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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하나님은 밤새 그들을 지켜 주셨다
( 출애굽기12장31 - 42절 )
Ⅰ.들어가는 말
1.열 번째 재앙이 임하던 그날 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들여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고 말했다(31)
2.이스라엘 백성이 떠나던 날 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을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밤새 지켜주셨다.
Ⅱ.본론
1.바로의 출애굽 허가
①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출애굽을 허락하다.
ㄱ.너희는 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이 땅을 떠나라(31)
ㄴ.너희가 요구한 대로 서둘러 여호와를 섬겨라(31)
ㄷ.너희가 그토록 원하던 소와 양떼도 몰고 가거라(32)
ㄹ.너희가 섬기는 신에게 나를 위해서 복을 빌어다오(32)
②애굽 사람들도 이스라엘 백성이 빨리 떠나주기를 재촉하다.
ㄱ.애굽인은 "이제,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다"면서 두려워했다(33)
ㄴ.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서, 이 땅에서 떠나달라"고 재촉했던 것이다(33)
2.라암셋을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①이스라엘 사람들의 요구에, 애굽 사람들이 흔쾌히 허락하다.
ㄱ.이스라엘 사람들은 부풀지 않은 밀가루 반죽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고 나섰다(34)
ㄴ.그들은 모세의 말대로 금은 패물과 옷가지를 달라고 애굽 사람들에게 요구했다(35)
ㄷ.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그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셔서, 요구하는 대로 다 주게 하셨다(36)
②드디어, 라암셋을 출발하여 숙곳으로 향하다.
ㄱ.이스라엘은 마침내 라암셋을 출발하여 숙곳으로 향했다(37)
ㄴ.이때 떠난 사람들은 어린이를 제외하고 60만쯤 되었다(37)
ㄷ.그밖에도 많은 식구, 그리고 소떼와 양떼를 몰고 나왔다(38)
3.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던 그날 밤
①430년 동안의 종살이가 끝나다.
ㄱ.이스라엘 사람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았다(40)
ㄴ.430년이 끝나던 날, 여호와의 군대는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
②그날 밤, 여호와께서는 밤새 그들을 지켜 주셨다.
ㄱ.그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내시려고 밤새 그들을 지켜 주신 밤이었다(42)
ㄴ.그래서, 그들은 대대로 이날 밤을 여호와를 생각하는 밤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43)
Ⅲ.맺는 말
1.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셔서 함께 하시는 인격적(人格的)인 신(神)이시다.
2.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되, 무척 애틋하고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보살피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3.그렇지 않은가?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탈출하도록 밤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1.출애굽
①동기와 목적
ㄱ.동기 : 애굽 사람들의 강제 노역에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시작되었다.
ㄴ.목적 : 하나님을 맘껏 섬기며 살려고
②과정
ㄱ.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 생활을 했다.
ㄴ.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려, 애굽에 아홉 번 재앙을 내리셨다.
ㄷ.이제, 그 마지막 재앙으로써, 애굽의 모든 맏배가 죽는 일이 일어났다.
③탈출 허가와 출발 준비
ㄱ.허가 : 바로가 드디어 이스라엘 출애굽을 허락했다.
ㄴ.준비 : 애굽 사람들에게 금은 패물과 옷가지를 달라고 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④드디어 출발
ㄱ.출발지 : 라암셋
ㄴ.목적지 : 숙곳
ㄷ.출발 인원 : 어린이를 제외하고 약 60만 명
ㄹ.출발 상황 : 출발하던 날 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하게 이끌어내시려 밤새 지켜 주셨다.
2.정리(교훈)
①생명이 귀한 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가 보다.
그 고집 센 바로도, 장자가 죽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②그런데, 왜 자신의 사람이 죽어야만 깨닫는 것일까?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생명의 귀중성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③참 생명은 예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예수를 바라 알고 바로 섬길 때에, 생명의 참 가치를 깨달을 수가 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
유월절을 지키는 자의 복
출 12: 43-51
유월절에 죽은 어린양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상징이었고, 그 양이 죽어 피를 흘려줌으로 이스라엘을 죽음과도 같았던 300년 이상의 노예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양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서 삼삼오오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들은 육신의 가족별로 모인 것이 아니라 양 고기의 분량을 따라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모여 양고기를 함께 먹다가 함께 구원을 받아서 구원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가족이나 연고를 따라 모인 것이 아닌, 구주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였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죽어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의 영의 양식이 되어주신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어린양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이고, 그 유월절에 양고기를 먹으면서 해방의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주님을 먹고 마시듯이 믿으면서 우리 주님의 재림과 그때의 유월절 해방보다 더 크고 영원한 행방인 자신의 부활과 영광의 날을 확신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르고 고기를 구워먹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형편을 살펴봅시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네 가지 특별한 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쉽게 영어의 첫 자를 따서 4P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Pardon, Peace, Purpose, Power입니다.
첫째, 사죄 (Pardon)를 받았습니다.
첫 번 유월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양 한 마리씩을 잡아서 죽이고, 죄지은 너 대신에 이 어린양이 대신 죽었다는 표식으로 네가 사는 집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그 집에 모여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천사가 문에 발라진 피를 보고 그 집은 심판하지 아니하고 넘어가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참 특별합니다. 그들은 죄인인데, 죄 없는 양이 대신 죽으면, 그 양이 희생당한 대가로 죄인의 죄를 사해주고 그가 당할 절망과 죽음에서 구원해 준다는 약속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특별합니까? 이것은 그때 그 양이 그렇게 능력 있는 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인류구원을 위해 오셔서 인류 대신에 죽어주실 위대한 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그런 능력자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날 어린양의 피는 문 밖에 칠해져 있었고, 사람들은 방안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피를 볼 수 없었고, 희생을 피를 보는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심판의 천사가 밖에서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집 문에 희생의 피가 있는가? 없는가 였습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안에 죄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 아들이신 예수의 희생의 피가 발라져 있는가, 없는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양의 피는 사람들이 보라고 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앙의 천사가 쳐다 보라고 바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효력을 가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인본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가책을 받아서 ‘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각성운동을 벌여 인간이 새롭게 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각성시킨 도덕적 스승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닙니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거룩하게 될 수가 없으며, 되어 본 적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우리에게 발라져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당신 외아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고 넘어가 주시는 것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피를 보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확실하게 "내가 피를 볼 때에 너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선행이나 공로나 그 무엇을 보는 보지 않고 다만 피만 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가슴에 뿌려져 있는 당신 아들의 피를 보실 때, 당신의 외아들의 희생을 생각하사 죄인들을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로인해 우리가 지은 죄는 제거 되었고,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되었고,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은 어린양의 피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표식입니다. 피 가 있고 없음은, 죄인이 용서받고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심판의 천사가 애굽의 모든 가정들을 찾아가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감옥의 죄수의 장자까지 모두 치셨습니다. 양의 피가 발라지지 않는 곳에는 그 어디나 철저한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죽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심판은 지나가 버렸고, 맛있게 구운 양고기를 먹으면서 평안히 찬송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양이 죽은 그 날 밤에, 하나는 심판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고, 하나는 그 칼날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은혜의 귀한 음식으로 배불리는데, 하나는 진노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하나에게는 넘실대는 파도가 비켜가고, 또 하나는 그 파도가 삼켜버렸습니다. 그 엄청난 차이가 무엇의 차이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들은 다 똑같은 죄인이지 차이가 없습니다.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도덕군자나 감옥의 죄수나, 다를 바가 없이 다 같이 죄인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은 들키고 잡혀간 죄인일 뿐이고 밖에 있는 사람은 들키고 잡히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죄인인가, 그것도 바르지 않은 죄인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똑같은 죄인들 중에서 당신 아들의 피를 바른 죄인을 용서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언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히9:2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아니했기에 죽었고, 하나는 그 피를 믿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시는 초점은 단지 피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 보시겠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것만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셨고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양되신 주님의 공로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모든 죄로부터 참된 용서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철저히 의지하여 온전한 용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안 (Peace)을 받았습니다.
첫 유월절 밤은 애굽 전역에 심한 공포와 두려움과 절규와 통곡이 휩쓸고 지나가는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밤에, 양을 잡아서 피를 뿌린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아주 평안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그 집에 모여 양고기를 먹고 있던 사람들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왜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이 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뿌렸는데도, 그렇게 순종한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이라도 죽임을 당했더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어린양의 피가 아무 쓸데없다는 증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피 뿌린 집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은 흠 없는 어린양에게 떨어졌고, 그 양은 처참하게 죽어 나갔으며, 그 양이 처참하게 죽은 대가는 심판받을 죄인들을 살리는 엄청난 효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상한 자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어린양의 피는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될 뿐 아니라, 참된 평안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내게는 임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용서 받은 줄을 확신하는데, 무엇이 불안하고 왜 두렵겠습니까? 그들은 태연하게 구운 양고기를 먹으며 평안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안은 절대로 안전하다.” “그리스도의 피는 안전을 보장해준다.” 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나는 절대로 안전하다." 라고 주관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심판의 불안과 절망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참되고 근원적인 평안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왜 그렇게 많은 고민과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자주 절망감과 실망을 느끼십니까? 그의 피 공로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은 불안을 잠시 잊게 만드는 평안이 아니라, 불안의 근원을 온전히 제거시킨 참 평안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를 근거로 이렇게 약속하시고 당부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여러분, 우리 대신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믿고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아무리 벼락이 쳐도 곁에 높은 피뢰침이 있으면 안전합니다. 피뢰침이 벼락을 맞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은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과 형벌을 이미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형벌은 주님이 대신 받으셨고 우리는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형벌이 없고 지옥이 없으며 영원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실패도 없습니다. 주께서 우리들과 날마다 함께 하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시며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이 말씀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는 참된 평안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삶의 새로운 목적(Purpose)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에는 그들에게 희망이나 목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유가 없는 그들에게 무슨 삶의 목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맞아 죽지 않거나 굶어 죽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를 보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하심으로 노예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고, 평화와 희망을 주시자, 그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옛날에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땅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며, 자유와 평화가 있는 땅을 가서 차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이들이 갖게 된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습니다.
헛된 삶에서 구원하여 목적 있는 삶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면, 사람에게는 참된 목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누구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 살고, 누구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살고, 누구는 쾌락을 위해, 누구는 권력을 위해서 살면서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공천헌금을 몰래 주다가 현장에서 잡힌 사람들의 목적은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한때 그보다 숭고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공산혁명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세계의 공산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사회마저도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고, 더 은밀하고 더 심각한 계급사회를 만들다가 붕괴되었습니다. 그들은 온전하지 못한 목표를 위해서 진실과 인권존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도 팽개치고 거짓 선동과 폭력적 혁명 운동을 하다가 붕괴되었습니다. 공산화의 비전은 잘못된 목표였습니다.
부자들을 끌어내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서 경제적인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정부도 올바른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중. 고등학교를 평준화하여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도 올바른 목표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의 정치적 사상은 인간에게 참된 목표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삶의 진정한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은 참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물을 이유도 없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나도 남을 사랑하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삶은 이룰 수도 없거니와, 남을 해롭게 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이웃에게 사랑과 복음과 기쁨을 주기위해 살아가는 삶,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사는 삶에는 전능하신 주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어 그 뜻을 이루도록 도우시지만, 자기만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에는 악마가 함께하여 그를 멸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야 마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한 삶의 목표를 부여잡고 힘써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힘(Power)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날 밤, 피 뿌린 집에서 그 양고기를 불에 구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들에게 해방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음식을 다 먹은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싸놓았던 짐들을 들고, 아이들을 업고 짐승들을 몰아서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진군나팔과 함께 모세를 따라 가나안을 향하여 전진을 시작하였습니다.
늦은 밤에 출발했지만 서둘러서 짐을 지고 아이들을 붙들고 걸어서 애굽 국경을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너무나 힘겨운 행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밤늦도록 양고기를 구워 먹었는지라 아이들까지도 힘이 든든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뜬히 애굽 국경을 넘어 멀리 홍해 바다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그날 밤에 목숨을 건졌다고 할지라도, 밤중에 어린양 고기를 먹지 아니했었다면, 그 밤에 과연 탈출에 성공했을까요?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기진하여 길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고, 그들을 보낸 뒤 생각을 바꾸어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에게 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늦은 밤에 양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기 때문에 먹은 양고기가 든든히 힘을 받쳐주어서 그 밤에 멀리 멀리 도망쳐 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도 얻었고 올바른 삶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내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험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진실하게 살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도우시는 힘이 아니면 우리는 삶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도우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성령이 우리와 날마다 함께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으며, 누가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시시때때로 유혹하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으며, 누가 절망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힘겨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며, 누가 실패를 당하고서도 굴복하지 않고 또 다시 도전해서 그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만드는 힘을 가졌습니까?
그런 힘은 오직 희생당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에게서만 나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 안에 오시는 성령에게서만 나옵니다.
사40장에 “소년이라도 넘어지며 장정이라도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피 뿌린 집인 교회를 중심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새 힘을 주십니다.
시 29:11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양의 피 공로로 구원을 받았고 피 뿌린 집인 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지금의 연약함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만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시는 정죄가 없으며 용서와 사랑만 있습니다. 두려움 없는 평안의 삶을 누립시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날마다 진리로 살아갈 수 있는 새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사죄의 평안과 삶의 새로운 목적과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날마다 행복하게, 날마다 반듯하게 살면서, 날마다 승리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참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