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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20 야곱이 발행하여
본문은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과정과 그 후에 라반과 함께 기거하게 되면서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3절은
“①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②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 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③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입니다.
모세는 이제 야곱이 메소보다미아 도착한 것과 숙부에게 영접된 일을 기록합니다. 모세는 야곱이 그 발을 들어서 알지 못하는 땅으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신앙으로 나타낸 비상한 힘을 칭찬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모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이 목자들과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 목자들을 통해서 자기가 찾던 집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리어서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목자들이 야곱이 도착하는 그 시각에 그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가르쳐 주고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잡한 우여곡절 때문에 또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 방황 할 때마다 우리와 우리 모든 일들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께 바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끌어 가시는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방식으로써 은밀하신 섭리는 신앙을 가진 자만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으로 하나님 바로 그분을 바라보면서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2. 본문 4-12절은
“④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 에서로라
⑤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⑥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⑦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⑧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 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⑨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⑩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 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⑪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⑫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입니다.
1) 그 당시에 있었던 아주 솔직하고 단순한 풍조는 이들이 만나는 태도에서 잘 나타납니다.
우애성이 포함되어 있는 호칭이 때때로 부정직하고 사악한 자들 때문에 수난을 겪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요즈음보다 우호적인 교통이 더욱 더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난생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당시에 만연했던 관습을 따라 행한 인사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그 지역 목자들을 가리켜서 “나의 형제”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가지는 전 인류를 끌어안는 보편 인류를 향한 사랑 정신입니다. 이런 종류로서 사랑하는 정신은 함께 가는 정신에 있어서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점점 좁혀져서 최상으로 고급한 관계까지 생각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이 순조롭게 나홀의 자손들을 아는 자들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섭리로써 역경 중에 순탄한 길을 내어 주신 결과입니다. 또 여기에는 그곳 목자들과 했던 대화와 그들이 취하고 살아가는 목양 형태가 나타납니다. 또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장면이 사실 그대로 기록됩니다.
또 한편 라헬이 때때로 양떼를 돌보았다는 점에서 근검절약 하는 기풍도 나타납니다. 라반에게는 종들도 많이 있었는데 자기 귀한 딸을 상스럽고 지저분한 일에 종사시킵니다. 물론 자녀를 나태와 안락과 방종 속에서 교육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요즈음은 야심과 자만과 그릇된 세련미로 예절이 유약하게 되어 갑니다. 또 가사 돌보는 일은 무시당한 채 대부분 부인들은 여성 고유 직분조차 수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재정력이 나아지면 자기 손에 물적심이 없이 살려고 한다든지 떡고물 묻힘이 없이 누워서 떡 먹으려는 심산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 자녀 교육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습관도 합당치 않습니다. 일차 교육자로서 책임이 오늘날에는 거의 망각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상태라면 그것은 당연히 일반 세속인들 아래로 내려간 상태입니다.
2) 그 다음에는 돌을 옮기는데서 야곱이 가진 사랑과 열심이 드러납니다.
또 야곱이 예절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 사촌에게 입맞춤을 감행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순결한 예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당시에 가졌던 정숙하고 온당한 생활 양식에는 보다 큰 자유가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입맞추는 것이 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눈만 잘못 돌려도 꺼려하는 풍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결과 주체 못할 정욕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타락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합니다. 불성실이 너무나 만연해서 남녀 간 교제가 정숙하게 행해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인이 순박성을 보고 깊이 애통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빠져 들어간 악한 타락을 우리가 싫어함으로써 우리와 우리 가족이 그것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오염 상황이 비단 환경의 문제뿐이겠습니까? 양심의 문제 등이 표출되어진 결과물이겠습니다.
3) 또 모세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이야기에는 사건 순서가 명시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보자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이 자기 친척으로 알려질 될 때까지는 입맞추지 않았습니다. 또 야곱은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가 울었던 것은 기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도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또 자연스런 애정도 솟아났습니다. 아무튼 야곱이 취한 이런 행동은 여러 가지로 충격을 받은 결과였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은 외롭고 고달픈 나그네로써 지내다가 이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족 발견에 자기 감정이 이끌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12절이 글의 순서상 나중이 되었을지라도 엄밀할 순서로는 10절에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반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라는 말씀 다음에 놓여져야 할 의미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양들 전부가 물을 먹는 시간에 양가 확인이 진행됐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신속하게 자기 부친에게 그 사실을 고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두 사람 사이에 애정 표현은 순수하고 건실했으며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건실한 신앙은 건실하고 아름다운 도덕성을 부가적으로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본문 13절은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입니다.
라반은 전에 아브라함 종들 중 하나가 굉장히 많은 재물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초라한 꼴을 한 생질을 보고 마음에 별로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아비 집을 떠나게 된 경위와 초라한 여행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또 야곱은 친척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줄 표적에 대해서도 어머니께 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반은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완전히 만족하게 야곱을 자기 생질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야곱이 자기 누이 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애정이 솟아났습니다. 이것은 자연히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혈연 관계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가르치신 뜻을 좇아 서로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친척사이에 두신 유대 관계가 밀접하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있는 애정과 친절은 온 인류 사이에 스며들 만큼 확대되어야 합니다. 아담으로 결속된 모든 자손이 이와 같이 서로 친척 관계에 있고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신자들 간에 형성시키는 영적 관계는 한층 더 효과적이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거룩한 상호 박애 결합은 없습니다.
이렇게 본문 내용들은 자연스런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른 신앙에서는 자연이 무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런 내용들은 필연성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도들의 평범한 과정들도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4. 본문 14-17절은
“⑭ 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⑮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
⑯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⑰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입니다.
1) 라반은 야곱이 자기 누이 아들이란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달간 야곱이 가진 성품을 시험해 보고 나서 그에게 보수를 주기로 결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어느 정도 정직한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외삼촌에게 가 있는 동안에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 떡을 게을리 먹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정직한 노동에 종사합니다. 여기서 라반은 단순히 먹는 것 외에 약간이나마 보수도 야곱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라반이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라는 말은 이중적입니다. 그 한가지는 남보다 더 두둑한 급여를 주어야 마땅한 생질한테서 정당한 보수를 편취한다면 이만저만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친척이라는 구실로 공짜 노역을 착취하고 싶진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해석이 보다 정당하여 통설로 인정됩니다. 그것은 “네가 내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는 관련 구절 때문입니다.
2) 더욱이 우리는 모세가 이 일들을 언급하는 목적에 주목합니다.
우선 무엇보다 라반을 통해서 형평성에 대한 대원칙이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 마음에 고유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맹목적인 탐욕이 다른 방향으로 물러날 때까지 ‘모두가 서로 정의와 공평을 개발해야 한다’ 는 기본 양심과 기본 양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 본성 속에 공평과 정의에 관한 법칙을 새겨 두셨습니다. 그래서 과도한 사리사욕 때문에 그 법칙을 외면하는 자는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3)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실제 문제가 되자 라반은 이 공평성에 관한 원칙을 망각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합니다.
이러한 실예는 확실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원칙만으로 실수한 적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물어도 모든 사람이 자기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제 자신이 그런 일에 처하게 될 때에는 달리 생각하기 일수입니다. 대개는 편견 된 자기 사랑 때문에 눈이 멀고 암흑에 휩싸여서 반대 길로 이끌려 갑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이익에 대한 욕망에 사로 잡혀서 공평과 정의를 희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늘 억제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데서 아무도 자기 일에서는 명판관이 될 수 없다는 격언이 생겨났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과도하게 사랑하는 나머지 옳은 것을 못 보거나 잊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판단을 주시는 영으로 우리들 자신 안에 있는 정욕을 지배하고 규제할 수 있게 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늘 간구 해야 됩니다.
5) 라반은 야곱과 계약을 맺고 싶어하면서 분쟁과 불평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일처리를 합니다.
옛말에 ‘우리는 법에 호소하지 않으려면 친구들과 합법적으로 거래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자기에게 대해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도 이상으로 인색하다는 것은 이 시대에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사실입니다. 이런 점만 아니라면 그토록 많은 법적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의를 소중히 지키기 위해서는 굳은 계약이 필요합니다. 견고하고 진실한 계약은 쌍방간에 생길 수 있는 부정을 방지해 주기 때문입니다.
5. 본문 18-20절은
“⑱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⑲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⑳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입니다.
1) 먼저 라반을 생각해 보십시다.
라반 속에 있는 불의하고 부패한 속성은 곧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기 딸을 교환 대상으로 삼아 보수를 받고 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딸을 야곱이 해야 할 봉사와 맞바꾸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기 딸에게 지참금을 할당해야 했습니다. 또 장래에 사위가 될 야곱에게도 보다 후하게 대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인척이라는 구실 아래 야곱에게서 노동 대가를 사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라반 자신이 바로 앞부분에서 부당한 것으로 스스로 인정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일반적인 정의감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자기 이해 관계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면 즉시 불공정한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여호와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개선시킬 때에만 그들은 정외와 공평을 실현하게 됩니다. 모세는 여기서 드물고 진기한 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극히 흔하게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딸들을 경매에 붙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익에 대한 욕망은 이보다 더 큰 것이라도 멀리 내동댕이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명예도 이익을 위해서는 포기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영혼도 팔아먹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이제 야곱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은 전혀 잘못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레아는 약한 시력 때문에 덜 아름다웠거나 아니면 눈매만 고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라헬은 그 우아한 자태에 있어서 레아를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은밀한 애정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잘 압니다. 이런 종류의 애정을 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이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과도히 발전하는 것만 경계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아한 모습에 이끌리어 아내를 택하게 되는 자라도 이성이 항상 우의에 놓여 있어서 들뜬 정욕을 지배하고 있기만 한다면 꼭 죄를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언니되는 레아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동생 라헬을 아내로 원했을 때는 아마 어느 정도 방종하는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눈에 보이는 욕망에 굴복하여 레아의 미덕을 과소 평가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난받을 만한 자제력 부족입니다. 훌륭한 성품을 제일 중요시해야 하는데 미모만으로 아내를 고르는 자는 다 같습니다. 야곱이 가진 애착심이 얼마나 끈질기고 큰가 하는 것은 그가 라헬을 얻기 위해 칠 년간 지치지 않고 수고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일에는 야곱의 정결함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오랜 기간동안 꾸준히 참고 기다리며 그토록 많은 수고 가운데서도, 마음 가운데 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3)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그 시대의 순전성과 절제성이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한 지붕 아래서 거하며 밤낮으로 친숙하게 대하면서도 야곱은 정숙하게 처신하며 모든 단정치 못한 행위도 삼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정한 기일이 다가오자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 말로써 라헬이 그때까지 순수한 처녀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사실상 신앙이 순수해야 그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가 가지런 하고 체계가 있습니다. 신앙이 순수해야 그 사람의 생활 전반이 건실하고 아름답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순수하면 절반은 천사와도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평생 소원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 천국에 가서 온전한 천사와 같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천상으로 끌어 올려져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