다.
가라지를 뽑으려 하는 종에게 내버려두라 하신다. 하나의 밀조차 다치는 것을 염려하시는 사랑이 듬뿍 담긴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 안에 주님의 좋은 씨앗과 함께 원수가 뿌려놓은 가라지도 있음을 안다. 내가 잠든 틈을 타서 뿌려놓은 가라지 씨앗. 이것을 제거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호미로, 낫으로, 나중에는 예초기로 해도 사실 잡기가 쉽지 않다.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가라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라지는 맥을 못 춘다. 밀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고 쑥쑥 크면 가라지는 그림자에 눌려 잘 자라지 않고, 영양 공급도 잘 안 되어 세력을 펴지 못한다. 내가 잠들어서 뿌려진 것이니 내 잘못임을 받아들이고, 늘 깨어 있으려 노력하면서 내 안에 뿌려진 좋은 씨앗을 잘 살펴 나가는 것이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임을 다짐해 본다.
복된 죄(Felix culpa)
-양승국신부-
“밀농사에 도움이 안 되는 ‘가라지’들을 보는 족족 솎아낼까요?”라는 질문에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와 무서운 분이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자녀에게 호통을 치면서 빨리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아버지의 모습일 텐데, 잘못을 저지르는 그 순간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대박’으로, ‘보란 듯이’ 크게 손 좀 봐주겠다는 의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였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정말이지 큰 뜻, 엄청난 배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보면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청소년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로 열매 맺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어떤 죄에 한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 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기대를 합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의 원천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지체 없이 공격하여 하루 빨리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오게 하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보다 깊게 호흡하시며 보다 큰 걸음을 옮기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램도 너무 기대치가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추구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의 이 고통, 이 부족함, 때로는 참혹함을 견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 제 부모님께서는 감옥 아닌 감옥살이를 하고 계십니다. 글쎄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로 인해서 한 달 동안 꼼짝을 못하시고 집에만 계셔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두 분 모두 여든이 넘는 고령이시고, 또한 집 층수가 13층이다 보니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하시기가 영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젊은 저도 13층까지 올라가기가 힘든데 연세 드신 부모님께서 얼마나 힘드실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과일을 비롯해서 몇 가지 먹을 것을 싸들고 부모님 집에 갔습니다. 역시 아직도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계단을 통해 부모님 집으로 가는데, 계단 난간에 너무 많은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어른 자전거, 아이들 자전거 할 것 없이 많은 자전거들이 커다란 자물통으로 난간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자전거들로 인해서 난간을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실 부모님께서 어쩔 수 없이 외출해야 할 때, 이 난간은 다리에 힘이 떨어지신 부모님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난간을 잡아야 힘들게나마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곳곳에 세워진 자전거로 인해 위험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이 난간의 중요성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막상 부모님께서 난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난간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자신의 집 안에 들여 놓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미움의 감정이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특히 요즘처럼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르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밖에 세워놓지는 않을 텐데요.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가 할 일이 참으로 많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배려이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들은 나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불편한 것은 절대로 안 되고, 남이 불편한 것은 그것도 못 참느냐며 화를 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들을 배려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지요. 혹시라도 쓸모없는 가라지를 제거하다가 멀쩡한 밀을 뽑아버릴 것 같아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들을 배려해주시는 주님인데,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왜 그렇게 배려하지 못하고 나만을 생각할까요? 배려하지 못하는 삶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내 모습은 좋은 밀의 모습이 아니라, 해를 입히는 가라지가 되어 결국 뽑혀 버려지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눌 줄 알아야 높아진다. 물을 나누어 주는 구름은 높이 있고 물을 저 혼자 간직하는 바다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인도격언)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양승국신부-
<내 속의 가라지>
한 반가운 형제와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조금은 거창하지만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면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공감했습니다.
신학적 지식도, 수도생활에 대한 경험도 일천하던 지원자 시절, 비록 몸은 고달프고, 때로 춥고 배고프고, 다방면에 걸친 결핍된 생활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또 한 번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럭저럭, 설렁설렁, 때로 마지못해 살아가지 그때 당시처럼 마냥 설레고, 마냥 행복하고, 그렇지가 못하다는데 또 다시 한번 공감했습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결론 역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가라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 인생의 밭에 가라지들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라지들과 맞서느라 삶의 많은 에너지들이 빠져나갔습니다. 삶의 피로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반비례해서 행복지수는 낮아져갔습니다.
가라지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봤습니다. 별 것도 없으면서 ‘내가 누군데’ 하는 쓸 데 없는 자만심이었습니다. 쓸 데 없는 자존심과 우월감이었습니다. 내가 그쪽보다 나이가 많은데, 내가 세례 받은 지 벌써 30년인데, 내가 그쪽보다 수도생활을 얼마나 더 오래 했는데, 내가 이 분야에 얼마나 오래 종사했는데...
결국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단순함과 순수함을 회복하는 것, 다시 초심자 시절의 열정과 첫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놔둔다. 마지막에 가서 가라지만 따로 묶어 불태워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섬뜩함이었습니다. 초반에는 그냥 좀 봐주겠지만 막판에 가서 제대로 손 한번 보시겠다는 말씀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순간순간 분노하시고 강력한 처벌을 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우리 가운데 과연 남아있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고 막차라도 타게 하시려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일일이 다 통제하신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팍팍하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아버지께서 엄격한 아버지, 단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쉽게 보복하고, 쉽게 진노하는 아버지였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면 죽음인데, 돌아가면 무시무시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데, 객사하면 객사했지 어떻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는 늘 당신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우리의 돌아옴을 기다리시는 열려계시는 하느님, 늘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환대의 주님, 우리가 돌아갈 때 마다 그저 용서하시고 등 두드려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유와 책임
-정희완 신부-
세상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며 선인과 악인이 언제나 뒤섞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또 우리 자신 안에도 선과 악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어떤 때는 조금 더 선한 모습으로 또 어떤 때는 조금 더 악한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또한 압니다. 물론 성서 해석적 측면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가라지의 비유는 실제 역사 안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이야기입니다. 악인을 구별하고 처벌하는 일에 있어서 자칫 선인이 희생될 위험이 많기 때문에, 공동체 안의 선인과 악인에 대한 판단과 구별은 종말적 심판에 맡겨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이 비유를 설명해 버리고 나면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단순함 속에 새로운 시선이 담겨 있는 창조적인 것입니다. 아마도 선과 악의 구별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 타인의 악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것. 그저 우리는 하느님의 그 선하심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아마도 그런 뜻일 것입니다. 우리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는 그 끝 날에 밝혀질 것입니다. 종말 때까지 우리에게 남겨진 생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판명될 그날까지 우리에게 유예된 그 시간들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무슨 일이든 기다릴 수만 있다면 …
- 강부철 신부-
그리스도인으로서 수도자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발버둥치지만 되돌아보면 언제나 부족하고 부끄러운 생활이었습니다. 때로 부끄러움이 지나쳐 비참했던 생활, 그래서 절망도 많이 했고 좌절도 많았던 삶이었습니다. 기나긴 방황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제가 당신께로 돌아설 때마다 언제나 기쁜 얼굴로 꼭 끌어안아 주시며 한없는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셀 수도 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제 인생은 한마디로 부족한 저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인내의 역사였습니다. 인내는 예수님의 특기입니다. 인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양성하실 때 자주 사용했던 ‘전매특허’ 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토록 잦은 실수와 과오를 범해도,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베드로에게 사직서를 쓰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 앞에서 예수님은 끝없이 인내하십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이 됩니다. 모진 박해자들의 채찍질과 조롱, 모독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보복 펀치’ 를 날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묵묵히 인내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좌정하십니다. 이웃의 무례한 행위나 모욕적 언사 앞에 인내한다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인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한다고 마음먹을 때, 주님을 위해 주님으로 인해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할 때, 참된 인내가 가능합니다. ‘무슨 일이든 기다릴 수만 있다면 … 기다림만 배우면 삶의 절반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멘. (실천)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안겨다 준 이를 나의 능력이나 마음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내를 실천한 주님의 이름과 능력, 마음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도록 노력합시다.
부정의 부정보다 긍정의 긍정이 더 사랑적
-김찬선신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그래서 욕심이 지금보다 더 많았을 때, 그때는 왜 그렇게 잘못만 보이고, 잘못하는 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저는 여지없이 훈장기질을 발휘하여 고쳐주려고 하였습니다.
욕심이 크면 욕심에 못 미치는 것만 보이는 법이지요.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보이지 않고요. 그런데 욕심보다도 더, 잘한 것은 보지 못하게 하고 잘못한 것만 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보다 잘난 꼴은 보지 못하기에 잘 하는 것은 깎아내리고 잘 못하는 것에만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이 욕심과 교만이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거하려 들게 만듭니다.
이런 제 경험을 바탕삼아 새로 책임자들에게 저는 충고하곤 합니다. 새로 책임을 맡으면 잘해 보려는 의욕이 넘치게 마련이고, 잘 하려는 의욕만큼 잘못하는 것에 시선이 꽂힙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고치는데 힘을 다 쏟습니다. 그때 말하자면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지 말고 밀이나 잘 키우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우선 가라지를 가려내어 근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 가라지를 근절할 수 있다 하더라도 힘을 가라지를 근절하는데 쓰기보다 밀을 키우는데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부정을 부정하는 것보다 긍정을 긍정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고 부정을 제거하는 것보다 긍정을 키우는 것이 더 사랑적입니다.
잡초는 없다
- 이동훈 신부-
관행농법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잡초는 없애야 할 적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듯 독한 제초제를 마구 뿌려댄다. 제초제가 편리하긴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그렇듯 후유증을 남긴다. 작물들이 제초제를 흡수하고,개울과 강과 바다로 흘러 물을 오염시키고 그곳에 사는 생물들을 오염시킨다. 흔히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은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고, 어떤 풀도 약효를 가지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니 어떠한 풀도 잡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과학적인 눈으로 볼 때도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그것들은 인간이 재배하려는 식물들의 영양을 빼앗아 먹는 도둑이 아니다. 밭에 난 풀들은 흙의 입자를 덩어리지게 하여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흡수하여 토양에 모세관을 만들어 줌으로써 식물의 뿌리가 호흡하는 것을 돕는다. 또한 식물들끼리의 경쟁은 식물의 자생력을 높여 오히려 더 튼튼한 식물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태풍이 오면 벼들이 쓰러지는 것도 결국 경쟁관계가 없이 거름과 물을 공급받아 편하게 자라서 자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잡초를 뽑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듯 주변 사람들을 우리의 잣대로 필요, 불필요한 사람으로 재단하지도 말고, 그들을 제거하려 들지 말라고 하신다. 전쟁이 언제나 후유증을 만들듯,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제거하면 서로가 편치 않다. 평화를 잃는다. 세상의 모든 것, 악마저도 필요 없는 것은 없다. 일찍이 유다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
예레미야는 말한다.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7, 5 – 7) 잡초라고 여기며 멀리했던 이웃 (자연을 포함한)을 포용할 때, 우린 이 땅에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늘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김 맛세오 수사-
봄이 오면 농부의 마음은 바빠집니다. 한 해의 수확이 잘 되기를 기대하는 부푼 마음으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농사일에 전념합니다. 그런 농부에게 자신의 밭이 기름지기를 바라고 좋은 씨를 골라 뿌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은 그만큼 수확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듯한 말씀 같지만, 그 속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담겨 있기에 그냥 섣불리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단 한 번뿐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쭉정이 같은 나쁜 씨를 뿌려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하는 미련한 농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닮은 내 마음 밭에 뿌릴 좋은 씨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평화, 사랑, 온유, 절제, 따뜻한 배려, 기쁨, 감사….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좋은 지향들입니다. 평화라는 씨를 뿌려 보십시오. 평화가 무럭무럭 자랄 것입니다. 기쁨의 미소를 뿌리십시오. 나와 관계 맺는 많은 이들이 기쁨으로 타인에게도 사랑을 베풀 것입니다.
얼마 전, 어떤 카페를 지인들과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곳이어서 그런지 너무나도 시끌벅적한 것입니다. 바로 앞의 사람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대화를 잘 나누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칵테일파티 효과’(Coctail Party Effect)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즉,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선택적 지각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긴 지하철에서 졸다가도 자신이 내릴 역 안내방송은 곧바로 알아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도 이 효과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가 사람들과의 만남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내가 원하는 소리만 들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말만 내뱉기만 할 뿐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서로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은 되돌아보지 않고 남만을 판단하고 있는 모습, 다른 사람에게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만을 관철시키려는 마음들. 이런 모든 모습과 마음이 서로 서로를 일치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인 것입니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듣기 싫은 소리도 들으면서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나만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터넷 게시판에 누군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성형 수술을 하고 비행기를 타면, 압력으로 꿰맨 자리가 터질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타서는 안 된다는데 사실인가요?”
사람들은 이 엉뚱한 질문에 “당연히 탈 수 있다.”며 입을 모아 답변을 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러한 댓글을 달자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기 시작했답니다.
“얼굴이 여권 사진하고 다르면 못 타요.”
맞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성형 수술 때문에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여권 사진과 다르기 때문에 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남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주님과 이웃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은 물론 일치를 위해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주님께서는 혹시라도 우리들에게 상처가 갈까봐 우리 곁에 있는 가라지들까지 당장 뽑지 않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이제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더욱 더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희망과 인내는 역경에 처했을 때 의지할 가장 믿음직한 자리요, 가장 부드러운 방석이다(로버트 버턴).
가라지의 유용성
-전삼용신부-
벼를 심고 꾸준히 계속 해 주어야 하는 것이 ‘피사리’입니다. 벼와 함께 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피’라 부릅니다. 그것을 꾸준히 뽑아주지 않으면 벼가 먹어야 할 양분을 그것들이 다 빨아먹습니다. 그것들은 워낙 양분을 많이 먹어서 나중에 자라고 나면 벼들보다 훨씬 크게 자랍니다.
그러나 크게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때가 이미 늦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주 크게 자라기 이전에는 피와 벼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농부들이 피사리 해 놓은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벼를 뽑아 놓은 것인지 피를 뽑아 놓은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습니다.
저도 피사리를 여러 번 해 보았는데, 아무리 주위를 해도 뽑아놓고 보면 벼가 몇 개씩 함께 뽑혀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때는 피를 뽑으면 옆에 있던 벼까지 함께 딸려 올라오기도 합니다. 논은 질고 뿌리가 서로 엉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피를 뽑다가 멀쩡한 벼를 뽑아버린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것을 보다 못한 저의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넌 피사리 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는 밀과 가라지가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밀과 함께 자라는 녀석이 가라지입니다. 일꾼들이 가라지를 뽑겠다고 할 때 주인은 뽑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자칫 밀까지 상처를 주거나 뽑아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더라도 멀쩡한 밀 하나가 뽑히는 아픔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대한 사랑을 잘 표현해줍니다.
“넌 피사리 하지 마라!”
사실 영혼에게 있어서는 악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제가 로마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이상한 모기에게 팔뚝을 여러 방 물렸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모기 종류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이 아플 정도로 부었고 그것이 가라앉은 이후에도 진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진물은 거의 2년 동안 나왔고 저는 여름에도 짧은 팔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찮은 모기에게 물려도 그렇게 고생하는 이유는 제 안에 그것에 대한 항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어렸을 때 한국에선 그런 모기에 물려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터키에 갔더니 수도에서 나오는 식수로 양치질을 해도 사람들이 다 바이러스 때문에 설사를 하고 배앓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국민들은 물에 들어있는 그 바이러스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물을 어려서부터 마셔서 그들에겐 그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매우 깨끗한 공기에서 크기 때문에 아토피나 기관지 문제 등의 면역력이 매우 약하다고 합니다. 이는 온실 속에서만 자란 꽃은 야생에서 자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방 주사란 것이 그 몸속에 병균을 넣어서 항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어느 정도의 병균을 접하는 것은 나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도 태어날 때부터 원죄에 물들어 약하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엔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담과 하와와 같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겪었던 과정을 이 세상에서 미리 겪고 더 완전해져서 하늘나라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곁에 악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기 위해 일부러 악에 접근하는 것은 교만이요 그것 자체가 죄이겠지만,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악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고 또 유익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너무 힘들고 안 좋은 일만 일어나서, 하느님은 안 계시다고 합니다. 선하신 분이 어떻게 나쁜 것을 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위하는 부모라면 공기 청정기만 돌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보통 공기와도 접촉하게 해야 하는 것처럼, 온실 속에서만 키우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히려 우리가 매일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주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도 이런 면에서 다른 제자들에게 유익했던 사도였습니다. 좋은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다면 어떻게 인내와 용서와 기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라지는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알아서 처리 할 것입니다.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더 강해지고 있음을 깨달으면 됩니다. 그것이 가라지를 통해 밀에게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선과 악의 거대한 문제
-김찬선신부-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매우 거대한 담론이 가능한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이라는 씨앗을 심으셨는데 악마가 악이라는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이 비유는 얘기합니다. 그러면 선과 악은 2원론적인 것인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거창한 질문을 이 비유는 하게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악과 악인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합니다.
철이 들면서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거대한 악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러운 악인에 대해서도 분노하였지만 악을 저지르고도 그들이 잘 사는 이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였고, 세상을 이렇게 만드신 하느님께 대해서도 분노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악은 제거되어야 하고 특히 사회의 구조적인 악은 깨부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걸리는 문제가 악은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악인도 제거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우리는 연쇄 살인 사건이 나거나 끔찍한 성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그 사람을 이 사회에서 영원히 제거하는 차원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얘기가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을 비롯한 생명존중론자들은 그들을 영원히 사회 격리시키더라도 사형은 시켜서 안 된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을 수도 있으니 그대로 놔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입니까? 하느님 앞에서 악하지 않은 사람 하나도 없는데 누가 나는 밀이라고 하면서 가라지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다윗 시편이 얘기하는 대로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이도 주님께서는 죄악을 지금 당장 헤아리지 않고 미루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결국 이런 셈입니다. 악이 하나도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악을 참으시는데 악한 우리 인간은 조그만 악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 없으신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시는데 죄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를 죽이려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조그만 악도 견디지 못합니다. 액자가 조금만 기울어져 있어도 반듯하게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진짜 사나운 개는 짓지 않고 두려움이 있는 개가 짓는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은 조그만 악에도 위협을 받을 만큼 작은 선이기에 조그만 악도 견디지 못하고, 우리의 사랑은 조그만 고통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조그만 악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만민에게 자비로우시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죄를 살피지 않으시며,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그분 것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십니다(지혜 11,23과 26).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선에 대해서 자주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지상선, 완전한 선, 충만한 선, 모든 선이십니다. 하느님의 선은 지극히 높고 너무 크고 완전하여 어떤 악도 범접치 못하고 아무리 큰 악도 깜냥이 되지 못합니다. 냇물이 바닷물을 오염시킬 수 없고 오히려 바닷물이 모든 물을 받아들여 정화시키듯이 어떤 악도 하느님의 선을 침범할 수 없고 오히려 하느님의 선이 모든 악을 무력하게 하기에 하느님은 어떤 악도 참으시고 인자하십니다. 이 하느님의 선과 사랑 때문에 오늘도 우리 생명은 부지합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제 동창 신부가 자전거 하나를 구입했습니다. 제가 워낙 자전거를 좋아하다보니 그 동창 신부가 구입할 때 저 역시 같이 가서 이것저것 살펴보았지요.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자전거였습니다. 자전거의 사양에 비해서 가격대도 아주 적당했거든요. 동창 신부의 새 자전거를 바라보면서 저 역시도 얼마나 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사실 지금의 자전거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동창 신부의 자전거보다도 사양이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은 사양이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 자전거가 훨씬 좋아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아무튼 새 자전거를 사고 싶다는 욕망을 제 자전거 타는 실력과 주머니 속의 사정을 떠올리면서 자제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선배 신부님께서 저에게 자전거 한 대를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제 오후 자전거 삽에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고르던 중에, 아주 좋은 자전거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다시금 제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 ‘나도 자전거를 하나 살까?’
다른 신부가 자전거를 새로 구입하는 모습에 나도 새 자전거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그렇게 좋은 자전거를 탈 자격이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아니오.’라는 답이 곧바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본당신부가 된 뒤로는 자전거를 그렇게 자주 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실력도 많이 줄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지 남이 사니까 나 역시 사고 싶다는 생각……. 욕심이지요.
이러한 욕심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받는 것만을, 즉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받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는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맞는 말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인간은(저만 해당하는 것인가요?) 누군가에게 받은 것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내가 준 것은 쩨쩨할 만큼 잘 기억하고 있지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내가 베푼 것을 공치사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만을 봐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주는 것이 더 행복한데도, 받는 것에 즉 나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수확 전에 미리 가라지를 제거하다가 잘못하여 밀을 실수로 뽑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하나를 신경써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님이시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가라지 같지만 밀의 모습으로 되돌아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끊임없는 욕심으로 나의 이웃들을 얼마나 많이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었는지요? 내가 가라지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가라지를 뽑겠다고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 아직은 가라지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들에게 더 많이 사랑을 베풀면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도 하나의 밀이 되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실천합시다.
빠다킹신부
“수확 때 까기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양승국신부-
<하느님 축복을 불러오는 고통>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어찌 그리도 지혜로 가득 찬 말씀인지 모릅니다.
말씀 한 마디로 죽어가는 사람을 벌떡 일으켜 세우시는가 하면, 말씀 한마디로 살기등등한 적대자들을 물리치십니다.
단 한 말씀으로 우리가 평생 노력해도 도달 불가능했던 ‘깨달음의 언덕’에 순식간에 도달하게 하는가 하면, 단 한 말씀으로 ‘한 가닥’ 한다는 높은 양반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나오는 말씀도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수확 때 까지 둘 다(밀과 가라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① 가라지처럼 쓸모없는 존재,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가라지처럼 살아갔던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다시 한 번 새 삶을 계획했을 것입니다.
➁ 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유익한 존재들, 고통의 세월을 지나가면서도 하느님께 모든 것 맡기고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큰 격려와 기쁨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➂ 때로 밀인 것 같기도 하지만, 때로 가라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 한 마디로 양다리 걸친 사람들에게도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자극을 받아 색깔을 분명히 하게 될 것입니다. 삶을 재정립하게 될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오늘 예수님 말씀은 정녕 큰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지나온 나날들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참으로 형편없었습니다. 그 오랜 반역과 방황의 세월들을 하느님께서는 큰 인내로 참아주셨습니다. 그 때 그 때 처벌하셨다면, 그 즉시 처리하셨다면 도저히 그냥 남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때로 경고를 보내셨는가 하면 때로 위로를 보내셨습니다. 때로 매를 드셨는가 하면 때로 따뜻이 감싸안아주시면서 그렇게 기다려주셨습니다.
비록 결함 많은 삶이었지만 하느님 자비로 충만한 나날들이었습니다. 비록 외나무다리 위흘 걷듯 아슬아슬한 나날들이었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행복했던 축복의 날들이었습니다.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같이 유약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척이나 고집스런 동물이어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려면 때로 강한 충격이 필요합니다. 충격요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는 나태해진 우리를 향한 충격요법 가운데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충격이 다가올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충격을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재창조하기 위한,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한 하느님 은총의 표시로 보시면 정확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십자가, 상처와 실망이 다가올 때 마다 한번 생각하십시오. 인간의 삶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삶의 축복’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부족해야, 불완전해야, 병약해야, 거기에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다가갑니다. 미숙하고 불쌍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미성숙이 하느님의 축복을 불러옵니다.
세상을 해결해야할 ‘문젯거리’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신비에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하느님께 새로운 눈을 청하십시오. 머지않아 그 모든 문젯거리들이 하느님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를 참아주는 영성
- 남상근 신부-
‘내버려두어라.’ 악한 것들은 싹 다 제거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 않답니다. 밀밭에 밀만 무성하게 자라면 좋을 듯한데 불쑥 치솟는 가라지를 참아주신답니다. 농부가 김매기가 싫어서도 게으른 탓도 아닐 텐데, 그냥 두신다 하십니다. 교각살우(矯角殺牛)란 고사성어가 연상됩니다. 소뿔을 바로잡으려다 멀쩡한 소까지 다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무던히 참아주시겠답니다. 생각해보면, 가라지를 내버려두심이 은총입니다. 가라지도 밭에서 자라게 하심은 인내하시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혹시라도 내가 밀이 아니라 가라지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설마 누가 뭐래도 난 밀이라고 과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라지임에도 내버려두시고 기다리시기에 아직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제쳐두고 말 안 듣는 한 마리에게 쏟는 목자의 관심이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나는 우리 안의 아흔아홉 마리 중 하나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길 잃은 양이기에 목자가 찾아주지 않는다면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밀밭의 가라지인 내게, 길 잃은 양인 내게 기다려주시고 찾아주시는 사랑이 아니라면 기댈 곳이 없습니다.
고해성사의 기쁨
-임인자-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례를 받고 첫 고해를 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나의 죄가 깨끗하게 씻어져 순결해진 느낌을 받고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견진성사까지 받고도 어떤 죄를 고백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고 한편으론 ‘난 잘살고 있는데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결국 제대로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올해 부활절 판공성사 보속으로 십자가의 길을 받았습니다. 아직 묵주기도도 익숙하지 않은데 십자가의 길을 혼자서 하라니 참 난감했습니다. 같이 해 본 적은 있지만 혼자서 묵상하면서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 부활절 이틀 전 밤 11시가 넘어서 혼자 했습니다. 천천히 한 처 한 처 묵상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매 처를 옮길 때마다, 예수님이 넘어질 때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 아프게 했는지, 무엇이 저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끝없이 솟아오르고 또 솟아올랐습니다. ‘내가 익명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자 하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이웃에게 잘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진정한 사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부담감으로 가족에게 소홀하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저에게 휴식의 시간, 참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말씀에 답하듯이 눈앞의 안개가 걷히고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고해성사의 기쁨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큰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도 자잘한 일상에서 오는 것들을 중심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죄는 과연 내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사에 가고 성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모든 말씀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 그것이 고해성사이며 보속의 길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를 계시
- 박규환 신부-
어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에서 교회론은 배울 때 ‘교회-순결한 창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고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순결하다와 창녀라는 전혀 상반된 의미의 두 단어가 어떻게 교회를 설명하는가! 그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순결합니다. 그 이유는 순결하고 거룩한 하느님께서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또한 창녀입니다. 죄 많고 부족한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고 부족한 우리이지만 순결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과 그 삶을 지향하기에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말씀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모든 공동체, 그리고 교회 안에도 선인과 죄인, 참 제자와 거짓 제자는 공존을 합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종은 주인에게 “밭에 자라난 가라지를 저희가 뽑아버릴까요?”라며 죄인을 거짓 제자를 쫓아낼 것을 제안하지만 주인은 추수 때-마지막 날-를 기약하며 자비와 관용으로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을 이야기합니다.
죄를 향해 열려있는 마음, 죄를 향해 열수 있는 마음, 죄를 녹게 하고 위안을 얻게 해 주는 그 마음은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바로 이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지만 그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큰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신 분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죄인들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마음 안에 녹아 들어가 자신은 물론 하느님의 마음-사랑과 자비-을 통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육화의 신비를 통해 죄 많은 인간들에게 녹아 들어오시어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신 것처럼 예수님의 교회는 죄 많은 창녀에게 녹아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녹아 들어간 마음은 거룩하고 순결합니다.
우리는 밭에 심겨진 아무런 쓸모없는 가라지일까요? 아니면 알찬 밀일까요? 나의 모습을 되돌아 봅시다. 밭의 주인이 밀과 가라지를 가려 뽑아버리지 않고 추수할 때를 기다린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음없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로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가서 우리는 회개의 모습에 따라 심판대에 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은총과 자비가 하느님의 소관인 것처럼 마지막 심판 역시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추수 때까지 다함께 자라도록 내 버려두어라
-하화식 신부 -
사람의 마음 안에는 늘 선과 악이 공존한다. 바로 그래서 가라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가라지는 무엇일까?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밀보다는 가라지를 더 자세히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은 현재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완성되는 마지막에 모든 것을 선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현재의 시점에서만 사람들을 바라보고 한 번의 잘못이 마치 내 모든 삶이 그런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이 내 안에도 있는가 보다.
좀더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내 안의 가라지도 그렇지만 특히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볼 때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줄 아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불편함은 이 가라지 문제, 곧 자신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일 수도 있다. “추수 때까지 다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는 말씀은 우리 삶에 참으로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라지를 어떻게 몽땅 뽑아버릴 수 있겠는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 인간이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하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장동현 신부-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 텔레비전의 저녁종합뉴스를 보지 마라.’ 최근에 어떤 분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끔찍하고 비참한 소식들이 많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오셨는데도 세상은 아직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좋은 가르침을 주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서로를 미워합니다. 가난과 전쟁, 인권유린과 학대라는 주제가 우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힙니다. 정부에서도 복지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지만 상황이 크게 개선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이런 악들을 일거에 쓸어버리지 않는가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곧 나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너는 마냥 선이기만 하였느냐? 그냥 쓸어버린다면 인간의 자유는 어디에 있느냐? 참고 기다리는 하느님을 아느냐?’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가진 것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하느님의 나라가 성큼 다가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저를 도구로 써주소서.
- 한 건 신부-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마태 복음에만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는 데, 밤새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원수를 갚는 수단으로 원수의 밀밭에다 몰래 가라지 씨를 뿌려 밀농사를 망치게 하는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원수에 의해 뿌려진 가라지가 무성히 자라는 것을 발견한 일꾼이 가라지를 뽑으려고 할 때, 주인은 가라지로 인해 밀이 뽑힐 위험이 있으므로 같이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가라지'란 털이 있는 독보리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잡초로서 처음에는 밀과 너무나 흡사해서 분별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이삭이 피어날 때는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밀과 가라지의 뿌리가 한데 얽혀 있어서 가라지만 뽑아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가라지를 거짓 밀 또는 타락 한 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가라지는 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먹으면 현기증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중독증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추수 때에는 분명하게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여 가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현실을 가지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줍니다. 즉 하늘 나라는 씨를 뿌린 밀밭 과 같아서, 이 세상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복음 선포가 이루어져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추수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도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자라듯이, 선인과 악인이 섞여 있으며,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눈에 보이는 악인을 쉽게 제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가라지도 타고난 밀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가라지처럼 악하게 보이는 사람도 선인이 될 수 있고, 밀처럼 선하게 보이는 사람도 악하게 될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가변성을 가진 인간을 인간이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현재 가라지의 모습인 악인이라도 판단하지 않으시고 추수할 때가지 기다리시듯이, 우리도 이웃 사람을 쉽게 악인으로 판단하여 단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수행을, 정진을 통해 악한 가라지에서 선한 밀이 되어 간다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복음의 정신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에서 알 수 있 듯이 아무리 머리가 좋은 아이라도 그 아이에게 올바른 심성을 키워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사회의 문제 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재능이 없어 보이는 아이라도 옆에서 잘 보살펴 그 적성에 맞는 재능을 보여주며 지켜볼 때 그 아이는 마침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사회에 선익을 가져다 줍니다. 결국 우리의 인간의 현실은 밀도 가라지가 될 수 있고, 가라지도 밀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주어지는 계명이라든지 율법,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 모두가 밀로써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도와 주는 방책입니다. 1독서인 출애굽기에서 그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 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자세히 읽어주자 온 백성은 입을 모아 ‘야훼께서 말씀 하신대로 다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의 준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밀로써 성장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자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추수할 때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분이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리시는 분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한 번은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악할 때 회심할 기회없이 삶의 종말을 맞는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 이렇게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회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 내면 속에 있는 악한 가라지, 우리 생활 속에 드러나는 나쁜 습관의 가라지 등을 제거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밀을 성장시키려는 삶을 살 겠다는 회심을 또 한번 가져봅니다. ♡
† 선인과 죄인이 공존하는 교회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비유설교로서 하늘나라를 밭에 뿌린 좋은 씨에 비유한 내용이다. 앞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연결시켜 본다면 좋은 복음의 씨앗이 좋은 토양에 뿌려진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그 씨앗이 싹을 피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튼튼히 하여 잎사귀와 꽃을 피우고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을 일만 남았다.
그런데 문제는 낮에 복음선포자들이 좋은 복음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난 뒤, 어두운 밤을 틈타 원수들이 와서 그 좋은 밀밭에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는 데, 밤새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렸음으로 이는 이중적 비유인 셈이다. 이 비유는 오직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마르코복음은 같은 대목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4,26-29)를 전해 준다.
비유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비유가 왜 양성되었는지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즉 비유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주 거론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 마르코복음 공동체에서는 이런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도래와 그분의 말씀과 행적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가 왜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가?’ 라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마태오복음 공동체에서는 ‘좋은 씨를 뿌려 좋은 열매만 자라나야 할 하느님의 밭에 왜 가라지가 함께 자라나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파종과 수확이라는 시간 속에 아무도 모르게 함께 자라난 가라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따라서 마태오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나 마르코복음의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는 당시의 교회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어버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결국 마르코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곧 완성되리라는 지나치게 성급한 종말론적 관념을 수정하여 바로잡아 주려했고, 마태오복음은 교회가 선인(善人)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罪人)과 공존(共存)하는 공동체임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선인과 죄인이 함께 뒤섞여 사는 교회의 실태에 매우 잘 어울리는 비유이다. 교회는 거룩하지만 교회의 구성원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가 거룩한 이유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아무도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교회에 관한 교의신학은 세 가지의 교회를 말한다. ① 지상의 교회, 또는 지상여정의 교회, ② 천상의 교회, 또는 개선교회, 천상성인들의 교회, ③ 정화의 교회, 또는 단련 받는 교회, 연옥의 교회가 그것이다.(교회헌장 7장 참조) 종말에 이르러 완성되기 전까지 교회는 이 세 가지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상태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교회는 독립적이지만 신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하나이고 서로 밀접하게 교류한다.
교회 안에는 늘 죄인들을 선인들로부터 가려내어 단죄하고 격리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교회가 선인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함께 성장하여 간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가 어제 복음을 통하여 배운 바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한번 복음의 씨앗이 어디에 뿌려지느냐는 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동안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누구나 공평하게 기회를 가진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이런 기회는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앗아갈 수도 없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섣부른 선별작업에서 선인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다.(29절) 밀과 가라지를 선별하는 작업은 그렇다하더라도, 우리 사람들 중에 누가 있어 선인과 죄인을 정확히 구별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선인과 죄인의 구별은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종말심판에 맡겨져 있다. 그때까지의 시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요, 인내와 관용의 시간이다.
교회는 그저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淨化)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悔改)와 쇄신(刷新)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항)..........◆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하느님의 시간표에 우리 시간을 맞추자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네 가지 밭에 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씨뿌리는 밭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같이 굳어져 있다면 갈아엎어 퇴비를 주면 되고, 완고와 시기의 돌이 박혀 있다면 파헤쳐 골라내면 되고, 탐심과 이재, 걱정과 원망의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다면 뽑아 불태워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은 농부의 끊임없는 손길과 개량을 통해 기름진 옥토로 얼마든지 개간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밭에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천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합니다. 예를들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말(언어 습관)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늘나라(천국)이라 하면 무슨 어머어마한 건축물이 화려하게 있는 도시같은 나라를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등 별의별 드라마를 잘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성서에서 말하는 천국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잘 표현하는 좋은 말이 성서에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주님의 기도문에서 나오는 표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천국이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실레이아(basileia)라는 말이 우리 생각처럼 나라나 눈에 보이는 도시구조물 같은 것이나, 언제 오는 것이나, 이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귀한 말씀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사건을 여러차례 설명을 해 주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하여 저희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관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어떤 불편한 사람이나 집단을 보면‘왜 하느님께서는 즉결 심판, 즉결 처분을 안 하시고 그냥 놓아두느냐' 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이 꼬라지라고 하느님 탓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기도할 때 들어 보면, 하느님을 꾸짖거나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다른 말이 아니고, '당신 도대체 눈 뜨고 있느냐!' '세상이 이 모양인데 당신 눈 먼것 아니냐!' '당신 귀 먹은 것 아니냐!'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말과 표현은 고상하게 하지만 결국 뜻은 이런 말투입니다. 빨리 즉결 심판, 즉결 처분을 하면 좋겠는데 왜 답답하게 이러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기도를 들을 때면 저는 아주 가슴이 덜컹덜컹합니다. '아이고 저러다가 자기가 제일 먼저 없어지는데, 저런 기도 함부로 하면 안되는데...' 참 교만스러운 모습입니다.
또 왜 밀과 가라지를 만들었느냐? 밀만 심고 자라게 하면되지, 왜 가라지를 만들어서 섞이게 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느냐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더 나아가서, "저 불쌍한 가라지들아!"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정말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줄 알아라.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너희를 그냥 놔두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가라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누가 압니까? 도대체 누가 판단하는 것입니까? 교회 다니면 다 밀이고 가라지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교회 밖에 있으면 다 가라지이고 밀이 아닙니까? 나 때문에 예수 믿는 것만 생각하고, 나의 못난 행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 안 믿게 된 것은 생각 안 합니다. 나 때문에 누가 교회 나온 것만 생각하지 나 때문에 누가 교회 떠나는 것은 생각 안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판단합니까?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 속에 중요한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메시지는 포착하지 못하고 자기 관심 있는 것 가지고 또 뜯어 맞춥니다. 그러니까 무리와 독설이 따릅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6일 동안 지으셨으니까 7일째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방진 것이니까 죽어도 된다?
여러분 거기에서 하루가 24시간이란 것을 어떻게 압니까? 지금의 하루와 그 때의 하루가 같다는 것을 어떻게 아세요? 성서를 다시 읽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하루라면 그것은 무엇으로 잽니까? 해와 달을 기준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읽어 보세요. 하느님이 언제 해와 달을 만드셨습니까? 사흘 지나고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이게 말이 됩니까?
또 선악과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무 문제없이 착하게만 살수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은 후에 문제가 많이 생겼다는 겁니다. 어떤 남자 분들은 '하느님이 여자를 만드시지 말았어야 되었었다.'고 합니다. 사탄이 임명한 뱀의 꼬임에 어리석게 넘어가 인류가 망했다. 그러니까 여자를 만들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 이것이 지금 그런 이야기입니까?
선악과도 그래요. 창조는 하느님이 다 지어주셨다는 이야기거든요. 한번에 확 자판기 물건 나오듯이 하신 것이 아니고, 정성스럽게 여러 단계에 걸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지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이 다른 것은 다 마음대로 해도 좋은데, 여기에 있는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이 그렇게 좁고 유치하신 분입니까? 과연 다른 것은 다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은데 어떤 것만은 안 된다고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눈이 좁아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선악과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선과 악을 나오게 하는 나무, 그것에서 나오는 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윤리적으로 어떻고 저떻고...그런 식으로 따지면 안됩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토브"라는 말이 선악과의 "선"입니다. 그래서 "토브(선)와 라(악)" 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 가지 나무 열매 중에 어떤 하나는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선악을 구별하게 되리라? 이것도 또 여러분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선악을 알게 되었다면 그전에는 뭡니까? 그럼 몰랐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럼 왜 하느님 말씀을 거역합니까? 그전에 악을 몰랐는데, 선악과 따먹고 나서 악을 알았다면 왜 선악과 따먹기 전에 그 유혹에 넘어갑니까? 그러니까 그런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에 관하여 성서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성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선과 악의 나무이야기는 '이제는 너희들이 자유를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나 그 열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토브), 곧 하느님과 악(라)의 문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는 그 사건과 그것을 파괴하는 사건과의 사이에 네가 개입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과나무나 어떤 나무 열매 따먹듯이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하느님과 하느님의 적대자 사이에 네가 중간에서 판단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선과 악은 이미 그 전에 다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거 따먹으면 좋겠다해서 따먹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이 재판하는 자리에 앉으려는 문제에 관하여는 하느님이 "이 심판과 재판, 즉 남을 판단하는 이 문제는 나한테 맡겨라"하신 이야기인데, 그것을 그만 인간들이 그 자리까지 가 보자고 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선악을 분간 못했다고 한다면, 따먹은 후에는 분간합니까? 그런 선악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가만 두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적대자 사이에 있는 그 사건 그 판단사이에 "네가 재판장 노릇하려 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도서 말씀은 만사에 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할 때도있고, 미워할 때도 있고, 사람이 이 세상에 올 때도 있고 갈 때도 있고, 교회에 나올 때도 떠날 때도 있고... 결국 만사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세상에는 밀도 있을 수 있고, 가라지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우리 잊지 맙시다. 우리는 자꾸만 잊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5장에 주님이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완전하신 분이다. 샬롬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도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조금도 차이 없이 착한 사람이나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까지 갈 것도 없이, 해가 보기에 인간이란 다 그것이 그것 입니다. 비가 보기에 인간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런데 누가 나는 밀이고 누가 너는 가라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재판장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을 알아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인데 우리는 엉뚱한 소리만 합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이고... 그래서 위선이 나오고 형식이 나오고 그러다가 자꾸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것을 깨뜨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죄 중에 가장 악질적인 죄가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죄 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고,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도 없고, 또 하느님이 그렇게 허락 하시지도 않는 일입니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서 나옵니다. 내 교만으로, 그래서 남을 낮추고, 그러지 않으면 자기를 높이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군사정권 시절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간첩의 누명을 쓰고 이 땅에서 가라지 취급을 받았는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섭리하십니다. 그런데 이 攝理라는 말이 재미있는 말인데, 귀(耳)자가 세 개가 들어 있습니다. 귀를 잡는다는 것은 사람을 조정한다는 말이고, 귀를 세개 그린 것은 모든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전체를 컨트롤 한다는 뜻의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신학자들이 성서에 나오는 것을 표현할 때 섭리에 해당하는 말을 providentia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원래 조종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귀 잡고 장난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프로비텐티아 자체의 뜻이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 다음에 손놓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이후에 계속 관계하신다는 뜻입니다. 보살피고 다스리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그 활동이 천지창조 이후에 중단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전도서에서 그것을 너무 잘 그려 줍니다. 우리의 상식과 아집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입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에는 하느님이 알아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제때에 일어나도록 맞게 만드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렇게 받아드리지 못하고 자꾸만 내 아집대로 해석하려 하니까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처음에 ‘헛되고 헛되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고 자꾸 헛되다고 해요.
그럼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가 허무주의를 말하는 종교냐? 이렇게 묻고 또 문제가 되자, 그럼 우리는 유신론적 허무주의라고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 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헛되다는 것을 주장하는 종교입니까? 여기서 헛되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헛되다고 해석하는데, 여기에서 헛되다는 "헤벨(hebel)"이라는 말이 본래는 ‘숨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금 생각처럼 무의미하고 허영되다라는 뜻이 아니고 세상 모든 일은 호흡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세상 일이 숨을 내 쉴때가 있으면 들이 마실 때가 있고, 숨을 깊게 마시면 깊게 내쉴 때가 있는 호흡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모여서 인생과 역사를 이루듯이 너희가 밀과 가라지를 함부로 자르려 말고 그 뜻을 너희가 깨닫고 살라는 말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있을 때, 주인께 물었습니다. 왜 처음에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좋은 씨앗만 심었다고 했는데, 이 가라지는 어디서 나온 것이냐고 묻습니다. 주인의 대답은 하느님은 좋은 씨만 뿌렸는데, 중간에 그것을 훼방하고 파괴하는 적대자 세력 사탄이 와서 가라지를 덧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들의 문제를 질문합니다. 그럼 이것을 단칼에 다 없애 버리면 우리 생각대로 좋은 세상이 올 것 아닙니까? 우리가 뽑을 까요? 하고 묻습니다. 그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가만 두어라"입니다. "놔 두어라." 고 하셨습니다.
선악과? 하느님 제가 이것을 따먹고 하느님을 좀 도와 드릴까요? "만지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먹을 생각도 하지 말아라. 놓아 두어라."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밖에 없으십니다. 어떤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진정으로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남을 물어 뜯을 일이 없어요. 누구는 밀이고 누구는 가라지이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할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만 두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추수 때까지"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그 때, 때에 따라 알맞게 해 놓으시고 판단하실 그 때까지 "가만 놓아 두어라" 고 명령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가라지를 뽑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놓아 두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가라지입니다. 내가 가라지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그리스도교의 후예들은 다른 사람보고 가라지라고 해요. 내가 가라지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네 탓이요"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운 고백인데, 어떻게 된 것이 요즈음은 나는 밀이고 저사람은 가라지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게 참 하느님 보시기에 기가 막힐 일입니다. 우리는 아예 밀이나 가라지이니 하는 말도 입에 올리지도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호흡이라고 표현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때'라는 것을 우리가 함부로 해석하지 맙시다. "하느님의 때"에 대하여 잘못 해석한 대표적인 분이 있습니다. 바로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요 문필가요 사회운동가인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 경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20세기 지성을 대표하는 러셀경이 영국성공회에서 기독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출교黜敎를 당했습니다.
유명했던 BBC 방송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에서 이 사람이 조목조목 이유를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며 例를 들었는데, 마르코복음 11장의 ‘무화과나무 사건’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시장하셔서, 주위의 무화과 나무를 살펴봤는데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매 맺을 때도 아니었는데 저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영영 앞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래서 러셀은 이렇게 도덕적으로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에 영국교회가 분노했고 러셀은 黜敎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러셀은 때의 의미를 오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마르코복음서에는 때에 관한 단어가 두 가지로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chronos)’를 사용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을 재는 시간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히 구별해서 사용한 말이 있는데, ‘카이로스(kairos)’ 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활동과 직접 관계된 시간, 그분이 지정하신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양적인 시간이 아니고 질적인 시간입니다.
마르코복음서에서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를 러셀은 열매맺을 철로 해석하였는데 사실 거기에서 쓴 용어는 ‘크로노스’가 아니고 ‘카이로스’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 다음에 기록된 내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더니 성전이 온통 장사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거든요. 그래서 화가 나셔서 그것을 다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못 드리도록 금지를 시켰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했다는 것은 성전으로 인정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성전 자체를 부정하신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은 예배를 드릴 자격이 없다고 부정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바리사이들과 유대지도자들을 상징하는 말이지 제철에 열매를 못맺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못 해석을 했어요. 하느님의 카이로스는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시간표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말은 "그 먼 옛날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 우리가 살 수 있게 다 마련해주신 그 분이 그 때부터 우리와 함께 대화하시고 호흡하시고 생각을 나누시고 사랑을 나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활동이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이것이 소위 섭리에 관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입니다.
섭리의 내용이 어떻고, 아무월 아무일에 무슨 일이 일어 발생할 것이다 식의 말은 다 교만입니다. 욕심입니다. 정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달으면 우리가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며, 세상 되어 가는 일속에서 나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전도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카이로스라는 것이 무엇이냐 ? 아! 헛된 것이 아니고 호흡과도 같구나! 내가 숨을 내쉴 때가 있으면 숨을 들이 마실 때가 있구나!"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고를 판단하려 하지 말고,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이고를 구별하려 하지말고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세상에 불의가 없어야 할 곳을 상징하는 재판정, 바로 재판하는 그곳에서도 불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불법을 행하는 것이 바로 너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겸손해 지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하고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때, 다른 사람보고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고, 다른 사람으로 가라지라고 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추수 때까지"라는 하느님의 시간표라는 의미를 알고, 그것을 바라볼 때, 정말 겸손해 질 수 있고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우리가 진실 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희는 아버지 앞에서 너무도 해서는 안될 말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용서하시고, 추수 때까지 묵묵히 자기 위치를 깨닫고 자신이 할 바를 고백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면서 한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하루 하루를 진실 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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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